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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 목사의 간증
-나라 위한 중보기도 운동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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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미국에 온 이유
제가 미국에 온지 40년이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남달리 컸음을 느낍니다.
이 시간까지도 호흡 연장시켜주면서 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리며
저의 작은 믿음의 여정을 통해 모든 분들과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너희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뻐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 2: 13
For it is God to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acoding to his good purpose
저는 지난 1980년 10월 8일에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 왔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인도하심을 받으며 뉴욕(NYU) 치과대학을
졸업을 했습니다. 1990년 35세에 치과를 개업하면서 절박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강권적으로 한국에 데려 가려고 오셨습니다.
저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꿈을 달성하기 전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는 수없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15년만 미국에서 치과의사로서 꿈을 펼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면, 50세부터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전파를 통한 영혼구원에
남은 인생을 모두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했습니다.
믿음의 선진인 어머님으로부터 서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너무나 절박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강권받고 꿈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을 택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저의 손을 들어 주셨고, 부모님은 저의 뜻을 굽히지
못하시고 한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기독교적이고
신사적이셨습니다. 결정을 위하여 셋이서 일주일간 갈보리 산기도 후에
다수결로 정하기로 아버지께서 제안하셨습니다.
1:2로 아버지께서 패하셨고, 저는 미국에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후 부모님은 즉시 한국으로 들어 가셨고 제가 개업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그 해 9월 1일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뉴저지 Fort Lee에
‘정명희 임플란트 성형치과’를 개업했습니다.
그리고 치과의사로 명성을 날리며 NYU 치대 교수로써
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15년 동안 명예와 부를 누리며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던 저는
2005년 8월 31일 세인트 바나나병원(St. Banana Hospital)에서
신장 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날은 1990년 9월 1일에 치과 개업을 하며 하나님께 서원한지
하루도 틀리지 않는, 꼭 15년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동안 내내 하나님께 한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15년후의 생활계획도
짜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많은 기획을 해 보았지만 뾰족하게
이렇다할 만한 계획을 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치과를 접고 무조건 선교지로 떠나야 하나 아니면 치과를
계속하면서 슬슬 조금씩 남편 목사님을 도우면서 하는척 흉내만 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15년 약속한 날
하루도 틀리지 않는, 정확하게 15년째 되는 날, 저를 수술대에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지키시는 약속을 원하시는것 같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가 서원한 2005년을 기억하면서 2004년부터는
치과외에 모든 재산을 팔며 준비했습니다. 2005년 3월에 모든 재산을
정리해 보니 2 밀리온 달러 정도 캐쉬를 모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아파트 한채와 상가 빌딩한채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15년 동안에 많은 돈을 벌어야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돈으로 남은 여생을 주의 일과 저의 Retire 자금이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배로 일했습니다.
돈 4500불 들고 미국에 온 제가 25년후인 2005년에 치과대학 및
임플란트전문의 및 교수까지 만들어 주시고, 현금 2밀리언 달러 이상을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단지 나의 서원 한마디만 믿고 도와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신장수술은 잘 되었지만 방광의 이음선이 매끄럽지가 않아서
요도가 좁아지는 현상으로 매 3개월 마다 전신 마취를 통한
스텐트를 갈아야 했습니다. 전신마취후에 비몽사몽으로 일상 생활이
좀 힘들어 졌고 마취가 깰만한 3개월 후에는 다시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일이 4년동안(2009년 12월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2006년에 치과를 처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를 무척 많이 사랑하시어"
긍휼을 베풀어 주심을 느꼈습니다.
그동안에, 2003년에는 제대로 효도도 못한채 하나님과 같은
아버지를 떠나 보냈습니다. 2005년에는 하나밖에 없는 조카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7년에는 예수님 만크음이나 사랑했던 남편도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외에 모든 가족을 잃었습니다.
어머님은 아직 저를 위하여 해야할 기도가 많이 남으셔서 못 떠나신것 같습니다.
