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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르기를,
“언덕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니 시야가 상쾌하다. 태산(泰山)에 올라가 천하를 작게 여기고 동산(東山)에 올라가 노(魯)나라를 작게 여겼다고 하신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뜻이 있다. 또 왕도(王都)는 팔방의 중앙으로 산천의 기운이 충만하게 서려 있으니, 이곳에 이르러 빼어난 것은 더욱 빼어나게 되고 화려한 것은 더욱 화려하게 되었다. 큰 수레가 지날 수 있는 길을 닦고, 궁궐의 왼쪽에 종묘(宗廟)를 두고 오른쪽에 사직(社稷)을 두었으니, 이는 창업하신 우리 태조(太祖)의 큰 계획이다. 100년 동안 민력을 길러서 왕궁 앞에 조정을 두고 뒤에 시장을 두는 규모를 이루었으니, 이는 수성(守成)하신 우리 열조의 큰 계책이다. 교목이 무성해지고 민가가 번성해졌으니,
승지 이형규(李亨逵)에게 이르기를,
“인정전(仁政殿)은 언제 창건되었는가?”
하니, 이형규가 아뢰기를,
“혹 전조(前朝)에서 세운 것이라고 전합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이것은 인조조(仁祖朝)에 중건한 것이다. 궁전 이외에 들보가 높은 건물로 어느 것이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하니, 이형규가 아뢰기를,
“흥인지문(興仁之門)만이 비교될 수 있을 듯합니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 栴檀偏宜鼻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安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名士)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동궁이 동정귤을 근신(近臣)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하였으니, 이는 택지(擇之) 용재의 시이고,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 高才時不遇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하였으니, 이는 호숙(浩叔) 이원(李沅)의 시이고,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 少作吾輕了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하였으니, 이는 명중(明仲) 이우(李堣)의 시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 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 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 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 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 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저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滕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견한잡록(遣閑雜錄) 심수경(沈守慶) 찬(撰)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송계만록 상(松溪漫錄 上) 권응인(權應仁) 찬
○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강산 풍물(江山風物)이 서로 으뜸을 겨루는데, 영남루는,
가을 깊어 큰길엔 붉은 단풍 비쳐 있고 / 秋深官道映紅樹
날 저문 어촌에는 흰 연기 난다 / 日暮漁村生白煙
한 낚시 어부는 빗소리 밖이요 / 一竿漁父雨聲外
십리길 나그네는 산 그림자 가이로세 / 十里行人山影邊
라고 한 등의 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촉석루는 전할 만한 가작이란 하나도 없다. 한 사람의 시작으로 영남에는 뛰어난 시가 있고, 촉석루에는 옹졸한 것은 촉석루의 기승(奇勝)이 영남루보다 나아서 잘 형용을 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 고서(古書)에,
“고(羔)라는 것은 양(羊)의 새끼다.”
하였다. 양의 또 다른 이름은 ‘염수주부(髥鬚主簿)’라 하니, 그렇다면 ‘고’와 ‘양’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이른바 ‘고’는, 양과 몸뚱이가 다르며 약간 작은 것이요, 또한 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라 하고 있다. 속명(俗名)으로 ‘염소’라는 것은 고와 양을 다른 것으로 분별하기 위한 말이다. 이렇게 써온 지 이미 오래니, 누가 분별할 수 있겠는가?
○ 세상 사람들이, ‘처의 형제를 ‘남(娚)’이라 하고, 돌 사닥다리[石梯]를 ‘천(遷)’이라 하고, 논을 ‘답(沓)’이라 한다. 이런 글자는 동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 고서(古書)에는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세상에 문장을 짓는 사람들이 가끔 문장에 쓰고 있으니, 잘못이다. 옛날 사람이 연풍(延豐)의 땅이 좁은 것을 조롱한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소가 누우니 논을 찾기 어렵고 / 牛臥難尋沓
기러기 날아오르니 하늘이 보이지 않더라 / 鴻飛不見天
하였다. 말과 뜻이 모두 새로운 것이나 ‘답(沓)’ 자에 흠이 있어 《시선(詩選)》에 들지 않았다 한다.
○ 장기ㆍ바둑 등의 놀이는 성현(聖賢)이 경계한 것이요, 바른 선비들이 할 짓이 아니다. 천사(天使) 성헌(成憲)은 장기ㆍ바둑을 좋아하였고, 윗옷을 벗고 활을 쏘아 박잡(駁雜)하다는 비평을 면하지 못하였고, 황홍헌(黃洪憲)ㆍ왕경민(王敬民) 두 사신도 바둑ㆍ장기를 두지 않는 날이 거의 없으니 비록 집안에서라도 오히려 불가한 일인데, 하물며 외국임에랴? 공 천사(龔天使 이름은 공용경(龔用卿))는 천성이 호방(豪放)하였으나 오히려 이런 놀이를 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신의 체면을 잃지 않은 것이다. 황홍헌ㆍ왕경민 두 공은 또 두목(頭目)을 시켜 노래부르게 하고, 스스로 자기가 신나는 것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스스로 노래하기도 하니, 비록 솔직한 듯하기는 하나 결코 단정한 사람은 아니다. 지난해에 우리 나라에도 어떤 조정 관원이 영남(嶺南)에 사신으로 나가, 스스로 처용(處容) 가면을 쓰고 돌며 춤을 추었다. 또 분사 대관(分司臺官)이 이르는 곳마다 노래하며 기생들과 예능을 겨루는 사람이 있으니, 이들은 황홍헌ㆍ왕경민 두 사람보다 더 심한 것이요, 거의 축흠명(祝欽明)과 같은 부류인 것이다.
○ 가정(嘉靖) 을축년에, 백어(白魚) 두 마리가 바다에서 한강을 거슬러올라와, 한 마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한 마리는 두모포(豆毛浦)에서 죽었다. 그 모양은 머리가 말같고 꼬리는 키[箕]같으며, 귀 뒤에 구멍이 둘이 있는데 길이는 몇 길 남짓 되고, 전체에 비늘 하나 없었다. 서울 남녀들이 모여 구경하는 사람들이 날로 수천 명은 되었으나 그것이 무슨 고기인지 알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신사ㆍ임오년(1581~1582, 선조 14~15) 무렵에 황충(黃虫)이 산골에 가득 차서 나뭇잎을 갉아먹었다. 그것이 날이 추우면 나무 밑에 움츠렸다가, 따뜻해지면 흩어져 밭이랑에 들어가 곡식을 해친 것이 몹시 심하였다. 인력(人力)으로는 다 잡을 수 없었고, 가까이하면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다가 늦누에가 고치를 지을 때 일시에 모두 죽고, 2년 후에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갑신년 봄에 북쪽 오랑캐가 날뛰었으니, 이 벌레가 징조가 아니었나 한다.
