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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조선의 정치학 - 지영해 옥스포드 대학 교수 ♥
요즘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KAIST의 이병태 교수와 한양대의 박찬운 교수간의 헬조선 논쟁이 뜨겁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교수는 헬조선이라 부르며 신세 한탄에 빠진 젊은이들을 향해 우리세대는 더 큰 어려움 속에도 고난을 이겨가며 오늘의 한국을 건설했으니 너희들은 그만 투덜거리고 강해지라고 일갈했다.
이에 박찬운 교수는 지금의 어른세대들이 누린 혜택들을 생각해보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사회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젊은이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어른들의 할 일이라고 이 교수를 비난했다.
두 사람의 논쟁을 읽는 과정에서 박교수의 사고 구조의 일부를 볼 수 있었고,
이 사고구조는 최근의 한국정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이해의 틀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한번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1.
젊은이들이 왜 비탄에 빠졌는지, 왜 그들이 촛불을 들고 길거리로 나오는지, 왜 그들이 헬조선을 외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시각에서 세상을 한번 보자는 것이다. 사실 박교수 말이 이 말이다. 박교수는 기성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저성장 사회의 고질병인 청년실업의 고통을 고스란히 젊은이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눈으로 봐야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제3의 관찰자의 시각을 떠나, 당사자 자신의 입장이 되어 어떤 상황을 이해(understanding) 하려고 하는 것을 사회현상에 대한 내재적(內在的) 접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실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에 이 내재적 접근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그냥 중립적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알기 힘든 행동의 동기를 드러내 보인다. 특히 한 개인이 살아온 환경과 그 환경 속에서 부딪혀 왔던 사건들을 훑어보면 그가 어떤 악조건 속에서 사투를 벌여 왔는지, 또 왜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등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강남 금수저로 태어나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재판관을 불안하게 쳐다 보는 것이다. 그들이 굶어봤을까? 악덕 고용주에게 착취를 당해봤을까? 여성이 되어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맞아봤을까? 그들의 삶을 살아보고 그리하여 그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재판관만이 그 앞에 서 있는 빵 도둑과 악덕고용주의 폭행범과 남편 살해범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내재적 접근은 가끔 한 국가의 군사외교적 행태를 이해하는 데에도 쓰여진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다시 말해 그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경험했던 공포와 분노, 희망과 좌절을 고스란히 느껴보는 방식으로 그 국가의 행태를 설명해 보는 것이다.
한 예로 한때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친북학자 송두율 교수나 해외 한국학계에서는 좌파의 거목으로 알려져 있는 시카고 대학의 브르스 커밍스 교수 등이 이 내재적 접근을 하나의 학문적 방법론으로 하여 북한을 이해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묻는다. 왜 북한이 지금 저렇게 움츠러들게 되었는가? 6.25 때 군인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미국의 잔혹한 공습이 그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겠는가? 네이팜탄으로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고 조선 사람들이 산 채로 불덩이가 되어 자기 눈 앞에서 울부짖고 있는데, 미국의 만행이 꿈엔들 잊혀지겠는가? 왜 핵무기를 개발했겠는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한미연합전력의 위협에 직면하여 그들은 얼마나 공포에 떨었겠는가? 핵무기 이외에 그들 스스로를 방어할 다른 방법이 현재 있겠는가? 이처럼 지난 70년간의 북한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세계를 보고, 북한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내재적 접근은 좌파의 중요한 사유방식의 하나가 되어 왔다. 이러한 사유방식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하나는 감성적 공감능력(共感能力, empathy) 없이는 내재적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재적 접근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비교적 눈물이 많고,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가능한 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사람이 갖는 분노와 환희, 좌절의 감정에 특별히 민감하다. 이들에게 있어서 감성은 사람들과 소리 없이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유용한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보수우파는 그들이 일부러 ‘감성팔이’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감성적 성향을 강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진실로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감성과 감정은 그들이 세상을 인지하는 더듬이와 같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대상 개인의 성장환경이나 대상 국가의 역사를 중시해서 본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 사람이나 그 국가가 현재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던 조건들을 시간 속의 인과관계 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그 운명의 기구함과 슬픔을 같이 나눈다. 소위 말하는 역사적, 혹은 계보학적(系譜學的, genealogical) 탐구가 내재적 접근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좌파지식인들이 자주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일제시대나, 미군정시대 등 과거의 역사 속으로 돌아가 그로부터 거슬러 올라오면서 논지를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
어떤 점에서는 내재적 접근은 개인이나 국가 등 행동자의 내적인 동기와 심리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이해’하고 나서는 그뿐이다. 내재적 접근은 그래서 어떻게 하라 하는 처방을 내놓지 못한다. 내재적 접근은 자기가 공감한 개인이나 국가의 내부적 심리상태 속에 갇혀서 그 개인이나 국가가 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에 대해서만 반복해서 말 할 뿐이다. 왜 그럴까?