2008년에는 남편이 운영했던 160 UNITS의 큰 Hotel도 은행관리로
넘어가 금전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매 2년마다 장례식를 치루고, 매년마다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큰 어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어느 덧 9년이 지난 2014년 1월 6일 콜럼비아대학병원에서
관상동맥우회술(CABG)이란 심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 수술은 성공확률이 40%로 당시로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험한 수술이었습니다.
다행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이후 복강경 담낭제거수술
(cholecystectomy), 경동맥 내막 절제수술(Carotid endarterectomy) 등
크고 작은 수술을 받으면서 정신과 육체 모두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9년동안 파탄과 절망이 연속적으로 덮칠 때마다
"이또한 지나가리라"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오직할 수 있는 것은 내일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희망을
나의 가슴에 꼭 끌어 안고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감사했습니다.
감사한 척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피하고 싶어하는 마음먹었던 것에 대하여
용서해 달라고 회개했습니다.
몸이 많이 좋아지면 하나님께 더 충성하리라 다짐했습니다.
2. 어떻게 하나님께 충성을 할 것인가.
1. 서원한 후 치과를 개업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며 생활했습니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습니다. 계획을 세워서 두 달에 한번 정도
정기적으로 여행을 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매일 매일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했습니다. 그런 생활이 약 9년쯤 된 것 같습니다.
2014년 6월7일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40년만에 고교 동창 조갑진 교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단번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임을 알았습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지만 2010년부터 나름 하나님 일을 했습니다.
뉴멕시코 마약전쟁 후의 난민 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과 교회 짓는 것을 후원했고, 구제사업을 도왔습니다.
또 한국과 중국 등지의 무의촌에서 치과의료 봉사를 통해 의료선교에도 앞장섰습니다.
의료선교는 다른 선교 기관들과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개인적으로
찾아 다녔습니다. 가끔 권사님이신 어머니와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혼자 다니며 도우미 동역자들은 현지에서 구했습니다.
도우미 친구들은 내가 필요로 할때 항상 그곳에서 찾을 수 있도록 천사들이 도와줬습니다.
매번 다른 친구들이지만 차를 제공해 주었고, 운전을 해 주었습니다.
또 200명분의 햄버거와 핫도그만드는 일을 도와 주었고,
항생제-소화제 -소염제 등의 의약품과 구호물품(쌀,기름, 설탕, 밀가루, 콩 등)을
사는 일 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어떻게 했을까 스스로 대견하기까지 합니다.
당시엔 몸이 정상이지 않았습니다. 고작 100 걸음 정도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천군-천사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셨음을 느낍니다.
2013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고, 남은 인생 하나님을 위해 살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같은 달 31일 한국에서 중국으로 선교를 가는데 도둑들이
미국의 집에 들어와 트럭으로 명품 가방과 옷 등 모든 귀중품과
전자 제품까지 털어갔다는 연락을 동생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흥분한 동생의 연락에도 불구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겼습니다.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한편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졌다는
홀가분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도둑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결혼 다이아반지와 진주목걸이, 그리고 롤렉스시계 등은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남겨 두신 선물같았습니다.
같은 해 11월 목사 안수받은지 한달만에 나는 또 갑자기
심장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뉴멕시코(미국)에서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고 뉴욕으로 왔습니다. 죽더라도 엄마곁에서 죽어야 하지 않을까요?
콜럼비아 대학병원에서는 수술을 시도해 보겠다고 하면서
성공률은 40%라고 했습니다. 내가 실험대상인 것입니다.
남편도 실험대상으로 수술대에 올라갔다가 더빨리 돌아가신 겁니다.
남편이 수술 후에 더 빨리 돌아가셨기에 저도 수술 안하고
그냥 숨 쉴수 있을때 까지만 살다가 죽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해야할 사명이 남았는데....
‘WHAT CAN I DO’.
