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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75
2월22일[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사순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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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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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hMF_ils41I
[서울대교구 현종민 세례자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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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함께 사는 형제가 제 성격에 딱 맞다며 별명을 하나 지어줬는데 ‘조급’ 양신부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하태평같고 여유만만해 보이지만, 같이 살아보니 엄청 급하답니다.
미사 입 퇴장 할 때도 광속이라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답니다. 바깥 일도 천천히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아무 말도 않고 그냥 혼자서 다 해버린답니다. 따지고 보니 그런 구석이 없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 사도도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수제자답게 진중하게 생각도 해보고, 여유있게 움직이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께서 질문을 던질 때면 다른 제자들에게 기회를 줘도 좋을 텐데, 제일 먼저 나서서 대답하다가 늘 점수 왕창 깎아 먹기 일쑤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성격은 공으로 표현하자면 럭비공이었습니다. 축구공이나 농구공은 바닥에 튀면 대충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이 됩니다. 그러나 타원형인 럭비공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좌충우돌, 우왕좌왕, 천방지축, 티격태격의 명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수난 직전 적대자들과 대치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순히 병사들에게 붙잡히십니다. 아버지의 때가 왔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는 칼을 뽑아 대사제 종의 귀를 내리쳐 잘라버립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잘라진 귀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아프다고 울부짖는 대사제의 종의 모습을 상상해보셨습니까? 귀를 잘랐기 망정이지 목이라도 쳤으면 살인자가 될 뻔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는 예측 불가능한 돌출행동으로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공동체 멤버들을 당혹스럽게 하는데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허물이 너무 많아 부적격자로 보이는 베드로를 수제자요 반석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쉼 없이 흔들리던 그를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 존재, 그래서 언제나 좌충우돌, 흔들리던 시몬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맡기시고, 천국의 열쇠까지 맡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큰마음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처럼 지상 생활 내내 쉼없이 흔들렸던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스승님으로부터 잦은 질타를 받던 ‘관심 사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정확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 죄, 인간적인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마다 겸손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는 당신 제자로서 부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의 기반 위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마침내 그 어떤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존재 자체로 오늘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겸손함입니다. 그러한 겸손의 덕 위에 부단히 자신의 결핍, 나약함,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아가려는 솔직한 자기 인식을 위한 노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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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SGIsnzZo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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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수장으로 한 명만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가톨릭과 다르게 이 성경을 해석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 위에 세우신 게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페트로스)는 남성이고 반석(페트라)는 여성 명사이기에 베드로라는 인간 위에 세우신 게 아니라 베드로의 반석과 같은 믿음 위에 세우신 것이란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이 이야기 뒤에 곧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뜻에 반하여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들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불완전한 인간인데, 어떻게 그런 인간 위에 교회를 세우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고 곧바로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하는 말은 페트라가 베드로의 믿음이거나 믿음을 가진 일반인을 가리킨다면 믿음이 있는 모든 이들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았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사제가 죄를 용서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결국 죄 때문에 쫓겨난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한,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이 지상에서 죄를 용서해주면 천상에서도 용서할 것이고 이 지상에서 용서하지 않으면 천상에서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불렀다고 베드로가 사탄이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회개시키기 위함이었고 베드로는 언제나 베드로였습니다. 성령강림 때 교회를 대표해 설교할 때 첫 번째 설교자는 베드로였고 그 설교로 첫 번째 개종자들 3천 명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누구이신지 잘 대답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인간적으로 완전하여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먼저 나타나시고 사도들에게는 늦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따라 보상을 주십니다. 사도들은 믿음이 강해서 사도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치의 중심으로 뽑아주셨기에 사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부족한 인간은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뽑으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이 기도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십니다.
또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도 하십니다. 이는 삼위일체 원리로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셨음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으로 남편이 아내 안에 있고 아내가 남편 안에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모든 것’을 주고 아내도 남편에게 ‘모든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의 선물이고 성령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머물게 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모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모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모였다고 하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계셔야 합니다. 자신들이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아야지, 어머니에게서 나왔다면 각기 자기의 다른 특성을 주장하며 나뉠 것입니다.
