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쭉한 봄비가 내리고 나니 산하가 온통 푸르다. 벌써 신록은 녹음으로 우거졌다. 야산에 그 많던 꽃들은 이미 져버렸다. 차를 타고 달리면서 푸름 속으로 풍덩 빠져들면서 마음도 푸르게 젖어들었다. 논에 자운영 꽃밭이 잠시 눈길을 잡아끈다.
산청의 장박마을에서 산행들머리다. 농촌은 한창 바쁘다. 논두렁을 손보며 물을 가두고 모내기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풋보리가 바람에 수염을 흩날린다. 길바닥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정겹고 보다 넉넉한 농촌의 여유로움을 보여준다.
바람이 제법 불어 시원하다. 그러나 가파른 산길에 어김없이 땀이 후줄근하게 흐르면서 능선에 올랐다. 일명 너백이쉼터다. 꽃을 기대하는 마음이 더 조급했던가, 훅훅 붉은 숨을 토해내지만 조금은 실망스럽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대부분 망울에 붉은 입술만 실룩거리며 고개를 살랑거린다. 도대체 황매산 철쭉은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천 고지를 훌쩍 넘는 황매산 온 산자락이 철쭉으로 밭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개화시기에 맞추어야지 철쭉보고 나에게 맞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도 여기저기에 찔끔찔끔 조금씩은 심심치 않게 피어 있으니 그로 위안을 삼는다. 아무래도 절정을 이루려면 일주일 이상은 늦추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허적허적 정상에 다다랐다. 평일 날임에도 어쩐 사람들이 그리 많이 모여드는지 증명사진 한 장 찍을 수 있도록 발붙일 틈을 좀처럼 주지 않는다. 능선을 넘어 목장 초지였던 구릉에 닿는다. 오른쪽 자락 영화주제마을로 내려섰다.
불과 한 걸음 비켜섰는데도 이곳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제법 꽃들이 피어 그런대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마치 꽃잔디를 펼쳐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토양은 그만큼 차별화하고 있었다. 잠시 영화촬영장 속에서 기웃거리다 다시 능선으로 되돌아 올랐다.
꽃밭 구석구석에 끼리끼리 모여앉아 점심식사에 온갖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사람들로 마치 소풍 길을 연상케 한다. 이 시간만큼은 오르느라 힘겨웠던 순간도 잊고 자연에 동화된 듯 발랄한 마음에 마냥 편안한 시간이기도 하다.
달랑거리는 도시락 통에서 삶은 계란에 사이다 한 병쯤 여기에 사과나 과자 몇 봉지면 더 발라 것이 없었다. 아니 김밥이면 어떻고 쑥떡이면 어떠며 김치조각이면 어쩌랴. 그저 하이얀 쌀밥이라도 구경했으면 싶었는데. 그래도 그 시절을 못 잊어 하는 것은 왜일까?
철쭉꽃 축제준비를 하면서 이번 주말이나 내주 초에 다시 한 번 오면 제대로 꽃구경을 할 수 있을 거란다. 능선을 타고 가려니 오던 길보다는 그래도 꽃이 많이 피었다. 큰 능선이 바람을 막아주어 좀은 포근한 온도를 유지하는 까닭일 게다. 이를 놓칠세라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제 사실상 철쭉꽃은 뒤로 하고 모산재에 오른다. 여기부터는 완전 암릉으로 분위기가 돌변한다. 우선 천하제일의 명당터라는 ‘무지개터’ 에 작은 웅덩이가 못을 만들고 용마 바위에서 앞이 뚝 끊기면서 절벽을 이룬다.
절벽 끝자락에서 잠시 조망을 하려니 마음이 움찔해진다. 선입견에서인지 어쨌든 범상치 않다는 느낌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터가 좋은 만큼 그만한 임자가 없었던가. 섣불리 아무나 욕심을 내어 묘를 쓰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에 서로 견제하며 빈 터로 남아있다.
주변마저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바위들이 떡 버티고 있다. 가히 절경이다 싶다. 철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원형 상태로 있는데다 허물어져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조심조심 하다보니 자연 발길이 늦어지며 정체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안전이 제일이지 않은가?