내재적 접근으로 본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행동한다. 그들은 다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행동자는 옳다. 그런데 그 행동자에게 무슨 비판을 가하고,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근본적으로 내재적 접근은 ‘그래 나는 너를 이해해. 얼마나 힘들었겠니. 너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라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그 다음부터의 필요한 행동에 대해서는 내재적 관찰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대신 그 공백을 “그러므로 분노하라”, “그러므로 저항하라”, “그러므로 뒤엎어라”라는 충동적인 언어로 채운다.
여기서 내재적 접근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면모가 나타난다. 모든 인간은 다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만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그 주체가 게으르거나, 무능력하거나, 판단을 잘못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영향 혹은 타자의 이기적 개입 때문이다. 따라서 내재적 접근을 택하는 사람들은 끊임 없이 자기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 대상은 개인일 수도 있고, 재벌일 수도 있고, 대통령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불특정 다수(“걔네들”)일 수도 있고 혹은 사회경제체제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은 내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불행하다. 그러므로 나의 불행은 ‘걔네들’의 책임이다.
이런 태도와 시각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흑백논리의 세계관이 형성된다. 내가 최선을 다 해왔기 때문에, 타자는 모두 자신의 행복과 발전을 훼방한 ‘악의 무리’로 규정된다. 내가 선한 근로자라면, 업주는 자연히 지금의 가난한 나를 만든 악덕기업주가 된다. 인간적 삶을 향유하지 못하는 수많은 군중은 선이고, 물질만능의 성장만을 추구한 박정희의 개발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혜택 받은 재벌들은 악이다. 또 직장이 없고 희망이 없는 젊은 세대들은 선이고, 이 기회를 모두 독점하고는 후대들이 못 올라 오게 사다리를 차버린 전 세대들은 악이다. 에너지 정책에서 배제되어 왔던 우리 시민은 선이고, 원전 전문가들은 원전 마피아와 결탁한 악이다. 내재적 접근을 세계관으로 하는 좌파들은 늘 흑백논리의 단순성으로 빠진다.
내재적 접근은 이처럼 정신적으로 성숙해 지는 것을 막는다. 문제의 본질에 대한 논리적 이해와 합리적 해결을 향한 노력은 자기연민과 타자에 대한 분노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크지를 못하고 거기서 멈춰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그 자기연민과 분노를 연료로 하여 ‘행동하는 양심’으로 변하고 자기의 발전, 우리의 발전,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 타자를 타도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선다.
