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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3일(5월 3일, 수요일)
(가)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에서 분통을 터뜨리다.
무척 힘든 여행을 하여도 아침에 일어나면 피로를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건강은 양호한 모양이다. 조금 여유 있게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마루노우찌이다. 이곳은 도꾜 한복판에 위치하여 일본을 움직이는 각종 관공서와 대기업 본사들이 밀집한 일본의 실질적 심장부이며 일왕의 거처인 고꾜(凰居)를 중심으로 넓게 조성된 왕실 정원과 삐쭉삐죽 솟은 대형 건물이 약간의 위압감을 주는 곳이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말썽 많은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였다. 우선 신사 입구의 天자 모양의 도리이(鳥居)는 가로 24m, 세로 25m로 거대하였다.
일본인들은 신사마다의 입구에 이 도리이를 설치하였는데 신사란 일본의 신을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일본인들은 새를 하늘에 있는 신에게 인간의 뜻을 전할 사신으로 믿는다. 따라서 새가 쉬어갈 장소를 신사 앞마당에 마련한 것이 바로 天자 모양의 조형물인 도리이(鳥居)라고 한다. 입구에서 신사에 이르는 길은 직선으로 뻗어있고 양편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규칙적으로 질서있는 모습으로 서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단정하게 정지되지 않은 게 없다. 입구 오른편에 여러 가지 기념물들이 있는데 근대 일본군의 창설자의 동상, 전사자 위령비, 2차대전 전몰자들의 어머니들이 격전지의 돌을 수집 전시하여 자애로운 모성의 표현이라는 ‘위령지 泉’이라 하는 것 등등이 보였다.
야스꾸니신사는 웅장하거나 화려한 맛은 전혀 없이 낮으막하고 차분하며 조용한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부에는 위령패가 있고 교실보다 좀 더 큰 면적의 참배하는 방이 있는 듯이 보였다. 내부는 자세히 들여다 볼 심정이 아니라서 외양만 보고 나왔다.
이곳은 메이지유신이 단행될 당시의 내전에서 전사한 정부군의 영혼을 달래고자 1869년에 세워졌으며 말썽이 된 것은 197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의 위폐까지 옮겨 놓고 신으로 승격시킨 것도 부족하여 정치인들이 참배하기 때문이다. 일본 자국민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세계평화와 이웃나라의 국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자들을 신격화하고 또 참배까지 하고 있으니 뻔뻔스러움이 망령의 수준이라고 일행 모두가 분을 삭이지 못한다. 정치적으로 자국민을 단결시키는 데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그런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다간 언젠가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고 그 날에는 일본 열도의 함몰이라는 비극을 당하게 될 것이다.
입구에는 은행나무 거목들이 많았는데 높은 꼭대기까지 전부 정지를 하였다. 그런데 윗부분을 정지하니 세력이 아래로 모여 가지 밑 부분이 혹처럼 부풀려져 마치 뿌리가 내리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도로나 도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아주 잘 정리 정돈되어 있는 모습은 일본다움을 보여 주는 듯하였고, 이렇게 깨끗하고 빈틈없이 정리 정돈된 모습은 일본의 어느 곳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구경을 마치고 입구에 나오니 SUV차량이 3대가 와 있다. 크고 도전적인 체의 글씨로 ‘실지회복, 투쟁, 결사’ 등 살벌하고 피냄새가 나는 용어의 현수막을 걸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독도, 중국과는 ‘센카쿠열도’ 를 두고 영토분쟁이 격렬하던 때라 다소 이해를 하지만 호전적인 국민성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잠시 모임이나, 회의를 하는 듯 그냥 정차하여 있었으나 몇 시간 뒤 긴좌지역에서는 마이크로 크게 외치며 시내를 순회하고 있었다. 우리도 정신 단단히 차리고 치밀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앞 뒤 계산 없이 객기 부리듯 떠드는 외교는 무슨 효과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국민에게 봉사하는 왕실
신사를 나와 육교를 건너 5분쯤 걸어 키따노마루(北の丸)공원으로 갔다. 옛날에는 왕실정원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일반인에게 자유로이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왕실이 국민에게 봉사하여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푸른 잔디와 연못, 크고 울창한 숲,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꽃, 잘 관리된 모습들이 무척 부러웠다. 도심 근처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이렇게 크고 좋은 공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공원 안에는 일본무도관이 있어 각종 스포츠 행사나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 장으로도 활용되는 데 서태지도 이곳에서 공연하였다고 한다. 또 과학 기술관과 동경국립미술관 공예관도 보였다.