교회 자체는 어머니입니다. 만약 교회에 아버지의 존재가 없다면 교회 자체는 어머니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모이기는 하지만, 분열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왔다고 믿지만,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필요합니다. 만약 본당에서 사제가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면 신자들이 미사에 나올지라도 분열될 것입니다.
가시적으로 아버지처럼 묶어주는 누군가가 공동체에 한 명만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아버지가 둘이면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바오로파, 아폴로파로 갈라졌던 것처럼 교회에 나오더라도 자녀들은 둘로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공동체에는 한 어머니, 한 아버지만 계셔야 합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한 성당에 한 사제, 한 교구에 한 주교, 한 교회에 한 교황만이 계십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30회에 보면 두 금쪽이가 만날 때마다 싸웁니다. 그러나 이혼한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게 자기 탓만 같습니다. 어머니는 모을 수 있지만, 일치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역할이 핵심입니다. 규율을 잡는 것은 아버지가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해야 할 엄마가 규율을 강조하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말엔 힘이 부족합니다. 엄마는 은총을 담당하고 아빠는 진리를 담당합니다.은총은 자비고 진리는 정의입니다. 은총은 용서고 진리는 심판입니다. 이렇게 은총과 진리가 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이면서도 서로 대치되는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축구에서 싸움이 일었습니다. 감독은 4강에서 진 게 두 선수 때문이라고 탓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탓은 감독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일치시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은 은총과 진리, 두 갈래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개는 아니지만, 주인이 하지 못해 싸우는 개들을 서열정리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강영욱 훈련사가 필요했던 장면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일치를 위해 그들 모두가 순종할 한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시며 당신의 대리자를 보내지 않아 현 개신교처럼 여러 교파로 갈라지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각자가 성경을 각자의 주장대로 해석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정해줄 권위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천 개의 종파로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 리가 없고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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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오기 전에 저의 자리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신문을 만들고, 신문사를 운영했습니다.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이제 저의 자리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주임신부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리는 직책과 직무를 뜻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별을 보고 방향을 정했습니다. 북극성은 방향을 잡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별자리는 기준과 원칙을 뜻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신호등이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파란 신호등에서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고,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나라는 이런 원칙과 기준이 잘 지켜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살던 명동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장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리는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장소를 뜻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텍사스는 미국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기업들도 텍사스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타주에 비해서 세금이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리는 직무와 직책의 의미로, 원칙과 기준의 의미로, 생활하는 공간의 의미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댈러스 교구는 저의 직책과 직무에 맞게 권한을 주었습니다. 제가 본당 사목을 할 수 있도록 댈러스 교구에서 요구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교육에 참여했다는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저의 직책에 따른 권한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받았던 권한과 비슷합니다.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 고백성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 병자성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 혼배성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 세례성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입니다. 본당 공동체와 함께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함께 생활하는 사목자와 수도자가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미주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과 연대하여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중남부 지역의 사제들과 연대하여 신심단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뉴욕에서는 ME 대표신부를 맡았었고,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았습니다. 이제 이곳 중남부에서는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제의 직무는 복음을 전하는 예언직과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사목직과 성사를 통하여 공동체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제사직입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자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생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자리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이라고 생각하였고, 기꺼이 베드로에게 교회의 사도좌의 권위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는 교황은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나누는 이곳이 이미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는 불의와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나의 체면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권위일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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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베드로 사도좌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이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히 대화하실 수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제자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왔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 이렇게 물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물으신다. 그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기적을 행한 제자들의 답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는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대답하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름으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자체이시므로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음을 나타낸다. 그 육신은 나약하여 죽었지만, 곧 다시 살아났다. 그 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죽음은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이 반석은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신앙이다. 주님께서는 이 반석이라는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공통적인 이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갖는 열쇠는 바로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그 상속자이다. 여기에 들지 못한 사람은 거룩한 것들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세는 어떤가?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에게 있어 그분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며, 그 답을 각자의 생활과 믿음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답이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바로 당신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더욱 일치하고 그분이 더욱 많은 봉사를 잘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의 신앙고백으로 이러한 직책을 가지셨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셨다면, 이제 우리도 올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언제나 하나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으뜸,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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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교회는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와, 무엇이든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뒤 베드로의 계승자들은 하느님 백성 전체에 대한 특별한 봉사직을 수행합니다.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의 역할은 이미 2세기부터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리옹의 이레네오 같은 교부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교회의 친교 안에는 고유한 전통을 지니는 개별 교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베드로 교좌의 수위권은 온전히 보존된다. 사랑의 모든 공동체를 다스리는 베드로 교좌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교회 헌장 13항)