그렇다고 추구하는 가치나 방향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가치는 ‘인간’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감정이입의 궁극적 기준은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경험, 자기의 느낌, 자기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주체로 정의된 자기가 모든 정의와 도덕률의 중심이 된다. 그래서 ‘인간이 회복된 경제’, ‘시민이 주인이 되는 국정’, ‘주체성을 강조하는 국방’ 등등이 나온다. ‘인간’을 중시한다는 데에 누가 그것을 싫어하랴? 단어 자체의 아우라로 그 단어가 들어간 진술이나 정책은 자동적으로 정당화된다. 그런데 이 ‘인간’ 혹은 ‘인간의 회복’이 구체적 상황에서 무엇을 뜻하며 어떤 정책과 행동강령을 해법으로 제시해 주느냐 물으면 구체적이며 검증 가능한 주장이 없다. 있다 해도 그 논지가 엉성하고 희미하다. 그 이유는 이제까지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왔던 인간을 지적 이해의 대상이 아닌, 공감의 대상으로만 취급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민이 겪는 문제에 대해 정책적 처방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 평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평가는 개인의 감정상태나 국가의 경험 자체 내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한 사람이나 국가가 한 일이 정당하냐,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그 대상을 비교의 틀에 넣어 봄으로써만이 획득된다. 국가라면 다른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국제적 스탠다드와 비교해야 한다. 혹은 역사 속에서 그 비교대상을 찾을 수도 있다. 젊은 세대의 불만과 요구가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정당한지는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나라의 젊은 세대나 전 세대 사람들과 비교해야 알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은 헬조선을 외친다. 한국은 정말 지옥인가? 정말 한국은 부의 불평등이 그렇게도 어마어마한가? GINI계수를 통해 서구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의 최상위권에 들 정도로 불평등이 없다. 영국을 예로 들어 보자. 영국에서는 차로 몇 십 분을 돌아도 그 땅을 다 보지 못할 정도로 부유한 전통세습부자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일반사람들은 귀족들의 얼굴을 일생 한 번도 못 보고 죽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그들의 세계는 서민들과 동떨어져 있다. 통계상 일반사람들이 꽤 높은 평균소득을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수치일 뿐이다. 서민의 하루 하루는 아주 힘들다. 그만큼 극소수의 상위 부자들이 부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사람들은 상상 속의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서로에게 떠들면서 확신을 더해가는 것이다. 일종의 문화적 자폐현상이다.
청년실업은 어떠한가? 서구의 경우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더 좋은 직업이 없으면 그냥 잡일이나 막일을 한다. 본인이 최근 졸업시킨 영국 학생 중 하나는 150만원 준다고 하니, 좋아라 하고 졸업하고 한국에 가서 영어 가르치고 있다. 또 다른 졸업생은 똑 같은 월급에 런던에서 중국어 번역회사에 취직되었다고 파티를 열고 야단이다. 서울대학교 졸업생이었으면 그런 일을 하려고 했겠는가? 한국은 직장이 없어서 청년 실업률이 높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모자란 중소기업도 부지기수다. 그 월급 갖고 생활이 안 된다? 그럼 외국의 젊은이들처럼 생활의 기대수준을 낮추라. 모든 젊은이를 모두 좋은 수준에 고용할 수 있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 한국은 기꺼해야 겨우 세계 10위권의 경제다. 1인당 GDP로 따지면 무려 25-30위권의 나라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배운 사람은 막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문화적 전통에 갇혀 있는 것도 결국 한국에 특이한 문화현상이다.
3.
한국이 헬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에 산다고 1년만 얘기하면 그 사회는 객관적 수치와는 관계없이 지옥이 되고 만다. 한국인의 가처분 소득, 부채율, 실업률, 문맹률, 인간발전지수 등등을 놓고 구체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라. 또 재외국민들과 외국인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의료서비스 시스템을 보라. 실제로 삶에 중요한 수치와 데이타들을 구체적으로 놓고 비교를 해보면, 한국이 헬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면에서 선진국과 비슷하거나 더 살기가 좋다. 한국이 천국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힘든 것, 좋은 것, 결국 어느 나라나 다 같다는 얘기다.
