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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0일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그분 목소리는 필요할 때 들린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기도 하고 착한 목자 주일이며 그래서 성소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는 어쩌면 예수님의 양들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긍정하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리 선택입니다.
내가 선택해야 상과 벌이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군대 있을 때 운전병을 하였습니다.
군대 차들은 그렇게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고장으로 인한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래서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운전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엔진의 이상한 소리나 나사가 풀려 나는 소리 등을 무시하면 커다란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소리는 더 잘 들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크리스천이고 가장 큰 부자였지만, 나눌 줄을 몰랐습니다.
성경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고 나와 있지만 그는 고집쟁이였습니다.
그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서야 이 말씀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눌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병도 치유되었고 새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 목소리가 들리려면 내 목소리를 부정해야 합니다.
하와는 뱀의 목소리를 살려두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목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님께 청할 뿐이지 그분으로부터 이래라저래라하는 말씀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순종’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이승복 박사는 어렸을 때 미국에 이민해 와서 미국 대표 기계체조 선수가 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만 연습 도중 척추가 망가져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식물인간이 됩니다.
이때 어떤 선교사가 그렇게 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고 분명 이것을 통해 큰일을 하실 것이라는 말을 해줍니다.
다른 때 같아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이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음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부하여 의대에 가고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이 됩니다.
양은 멍청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앞도 제대로 안 보이고 냄새도 잘 못 맡습니다.
힘도 없어서 맹수들에게 이만큼 좋은 먹잇감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없으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서 알아듣는 것보다는 그러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알아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 한 말씀이 없으면 나의 영혼은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말씀을 해주시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말씀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지, 안 들어주시는 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방향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분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를 힘입니다.
어떤 병원장 사모님은 매우 돈도 많고 어릴 적부터 성공만 거듭하여 남부러운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점을 치러 다니고 비싼 집과 비싼 차, 그리고 비싼 옷을 즐겨 입으며 으쓱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의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했고 그 당사자는 우리나라 준재벌이었으며 원상태로 고쳐놓지 않으면 이 병원을 망하게 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사모님은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의 목소리와 비슷한 무당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왔던 것이 어떤 고통을 주는 지 알았기 때문에 이제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고는 완전히 회개합니다.
병원이 잘 되건 안 되건 그건 상관없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에 보답하고 싶어서
본당에 가서 가장 비천한 봉사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일도 잘 풀렸습니다.
그분 목소리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 나를 믿지 맙시다.
그러면 나와 비슷한 목소리도 믿지 않게 되고 오로지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그분 목소리만이
귀하게 여겨지고 비로소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착한 목자에게 합당한 사람은 착한 양이 되는 신앙인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30일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오늘은 착한 목자이지만, 잠깐 방심하면, 도둑이요 강도, 삯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시골에 살다 보니 비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실감합니다.
오늘 하루 온종일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비가 오길래, 웬 떡이냐 하며, 이런저런 모종을 심었습니다.
전문가 농부들이 보시면 배를 잡고 웃으실 모종 작업입니다.
멀리 텃밭에 심었더니 자주 안 가게 되고, 엄청난 잡초 때문에 엄두도 안 나길래, 올봄에는 찌그러진 솥단지며, 금이 간 물통, 다 쓴 간장통 등 폐품에다 흙을 담아 모종을 심었습니다.
작업을 다 끝내고 나니, 그럴듯했습니다.
모종 작업도 만만치 않습니다.
좋은 흙을 퍼오고, 퇴비도 좀 섞고, 잘 배합한 다음, 모종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뤄 땅에 꽂고, 흙을 다져준 다음, 뿌리가 잘 내리도록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모종 작업을 하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하셨겠지.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조심조심 다루시고, 애지중지하시고,
잘 자리 잡고 성장하도록 갖은 정성을 기울이시고...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그저 백번 천번 감사드리며, 감지덕지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한 본당에 특강을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자상하신 주임 신부님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는데, 신부님 손이 보통 손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도 거칠고 투박하기로 만만치 않은데, 그 신부님 손은 여기저기 굳은 살이 박히고 상처도 많았습니다.
“아니, 신부님께서 무슨 공사판에서 중노동 하시는 분도 아닌데, 무슨 손이 이러시냐?”고 물었더니, 신부님께서, 거의 공사판 노동자처럼 살고 계신답니다. 웬만한 건물 보수나 기계 수리는 직접 다 하시다 보니 손이 그렇게 거칠다고 하셨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우리 안에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한 형제가 저희 피정 집을 찾아오셔서 며칠 머무시다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말씀, “세상 답답한 날들이었는데, 고속도로가 하나 뻥 뚫린 기분입니다.”
또 다른 자매님께서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줄기 밝은 빛을 보고 갑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형제들, 하나같이 부족하고 나약하고, 한심하고 웃기는 존재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를 통해서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오늘은 착한 목자였지만, 잠깐 방심하면, 살짝 초심을 잃어버리면,
주님께서 보시고 슬퍼하실 도둑이요 강도, 삯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요한 것이 한결같으며 지속적인 겸손의 덕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육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영적 생활, 주님 계명에 따른 생활로 넘어가려는 노력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인 동시에 착한 목자를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성화와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이 땅의 모든 사제, 수도자들이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고 착한 목자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모든 평신도들 역시 보편 사제직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과 직장, 단체와 사회 안에서 주님을 꼭 빼닮은 너그럽고 착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 성소 주일을 맞아 사제와 수도자, 지도자들에게만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서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일>
(2023. 4. 30.)(요한 10,1-10)
<목자의 비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여기서 ‘도둑’과 ‘강도’는 거짓 예언자, 가짜 메시아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자들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간다는 말씀은, 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은 전하지 않고 그릇된 이론이나 학설 같은 것만 말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사리사욕만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겉으로는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산을 등쳐먹으니 그자들은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그자들의 위선, 교만, 허영은 문이 아니라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목자가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은, 참된 목자는 하느님의 말씀만 전하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라는 말씀과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참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한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가르치셨을 때의 일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음을 느끼고
몹시 놀랐습니다.
<참된 목자의 음성이라고 느낀 것입니다.>
당시에 율법학자들은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사실상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이고, 그래서 그들의 말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거짓 예언자와 가짜 메시아를 잘 식별해야 하고, 그자들을 멀리 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 전의 재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마르 13,21-23).”
요즘에도 거짓 예언자들과 가짜 메시아들에게 속는 사람들이 많고, 그자들을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습니다.
그자들에게 속아서 따라가는 일의 결과는 늘 고통과 불행입니다. 나중에 심판 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바로 겪는 일입니다.
<혼자서만 고통과 불행을 겪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모두 고통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가짜 메시아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하고, 교회 교도권의 판단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7-10).”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나는 문이다.” 라는 말씀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메시아라는 것과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문이나 길이나 진리나 생명은 없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아닌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세속 사람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에도 해당됩니다.
그런 것들을 얻기를 원하고, 원하는 대로 얻는 것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고, 오히려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나타났었던 가짜 메시아들을 가리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