|
고려인(高麗人=高駒驪人)은, ‘화하인(華夏人)=중국인(中國人)’
“Korea = Corea” : 대한민국(大韓民國)과 뭔 상관(相關)?
2023년 01월 20일
○ ‘일본(日本)’의 국명(國名) 변천(變遷) 과정(過程)을 살펴보면 : “왜노국(倭奴國)=왜국(倭國)=일본(日本)”의 순서(順序)로 바뀐다.
이들은 “남아세아(南亞世亞)의 여러 도서(島嶼)”에서 살아가던 종족(種族)들로, 그곳이 고향(故鄕)이요, 터전이었으며, 인종(人種) 역시(亦是) “남아세아(南亞世亞) 인종(人種)”들이다. 왜(倭)에 대한 계속(繼續)되는 장문(長文)의 글이어서 솔직(率直)히 무지하게 재미없는 이야기들이다.
정리(整理)하고, 보충(補充)하고, 또 다른 사서(史書)들로 고증(考證)하는 작업(作業)까지 끝이 나, 게재(揭載)만 남겨 놓았는데, 너무 재미없는 해설(解說)이다보니, 지루하기가 한이 없는 것 같으니, 중간(中間)에 다른 주제(主題)로 잠깐 지루함을 달래보기로 하자!
대한민국(大韓民國)은, “Korea 또는 Corea”인가?
○ 『고려(高麗)』는, “Korea 또는 Corea”라고 불렸다고 전(傳)해진다. 전회(前回)에도 언급(言及)한 적이 있는 주제(主題)다. 재(再) 정리(整理)하고 보충(補充)한 것이다.
『Korea 또는 Corea』라는 말은, 옛 『고려(高麗)의 명칭(名稱)』이라고 전해진다. 이런 연유(緣由)를 따져보면 :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 즉(卽) 한국(韓國)을 “Korea=Corea”라고 부르고 있는 우리들은 뭔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나라이름(國名)을 “Korea=Corea”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資格)을 갖췄는가? 한 마디로 ‘자격미달(資格未達)’이다.
옛 “고려왕조(高麗王朝)”【‘고려(高驪)=고구려(高駒驪)’ 또는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어디에서 시원(始源)했으며, 어디에서 소멸(消滅)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 “고려(高麗)”의 나라이름[국명(國名)]을 차용(借用)하여 사용(使用)하는 것은, 선조(先祖)들을 모욕(侮辱), 모독(冒瀆)하는 일이 아닐까?
“고려(高麗)와 대한민국(大韓民國)이 뭔 상관(相關)?”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Korea=Corea”가 될 수 없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이 대한[大韓 : Dai han]이면 대한[大韓 : Dai han]이요〉, 〈한국(韓國)[Han kug]이면 한국(韓國)[Han kug]〉이지, 그게 어떻게 『Korea=Corea』가 될 수 있겠는가?
○ “나무위키”를 참고(參考)해 보면 :
〈'고려(高麗)'라는 국명을 아랍어로 '쿠리야(كوريا)‘라고 부른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고종(高宗) 때는 대한제국을 'Korean Empire'라고 하지 말고, 'Empire of Dai Han'이라는 영문 호칭을 사용해주길 주한 외국 공사관에 요청한 적도 있었는데 거의 무시당했다. 결국 대한제국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 후 포기하고 그냥 ’코리아‘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및 대한제국이 발행한 우표에는 영어 및 프랑스어로 “Corea, Korea, Corée” 등으로 나라 이름을 적었다. [출처 : 나무위키]
➊ 인도 번왕국 중 하나였던 소국 Koriya[편집] : Korea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대놓고 Korea State가 표제명이다. 현재 인도 레와(Rewa) 지방과 수루구자(Suruguja) 지방 사이, 당시 기준으로 오디샤 일대에 위치했다. 1941년 기준 면적 4,224㎢, 인구 12만 6874명. 이 나라를 포함한 인도 번왕국들은 인도가 독립하면서 1948년 1월 1일부로 통치권을 인도 정부에 양여하였다.
비하르(Bihar) 주(州) / 사란 지방의 마을 Korea / 네팔 남쪽
비하르(Bihar) 주(州) / 데오리아 지방의 마을 Korea / 네팔 남쪽
자르칸드(Jharkhand) 주(州) / 안바드 지방의 마을 Korea / 방글라데시 서쪽
자르칸드(Jharkhand) 주(州) / 가르와 지방의 마을 Korea / 방글라데시 서쪽
서벵골(West Bengal) 주(州)의 마을 Korea / 방글라데시 서쪽 (캘커터 북방)
➋ 핀란드[편집] : 퀴멘락소(Kymenlaakso) 주의 마을 Koria : 인구 4천여 명의 소도시. 근처의 주요도시는 라띠(Lahti), 꼿까(Kotka)가 있으며 헬싱키에서 129km 떨어져 있다.
