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백서 -이기철

두 번째 백서帛書                                                                   이 기 철   항상 네 곁으로 조심조심 걸었다  네가 잠든 동안은 문 밖에 서서 오래 기다렸다  너에게 가는 채비를 하는 동안 나는 숨소리도 낮추고  남방셔츠를 입을 때도 단추를 잠글 때도 소리 나지 않게 조바심했다   네가 없는 동안 나는 혼자 고독을 발명했다 고독의 잎파랑치 물오르는 소리 고독의 나비 날개소리 비자나무 새순 돋는 소리 자두열매 속살 익는 소리, 그러나 네 숨소리가 들리면 나는 걸어온 꿈길을 벗어나와 너의 순경음을 들으며 네가 전하는 입술가배야운소리를 받아 검정연필로 네 자모字母를 받아썼다   내가 만들어 준 몇 개의 인형 내가 사 준 핑크블라우스 너의 옷깃에 달아 준 님프브로치 너의 목에 걸어준 달빛레이스 네가 외출할 때 신었던 면화양말 초록길에서 사 온 여름아우터 적당히 굽 달린 펌프스구두, 눈부셔 눈이 부셔 차마 사지 못한 도로시와속옷 몰드 브레지어 플로라 팬티, 아 그것은 너의 절대비밀의 성역이므로   그리하여 나는 너를 맞기 위해 실바람 한 올을 오려내어 너의 쪽진 비녀를 만들고 달빛을 베어내 너의 앞가슴에 달아 줄 옥빛단추를 빚었다   이 마음 표백을 나는 한갓 시라고만 부를 수 없어 너에게 바치는 백서帛書라 부르노니, 내 심금 비단에 싼 열다섯 줄 언어, 참고 참다가 마침내 터뜨리는 최초의 고백록      * 교수님께서 현대시 7월호에 백서 두 장을 보내셨는데, 그 중 한 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