내재적 접근은 역사와 계보론적 시각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심성을 이해하게 한다는 점에서 과거회귀형 사유다. 과거는 잘 보여주지만, 미래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래에 대한 비전은 자신을 외재적(外在的) 수준과 비교해 보아야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외재적 접근은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국과 타국의 역사 속에서는 어떤 정책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또 국제관계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떤 정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의 습득은 오랜 동안 집중적인 지적 훈련과 경륜의 축적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 없이 하루 이틀 만에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금방 원한다고, 생각한다고, 느낀다고, 분노한다고 뚝딱 마술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새정부는 이 힘든 과정을 포기하고 쉬운 길을 택하고 있다. 그 특유의 공감의 철학을 바탕으로 서민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정부의 이미지 창출에 집중하고 있다. 새 정부는 서민을 위해 서민과 같이 걷는다. 국민들이 자기 눈높이로 겸손하게 위치를 낮춘 정부를 보고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환호하고 얼마나 눈물이 나겠는가. 국민들은 이제 비로소 국가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환호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모자라 새 정부는 국민들을 진정한 주권자라고 부르며 그들이 직접 정책을 결정하게끔 하고 있다. 이제 국민들에게는 비로소 꿈에만 그리던 진정한 민주주의의 낙원이 이 땅에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이 이렇게 꿈을 꾸고 있는 사이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새정부는 ‘이해’에 바탕을 둔 ‘힐링’의 열망을 평가과정 없이 곧바로 정책으로 환원한다. 4대강 보 파괴, 원전폐쇄 및 건설중단,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 인상, 작전권 조기 환수, 주한미군 축소 및 철군 가능성, 사드배치 연기, 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제안, 대동강의 기적 프로젝트, 북핵문제의 대화를 통한 해결, 대중국 유화정책 등, 출범 후 이제까지 쏟아낸 거의 모든 정책이 ‘공감’에서 곧바로 정책으로 점핑한 것들이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문제에 부딪히지 않은 것이 없다. 북한에 보낸 ‘민족끼리의 대화와 교류’ 제안은 북측조차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과 유리되어 떠돌고 있는 주관적 인식의 세계. 거기에는 평가 단계가 없다. 그 깊은 곳에서는 내재적 접근의 사유 모드가 자리 잡고 있다.
국민들은 환호하겠지만, 이해와 동감만으로는 국민들의 실질적 필요와 국가의 중추기능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비현실적인 정책이 모두 그러하듯이 국민의 생활과, 국가의 경제근간과 안보를 크게 해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북한핵으로부터의 위협과 미국의 북한 공격 가능성이라는 이중 위기 속에서는 더욱 더 국내외 조건을 두루 살피고,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계산을 해야 할 때에, 국민의 기분과 그 기분의 공감을 중심으로 정책을 수립하면 국가기능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정부의 실체를 보았을 때, 그들이 느낄 환멸은 심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국가 체제가 너무 무너져 커다란 피해와 많은 희생자가 난 후이며, 회복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두 교수간의 헬조선 논쟁으로 돌아가자. 박교수가 종교인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너희들을 아픔을 이해하며 같이 나눈다’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생으로서는 ‘너희들을 이해한다’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니 오히려 젊은 세대들을 내재적 접근이 갖는 모든 부정적 결과에 노출시킨다. 평가와 처방은 내재적 접근의 사유방식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재적 이해’는 오히려 젊은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연장시킬 뿐이다.
젊은세대는 마땅히 도전 받아야 하고, 도전에 직면할 의무가 있다. 그들의 아픔을 같이 나눈다는 말은 듣기에는 달콤하겠지만, 발상부터가 그들을 무책임한 소아로 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실제적으로도 재난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젊은이들은 국가가 다독거리며 보호해줄 사람들이 아니고, 거꾸로 국가를 보호하고 이끌어 가야 할 주역들이다. 그들이 주인이다. 그리고 전 세대는 주인의 책임은 무겁고 험하다는 것을 젊은 세대에게 말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