➌ 파키스탄[편집] Korea / 이슬라마바드 주변
➍ 성씨(姓氏) : Correa, Correia [편집] : 스페인과 중남미의 성씨 중 하나로 본래는 ‘코레아’라고 읽는다. 세파르담 유대인 계통의 성씨라고 하며 흔하지는 않지만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처럼 대통령까지 나왔을 정도이니 희귀한 성씨는 아니다. 포르투갈과 갈리시아에서는 철자를 다르게 써서 Correia라고 하며, 코헤이아라고 표기한다. 한국에서는 축구 선수인 앙헬 코레아, 카를로스 코레아가 유명한 편이다.
스리랑카의 성씨 Corea [편집] 스리랑카의 성씨중 하나다. 【출처(出處) : 나무위키 설명(說明) 참조(參朝)】-인용(引用) 끝-
➨ 위의 인용(引用) ➊의 “인도(印度)” 동북방(東北方) 네팔(Nepal) 남(南)쪽의 “Koriya 또는 Corea”라는 이름에 대한 것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인용(引用)하여 “조선인(朝鮮人)을 닮은 부족(部族)”에 대한 내용(內容)은, 우리 카페에 이미 게재(揭載)하여 소개(紹介)한 것이다
------------------------------------------------------
○ 『고려(高麗)』는 “Korea=Corea”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AD 918년 이전(以前)의 고려(高麗)란 “고구려(高駒驪)=고려(高驪)=고려(高麗)”를 뜻한다.
여기서 “고려(高麗)”를 “Korea=Corea”라고 불렀다고 전(傳)해지는데, 고려(高麗) 때에 ‘아랍[Arab] 상인(商人)’들이 “고려(高麗)”를 아랍어로 '쿠리야(كوريا)'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由來)한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인 ‘남사(南史), 양서(梁書), 통전(通典)’등으로 볼 때, 당시의 ‘고려(高麗)’란 곧 “고구려(高駒驪)=고구려(高句麗)”를 의미(意味)하는 것이고, “왕건(王建)의 고려(高麗) 이전(以前)”, 일천(一千)여년 전(前)부터 “고구려(高駒驪)”를 “고려(高麗)=고려(高驪)”라고 불렸고, 스스로도 불렀다는 것은 기정(旣定) 사실(事實)이다.
이미 “고구려(高駒驪)=고려(高驪)=고려(高麗)”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을 포함(包含)한 거대제국(巨大帝國)이었음을 감안(勘案)해 본다면 : 당시(當時)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그 남(南)쪽에 있었던 페르시아[Persian]인들은 “고구려(高駒驪)=고려(高驪)=고려(高麗)”를 뭐라고 불렀을까?
AD 300-700년 시대(時代)나, AD 1,000년 이후(以後)나 ‘아랍[Arab]어’가 달랐을까?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말하는 왕건(王建)의 “고려(高麗)”를 서양(西洋)아이들이 “Korea=Corea”라고 했다는 것에서 기인(起因)한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고려(高麗)를 반도왕조(半島王朝)로 만들기 위한 현대(現代) 사가(史家)들의 조작(造作)된 해설(解說)일 뿐이다』라고 필자(筆者)는 주장(主張)하는 바다.
‘반도왕조(半島王朝)’가 결코 될 수 없는 운명(運命)을 가진 것이 ‘조선왕조(朝鮮王朝)’다.
➨ 그렇다면 “고려인(高麗人)”이란 말은, 어떤 뜻을 함유(含有) 또는 내포(內包)하고 있는 것일까? 옛 사서(史書)를 중심(中心)으로 “고려인(高麗人)”에 대한 폭넓은 그 의미(意味)를 되새겨보기로 하자.