만리장성을 애도하는 부〔弔長城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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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며 / 遵華表而西邁兮
만리장성을 바라보고 애도하노라 / 望長城而弔之
성가퀴는 만리에 이어 뻗어있건만 / 睥睨聯亘於萬里兮
저 오랑캐들을 방어하진 못했도다 / 曾不禦夫四夷
어찌하여 진 시황은 망령이 나서 / 何秦皇之狂妄兮
몽염을 시켜 군대를 혹사시켰던가 / 命蒙恬而暴師
임조에서부터 줄지어 선 담이 / 自臨洮而列雉兮
대막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이어졌도다 / 橫大幕以委蛇
높은 곳은 깎고 깊은 곳은 메꾸면서 / 塹其高而湮其深兮
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하였다 / 因地形之嶮巇
정장을 세워 기련산으로 통하게 했고 / 亭障通於祁連兮
한해를 둘러 성지(城池)를 만들었도다 / 環瀚海而爲池
북가에서 운양까지 / 據北假而達于雲陽兮
구복의 울타리가 장엄도 하다만 / 壯九服之藩籬
삼십 만 백성들을 고생시키고 / 勞赤子之三十萬兮
지맥을 끊어버려 귀신이 탄식했다 / 絶地脉而鬼神咨
나는 새도 외려 넘지 못하는데 / 雖蜚鳥猶不能踰兮
어찌 훈육씨가 감히 엿볼 것인가만 / 豈葷粥氏之所敢窺
슬프다 중국이 그 도를 잃어 / 哀中國之失其道兮
오랑캐 기병들이 매년 변방을 침범했다 / 虜騎連年而犯陲
한 태조가 백등에서 곤란했을 때 / 漢太祖困於白登兮
칠 일 동안 포위되어 장사들이 굶주렸으니 / 圍七日而壯士飢
만약 한 모퉁이가 풀리지 않았다면 / 苟一角之不解兮
어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랴 / 惡能脫於憂危
진나라의 두 임금이 포로가 되어서는 / 晉二帝之被俘兮
신주를 회복할 기약도 없이 / 神州克復不可期
신정에서 날 저물도록 술에 취해 / 新亭暮而酒酣兮
초나라 죄수처럼 함께 슬퍼만 하였으니 / 惟楚囚之共悲
산과 계곡이 험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 匪山谿之不險兮
층층 높은 성곽도 아무 도움 못 되었다 / 層郭嵯峨無所禆
당 현종이 민산으로 피난갔을 땐 / 唐玄宗之狩岷山兮
이미 승냥이와 범이 갈랫길에 가득찼다 / 已豺虎之滿岐
오랑캐 말이 곤명지에서 물을 마시니 / 戎馬飮於昆明兮
부로들이 그 때문에 눈물 흘렸다 / 父老爲之涕洟
송나라 휘종은 우매하고 덕이 없어 / 宋徽宗之昏德兮
흠종과 함께 오랑캐의 포로 되었으니 / 與靖康而囚覊
임금님 수레는 돌아오지 못한 채 / 仙駕兮不返
오국성은 아득히 저 하늘 끝에 있었도다 / 五國杳兮天一涯
원나라 사람이 천하를 차지하게 되자 / 迨元人之有天下兮
단위의 위의를 다시는 보지 못했고 / 不復見端委之儀
쇠잔한 성가퀴만 부질없이 요하 동서에 서 있어 / 殘堞徒立於遼西東兮
재령과 함께 들쭉날쭉할 뿐이로다 / 並梓嶺而參差
정통제가 토목보에서 함락되었으나 / 當正統陷於土木兮
그때까지도 크신 덕성은 쇠퇴하지 않아 / 尙盛德之未衰
천둥 벼락 울려 오랑캐에게 경고했고 / 震雷警於穹廬兮
빛나는 용의 비늘이 장막에 비치었다 / 爛龍鱗之照帷
숭정제가 승하함에 미쳐서는 / 逮崇禎之棄羣臣兮
팔기가 관문을 들어옴에 걸림이 없었도다 / 八旗入關而不疑
진실로 하늘에는 명(命)이 있나니 / 信皇天之有命兮
성과 해자로 다스릴 수 있다곤 생각지 마라 / 勿謂隍陴之可治
비록 높은 성벽 우뚝 세웠다 해도 / 雖崇墉之仡仡兮
또한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였으니 / 亦不足以維持
저 진 시황이 무도하였기에 / 彼祖龍之無道兮
나라가 혼란에 빠져 편안할 수 없었다 / 海內土崩而莫能綏
토목공사 십 년에 / 版築兮十年
슬픈 노래가 길이 전해오나니 / 哀歌兮永詒
황폐한 문루에 올라 술잔을 들어 / 登荒譙而擧觴兮
이 성에 술 부으며 탄식하노라 아 / 酹爾城而嘻嘻
화표(華表) : 옛날에 임금에게 할 말을 적어 두거나 이정표(里程標) 구실을 하도록 길가에 세워 둔 나무이다.
몽염(蒙恬) : ?~기원전 209. 진(秦)나라의 장군으로, 몽무(蒙武)의 아들이다. 진나라가 제(齊)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웠고, 흉노 정벌 때도 활약이 컸으며, 만리장성의 축성을 맡아 했다. 북쪽 변경을 경비하는 총사령관으로서, 상군(上郡)에 주둔했다. 시황제(始皇帝)가 죽자,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의 흉계로 투옥되어 자살했다. 죽을 때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의 장성을 구축했으니, 어찌 지맥을 끊어 놓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나의 죄이다.” 하였다. 《史記 卷88 蒙恬列傳》
임조(臨洮) : 감숙성 민현(岷縣)에 있는 지명으로서 진시황 때 축성한 만리장성의 기점이 되는 곳이다.
대막(大幕) : 중국 서북부의 광대한 사막지대를 말하는데, 고비사막을 가리킨다.
정장(亭障) : 담을 두르고 세운 정자를 말하는데, 국경이나 요해처의 경비를 위해 세운 정자 모양의 초소(哨所)를 뜻하게 되었다. 정후(亭堠)라고도 한다.
[기련산(祁連山) : 흉노어로는 천산(天山)이라고 한다. 광의적으로는 감숙성 서부와 청해성 동북부 변경의 산지를 총칭한다. 협의적으로는 그 가장 북쪽의 산을 가리킨다.
한해(瀚海) : 고비사막을 가리킨다.
북가(北假) : 북쪽 지방인 하북(河北)의 양산(陽山) 북쪽에 있다.