베드로 사도좌는 단순히 인간적 관점에서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도록 만들어진 직무가 아니라, 그 안에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치의 표지이자 목자의 구실을 하는 베드로좌는 당신 교회를 하나로 모아 구원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느님의 목자적 사랑을 보여 주는 특전적 표지입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를 돌보아야 하는 교황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전망을 제시하고, 하느님의 백성이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고 독려하여야 하는 교황의 직무가 한 인간이 맡기에 얼마나 크고 버거운 것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세상의 풍파와 도전에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굳건한 반석의 구실을 하는 교황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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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교회>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또 교회를 하나의 조직으로 만드신 것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을 인간들이 스스로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고, 인간들이 서로 협력하고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모든 일을, 인간들을 구원하는 일도, 협력자 없이 당신 혼자서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게 됩니다. <만일에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를 지어도 책임이 없고, 신앙생활을 아무리 충실하게 해도 공로가 되지 않습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사실상 인간들은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과 악, 구원과 멸망을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고, 좋은 선택과 실천을 했다면 그 공로도 우리의 것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 것은 천지창조 때부터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8.15.18)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신 일까지만 하셨고, 그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일은 사람이 스스로 하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집’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스스로 돌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외로운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협력자와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렇지만 협력자를 만들어 주신 일까지만 하셨고, 함께 일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력하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하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마음으로부터 하지 않으면, 또 주님께서 시키신 일이니까 억지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협력도 아니고, 함께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을 사람에게 맡기신 그 뜻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일에서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15-16)
교회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한 몸’인 공동체이고, 그래서 모두가 똑같이 귀하고 소중합니다. 맡은 직분과 직책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 베드로 사도’라는 ‘한 개인’을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인들의 공동체’이기도 하고, ‘신앙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의 일치도 중요하고, 신앙의 일치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신앙인들)의 일치는 명령과 복종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 사이의 분열과 갈등은 겉으로만 보면 이해관계 때문에, 또는 의견 충돌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의 일치’도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1코린 8,1ㄷ-3)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각자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달라서 그렇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또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게 됩니다. <오백여 년 전의 교회 분열도 신앙의 차이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다시 일치를 회복하려면 우선 먼저 사랑부터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한쪽만이 아니라 양쪽 다, 서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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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열두 제자 가운데 첫째로 삼으시고 교회를 이끄는 특별한 권한을 주신 것을 경축합니다.
우리가 보통 베드로 사도에 대하여 떠올리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을 때,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걷다가 높은 파도에 겁을 먹고 물에 빠지거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붙잡히셨을 때,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다가 눈물을 쏟고 마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어부 시몬에서 바위를 뜻하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에게 베드로, 곧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계약으로 맺어진 옛 이스라엘 백성 대신 세우시게 될 이 교회는 죽음의 세력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첫째로서 베드로는 이제 누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참여하여 하늘나라의 구원에 참여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커다란 권한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권한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베드로 사도로부터 이어온 사도들의 직무를 통하여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에 참여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그 후계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이끌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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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오늘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와는 제법 큰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우리 삶의 자리와 베드로 사도좌와의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도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님이나,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주일만 간신히 지킨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는 이 축일이 큰 의미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은 교황님과 주교님들을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신앙심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온전히 삶을 투신하면서 살기에는 생각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다반사가 예수님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다가올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부족한 신앙인이라고 자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신앙인이기에, 부족해 보이는 신앙인이기에 오늘의 축일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적 없으셨던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반석 삼아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럼 베드로 사도는 위대한 인물이었을까요?