(1) 남사(南史) 고창국(高昌國)
※【남사(南史) : 唐朝, 李延壽 撰. 紀傳體,共八十卷,含本紀十卷,列傳七十卷. 上起劉宋永初元年(420),下迄南陳禎明三年(589)。記劉宋、南齊、南梁、陳四國一百七十年史事的南朝史。《南史》與《北史》是唐初史家李延壽的作品】
《南史 高昌國 : 其國蓋車師之故地,南接河南,東近敦煌,西次龜茲,北鄰敕勒.國人言語與華略同.有五經,歷代史,諸子集.➨面貌類高麗,辮髮垂之於背.著長身小袖袍,縵襠褲.中略.其地高燥,築土為城,架木為屋,土覆其上.寒暑與益州相似,備植九穀,人多噉麵及牛羊肉.出良馬,蒲桃酒,石鹽.中略.》
➨ 위의 ‘남사(南史) 고창국(高昌國)’ 편에서 고창국(高昌國) 백성(百姓)들은 ≪얼굴 모양(面貌)이 고려(高麗)의 무리【面 貌 類 高 麗】≫ 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때의 “고려(高麗)”란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를 뜻한다.
(2) 양서(梁書) 高昌國 : 《高昌國, 中略. 其國蓋車師之故地也.南接河南,東連燉煌,西次龜茲,北鄰敕勒.置四十六鎮,交河,田地,高寧,臨川,橫截,柳婆,洿林,新興,由寧,始昌,篤進,白力等,皆其鎮名.中略.國人言語與中國略同.有五經,歷代史,諸子集.➨面貌類高驪,辮髮垂之於背,著長身小袖袍,縵襠袴.》
➨ ‘양서(梁書) 고창국(高昌國)’ 편에서도 ‘남사(南史)’와 같이 고창국(高昌國) 백성(百姓)들은 ≪얼굴 모양(面貌)이 고려(高驪)의 무리다【面 貌 類 高 驪】≫ 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또한
(3) 杜佑 通典[AD 801 唐德宗貞元17年] 西域 : 車 師 [高昌附]
車 師 [高昌附] : 中略.去燉煌十三日行.其地東西三百里,南北五百里,四面多大山. 去長安八千九百里.戶六百.西南至都護理所一千二百三十餘里,北與匈奴接.中略. : 文字亦同華夏,兼用胡書.有毛詩,論語,孝經,歷代子史,集學官弟子,以相教授. : 문자(文字)는 또한 화하(華夏)와 같았으며(同), 오랑캐(胡)의 문자(書)도 함께 사용하였다. 모시(毛詩). 논어(論語). 효경(孝經)등이 있었으며, (중략). 其刑法,風俗,婚姻,喪葬與華夏大同.➨ 其人面貌類高麗,辮髮施之於背,女子頭髮辮而垂. : 그 형법. 풍속. 혼인. 장례 등 모두 화하(華夏)와 두루 같다. 그 사람들[高昌人]의 얼굴 모양은 고려(高麗=高句麗)의 무리(一族)이며, 변발이 널리 퍼지기 전에 여자들은 두발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 其國北有赤石山,山北七十里有貪汗山,夏有積雪.此山之北,鐵勒界也. : 그 나라 곧 거사(車師 : 古昌)의 북쪽에 적석산(赤石山)이 있으며, 산(山) 북(北)쪽으로 70 리에 탐한산(貪汗山)이 있는데, 여름에도 눈이 쌓여있다. 이 산(山)의 북(北)쪽은 철륵(鐵勒)과 경계를 접한다. 從武威西北有捷路,度沙磧一千餘里,四面茫然,無有蹊徑. : 무위(武威) 서북(西北)으로 따라가면 첩로(捷路)가 있는데, 사적(沙磧)=사막(沙漠) 1천 여리(餘里)를 건너야 하는데, 사방(四方)이 아득하여, 지름길로 지나는 곳이 없다. 欲往者,不可準記,唯以人畜骸骨及駝糞為驗.路中或聞歌哭之聲,行人尋之,多致亡失,蓋魑魅魍魎也.故商旅往來,多取伊吾路. : 이곳을 가고자 하는 자(者)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유일하게 사람과 가축의 해골(骸骨)과 낙타의 똥이 표징이며, 길 중간에 혹 노래나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행인은 찾는 것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데, 모두가 온갖 도깨비가 하는 짓이다. 그래서 왕래하는 장사치무리들은, 이오(伊吾)의 길을 많이 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매망량(魑魅魍魎) : 온갖 도깨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매(魑魅)는 사람을 홀려 해치는데, 몸은 짐승이요, 얼굴을 사람모습이며, 네발을 가졌다고 한다. 망량(魍魎)은, 비상한 재주로 사람을 홀리거나 짓궂은 장난,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하는데, 동물이나 사람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도 위의 “양서(梁書)와 남사(南史)”와 같은, 고창국(高昌國) 백성(百姓)들은. ≪그 사람들의 얼굴모양(面貌)은, 고려(高麗) 무리이다【其 人 面 貌 類 高 麗】≫ 라고 하였다.
