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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올림픽'과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보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없는 사회의 실현은 언제쯤...) 신문방송학과 3학년 4557030 강선경 세상은 지배와 피지배로 인해 생겨나는 소상이라 보인다. 그리고 지배와 피지배에 있어서 진정한 피해자와 가해자는 항상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 피해자와 가해자를 누구라고 명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가해자가 큰 국가적 힘을 가졌다면 그 해결은 더욱 미흡하다. 수업시간에 우연하게 보았던 상계동 올림픽은 88올림픽 개최로 인해 상계동 주민들이 86년부터 강제 철거되는 위협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사람들은 의식주를 통한 기분 조건들이 있어야 비로소 산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상계동 주민들은 국가로부터 살 집을 박탈당했다. 아무 잘못 없이 그냥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사회는 그들을 위한 정책 하나 마련하지 않았고 그저 철거만을 최상책으로 내세웠다. 여기서 한 가지 중점으로 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진정한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관점이다. 강제 철거를 당한 사람들은 진정한 피해자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적 명령을 받고 강제 철거를 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가해자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역시 무허가 건물에 살다 강제철거를 당한 인물이다. 박흥숙은 본질적으로 강제철거라는 국가적 명령을 받은 처지는 상계동 주민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억울함의 표출에 있어서 상계동 주민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상계동 올림픽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상계동 철거에 분노한 어떤 아주머니와 그의 아들이 철거인들에게 강제 폭행을 당하는 모습이 있었다. 아들은 철거인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해 옷이 다 찢겨진 채 자신의 엄마를 껴안고 ‘억울하다’라는 말만 할 수 있을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무등산 타잔 박흥숙은 이와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과 더불어 자신보다 더 심한 처지에 처한 오갈 데 없는 노인들과 환자들을 위해, 무등산 계곡으로 올라가는 철거인에게 총을 겨누고 쇠망치까지 휘둘러 살해까지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철거의 억울함의 표출에서만 다른 형태를 띨 뿐 강제철거를 당하는 상계동 주민이나 박흥숙 모두 마음에서의 억울함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큰 아픔인 것은 분명하다. 국가는 그저 박흥숙의 살인만을 주장했고, 결국 그는 사형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언론에 보도된 철거반원들은 박흥숙의 피해자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무등산 계곡 사람들의 집을 강제철거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박흥숙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가? 철거반원들은 박흥숙의 피해자가 되기 이전에 국가의 진정한 피해자였다. 박흥숙과 함께 말이다. 우리는 빈민촌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저 불쌍하고 처량한 하나의 사건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빈민촌 사람들은 우리 국민들의 약자들을 대변하며 그들을 위해 사회는 앞장서야 한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했다. “도시가 번창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옛날 빈민층의 수에서 조금의 감소는 없다. 빈민층의 수는 변함없다.” 왜냐하면 강제철거의 이유는 다름 아닌 미관상으로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 상상할 수 없는 빈민층의 사람들이 오늘도 힘겹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서 우리나라의 외형적인 모습만을 강조하고 국가만이 승을 거두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요즘에도 빈민촌은 많으며 재개발사업으로 인해서 강제추방 되는 사람들 역시 많을 것으로 보인다. 나도 몇 해 전 살던 아파트가 재개발 승인이 떨어져 주변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 했던 상황이 있었다. 그때 당시 재개발 승인으로 인해 주변의 땅값은 부지기수로 올랐으면 주민들은 큰 반발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나마 가지고 산다는 중산층들도 이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철거 소식에 당황스러운 것은 숨길 수 없는데 더군다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런 빈민가에 살고 있는 우리 약자들에게 아무런 대책 없이 집을 불태우고 철거해 버리는 것은 국가의 파렴치한 행위라 보인다. 우리나라는 현재 빈민층을 약자로서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빈민층은 다만 저임금 유지를 위한 하나의 노동력 수단으로 밖에 안 되는 처절한 상황이다. 박흥숙의 일기에는 ‘강자 앞에 약해지고 약자 앞에서 강해지는 것이 이 사회다’라는 안타까운 메시지가 적혀있다. 그 당시 사회는 유신체제와 국가적 목적에 의해 대부분의 고위간부들은 그저 국가 체제에 따라가고 있었고 그로 인해 피해 받은 것은 약자로서 힘조차 발휘할 수 없었던 우리 시민들이었다. 또한 그런 체제로 인해 언론 역시 심한 왜곡으로 고위간부들의 안위를 위해 불쌍한 시민들을 매장시켜버렸다. 모든 국가는 지배와 피지배로 인해 지배된다 해도 그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아야 올바른 사회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본 우리 현실의 일부인 상계동과 박흥숙 사건에 대해서는 국가의 여전한 권력행세가 한심하다. 우리나라는 100억불의 수출성장을 거듭했고, 큰 나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약자들을 위한 새로운 정부 방편이 필요할 것이라 보인다. 강제철거의 피해자도, 국가의 명령으로 철거를 해야만 했던 제 2의 피해자도 없는 그런 사회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꿈꿔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