우리는 그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어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지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도 풍랑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물에 빠지고,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인공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체험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베드로이기에,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우리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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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부여된 권한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람 말 ‘케파’를 그리스 말로 옮긴 ‘베드로’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바위’(반석)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름을 따로 부여하시면서 그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공동체의 토대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죽음의 세력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단단한 기반을 지닌 건물로 묘사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시며, 그 열쇠로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그가 지상에서 매고 푸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다스리는 교도권, 특히 어떤 사안을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행사되는 베드로의 권한이 하늘에서도 존중받게 될 것임을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부여된 이 권한은 그의 후계자들을 거쳐 프란치스코 교황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의 역사 속에서도 이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계속해서 흔들림 없이 구원의 여정을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주어진 막중한 권한만큼 무거운 책임감까지도 함께 짊어지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그 직분이 개인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여정일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마주한 다양한 위기와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자 늘 애쓰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자주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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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
사도좌(使徒座, Sedes Apostolica)는 사도들이 창건한 교회의 주교좌를 일컫지만, 통상 이탈리아 로마의 주교인 사도 성 베드로와 사도 성 베드로의 후계자(=교황)가 계승하고 있는 자리를 말하며, 사도좌는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자리이고, 사도좌는 곧 교황의 권위와 권한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매일 미사엔, 오늘 축일의 기원을 이렇게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말입니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먼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고, 그리스도인들 또한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아 지금껏 이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축일의 의미는 바로 복음에서 사도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6,17) 여기서 살과 피가 아니라는 언급은 베드로의 인간적 지식과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내 베드로에게 그 깨달음은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우리 또한 아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이끌어 주시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시지 않으면, 어떤 누구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와 함께 우리 또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아빠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당신의 구원 섭리와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계십니다.
사실 그렇게 고백한 베드로 사도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를 의식한 예수님은 고백을 들은 다음 이내 베드로의 믿음 위에, 즉,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6,18.19) 결국 교회는 베드로에게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입한 계시와 그 계시를 고백한 베드로의 믿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라는 고백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 성부에 대한 고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느님께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며,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본디 베드로 이전에 그의 원래 이름은 시몬 바르요나로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지만, 이 고백 이후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는데 그게 바로 베드로(게파, 반석)입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게파라고 불릴 것이다. ‘게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1,42) 결국 그의 새로운 이름처럼,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명명하고 호명함으로써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겠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로써 베드로 사도라는 한 개인의 인격을 반석으로 삼아서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의 믿음의 표지인 신앙고백을 기초로 삼아서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그 기반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는 표지가 바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9) 예전에 여성이 시집가서 시어머니로부터 곳간 열쇠를 넘겨받는다는 것은 그 집안 살림살이에 대한 권한을 넘겨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쇠는 권한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준 계기이자 바탕이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순간이며 자리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교회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것은,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주님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맡겨준 매고 푸는 권한을 주셨음을 깨닫고 하늘나라가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하기에, 이 땅에서부터 맺는 것을 풀고 하늘을 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열고 푸는 일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기에 오늘 우리가 우선해서 해야 하는 일은 죽은 분들이든 살아 있는 사람이든 모든 이들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 22,32)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잊지 않고 깨어 살았던 베드로는 그러기에 오늘 독서에서 참된 목자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후임들에게 자부적인 사랑으로 권고합니다. 다시금 낭독하렵니다. 여러분보다 제가 듣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 5,2~3)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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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는 후배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하나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이 사진 안에는 아주 멋진 몸(상반신)을 드러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후배 신부였습니다. 보디 프로필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진,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 편집한 거야?”라고 묻자, 아니라고 합니다. 이 사진 한 장을 남기기 위해 식단 조절을 하면서 몇 개월 동안 다이어트를 했고 또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 트레이닝을 열심히 받았다면서 너무 힘든 시간이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후배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이 힘든 것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깜짝 놀랄 정도로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통통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기에, 지금의 많이 마른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살이 빠져서 그런지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보였고, 그래서 실제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습니다. 