또 “통전(通典) 서역(西域) 우전(于闐)” 편을 보면 : ≪自高昌以西,諸國人多深目高鼻,惟此一國,貌不甚胡,頗類華夏 : 고창(高昌)의 서(西)쪽 지방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은데, 눈은 깊고, 코는 높다[深目高鼻]. 유일하게 그 한 나라【우전(于闐)】는 얼굴모양이 호[胡 : 오랑캐]와 같지 않은데, 자못 화하(華夏) 무리와 같다.≫고 기록(記錄)해 놓았다.
(4)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車師國 : ≪其 人 面 貌 𩔖 髙 麗 : 거사국(車師國) : 그 나라 사람들[車師國人]의 얼굴모습(面貌)은 고려(高麗)의 무리이다.≫라고 하였다.
또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서 말하기를, ≪于闐國 ; 去長安九千七百里. 髙昌以西諸國人多深目髙鼻惟此一國貌不甚同頗𩔖華夏 : 우전국(于闐國) : 장안(長安)에서 9,700리를 간다. 고창(高昌) 이서(以西)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움푹 들어간 눈에 코는 높게 생겼는데’, 유일(惟一)하게 이 한 나라는 얼굴이 크게 달라 화하(華夏) 무리들과 매우 같았다.≫고 하였다.
(5) 冊府元龜 卷九百六十一[宋 王欽若等 撰] 外臣部 / 土風第三
《高昌國葢車師之故地也南接河東連燉煌西次龜兹北鄰勑勒. : 고창국(高昌國)은 모두 거사(車師)의 옛 땅이다. 남(南)쪽으로는 하(河)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돈황(燉煌)과 이어졌고, 서(西)쪽은 구자(龜玆), 북(北)쪽은 칙륵(勅勒)과 이웃한다. 중략(中略). ➨面 類 髙 麗. 中略 : 얼굴은 고려(高麗) 무리이다. 중략(中略). 北有赤石山山北七十里有貪汙山下有積雪此山之北鐵勒界也. : 북쪽에 적석산(赤石山)이 있으며, 산(山) 북(北)쪽으로 70 리에 탐한산(貪汗山)이 있는데, 여름에도 눈이 쌓여있다. 이 산(山)의 북(北)쪽은 철륵(鐵勒)과 경계를 접한다. 従武威西北有㨗路渡沙磧千餘里四面茫然無有蹊逕 : 무위(武威) 서북(西北)으로 따라가면 첩로(捷路)가 있는데, 사적(沙磧)=사막(沙漠) 1천 여리(餘里)를 건너야 하는데, 사방(四方)이 아득하여, 지름길로 지나는 곳이 없다. 欲往者尋有人畜骸骨而去路中或聞歌哭之聲行人尋之多致亡失葢魑魅魍魎也故商客往来多取伊吾路. : 이곳을 가고자 하는 자(者)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유일하게 사람과 가축의 해골(骸骨)과 낙타의 똥이 표징이며, 길 중간에 혹 노래나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행인은 찾는 것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데, 모두가 온갖 도깨비가 하는 짓이다. 그래서 왕래하는 장사치무리들은, 이오(伊吾)의 길을 많이 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내용(內容)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을 보면, 책부원구(冊府元龜)를 찬(撰)하면서 이를 인용(引用)한 것이 아닐까 추측(推測)해 볼 수 있다.
≪面類髙麗 : [고창국(高昌國)인들의] 얼굴이 고려(高麗) 무리이다.≫ 라고 하였다.