운양(雲陽) : 운양성(雲陽城)은 옹주(雍州) 운양현(雲陽縣) 서쪽 80리에 위치하며, 진나라 수도인 함양의 북서쪽으로 이곳에 진시황이 지은 감천궁(甘泉宮)이 있다.
구복(九服) : 중국 주(周)나라 때 왕기(王畿)를 사방 천 리로 하고, 그 주위를 상하 좌우 각각 오백 리마다 일기(一畿)로 구획하여,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ㆍ만복(蠻服)ㆍ이복(夷服)ㆍ진복(鎭服)ㆍ번복(蕃服)으로 한 것을 말한다. 복(服)은 천자에게 복종한다는 뜻이다. 중국 고대에는 왕기의 밖을 오복(五服)으로 했는데, 주공(周公) 때에 이르러 구복(九服)으로 했다.
훈육씨(葷粥氏) : 흉노의 옛 이름이다. 《사기》 권110 〈흉노열전〉에 의하면 흉노의 선조는 하우씨(夏禹氏)의 후예로 순유(舜維)라 하며, 요순 시대 이전부터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葷粥)이라 불린다고 하였다. 만리장성은 북방 이민족들, 특히 흉노를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전국 시대 때부터 축성하기 시작했으며 진시황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한 태조가 …… 있었으랴 : 백등(白登)은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현(大同縣) 동쪽에 있는 산이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흉노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7일간 이 산에서 포위를 당해 있었는데, 흉노의 선우 묵특(冒頓)이 포위망 한 쪽을 터주어 탈출하였고, 이후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 되어서는 : 두 임금은 서진(西晉)을 건국한 무제(武帝)의 아들인 3대 황제 회제(懷帝, 284~313)와 회제의 조카인 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愍帝, 300~317)를 말한다. 회제는 흉노에게 포로가 된 후 치욕을 당하다 짐독에 의해 독살되었고, 민제도 흉노에게 포로가 되어 18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신주(神州) :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추연(騶衍)이 중국을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했는데, 이로 인하여 후세 사람들이 중국을 신주라고 했다.
신정(新亭) : 정자 이름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의 남쪽에 있다.
초나라 죄수〔楚囚〕 : 춘추 시대 초나라의 종의(鍾儀)가 진(晉)나라에 잡혀가서도 남방의 관(冠)을 쓰고 살았다. 진후(晉侯)가 군부(軍府)에서 얽매여 있는 사람을 보고 누구냐고 물으니, 정(鄭)나라에서 보낸 초나라의 죄수라고 대답했다. 이후 타향에 잡혀있는 사람, 곤란한 처지에 있는 경우를 초수(楚囚)라고 불렀다.
신정에서 …… 하였으니 : 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탄식하며 슬퍼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서진(西晉) 말년에 중원(中原)이 함락되자 강남(江南)으로 피난을 갔는데, 신정(新亭)에서 술자리를 베풀었을 때 신하들이 서로 마주 보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자, 승상(丞相) 왕도(王導)가 “함께 힘을 합하여 신주(神州)를 회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찌하여 초나라 죄수처럼 서로 마주 보며 눈물만 흘리는가.”라고 꾸짖었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당 현종이 …… 땐 : 민산(岷山)은 사천성(四川省) 북부에 있는 높고 험한 산으로 양자강의 근원이 된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 현종은 사천성으로 피난을 떠났다.
승냥이와 범〔豺虎〕 : 안록산 무리를 가리킨다.
곤명지(昆明池) : 옛날 장안(長安)에 있던 연못 이름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만들어 수전(水戰)을 익히던 곳인데, 송(宋)나라 이후에 없어졌다.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서쪽에 있었다. 곤지(昆池)라고도 한다.
오랑캐 …… 마시니 : 안록산의 난을 가리킨다.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이듬해 장안을 점령하였다. 또한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토번이 중국을 침입하여 763년 장안을 보름 동안 점령한 일이 있었다.
휘종(徽宗) : 1082~1135. 북송(北宋)의 제8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100~1125년이다. 신종(神宗)의 아들로서 시문과 서화에 뛰어났고, 특히 그림은 전문가의 경지에 달하여 풍류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1125년 금나라가 침입하자, 흠종(欽宗)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였으나, 재차 침공한 금나라 군사에 의해 국도 개봉(開封)이 함락되고, 흠종과 함께 금나라 군대에 잡힘으로써 북송이 멸망하였다. 북만주의 오국성(五國城)에서 병사하였다.
우매하고 덕이 없어〔昏德〕 : 금나라는 포로로 잡아간 흠종에게 정신이 혼미하다는 뜻으로 혼덕공(昏德公)을, 휘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라는 칭호를 붙이고 온갖 멸시와 학대를 가하였다.
흠종(欽宗) : 1100~1161. 중국 북송의 마지막 황제로 재위 기간은 1125~1127년이다. 이름은 조환(趙桓)이며 휘종의 장남이다. 아버지인 휘종(徽宗)이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퇴위했을 때 제위에 올랐다. 여진족은 송나라로부터 영토 할양과 배상금을 약속받고 돌아갔다. 그러나 송나라에서 강경론이 대두하여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2년 후 여진족은 다시 남하하여 수도인 개봉(開封)을 포위하고 흠종과 휘종을 포로로 잡아갔다. 흠종의 동생인 강왕(康王)이 남경(南京)으로 가서 즉위해 남송(1127~1279)을 세웠다. 흠종은 죽을 때까지 30년이 넘게 포로생활을 했다.
휘종은 …… 되었으니 : 북송(北宋) 정강(靖康) 원년(1126)에 금(金)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송나라의 수도인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이듬해(1127) 휘종과 흠종(欽宗) 두 황제와 황족들을 포로로 잡아 만주로 끌고가서 하황(河隍)에 가두었다가, 1130년에 흑룡강성 의난현의 오국성에 가두었다. 정강(靖康)은 북송(北宋)의 마지막 임금 흠종(欽宗)의 연호로서 연대는 1126~1127년이다.
오국성(五國城) : 북만주인 흑룡강성(黑龍江省) 의난현(依蘭縣)에 있다.
원나라 …… 되자 : 원(元)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成吉思汗, 1167~1227)의 손자이며 몽골제국의 제5대 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가 1271년 몽골제국의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유목 국가인 몽골제국의 직계 국가이다. 13세기 중엽부터 백 년 가량 중국을 지배하였다.
단위(端委) : 주(周)나라 때 조정에서 관리가 입던 현단복(玄端服)과 위모관(委貌冠)을 일컫는 말이다. 곧 관리의 관복(冠服)을 뜻한다.
재령(梓嶺) :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높은 산이다. 한(漢)나라의 위청(衛靑)이 재령을 넘어 오랑캐를 정벌하였다.