이대로가 좋은가 아님 입장료라도 받아서 이에 안전한 편의시설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우문에 돈은 내기는 싫다는 표정들이다. 그렇다고 위험스러운 길을 마냥 방치하는 것도 여러 모양새로 좋지 않다. 머잖아 해결책이 제시되기를 바라면서 예정된 시간에 하산을 재촉하였다.
이 정도면 오늘 꽃산행의 목적은 처음 기대에서 다소 벗어났던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는 그래도 달성됐지 싶다. 황매산에는 황매가 없다. 그러나 드넓은 화원에 피어나는 천상의 철쭉꽃밭에 수많은 인간은 벌 떼가 되고 나비 떼가 되어 전국각지에서 훨훨 찾아들고 있었다. 비록 달콤한 꿀은 찾을 수 없었지만 눈요기만으로도 배불릴 수 있어 시시덕거리며 희희낙락이었다.
오늘 하루는 푸름 속에 빠져보고 꽃밭에 빠져보고 바위 속에 빠져보는 날로 푸른 나무가 되고 꽃이 되고 바위가 되어보았다. 오는 길은 합천호를 굽이굽이 타고 돌았다. 호수는 그간의 가뭄을 보여주듯이 물길이 저 밑바닥에 머물렀다. 아직은 많은 비가 내렸으면 싶었다. 넘실넘실 가득 물을 채워 풍년가를 불렀으면 싶었다. 농촌의 어려움을 말갛게 헹궈주었으면 싶었다.
봄은 꽃이 아닌 게 없다 산자락이 그대로 하나의 꽃으로 돌마저 꽃들 사이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봄은 푸름 아닌 게 없다 산자락이 그대로 하나의 푸름으로 돌마저 푸름 사이에서 푸르게 돋아난다.
봄은 발걸음 하나하나에도 조심스럽다 발밑에서 까르르 웃음소리 새싹이 힘껏 솟아오르고 있다.
봄은 흐르는 냇물도 겨우내 묻어두었던 이야기 꺼내놓고 속삭속삭 반짝이는 물비늘을 드러낸다.
봄은 그대로 하나의 축제장으로 누구라도 오라는 손짓에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봄은 저마다 마음의 씨앗을 뿌려가며 꿈을 가꾸기에 두근두근 가슴이 부풀며 희망을 담아본다.
봄은 새들도 넘쳐나는 정겨움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노래를 부르며 짝을 찾아 산자락을 흔든다.
봄은 지는 꽃잎마저 그냥 지는 게 아니다 나풀나풀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하늘을 날아본다.
이제 기꺼이 봄날을 노래하자 봄날이 어정어정 봄날의 약속을 끌어안고 무성한 여름으로 가려한다.
<이제 봄날을 노래하자>
첫댓글모두가 꽃을 바라는 가운데서도 몽우리면 몽우리인대로 꽃이면 꽃인대로 초원은 초원인채로 그 자체가 아름다웠습니다. 모처럼 동반하신 사모님과 나란히 앉아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꾸벅꾸벅 문방님의 꿈이 궁금했습니다. *^^* 오늘 문방님의 글에서 다시 꽃송이들이 피어나네요. 고운 꽃밭의 시간.. 시로써 간직됩니다.
첫댓글 모두가 꽃을 바라는 가운데서도 몽우리면 몽우리인대로 꽃이면 꽃인대로 초원은 초원인채로 그 자체가 아름다웠습니다. 모처럼 동반하신 사모님과 나란히 앉아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꾸벅꾸벅 문방님의 꿈이 궁금했습니다. *^^* 오늘 문방님의 글에서 다시 꽃송이들이 피어나네요. 고운 꽃밭의 시간.. 시로써 간직됩니다.
꽃이 피든 안피든...각자의 마음이 문제인것을...그래도 그만하면 봄을 만끽한 것같으네요. 오래 간만에 함께한 산행 반가웠습니다.
문방님의 산행기는 못간사람도 황매산으로 빠져들게 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