➨➨➨ 위의 글 “(1)+(2)+(3)+(4)+(5)”의 원문(原文)에서 말하고 있듯이 『고창국(高昌國)=거사국(車師國)』은 당시(當時)에 『고려인(高麗人)들이 살고 있는 나라였다』 고 하였다. 이들의 면모(面貌)는, 호(胡) 즉 오랑캐(되놈)가 아닌 ‘고려인(高麗人)’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記錄)을 보면 : 당시(當時)에도『서역(西域) 땅을 기준(基準)으로 인종(人種) 분포(分布)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그런데 위의 글 “(3)+(4)”의 구절(句節)을 보면 : ≪고창(高昌)의 서(西)쪽 여러 나라 사람들은 “눈은 깊고, 코는 높다[多深目高鼻]” 허지만 유일하게 “우전(于闐)인들은 얼굴모양이 그들 호(胡)와 달리 화하(華夏) 무리와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호(胡)와 달리 화하(華夏)무리와 같다[貌 不 甚 胡, 頗 類 華 夏]≫고 한 것은,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얼굴모양(面貌)이 고려(高麗)무리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
즉 당시(當時)의 ‘서역(西域) 땅’에는 『고려인(高麗人)과 호(胡)인』 들이 살았는데, 고창국(高昌國)은, ‘고려인(高麗人)’들이었고, 이곳의 서(西)쪽은 얼굴모양(面貌)이 전혀 다른 호(胡)[오랑캐=되놈]인들이 살았는데, 유일(惟一)하게 “우전(于闐)” 백성(百姓)들은 호(胡)[오랑캐=되놈]와 전혀 다른 ‘화하(華夏)’인과 같이 생겼다』는 뜻이다.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을 보면 : 서역(西域) 땅에서 “고창국(高昌國)”에는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인”들이 살았다. 그러데 고창국(高昌國)의 서(西)쪽으로는 호인(胡人) 즉 “눈은 깊고, 코는 높은[多 深 目 高 鼻]” 자(者)들이 살았는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도 『“이곳 우전국(于闐國)” 사람들은 “호인(胡人) 즉 눈은 깊고, 코는 높은[多 深 目 高 鼻]” 자(者)들을 닮지 않고, 화하인(華夏人)과 같았다.』는 이야기다. 【소륵(疏勒)국 또한 마찬가지다.】 이 말은,
≪화하인(華夏人)은, 고려인(高麗人)과 같이 “호인(胡人) 즉(卽) 눈은 깊고, 코는 높은[多 深 目 高 鼻] 무리들이 아니었다.”≫는 뜻이고, ≪화하인(華夏人)은 곧 고려인(高麗人)이다.≫라는 뜻이 된다. ‘화하인(華夏人)은 또한 중국인(中國人)’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인(高驪人)”은, ‘화하인(華夏人)=중국인(中國人)’과 똑같은 생김새를 갖고 있고, 같은 인종(人種)이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 결국(結局) “고려인(高麗人) = 화하인(華夏人) = 중국인(中國人)”이라는 뜻이고, 같은 무리들을 다르게 부른 이칭(異稱) 또는 별칭(別稱)이었다는 뜻이 된다.
즉 당시(當時)의 ‘서역(西域) 땅’에는 ‘고려인(高麗人)과 호(胡)’들이 살았는데, 고창국(高昌國)은, 고려인(高麗人)들이었고, 이곳의 서(西)쪽은 얼굴모양(面貌)이 전혀 다른 호(胡)[오랑캐=되놈]들이 살았는데, 유일(惟一)하게 우전(于闐) 【소륵(疏勒)과 주구파(朱俱波)도 포함(包含)된다.】사람들은 화하(華夏)족과 같이 호(胡)[오랑캐=되놈]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려인(高麗人)은 화하인(華夏人)≫이라는 뜻이다. 화하인(華夏人)은 또한 중국인(中國人)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結局) “고려인(高麗人)=화하인(華夏人)=중국인(中國人)”은, 같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한족(漢族)은 없다. 이곳은 본시(本是)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의 땅이었으니, 이곳 백성(百姓)들은 당연(當然)히 ‘고려인(高麗人)’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당연(當然)한 것이고, 이때의 인종분포(人種分布)는, 대략(大略) 서역(西域)의 “고창(高昌 : 車師國), 우전(于闐), 주구파(朱俱波), 소륵(疏勒)”등을 중심(中心)으로 황인종(黃人種)과 서양인(西洋人)으로 구분(區分)되어 나누어져 있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 또 다른 원전(原典)의 원문(原文) 기록(記錄)을 살펴보기로 하자.
(6) 魏書101 列傳 89 [魏收 北齊] 高昌 : ≪車師前王之故地,漢之前部地也.東西二千里,南北五百里,四面多大山.國有八城,皆有華人. : 거사전왕(車師前王)의 옛 땅이며, 한(漢) 때의 전부(前部)의 땅으로, 동서(東西)가 2천리요, 남북(南北)이 5백리로, 사방에 큰 산(山)이 많다. 나라에는 8성(城)이 있고, 모두 화인(華人)이다.≫
특히 위서(魏書)에서는 : 《거사전왕(車師前王)의 옛 땅은, 동서(東西)가 2천리(千里)요, 남북(南北)이 5백리(百里)》라고 하였다.