정통제(正統帝)가 …… 함락되었으나 : 토목의 변(土木之變) 또는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을 말한다. 토목은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보(堡)의 이름이다. 명나라 영종(英宗)의 정통(正統) 14년(1449)에 몽골 부족을 통일한 오이라트(瓦剌)의 귀족인 먀선(乜先)이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침입하자, 환관 왕진(王振)이 영종을 모시고 출정하였다가 토목보에서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영종은 중국 역사상 야전에서 포로로 잡힌 유일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본국에서는 그를 폐위시키고 경제(景帝)가 즉위하였다. 영종은 오랑캐 군영에 1년을 머물다가 돌아와서 남궁(南宮)에 8년 동안 있었으며, 경제가 병이 들자 다시 황제에 복위하였다. 《史略 卷9 英宗獻皇帝》
천둥 …… 비치었다 : 두 구절은 권이생(權以生)이 쓴 《사요취선(史要聚選)》에 의한 것으로 정사에 없는 설화적 내용이다. 즉 하늘이 영종을 위하여 천둥 벼락을 쳐서 오랑캐에게 경고를 내렸고, 하늘에서 빛을 내려주어 영종을 보호하는 등 천우신조를 입어 영종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숭정제(崇禎帝) : 1611~1644. 중국 명나라의 제16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628~1644년이다. 숭정(崇禎)은 연호이다. 이름은 주유검(朱由檢), 묘호는 의종(毅宗)이다. 천계제의 동생으로 후사가 없는 천계제의 뒤를 이어 명나라 제1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1644년(숭정17), 반란군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포위하여 북경이 함락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숭정제는 위급을 알리는 종을 울렸지만, 신하들은 모두 도망가고 환관 왕승은(王承恩)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3월 29일 숭정제는 아들들을 남방으로 탈출시키고, 황후를 목매어 죽게 하고 공주들을 손수 죽인 후,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경산(景山)으로 가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팔기(八旗) : 중국 청나라 때의 병제(兵制)로서 정치 군사 조직이다. 팔기(八旗)는 청나라를 건국한 태조(太祖)가 창업에 공로가 있는 만주족을 비롯하여 한인, 몽고인, 여진인 등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고자 태조 원년(1616)에 조직한 군대로, 총군(總軍)을 그 군기(軍旗)의 빛깔에 따라 여덟 부대로 나누어 편재했기 때문에 팔기라고 했다. 청조 초기에는 팔기제도를 통하여 생산과 행정을 관리하고 군대를 편성했지만, 중기 이후에는 군사에 국한하였다.
관문을 들어옴에 : 관은 산해관을 말한다. 산해관은 만리장성 동쪽 끝 최초의 관문이다. 이곳을 통과하여 중원으로 향하는 것을 입관(入關)이라 하며, 그 외부의 동북지역을 ‘관외’ 또는 ‘관동’이라고 한다. 명나라 말, 누르하치 홍타이지에 의한 만주족의 침입을 잘 방어한 수장 오삼계가 청에 항복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청에 투항하여 청나라 군대의 길잡이가 된 공으로 번왕에 봉해졌으나, 강희제가 번을 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망했다.
진 시황(秦始皇) : 원문의 ‘조룡(祖龍)’은 진 시황의 별호(別號)이다. 조(祖)는 시(始)고, 용(龍)은 제왕의 상징이다.
토목공사 …… 전해오나니 : 몽염이 진시황의 명을 받아 10년 동안 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극심한 고통을 노래한 민요가 수없이 생겨났다. 진(秦)나라 때의 〈장성가(長城歌)〉에, “아들을 낳거든 키우지를 말고, 딸을 낳거든 육포를 먹여라. 보지 못했나 저 장성 아래에, 해골들이 겹겹이 쌓인 것을.〔生男愼勿擧, 生女哺用脯. 不見長城下, 屍骸相支拄.〕”이라고 하였다. 《中國歷代長城詩錄》
산산강을 건너며 석양녘에 서쪽으로 칠점산을 바라보다〔涉䔉山江 夕陽西眺七點山〕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참시가 거문고를 타던 장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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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강에 모래섬도 없고 / 大江無洲渚
어스름이 혼돈을 품고 있구나 / 晦冥函混沌
일곱 봉우리 죽 이어져 떠 있고 / 連綿七峰浮
저 멀리 황산은 아스라하네 / 迢遰黃山遠
구릉 하나가 서쪽 언덕에 솟은 것이 / 孤丘擢西岸
홀연 마늘이 정원에 돋아난 듯 / 忽如䔉生苑
대 숲이 그 정상을 덮고 있으니 / 篁竹被其頂
깊숙이 뻗은 가지 높이 솟았네 / 幽枝上偃蹇
선인이 거문고를 타는데 / 羽人彈瑤琴
아득히 구름 산에 막히었구나 / 杳杳隔雲巘
맑은 소리 들을 수가 없고 / 淸音不可聞
봄 경치만 참으로 아름다워라 / 芳景正婉娩
벼슬살이의 굴레를 벗어나 / 願脫簪組累
영원히 암혈에서 숨어살고파 / 永從巖穴遁
하필 헛된 영화를 탐하며 / 何必貪虗榮
내 본성을 손상시킬쏘냐 / 斲我性靈本
산산강(蒜山江) : 경상도 김해에 산산창이 있었는데 이곳에 있는 강인 듯하다.