상큼한 5월의 신록의 냄새를 맡으며 시원한 숲속을 걸어도 다리는 아프다. 다리는 공원의 어느 곳에라도 앉거나 누워서 잠시 쉬어 가기를 요구하지만 우리 대장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저만큼 앞장서서 열심히 걸어가고 우리는 뒤따라 가기에 바쁘다. 그러다 보니 경계가 어디인지도 모르게 히가시교엔(東御苑)으로 들어섰다.
일본지명에 교엔과 공원이라는 말이 있다. 둘 다 공원인데 왜 명칭이 다를까? 일반적으로 우리 상식에 존재하는 공원은 한자로 ‘公園’으로쓰고 일본어로는 코엔(こうえん)이라고 읽으나 교엔의 한자는 ‘어원(御苑)’으로 풀어보면 귀하신 분(御)이 노니는 정원(苑)이란 뜻으로 일왕과 그 일가가 사용하던 정원에만 이런 이름이 붙어있다고 한다.
(다) 히가시교엔(東御苑)과 메가네바시
히가시교엔(東御苑)은 에도성(지금의 동경)의 유적에 둘러싸인 널찍한 공원으로 당시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행정청이 들어앉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곳이란다. 이곳을 일왕 거처인 고꾜에서 고꾜가이엔(皇居外苑)을 제외하곤 일반에게 공개되는 유일한 황실 정원이다.
구경하는 데 1시간을 족히 걸린다는 곳을 얼마동안에 걸었는지 쉴새 없이 보면서 쉴새 없이 걸었다. 예쁘게 꾸며진 연못, 일본에서 가장 큰 성채의 터인 텐슈다이(天守臺), 우리나라의 석빙고와 비슷하게 돌로 지은 창고인 이시무로(石室), 성벽을 따라 나란히 지어 전시에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를 보관하였던 후지미따몬(富士見多聞), 창고와 방어용 요새로 사용하던 후지미야구라, 등을 때로는 자세히 때로는 대충대충 보며 지났다. 거대한 암석을 다듬어 정교하게 쌓아올린 성벽을 보면서 지나니 출구가 보이고 그 옆에 옛날 왕실 수비병들의 숙소였던 건물도 있다. 외부 침입자를 철저히 차단하기 위하여 복잡한 구조로 만든 3개의 출입문을 통과하니 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성 밖에는 국내외의 관광객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소풍간 학생들처럼 담임인 젊은 여성이 마이크 호르라기 등을 가지고 앞에서 뭐라고 말하면서 가고, 늙은이 젊은이 들이 줄지어 따라가는 모습을 모니 우스웠다. 내전이나 외침을 겪지 않은 곳이니 성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농짝보다 큰 바위들로 축조된 성은 지금도 거의 원형을 보존한 채로 있었다. 성을 둘러싼 해자는 좁은 곳은 30m, 넓은 곳은 50m 이상 되어 보였고 부속 건축물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는 일왕이 거주하는 집인 고꾜(皇居)를 오른편에 두고 걸어서 반바퀴 쯤 돈 모양이다. 자잘한 자갈이 깔린 대로를 10여분 걸어가니 두 개의 아취형 다리를 이은 다리가 나오는데 이것이 사진에 많이 나오는 메가네바시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경(메가네)교인 셈이다. 두 개의 다리가 마치 안경처럼 보인다. 고꾜에 왔다는 증명사진을 찍는 포인트로 많이 애용되는 곳이라고 한다. 이봉창 열사가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지던 곳이 이 근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잠시 가슴이 벅차올랐다.(인터넷을 검색해 본봐 일왕이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하고 돌아가다 앵전문 앞에 도착했을 때 포탄을 투척했다 함). 우리는 사진사들이 단체 촬영을 위하여 마련해둔 화분대 모양의 앉을 자리에서 이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이 화분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잠시 쉬면서, 힙색 속에서 간식거리를 꺼내 먹기도 하고, 다리도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뒤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들자 사진사들에 의해 쫓겨나듯 나왔다. 다시 잘 다듬어진 또 하나의 공원을 거치면서 기마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남기고선 긴자거리를 찾아갔다.
(라) 조용하고 질서 있는 긴좌
이곳에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일본을 움직이는 중요 관청들이 있다고 하나 우리의 관심에는 없다. 긴자에선 도꾜 국제포럼과 유까꾸전망대온, 쌀 백화점을 구경할 예정이었다.