고창국(高昌國)이 있었던 거사전왕국(車師前王國)의 땅이 “동서(東西) 2천리(千里)에, 남북 5백리(百里)였다”는 사실(事實)은, 거사전왕국(車師前王國) 즉 고창국(高昌國)에 대한 새로운 연구(硏究)가 필요(必要)하다고 보아진다. 특히 이곳은 모두 “화인(華人)”들이었다고 하였는데, 또 다른 여러 사서(史書)속에서는 “고려인(高麗人)”들이 살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서(史書)속의 기록(記錄)을 보면 : 『고려인(高麗人)은 곧 화인(華人)이다”』라는 결론(結論)을 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7) 北史 97 列傳 85 西域 高昌 : 《高昌者,車師前王之故地,漢之前部地也。國有八城,皆有華人. : 고창(高昌)은, 거사전왕(車師前王)의 옛 땅으로, 한(漢)의 전부(前部)의 땅이다. 나라에는 8성(城)이 있고, 모두 화인(華人)이다.》라고 하였다.
(8) 唐會要 高昌 : 《高昌即漢車師前王之廷.後漢戊巳校尉之故地.壘有八城.本皆中國人也 : 고창(高昌) 즉 거사전왕(車師前王)의 왕정(王庭)이다. 후한(後漢)의 무사교위의 옛 땅으로, 8개의 보루가 있는데, 본래 모두 중국인(中國人)이다.》라고 하였다.
(9) 太平御覽 朱俱波 : 《通典曰:在於闐國西千餘里,其西至蔥嶺二百里,東至涅盤國,南至女國三千里,北至疏勒九百里.其王本疏勒國人.人貌多同華夏,亦類疏勒. :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 우전국(于闐國) 서(西)쪽 1천여 리에 있는데, 그 서(西)쪽은 총령(葱嶺)2백리에 다다르고, 동(東)쪽은 열반국(涅槃國)에 닿고, 남(南)쪽으로는 여국(女國) 3천리에 다다른다. 북(北)쪽으로는 소륵(疏勒)이 9백리다. 그 나라 왕(王)은 본래 소륵국(疏勒國)사람이다. 사람들의 얼굴 모양은 화하(華夏)와 같다. 또한 소륵(疏勒)의 무리이다.》라고 하였다.
(10) 讀史方輿紀要 高昌 : 《火州在哈密西七百里。至肅州一千七百五十里,至京師八千四百里。西連亦力把力,南距于闐,北接瓦剌,漢車師前王庭之地也。壘有八城,其人皆中國苗裔。: 화주(火州)는 합밀(哈密)의 서(西)쪽 7백리에 있다. 숙주(肅州)가 1750 리를 가며, 경사(京師)는 8,400리를 가야한다. 서(西)쪽은 역력파력과 이어져 있으며, 남(南)쪽은 우전(于闐), 북(北)쪽은 와랄(瓦剌)과 접해 있는데, 한(漢)의 거사전왕(車師前王)의 왕정(王庭)이다. 8개의 보루가 있는데, 그 사람들 모두 중국인(中國人)의 후손(後孫)들이다.》라고 하였다.
○ 위의 글 “(6)+(7)+(8)+(9)+(10)”의 원전(原典) 원문(原文)을 보면 : ≪화인(華人), 중국인(中國人), 화하(華夏) 무리(類), 중국(中國)인의 묘예(苗裔)≫등으로 표현(表現),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글 《“(1)+(2)+(3)+(4)+(5)”에서는 “고려인(高麗人)=고려인(高驪人)”》이라고 하였으니, 아래의 《“(6)+(7)+(8)+(9)+(10)”에서 말하는 “화인(華人), 중국인(中國人), 화하(華夏)류(類), 중국(中國) 묘예(苗裔)”》라는 말은, 즉(卽) ≪“고려인(高麗人)=고려인(高驪人)”≫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즉(卽) 『고려인(高驪人)』이란 : 『화인(華人), 화하인(華夏人), 중국인(中國人)』을 뜻하는 말이고, 『묘예(苗裔)란 먼 후손(後孫)』이라는 뜻이다.
또 ≪오늘날에도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서는, 옛 ‘조선족(朝鮮族)’을 “고려인(高驪人)”이라고 호칭(互稱)하고 있다. 이들은 오늘의 ‘한국인(韓國人)’과는 다르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이들이 진짜 ‘조선족(朝鮮族)’이며, 옛 “고려인(高麗人)”이다≫라고 할 수 있다.