칠점산(七點山) : 경상도 양산군 남쪽 44리 되는 곳 바닷가에 있다는 산으로, 7개의 작은 산이 흡사 7개의 점을 찍어 놓은 것 같다고 한다. 안축(安軸)의 시에, “바닷물 천 리에 물이 하늘에 떠 있으니, 일곱 점 푸른 봉우리 안개 속에 아득하네. 이곳이 바로 금선(琴仙)이 살던 곳, 배타고 가는 길 총총히 하지 말게.〔海門千里水浮空, 七點靑峯杳靄中. 此是琴仙棲息處, 乘舟且莫過悤悤.〕”라는 구절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2 慶尙道 梁山郡》
참시(旵始) : 생몰년 미상이다. 가락국(駕洛國) 거등왕(居登王) 때의 도류(道流)이다. 금선(琴仙) 또는 칠점선인(七點仙人)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설에는, 가락국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點山)의 참시산인(旵始山人)을 초청하니, 참시가 배를 타고 거문고를 가져와서 서로 더불어 즐겼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2 慶尙道 金海都護府》
황산(黃山) : 경상도 의성현 동쪽 50리에 있는 산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5 慶尙道 義城縣》
영등포〔永登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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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포구라 위험한 나루 아닌데 / 小溆非危津
봄 조수가 제법 넘실넘실하는구나 / 春潮猶浩浩
서포가 점점 돌아 멀어지는데 / 西浦稍回遠
이 징검다리가 지름길이 된다네 / 玆梁爲間道
바람 따뜻하고 해 길어지니 / 風暄日正遲
창주에는 마름풀이 돋았구나 / 滄洲生蘋藻
아득하게 한산도가 빙 둘러있고 / 漠漠閑山圍
컴컴하게 먼 바다가 감싸고 있어라 / 冥冥遙海抱
빈산에는 병사 하나 없고 / 空嶂無一兵
황량한 수루에는 푸른 풀만 돋았는데 / 廢戍唯靑草
아스라이 하늘가에 떠있는 돛단배는 / 微茫天際帆
왜놈인지 되놈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구나 / 不辨夷與獠
도적이 비록 밤에 쳐들어 왔다지만 / 盜賊雖夜渡
창졸간이라 토벌할 수 없었으리 / 倉卒不可討
돌아보며 삼로의 제독들에게 이르노니 / 顧謂三路督
어찌 좀 더 일찍 보고하지 못했는가 / 曷不登聞早
영등포(永登浦) : 거제(巨濟)에 있는 포구. 임진왜란 때 왜적의 점거를 당한 지역이다. 후에 이순신이 이 섬의 앞바다에서 왜선을 크게 무찌르기도 했으나 이 시는 점거 당했을 당시를 회상하며 쓴 것으로 보인다.
서포(西浦) : 대마도(對馬島)의 포구.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달아나자, 명 장수 마귀가 도산(島山)과 서포(西浦)에 들어가 많은 왜적을 참획하였다고 한다. 《海東繹史 卷64 本朝 備禦考4》
왜놈인지 되놈인지 : 원문의 이료(夷獠)는 중국의 서남방에 사는 오랑캐의 이름인데, 왜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흔히 썼다. 삼로의 제독 : 삼로는 호서ㆍ호남ㆍ영남을 이름. 삼도의 수군절도사를 가리킨다
거제부 간덕촌 명나라 유민이 살던 곳에서 묵다〔宿巨濟府看德邨大明遺民所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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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이 황제의 도읍을 점거하여 / 滿洲據神京
천하가 온통 오랑캐 세상이 되었으니 / 天下皆被髮
열렬한 요동의 백성들이 / 烈烈遼東叟
피난하여 바다로 들어왔네 / 避地入溟渤
그윽하고 깊숙한 이 섬에서 / 玆島窈且深
소나무 그늘 아래 띠풀 집을 지었지 / 茅屋蔭松樾
계문은 오천 리나 떨어져 / 薊門五千里
끝내 유골조차 돌아가지 못하였으나 / 曾不歸其骨
자손은 선조의 남긴 뜻을 받들어 / 子孫承遺志
농사지으며 기꺼이 숨어 살았네 / 農畆甘湮沒
꿩을 잡으며 산구릉 아래서 잠들었고 / 弋雉眠山雲
물고기를 잡으며 바다에 뜬 달을 노래했네 / 罶魚歌海月
동산에는 유자나무 잎이 무성하고 / 園中柚葉繁
뜨락에는 매화가 피었지 / 庭際梅花發
전장의 먼지가 온 중국을 덮었으니 / 煙塵滿九州
하필 유주(幽州)와 갈석(碣石)에 연연해하랴 / 何必戀幽碣
슬프도다 천주(泉州)와 장주(漳州)의 사람들이 / 哀哉泉漳客
뗏목을 타고 백월에서 왔을 때 / 乘桴自百粤
탐라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 耽羅不能容
포박하여 되놈들에게 바쳤네 / 纍纍獻戎羯
그런데 그대들만은 이 땅에 몸 부쳐 / 爾獨棲此土
주륙을 면할 수 있었구나 / 得免伏斧鉞
도깨비 마을에 그림자를 감추고 / 匿影魑魅鄕
교룡의 굴에 자취를 숨겼네 / 遁迹蛟龍窟
명나라의 의관 여전히 바꾸지 않고 / 衣冠猶不改
힘을 다해 애쓰며 살았다네 / 筋力以自竭
중원에는 지사가 많은데 / 中原多志士
어찌 북벌을 도모하지 않는가 / 胡不謨北伐
요동 땅 화표는 온통 쓸쓸하고 / 華表一寥廓
고개를 돌려보면 늘 아스라할 뿐 / 回首恒忽忽
우리를 대우함이 자못 정성스러워 / 遇我頗欵曲
밤낮으로 방에 와 아뢰네 / 日夕升堂謁
서쪽 숲에서 흰 사슴 죽이던 / 西林殪白鹿
장한 마음 아직 멎지 않았으니 / 壯心殊未歇
장차 연산을 정벌할 때를 기다려 / 且待征燕山
끝내 병졸이 되어 앞장서리라고 / 終當爲前卒
간덕촌(看德邨) : 명나라의 유민이 살던 곳.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였을 때와 한족의 재건 국가인 남명(南明)이 망한 1661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유민들이 우리나라로 피난해 왔는데, 조정에서 이들을 받아들여 거제부 간덕촌에서 함께 살게 하였다.
거제부 …… 묵다 : 일설에는 황경원(黃景源)이 1761~1762년 거제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이 시가 유배 시절에 지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나 작품의 편차를 통해 창작 연도를 추정하면 이 시는 1752~175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다. 아마도 경부부윤 시절에 주변을 여행하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자나무 잎이 무성하고 : 거제의 유자도(柚子島)에는 온 섬에 유자나무가 있다. 온 중국 : 원문은 ‘九州’이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우(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한 뒤에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각기 토산물로 공(貢)을 바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유주(幽州)와 갈석(碣石) : 유주는 중국의 요동 및 하수지역이다. 갈석(碣石)은 하북성(河北城) 창려현(昌黎縣)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요동의 끝지역이다. 요동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던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월(百粤) : 지명(地名)이다. 옛날 교지(交趾)에서 회계(會稽)까지 7, 8천 리 주위에 군소 월족(越族)들이 모여 각기 작은 나라들을 매우 많이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文獻通考 輿地考 古越南》
슬프도다 …… 바쳤네 : 1668년(현종9)에 중국의 천주(泉州)와 장주(漳州)의 주민 1백여 명이 표류(漂流)되어 제주도에 닿았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그들이 표류해 온 일이 청(淸)나라에 누설될까 두려워서 그들을 포박하여 청나라로 압송했다. 이 일에 대해 송시열은 “천주ㆍ장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진다.”라고 개탄한 바 있다. 《宋子大全 附錄 卷5 年譜4》
도깨비 …… 숨겼네 : 원문의 ‘魑魅鄕’과 ‘蛟龍窟’ 모두 사람이 잘 살지 않는 깊은 산속 또는 바닷가를 말한다.