물론 본인의 만족도가 커서 괜찮다고는 하겠지만, 이 사진 한 장을 위해서 그렇게 힘든 시간은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일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중요한 것일까요? 그보다 스스로 느끼는 멋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남에게 보이는 삶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보이는 삶은 계속된 만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멋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여건들을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예수님 질문에,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지요. 베드로는 인간적인 약점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정답 하나 말했다고 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보시고 크게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며, 이 세상을 만족하며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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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있음에>
마태오 16,13-19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나 있음에>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나 있음에
하늘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기를
나 있음에
땅이 하늘로
오를 수 있기를
나 있음에
하늘과 땅이
땅과 하늘이
하나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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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이날 사도들의 후계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16,13)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하자“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질문 앞에서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하는 답을 해야 합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로 표현하셨습니다. 연필을 사용하는 것은 주인 몫입니다. 설사 부러지더라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환시를 통해 만난 아기 예수님의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묻는 데레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데레사의 예수’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에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연장입니다.” 하고 답합니다. 저의 삶의 여정에 많은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고 저도 끝까지 주님의 도구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텔레비전 시청, 핸드폰 보는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시간 중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봉헌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 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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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목자 영성>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사랑과 섬김”-
"주님,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 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샘솟나이다."(시편97,11)
지난 밤 초춘(初春)에 내린 흰눈이 온누리를 덮었습니다. 나무마다 설화(雪花)의 눈꽃들 만발한 초봄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 모두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순결한 영혼, 순결한 마음, 순결한 사랑으로 살라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사순시기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은 다음 오늘 감사송(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과도 잘 어울립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사도들이요 오늘날의 주교들, 사제들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직무가 섬김의 목자직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시고 교회를 이끄는 특별한 권위와 권한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본기도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셨으니,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베드로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흔들리지 않는 교회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오늘 축일의 유래를 간략히 살펴봅니다. 로마시대에는 죽은 이의 기일에 무덤에 모여 추도하는 관습이 있었고, 2월22일 오늘은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관습을 받아들여 4세기부터 베드로 사도 무덤을 참배하고 추모했으며 바로 오늘 축일은 여기서 유래합니다.
이어 바오로 4세(재위1555-1559) 교황이 6-7세기때 갈리아 지방에서 유래된 1월18일을 로마전례력에 수용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정했으며, 1960년 성 요한 23세(재위1958-1963) 교황이 이 사도좌 축일을 2월22일에 지내도록 했습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근거가 되는 교부들의 어록도 참 풍부합니다.
1.“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성 대 레오 교황)
2.“베드로는 반석을 뜻하는 말인데, 반석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라는 이름 안에 교회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이 바위는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바위라고 표현하신뒤, 그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4.“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입니다. 곧 반석 위에 세우시어 굳건함과 힘을 지니게 하십니다.”(오리게네스)
5.“사도들은 유일한 초석 예수님 안에 있는 초석들입니다. 설사 사도들이 없다해도 예수님만은 마땅히 초석으로 불리시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교회의 초석들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프리마시우스)
6.“‘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마태 16,18)’고 말하지만, 모든 사도 위에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말씀도 있습니다(마태 18,18). 그들 모두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으며 교회의 힘도 그들 모두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열둘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 것은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머리가 지명된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
이 모든 교부들의 말씀은 오늘 복음에 근거합니다. 그러니 신앙의 모범인 베드로를 본받아 예수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압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고백함으로 주님의 극찬과 더불어 전권을 위임 받을 정도로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베드로를 신뢰했는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반석이라 극찬을 받던 베드로가 순식간 사탄의 걸림돌이 되어버립니다.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의 확인을 받아낸 일화(요한 21,15-19)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지로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세 번 오고 간 문답입니다. 베드로가 이 체험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베드로가 순교에 이르기까지 항구할 수 있었던 믿음도 이런 체험의 은혜일 것입니다. 새삼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깊어지는 믿음의 여정이요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면모는 믿음 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바로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사도이자 목자인 베드로의 고백에는 참목자 예수님을 닮은 목자의 사랑이 녹아있음을 봅니다. 교회지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목자뿐 아니라 양떼 신자들이 으뜸 목자 예수님께 보고 배워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참으로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사랑과 섬김의 자세가 하나로 녹아 있는 참 목자 예수님을 닮은 아름답고 거룩한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주님의 평생 배움의 학인(學人)들인 우리를 격려합니다. 세월과 함께 쌓여 드러나는 ‘공부의 주름’, ‘연륜의 나이테’이길 소망합니다.