시련이 올 때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 ‘즐겁게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피하려 하면 오히려 넘어지고 더 크게 휘말리게 됩니다.
마치 파도타기를 즐기는 서퍼처럼 파도의 심장을 쪼개먼서 시련을 즐겁게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시려고 목사 안수까지 받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내밀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계속 하나님과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대화를 했습니다. 남편이 말했던 “당신 몸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사도바울처럼 함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부족한 부분”이란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내 주위의 모든 형제-자매-친구들이 다시는 살아서 볼 수 없을 지
모른다며 1주간 금식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또 국세지의 식구들, 목사님들, 속초 동생과 교회식구들,
서울의 언니와 남동생 사촌 등 모든 사람들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연로한 어머니는 일주일 동안 집도 안가시고 병원 소파에서 주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며 마음이
편해짐을 느겼습니다. 이듬해인 2014년 1월 6일 심장수술을
잘 마치고 당연히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되었고
3개월 동안 침대에 거의 누워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3. 순종하는 삶으로의 과정 1
남녀공학 중경고교 다닐 때에 특별활동반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기독교 반과 미술반에서 활동했습니다. 미국나이로 치면
16살. 나는 중경 2회인데 우리기에서는 기독교 반에 남학생이 6명,
여학생이 4명, 그리고 후배까지 포함 전체가 15명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 같은 동기 남학생 회장이 조갑진이었는데 특별활동 시간이
끝나면 과외공부하러 가기도 바쁜 우리들을 붙잡고
"우리 5분만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붙들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활동반 시간이 끝나면 의례 15~20분을 나라를 위한
통성기도를 하고는 퇴교했었습니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16세.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갈것인가" 등을 토론하는데에
열정을 쏟을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제겐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이같은 주제는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토론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동기들은
나를 그저 조용하고, 말이 없는 친구로만 기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도 3명에 불과했습니다.
과외공부 야외활동 등. 그러기에 나를 기억하는 동창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술후 5월 달 쯤 누워서 지내면서 계속 나의 사명에 대하여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걸려온 전화에서
“정명희 목사님 맞으시죠”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전화선을 통해 들려온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서울 신학대 조갑진교수로 고교시절 기도모임을
인도했던 친구였던 것입니다. 전화선을 통해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중경 2회 기독교반에 있었던 정명희”라고 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갑진 교수는 LA부터 자동차로
동부쪽으로 향하여 횡단하며 기도의 동역자들을 만나면서
전화로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갑진교수에게 “심장 수술후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하고,
10일 후에는 퇴원할 것이니 뉴저지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10일 후에 나를 찾아온 조갑진 교수, 우리의 나이 60세,
그동안의 살아온 그의 스토리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과 대학 총장 등을 다 거절한
그의 인품. 교수로서 신학생 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그의 순수한 신앙과, 나라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과 충성됨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신학박사 학위 받은 후 한국에 돌아와서 잘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미국을 순회하면서 목사님 들에게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아직도 구걸하고 다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으로는 “기도하라고 선포하자, 구걸하지 말고"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가 떠난후 나도 모르게 소리없는 눈물이
한없이 나왔습니다. 이 후에도 몇달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려움없이 세상에 살 동안 조교수는 근검절약하면서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바쳤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꽤 인내로써 기다려 주셨구나,
하나님께서는 엄마와 아버지, 남편 제임스 목사님, 오빠 그리고
이친구를 통해 끊임없이 나에게 말씀하셨구나”.
“미안해요 하나님...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하나님. 하나님의 일하고 싶은데
다 내려 놓기는 싫거든요. 다 내려놓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러나 그런것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선 먼저 해야할 일이 급했습니다.
먼저 기도운동을 하기 위한 기획을 했습니다.
이거 저것 생각하면서 무슨일을 도모하겠습니까. 일단 닥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 9월 30일 기도의 용사를 모으기 위하여 200명에게 카톡서신을
띄웠습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운동하자고, 80명이 동참해주었습니다.