화표(華表) : 화표는 이정표 구실을 하도록 길가에 세워둔 나무 기둥. 여기서는 요동(遼東) 땅을 은유하는 말로 쓰였다.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선도(仙道)를 배워 터득한 뒤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고향 땅에 돌아와서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다가 탄식하며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搜神後記 卷1》
서쪽 …… 죽이던 : 주(周)나라 쇠퇴기에 목왕(穆王)이 서쪽 지방의 오랑캐인 견융(犬戎)을 정벌한 일을 가리킨다. 당시 제공(祭公) 모보(謀父)가 선왕(先王)을 예로 들면서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간하였으나 목왕은 결국 견융을 정벌하고 흰 이리 네 마리와 흰 사슴 네 마리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史記 卷4 周本紀》 북벌(北伐)을 염원하던 강한(江漢)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촉석강에 배를 띄우고 지리산의 푸르른 빛이 울창하게 강 속에 비치는 모습을 보다〔汎矗石江 望智異蒼翠 蔚然倒映江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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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한 노을 속에 봄 숲은 밝아오고 / 霞碧春林曙
기러기는 저 멀리 창주로 날아가네 / 鴈飛滄洲永
오랜 비가 홀연 그치고 나니 / 宿雨忽已霽
고요한 성곽이 한눈에 보이는구나 / 一望城郭靜
기나긴 봄날 놀잇배 아름답고 / 遲日麗畫船
안개 낀 맑은 강물 드넓게 펼쳐졌네 / 煙水澄萬頃
배 타고 오르내리는 것도 그런대로 즐거운 일이거니와 / 泝洄聊自悅
따사로운 날씨 또한 행운이라 / 暄和亦云幸
바위 절벽이 서북쪽에 벌여있는데 / 石壁西北列
깎아지른 그 모습 어찌 그리 정연한가 / 戌削何其整
잔잔한 강은 백사장을 두르고 / 平江繞白沙
빽빽한 대나무는 밀양령을 가리었네 / 密竹翳陽嶺
맑은 강물에서 배를 젓노라니 / 翫舟空明內
밝은 햇빛 속에 마름풀 떠있구나 / 淸輝汎藻荇
우뚝 솟은 방장산은 / 亭亭方丈山
아래로 푸른 산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네 / 下盤蒼峭影
누워서 쌍계사의 구름을 바라보고 / 卧見雙溪雲
앉아서 칠불사의 경내를 밟아보노라니 / 坐踐七佛境
능파선자의 고운 소매 너울거리듯 / 凌波玉袖輕
이슬에 젖어 거문고 소리 차갑게 나는 듯 / 承露琴絃冷
빈 누각에는 멀리서 메아리만 화답하고 / 虗樓答遠響
꽃이 핀 나무는 고운 경치 머금었네 / 榮木含芳景
우연히 벗을 따라가 노닐다가 / 偶從友生游
훌쩍 티끌세상을 벗어났구나 / 脫然塵事屛
그러나 도화원은 끝내 찾을 수 없으니 / 花源不可窮
배를 돌려 돌아오는 길 애석하여라 / 輟棹還耿耿
성곽(城郭) : 진주성(촉석성)을 가리킨다.
깎아지른 그 모습〔戌削〕 : 남강가의 돌들이 뾰족뾰족하게 솟아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했다. 촉석루라는 이름 역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맑은 강물〔空明〕 :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투명한 강물 빛을 표현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擊空明兮泝流光.〕”라는 말이 나온다. 《東坡全集 巻33》
방장산(方丈山) : 지리산의 이칭 쌍계사 : 지리산에 있는 절. 문전에 쌍계가 흘러 헌강왕이 쌍계라는 호를 하사하고 학사(學士)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의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각자(刻字)하게 하였다고 한다.
칠불사 : 지리산의 중심봉인 반야봉의 남쪽 고지에 위치하고 있는 절. 앉아서 …… 밟아보노라니 : 와유(臥遊)를 묘사한 것이다. 능파선자의 고운 소매 : 능파선자(凌波仙子)는 물위를 걷는 다는 아름다운 수신(水神).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조식(曹植)이 상고 시대 복희씨(伏羲氏)의 딸 복비(宓妃)가 낙수(洛水)에서 익사하여 수신(水神)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는 미인의 사뿐한 몸매와 고운 자태를 비유한다.
이슬에 …… 듯 : 거문고는 여가(餘暇)에, 주로 이슬이 내린 밤에 타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썼다. 위응물(韋應物)의 〈화경(花徑)〉이라는 시에 “공무의 여가에 호상에 앉아 이슬 젖은 거문고를 타노라.〔胡床理事餘 玉琴承露濕.〕”라는 용례가 있다. 《御定全唐詩 巻193》
철령 갑술년 〔鐵嶺 甲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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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鐵嶺)이 북방을 막고 섰는데 / 鐵嶺扞北方
떡갈나무 숲이 그늘진 봉우리를 에워쌌네 / 叢柞圍陰巘
처음엔 조도(鳥道)가 걸린 것을 근심했는데 / 初愁鳥道懸
다시 보니 양장(羊腸)이 구불구불하네 / 復見羊膓轉
쉬지 않고 걸어 산꼭대기에 올라 / 冉冉上巖顚
망망한 변방의 산골짜기를 굽어본다 / 茫茫臨塞畎
맑게 갠 숲엔 아침 해 솟아오르고 / 林淸曉日霽
먼 들판엔 가을 구름이 걷히네 / 野迥秋雲卷
돌아보건대 옛날 왕씨 왕조 때에 / 念昔王氏世
관문(關門)을 설치하여 빗장을 질렀다네 / 置門施管鍵
텅 빈 막남(漠南) 땅을 제어하였고 / 控制漠南空
진방(鎭防)이 천하에 제일이었네 / 鎭防天下鮮
삼엄한 성은 삼백 치(雉)라 / 嚴城三百雉
여진족이 발 디딜 수 없었는데 / 女眞不敢踐
그 옛날의 문루(門樓)는 이제 퇴락하여 / 古譙今已頹
주위를 분간할 수 없네 / 周遭不可辨
외람되이 동호부를 거느리게 되었으니 / 猥領銅虎符
그윽한 심회를 다 펼 수가 없구나 / 幽懷莫能展
어찌하면 이 관문(關門)을 복원하여 / 安得復此關
만세토록 서울을 지킬 수 있을까 / 萬世衛京輦
갑술년 : 황경원의 나이 46세이던 1754년(영조30)이다. 황경원은 1년 전인 1753년에 철령(鐵嶺)이 있는 함경남도 안변(安邊) 지역의 부사(府使)로 부임하였다.