“공부란 세월과 함께 쌓이는 주름과 같으니, 배웠다면 몸에 새겨 일상에 드러내야 한다.”(다산)
“시 삼백편을 외워도, 사방이 사신으로 나가서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배웠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공자)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참목자 예수님을 닮아 주님과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합니다. 또 하나의 베드로 반석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황송스럽고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마태16,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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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처음 양성책임을 맡을 때 겨우 서른이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더 먹은 형제들도 가르쳐야 했습니다.
당연히 양성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할 때 양성을 하다 보면 할 수 있게 된다고 여러분이 조언하였고 재속프란치스코회에서 양성을 처음 하게 된 분들도 양성하면서 양성자로 자신이 차츰 양성되었다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도 실제로 하다 보니 할 수 있었고 차츰 양성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더 큰 힘이 된 조언은 역시 신앙적인 조언으로서 소임을 주신 주님께서 할 수 있는 힘도 주실 거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사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요.
권력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이용하여 자기 사욕을 차리다 잘못되곤 하잖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좌는 이런 것과 달라야 합니다. 사도좌는 인간이 쟁취한 자리가 아님은 물론 인간이 마련해준 자리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 으뜸 자리를 맡기신 겁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의 으뜸 자리를 맡기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좌 곧 교황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간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할 사람으로서 그에게 주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양 떼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 떼를 맡기시면서 당신 양 떼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지 베드로에게 물으시지 않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당신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것 같고 우리 같으면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도 있을 것이고,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도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자세 없이 책임자의 자리를 맡고 인간적인 사랑만으로 양들을 사랑하면 자주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랑은 금세 고갈될 것이고 그 사랑에는 욕심이나 기대라는 불순물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해야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처럼 순수하고, 무엇보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이 되어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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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16,18.19)
<예수님의 신원>
오늘 복음(마태 16,13-19)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베드로가 '이 지상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직접 부르심을 받은 첫 번째 교황으로서, '제1대 교황'입니다. 현재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드로 사도에 이어진 '제266대 교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셨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로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례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태 16,14)
이어서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을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대답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완벽한 대답입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을 다시금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끄시는 '스승님'이시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살아계신 '임마누엘이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신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없애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완벽한 대답으로 베드로는 사도좌의 자리에 오릅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그렇다면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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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Y96jajfGq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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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 19)
우리의 인격을
되찾아 주시는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하느님의
은총은
사도좌의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가톨릭
교회역사
전면에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도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도좌를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도좌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친히
맡기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끝까지
신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성사 안에
사도좌가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를 위해
사도좌가
있습니다.
신앙의 현실과
마주하는
가운데에서
사도좌는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올바른 교리를
전달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열린 마음으로
갈등과
반목의
현장에서
이해와 화해를
시도하십니다.
괴롭고
절망적인
현실사회의
아픔을
위로하시며
실천성과
만남으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오늘의
역사적 현실을
대변하시며
소중한 가치를
신앙의 차원으로
성장시키십니다.
복음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신앙을
수호하는
사도좌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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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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