저는 40명도 안될 줄 알았습니다. 많아야 20명 정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80명의 기도용사와 40명씩 금식릴레이 기도 카톡채팅방을
두방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0월 10일부터 카톡 채팅방
기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16시간을 1년6개월 동안
집중 기도제목과 묵상을 올렸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 아픈 줄도 모르고
일에 매달렸습니다. 눈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4. 순종하는 삶으로의 과정(마지막 편)
하염없이, 소리없이 흐르는 이 눈물은 무엇인가.
감사-회개-긍휼-감격의 눈물.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눈물은
막혔던 숨통을 뚫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천사들이 함께 나의 애통하는
심정을 쟁반에 담아 하나님께 전달해주며 수종 드는 것 같은 느낌 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더해 세계가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금 유럽에서는 초대교회 때에 일어났던 기독교인에 대한
학대가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학살을 일삼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철창에 가두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마치 짐승을 구경하듯이 즐기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2014년에..
이 일을 교황도 묵인하고 있었고, 당시 미국 오바마대통령도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방관자이거나 동조자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넘 이상한 일이고 뒷배경이
누구인가를 짐작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같은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뒤에서
서포팅하는 음모의 세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되고, 세계는 곧 파탄에
이를 것이라는 그림이 보여졌습니다. 속이 매우 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저절로 무릎이 꿇어졌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도문이 쓰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16시간씩 매일 집중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우리가 다같이 해야할 기도문을 썼습니다.
남편이 살아 계실때 항상하는 하는 말 중에 두가지가 생각납니다.
첫번째가 “치과 환자보는 것외에 아는게 뭐가 있느냐는 것이고
둘째가 생각의 한계를 넘어 무한한 생각의 가능성
(Unlimited boundary Thinking)을 가진 정명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학창시절 국어 점수가 제일 낮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문을 쓰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기도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에게 넘 놀랐습니다. 매일 매일 다른 내용의 기도문이 써졌습니다.
천사들이 내 주위에서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 하나님'.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천사들이 수종을 들어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기도문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2014년 9월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인도하시는데로 인사말과 함께
치과상담 청취자 200여명에게 카톡으로 처음 서신을 보냈습니다.
처음엔 치과에 관계되는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기도문 40개를 작성했습니다.
이 가운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금식기도문을 올렸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확신했습니다. 정말로 기뻐하심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운동이 지금 빨리 일어나야 한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40일 동안 릴레이로 하루씩 금식하며 기도하려면 40명이 필요했습니다.
40명을 모집하려고 했는데 160명이 첫 번에 모아졌습니다.
1년이 지날 때쯤인 2015년 말에는 40명씩의 금식기도 모임이
20개나 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동으로 실행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격적으로 용기내어 서슴없이 기도용사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뤄 주셨습니다.
단지 말만하면 이런 일들이 이뤄졌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금식기도에 동참해 주시겠습니까”라고
전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일 하셨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할 시대적인 사명자, 숨겨진 20만명의
기도 용사를 찾기 시작해 2014년 10월 10일에
첫번째 40-40 금식릴레이 카톡 채팅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흑탕물이 되어버린 옹달샘에 바위사이로
한방울씩 떨어지는 맑은 생수가, 어느새 더러워진 옹달샘이
마실 수 있는 맑은 옹달샘으로 변화되듯이 사탄들에 의하여
더러워진 세상은 한 방울의 생수같은 우리의 기도로 변화될 것입니다.
계속 생수 한방울을 떨어뜨려 주기만 하면 세상은 새로와 질 것입니다.
지금 세계로 뻗어 있는 악의 기류를 우리의 생수와 같은
기도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다 같이 힘을 합하여 마음을 합하여 기도의 생수를 흘러내립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생수와 같은 기도
한 방울을 바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기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우리 작은 20만의 기도용사의 기도 한 방울이
반드시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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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방 글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