철령(鐵嶺) : 함경남도 안변(安邊)과 강원도 회양(淮陽) 사이에 있는 고개로, 해발 685m에 이른다. 예로부터 지형이 험하여 천연요새지로 중시되었으며, 관북ㆍ관동ㆍ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이기도 하였다.
관문(關門)을 …… 질렀다네 : 고려 시대에 설치한 철관문(鐵關門)을 의미한다.
막남(漠南) : 내몽고에 있는 고비사막 남쪽의 땅. 북융족(北戎族)들이 살았는데, 주(周)나라 때에는 이들을 험윤(獫狁)ㆍ훈육(葷粥)ㆍ견융(犬戎)이라 하였고 진한(秦漢) 시대에는 흉노(凶奴)라고 하였다. 활쏘기와 사냥을 잘하여 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가죽옷을 입었으며 공격과 침략을 능사로 삼았다고 한다. 삼엄한 성 : 신라 시대에 쌓은 철관성(鐵關城)을 의미한다.
치(雉) : 성(城)의 담장을 재는 단위로 보통 높이 1길, 길이 3길을 말한다.
동호부(銅虎符) :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여기서는 ‘지방 수령의 관인(官印)’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외람되이 …… 되었으니 : 지방 수령인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부임하여 내려왔다는 의미이다.
묵희령에서 풍악산을 바라보다〔墨喜嶺望楓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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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안개 낀 산 끝나는 곳에 / 纔窮煙嶠逈
비로소 눈 쌓인 봉우리 둘러선 것 보이네 / 始見雪峰回
첩첩이 쌓인 저녁 구름 낮게 깔리고 / 重疊夕雲下
쓸쓸하니 가을 기운 밀려오네 / 蕭森秋氣來
처음엔 바위 가에서 피리를 불고 / 巖邊初弄笛
다시 소나무 옆에서 술잔을 돌리네 / 松際更傳杯
9월 9일은 만나기 어려운 날인데 / 九日知難遇
장차 천일대에 오르겠구나 / 將登天一臺
묵희령(墨喜嶺) : 금강산에 있는 고개 이름.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장안사(長安寺)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천일대(天一臺) : ‘천을대(天乙臺)’라고도 하며, 정양사(正陽寺) 근처에 있다.
안문〔鴈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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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재에 가을 해 저무니 / 鴈門秋日晏
쌓인 싸락눈 이내 얼어붙었네 / 積霰遂成凍
예는 신산(神山)의 안팎이 나뉘는 곳 / 神山別內外
낙엽이 바위 골짝에 평평히 덮였네 / 落葉平巖洞
험준한 고개는 하늘까지 닿았는데 / 峻嶺上造天
겨울 참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라 / 但聞寒雀哢
망망하구나, 저 너른 바다에 / 茫茫大海水
섬들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 島嶼一何衆
우리 유도(儒道)를 행할 수 없어 / 吾道不可行
애오라지 상송(商頌)을 읊어 보네 / 商頌聊一諷
이미 성각(省閣)에 얽매임을 끊었으니 / 已絶省閣牽
점차 구학(丘壑)에 숨고자 하는 꿈 고요히 꾸네 / 稍靜丘壑夢
신선은 아득하여 따르기 어려우니 / 靈仙杳難攀
맑은 경치만 희롱할 뿐이네 / 淸景秪自弄
중향성만 아직도 나를 따르며 / 香城尙隨我
아득히 저 멀리서 배웅해주네 / 迢迢遠相送
안문 : 안문재〔鴈門岾〕. 고개의 이름으로, 안문봉(雁門峰)의 남쪽 줄기이다. 신
산(神山) : 금강산을 가리킨다. 예는 …… 곳 : 안문재는 내금강(內金剛)과 외금강(外金剛)의 분기점이다.
애오라지 …… 보네 : 상송(商頌)은 《시경》의 상송 편을 말하는 것이며, 상송을 읊는다는 것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맑은 절조를 고수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서, “증자(曾子)가 위(衛)나라에 살 때 입은 옷은 겉이 없을 정도로 해지고 얼굴은 부어 종기투성이고 손발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사흘 동안 밥을 짓지 못하고 10년 동안 새 옷을 만들어 입지 못하였으며 갓을 바로잡으면 갓끈이 끊어지고 옷깃을 잡으면 팔꿈치가 드러나고 짚신을 신으면 발뒤꿈치가 터졌다. 그런데도 발을 끌면서 상송을 부르면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曾子居衛, 縊袍無表、顏色腫嗆、手足胼胝. 三日不舉火、十年不製衣, 正冠而纓絕、捉矜而肘見、納履而腫決. 曳縱而歌商頌, 聲滿天地, 若出金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성각(省閣) : 원래 고려 시대의 중앙관제인 삼성(三省), 즉 상서성(尙書省)ㆍ중서성(中書省)ㆍ문하성(門下省) 등 정치의 중심 기구를 지칭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주로 삼사(三司)나 승정원 등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관서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미 …… 끊었으니 : 황경원은 이 시를 썼을 때인 안변부사가 되기 전에 이미 한림ㆍ지평ㆍ정언ㆍ교리ㆍ수찬ㆍ헌납ㆍ필선ㆍ보덕ㆍ응교ㆍ사간ㆍ승지ㆍ대사간ㆍ대사성ㆍ우승지 등 언론 삼사(三司)와 승정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대사간은 사간원의 수장으로 정3품 당상관직이며, 문과 출신의 명망 있는 인물이 아니면 임명될 수 없는 핵심적인 양반 관료직이다.
구학(丘壑) : ‘일구일학(一丘一壑)’의 준말로 은거지(隱居地)를 말한다. 《한서(漢書)》 〈서전 상(敍傳上)〉에 “한 골짜기에서 고기를 낚으니 만물이 그의 뜻에 간여하지 않고, 한 언덕에서 소요를 하니 천하가 그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漁釣於一壑, 則萬物不奸其志;棲遲於一丘, 則天下不易其樂.〕”라고 한 말에서 비롯하였다.