---------------------------------------
● 따라서 『“고려인(高驪人)”이란 말은, “화인(華人), 중국인(中國人), 화하(華夏)인”을 말하는 것으로, 같은 무리들을 다르게 부르는 이칭(異稱)이었을 뿐이다.』 라는 것이 필자(筆者)가 말하는 것이고, 원전(原典)에서도 이를 증거(證據), 고증(考證),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게 아니다”라는 반론(反論)이 있는가? ‘원전(原典)속에 이런 반론(反論) 성격(性格)의 기록(記錄)이 없다’는 것은, 『고려인(高驪人)은, 화인(華人), 중국인(中國人), 화하인(華夏人)을 말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증명(證明)한다.
----------------------------------------
○ 우리 학계(學界)는 어떤가? 아마도 『별 미친 소리를 다한다.』고 할 거다. 어떤 자(者)가 “미친 놈”인지는 시간(時間)이 지나면 알게 될 게고, 이건 개인(個人)의 사견(私見)이 아닌 옛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작금(昨今)의 우리 사회(社會)’는 안녕(安寧)하실까? 한마디로 암울(暗鬱)한 기운(氣運)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중이다. 사회(社會) 전(全) 분야(分野)가 똑같다. 희망(希望)도 없고, 기대(企待=企望)도 없는 무중력(無重力)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오늘의 정권(政權)”이 끝나야 ‘암울(暗鬱)한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도 끝날 것 같다.
사회(社會) 전반(全般)에 걸쳐 ≪‘무능력(無能力)과 무책임(無責任)’이 판을 치고, 거짓말·욕설(辱說)·비속어(卑俗語)를 남발(濫發)하고, 이를 덮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이 판을 치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우스꽝스러운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가 되어버렸다.≫ 이게 모두 누구의 탓인가?
‘인접(隣接)한 나라, 가까운 나라’ 곧 “열도(列島) 일본(日本)”의 “기시다” 총리(總理)를 보자. 침체(沈滯)되어 있던 각 분야(分野)에서 기지개를 펴고, 국방력(國防力)과 경제발전(經濟發展)을 위한 재도약(再跳躍)에 시동(始動)을 걸었다고 전해지는 가운데, 외신(外信)들은 “기시다”를 “얻을 것을 다 얻어내는 매우 영리한 지도자(指導者)”라고 평가(評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시급(時急)한 판국에, 대한민국(大韓民國) “정권(政權)”은 무엇을 하고 계시나?
➨ 하시는 일마다 “참사(慘事), 참사(慘事) 대참사(大慘事)”를 가져오시고, “정적(政敵) 제거(除去), 정적(政敵) 소탕(掃蕩), 정치(政治) 보복(報復)”에 온 국력(國力)을 소모(消耗)시키다 보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계(視界) 제로’의 정치(政治)판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와중(渦中)에도 《자신(自身)의 대통령궁(大統領宮)을 치장(治粧)하기 위해, 관저(官邸)를 치장(治粧)하기 위해, 자신(自身)의 경호(警護)를 위해, ‘수백(數百)억 원∼수천(數千)억 원’을 쌈지 돈 쓰듯이 곶감 빼먹듯 국고(國庫)를 탕진[蕩盡:탕패(蕩敗)]하고 있는 중이시다.》
➨ “정상외교(頂上外交)라고 전용(專用) 비행기(飛行機)에 부인(夫人)까지 대동(帶同)하고 다니시면서 하는 짓”이라고는 『“∼ ∼참사(慘事)”를 불러오고 ‘헛빨짓’인지, 아닌지 조차 구분(區分)하지 못하는 ‘무능력(無能力)·무책임(無責任)의 극치(極致)’를 보여준다.』 진짜 뻔뻔한 사람이다. 거기다가,
≪모든 것이 “검찰(檢察)”로 통(通)하는 ‘검찰(檢察)로드(Road)’을 만들어 놓고, “검찰(檢察)공화국(共和國)”의 위상(位相)을 드높여나가고 계시는 중이며, 여기에 “거짓말과 거짓말,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짓이 활개를 치는, 무능력(無能力)과 무책임(無責任)을 앞세우는,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정치(政治)를 펼치고 있는 중(中)이시다.”≫ 이게 누구의 책임(責任)인가?