도꾜 국제포럼은 미국인이 설계한 거대한 건물이었는데 높이 60m의 웅장한 유리홀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뻥뚫린 건물 한 가운데를 지그재그로 연결한 구름다리를 걸으며 유리벽을 지탱하는 은색의 철구조물을 보고 한편으로는 건축술에 놀라고 한편으로는 이 구름다리가 무너져 새까맣게 보이는 지상으로 떨어지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느꼈다. 우리는 회의실을 둘러보기를 희망하고 직원에게 문의했으나 입실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대신 거기서 한글로 된 도꾜의 지도와 관광안내 책자 한권을 입수할 수 있었다. 도꾜 시내에서 입수한 관광자료 중에서 한글로 된 것으로는 유일하여 모두 기뻐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수백m 거리에 있는 쌀백화점을 찾아 많은 다리품을 팔아 겨우 찾고 보니 하필 쉬는 날이라 아쉬웠다.
(마) 소니쇼룸에서 새로운 최신형 컴퓨터를 만지다.
그리고 이곳에는 일본의 유명기업이 자사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스폰서를 하는 쇼룸이 만다고 하는데 우리는 세계적 전자회사인 소니쇼룸에 들어섰다. 시간이 부족하여 4층 정도만 구경하였는데 기대에 못 미치는 듯하였다. 우선 4층인가에 전시되어 있는 LCD모니터를 보고 몇 인치냐고 물으니 42인치라고 한다. 42인치면 105cm 정도, 우리의 금성이 얼마 전에 100인치짜리를 만들었다고 발표한 것이 기억나 별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은근히 자부심이 느껴졌다. 3층에 내려오니 컴퓨터가 하나 놓여 있는데 이런 곳에서 집이나 친지들에게 메일이라도 보내면서 이곳에 있다는 자랑을 늘여놓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는 생각에 앞에 앉아 조작하려 하니 마우스가 없었다. 관리하던 아가씨가 손가락으로 모니터 화면을 짚으니 마우스 포인터가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이 마우스의 역할을 대신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도 그대로 시도를 해 보니 손가락은 마우스만큼 정교하지 못했다. 그리고 클릭은 좀 세게 누르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좀 힘줘 눌러도 효과가 없어 시도만 여러 가지로 하고 있으니 아가씨가 와서 한 키를 누르라고 가르쳐 준다. 따라 해보아도 더블 클릭이 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메일 보낼 가망도 없어 보이고 동료들이 밑으로 내려간 뒤라 포기하고 그냥 내려왔다. 좀 더 알아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긴자거리는 다른 거리와는 달리 거대한 고층 빌딩들의 거리이면서도 깨끗하고 조용하고 차들이 없는 거리였다. 왕복 2차선의 도로에 차선은 그어져 있었으나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뿐 몇 십 분을 있어도 통행하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바) 도꾜 타워 겉만 보고 돌아서다.
‘대장’은 마치 숨겨놓은 땅이나 애인을 먼발치라도 보고 싶은 듯이 도꾜타워를 보고 그 속에 올라가서 도꾜 시내를 꼭 구경하고 싶어 했다. 도꾜의 5월도 상당히 무더웠다. 한참을 걸어다니다 보니 물병도 점점 가벼워진다. 구경중 시장할 것에 대비하여 힙색에 넣어 가지도 다니던 간식거리를 조금씩 나누어 먹으며 다녀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이사람 저사람 붙잡고 가는 빠르고 싸고 쉬운 차편 묻고 제일 가까운 역 묻고, 그러고도 열기가 넘치는 아스팔트위를 걷고 또 걸어서 드디어 찾았다. 우리는 매표소 입구에서 기다리게 하고 대장이 안으로 달려갔다 오더니 “야! 줄이 200m는 되겠더라. 공휴일리라고 왜놈들 놀러 다 나왔는갑다. 타는데 2시간은 너머 걸리겠더라. 그냥 가자”. 시간이 금인데 뙤약볕 속에서 귀중하고 소중한 황금을 낭비할 순 없지.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데 한 장 남기려 좋은 촬영장소를 찾아보아도 이놈의 탑이 워낙 높아 웬만한 곳에서는 다 렌즈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몇 군데서 찍었는데 가장 잘 찍은 것이 이 사진이다. 간단한 점심으로 허기를 때운 우리는 오다리바를 향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