솔직히 말해 “고딩”만 되어도 『때(時)와 장소(場所)를 가릴 줄 알고, 동문서답(東問西答)인지, 헛소리인지 아닌지 정도(程度)는 능(能)히 구분(區分)하고, 음주(飮酒) 역시 스스로 절제(節制)할 수 있다.』 근데 뭔가?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選擇)이 ‘5년’을 암울(暗鬱)한 사회(社會), 희망(希望)없는 사회(社會), 아무것도 기대(企待)할 수 없는, 발전(發展)없는 사회(社會)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物論) ‘5년(年)’이란 시계추(時計錘)는 금방(今方)이다. 5년 임기(任期)지만 ‘4년째’가 되면 물먹듯 ‘레임덕’이 와 힘을 쓰지 못한다. 더구나 지금의 정권(政權)은 ‘3년’만 지나도 ‘레임덕’에 식물정권(植物政權)이 될 것은 미뤄 짐작(斟酌)할 수 있다. 그 뒤(後), 정권(政權)이 저지른 ‘쓰레기 더미’를 치우면서 “그 책임(責任)을 물어도 늦지 않다.”
국민(國民)들 스스로 이들이 한 짓 하나하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책임(責任)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권(政權)의 업보(業報)’는, 기필코 합당(合當)한, 상응(相應)하는 책임(責任)을 물어야 하고,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필연(必然)이다. 끝까지 이들의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해 철저(徹底)한 책임(責任)을 물어야 한다.
특히 그 중(中)에서도 “정치보복(政治報復)과 참사(慘事)로 억울하게 희생(犧牲)된 국민(國民)들 몫에 대한 책임(責任)은,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莫論)하고 법정최고형(法定最高刑)” 으로 다스려야 한다. 이게 민의(民意)다.
후인(後人)들에게 교훈(敎訓)이 되어야 함도 유념(留念)해야 하다.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위해서 말이다! 이건 ‘설날’을 맞이한 다짐이다.
2023년 01월 2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즐거운 설날 연휴를 건강하게 보내십시요.
선생님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근래 최강 한파에 건강하게 보내셔요
먼저 수고하닉ㄴ 연구를 찬찬히 읽어보지는 못햇습니다만.
감사드립니다.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전혀 생뚱한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문헌 중심으로 비교분석하시면서 왜곡이나 각색을 찾아내시는데 감탄합니다
저는 구글어스와 제 경험과 일반적 상식의 과학 기준으로 문헌들의 오류나 왜곡, 과장이나 거짓을 찾는 방식으로 문헌이나 문헌해석, 위치 비정에 대하여 다시 바라봅니다.
가장 중요한 관점은 황하와 양쯔강 즉 장강, 그리고 한수에 대한 고대시기 하류에 대한 것입니다.
중국의 황하는 지구의 모든 강들중에 가장 많은 토사를 쓸고오는 전형적인 홍수하천임에도 지금의 서해바다 어디에도 황하에 의한 삼각주는 없습니다. 양쯔강도 한수도 마찬 가지입니다.
반면에 황하나 양쯔강, 한수에 비해 턱없는 홍수유량의 낙동강, 한강은 지금도 하구 삼각주 평야와 개펄이 있습니다.
세계의 큰강들은 저마다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지금의 중국 대륙평원들은 불과 수세기 전까지만해도 돌고래가 뛰어놀든 미국의 미시시피 하류같은 거대한 바다와 늪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자의 기원으로 말하는 황하 북동쪽 은허의 유적은 그것이 한자와 무관한 글자체일뿐만 아니라 구곳이
그곳이 곧 황하의 홍수물과 바닷물이 어울리든 습지라는 것입미다.
당연히 지금의 태산일대와 산동은 섬이었겠지요.
왜곡된 기록이지만 진시황이 시기에 말한 동방은 지금의 태산일대와 산동이고 그곳은 당시 바다와 늪으로 둘러쌓여 접근이 어려운 섬이었다고 봅ㄴ다
중국이 주장하는 송나라 수도 개봉은 애초부터 송나라가 있지도 않은 위치인 거시죠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양자강 중하류, 운하가 있는 남방지역인데 이것을 지명확대를 통해 마치 지금의 중원평원이 기원전부터 운하를 건설하고 황하물길을 잡아서 평원을 만든 것처럼 역사서들이 말가고 있는 것이아고 봅니다.
면백한 허구인 것이지요.
지금의 중원평원은 불과 17세기까지만해도 말도 제대로 다니는 길도 없든 곳임을 .. 표류기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25사보다 직접 경험하고 작성한 표류기나 기행문을 우선적으로 사실적 우위에 둡니다. 역사서들은 수백년후의 가공된 기록이 대부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