달밤에 배를 띄우고 학포에서 놀다가 멀리 풍악산 봉우리들이 바다어귀에 은은하게 보이니 마음이 쓸쓸하다〔月夜泛舟游鶴浦 遙望楓嶽諸峰隱隱出海口 神思悄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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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띄우고 오르락내리락 노래 부르고 듣노라니 / 順流歌吹逆流聽
출렁이는 조각배가 푸른 절벽에 멈추네 / 蕩漾輕舟逗翠屛
호숫가 구름 모래는 첩첩 산봉우리를 만들고 / 湖上雲沙生疊嶂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는 텅 빈 바다에 울리네 / 海中風竹響空汀
바다 물결에 밝은 달 일렁이자 저녁 기러기 날아가고 / 波搖明月夕鴻起
서리가 먼 하늘을 두르니 차가운 잎새 떨어지네 / 霜匝遙天寒葉零
아스라이 서남쪽에 만 개의 옥(玉) 빽빽하니 / 極目西南森萬玉
봉래산 경치는 멀리서도 또렷해라 / 蓬萊山色遠亭亭
학포(鶴浦) : 강원도 통천(通川) 지역의 옛 지명. 오압산(烏鴨山)에서 뻗은 산줄기가 학포를 감싸고 남과 북에서 해안으로 뻗쳐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펴서 감싸 안은 것 같다 하여 학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호숫가 …… 만들고 : 학포 근처에 있는 백사봉(白沙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사봉은 모래로 이루어진 봉우리인데,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려 물이 흘러가는 것 같다고 한다. 아스라이 …… 빽빽하니 : 만 개의 옥(玉)은 금강산의 일만 봉우리를 가리킨다. 금강산 봉우리의 모양과 색이 옥을 깎아놓은 것 같다고 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벽라도〔碧螺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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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를 풀고푸른 섬에 나아가 / 解帶臨靑嶼
배를 매고 하얀 마름꽃 핀 섬에 누웠네 / 維舟卧白蘋
우수수 가을 기운 흩어지니 / 泠泠秋意散
선명한 달빛이 새로워라 / 的的月華新
물고기는 뛰놀며 자주 바위에 오르고 / 魚戱頻登石
갈매기는 날아서 사람에게 다가오네 / 鷗飛欲近人
언제나 시골 늙은이와 함께 / 何時偕野老
물가에서 생을 다할 수 있을까 / 湖海與終身
띠를 풀고 : 원문의 ‘解帶’는 허리에 묶은 띠를 풀고 세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편히 쉰다는 의미이다. 푸른 섬 : 벽라도(碧螺島)를 가리킨다. 물고기는 …… 다가오네 : 사람에게 기심(機心)이 없으니 동물들이 이를 알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태평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기심은 자기의 사적(私的)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교묘하게 도모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바닷가에서 매일 아침 갈매기와 벗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부친의 부탁을 받고 갈매기를 잡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자 갈매기들이 벌써 알아채고는 그 사람 가까이 날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전한다.
달이 뜨자 배를 타고 학포에서 벽라도로 들어가 오랫동안 배를 타고 오르내리다〔月出泛舟 自鶴浦入碧螺島 沿洄久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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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출렁이는 섬에 / 湖水灧洲島
갈대의 모습 이미 변하였네 / 蒹葭氣已變
오늘이 바로 열엿새 저녁이라 / 正當旣望夕
맑은 가을하늘에 은하수가 보이네 / 秋晴河漢見
밝은 달이 동해에 떠오르니 / 明月昇東海
사방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아라 / 纖雲淸四面
백옥의 바퀴 같은 둥근 달이 / 團團白玉輪
곧바로 물속에서 굴러 나오네 / 直自波中轉
외로이 뜬 배에는 뜸도 없는데 / 孤舟上無篷
오르락내리락 떠다녀도 지루한 줄 몰라라 / 溯洄不知倦
황량한 섬에는 기러기 슬피 울며 내려앉고 / 衰嶼哀鴈下
성긴 숲에는 이슬이 흠뻑 내렸네 / 疎林零露徧
흰 모래가 절로 봉우리를 이루니 / 白沙自成峰
그 고운 빛이 눈서리보다 희네 / 姸色凌霜霰
푸른 절벽은 멀리 하늘과 맞닿았고 / 翠屛逈際天
엷은 놀은 푸른 숲을 뒤덮었네 / 輕霞被蔥蒨
외직으로 나가니 조촐한 타향살이 편안하고 / 補吏安羇拙
어머니 봉양하는 성은(聖恩)을 입었네 / 將母蒙恩眷
어느덧 어지러운 세상일 멀어지니 / 於焉遠世紛
당대의 명사들과 어울릴 필요 무어 있나 / 何必廁時彥
옛 현인은 명철보신(明哲保身)을 귀히 여겼고 / 昔賢貴明哲
빼어난 인재는 세상에 얽히는 일 많다네 / 英才多糾縣
미미한 녹봉 그런대로 숨어살 만하니 / 微祿聊可隱
영화로운 벼슬은 내 사모하는 바가 아니라 / 榮宦非所戀
아스라이 푸른 물결 몰려가는데 / 渺渺滄浪趣
이 좋은 밤 화락하게 잔치를 여네 / 愉愉良夜讌
기미(幾微)를 알고 일찍 떠났다 말하지 말라 / 莫謂見幾早
일찍부터 비천함을 달게 여겼으니 / 夙志甘卑賤
호수 출렁이는 섬에 : 벽라도는 호수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으로 보인다. 이곡(李穀)은 《가정집(稼亭集)》 권15 〈동유기(東遊記)〉에서 학포의 원수대(元帥臺)와 벽라도를 묘사하며 “포구에서 배를 저어 이른바 학포라는 곳으로 들어가서 원수대에 올랐는데, 백 이랑의 맑은 호수에 하나의 고둥처럼 떠 있는 외로운 섬이 또한 하나의 기이한 장관이었다.〔自浦口棹舟, 而入所謂鶴浦者, 登元帥臺, 百頃澄湖一螺孤嶼, 亦一奇觀也.〕”라고 하였다.
뜸 : 원문의 ‘篷’은 대로 엮어서 배〔舟〕의 윗부분을 덮는 기구를 말한다.
흰 …… 희네 : 하얀 모래로 이루어진 봉우리인 백사봉(白沙峰)을 가리킨다. 남구만(南九萬)은 《약천집(藥泉集)》 제28권 〈북관십경도기병서(北關十景圖記幷序)〉에서 백사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안변부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서 바닷가의 돌벼랑 가를 따라가면 (학포의) 포구 가에 이른다. 포구 동북쪽에는 명사(鳴沙) 수십 리가 바람을 따라 무늬를 이루는데, 혹은 가늘고 혹은 굵어서 찬란하기가 하얀 비단과 같다. 포구의 동쪽에는 모래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쌓인 것 같고 때로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려 물이 흘러가는 듯한데 봉우리의 높이가 줄지도 늘지도 않으니, 이것이 신기하다.〔自安邊府東行六十里, 遵海瀕旁石崖, 到浦邊. 浦之東北鳴沙數十里, 因風成紋, 或細或大, 爛如素錦. 浦東沙峯斗起, 望之如雪堆, 有時風起, 則飛沙如流, 而峯之高不減不增, 是可異也.〕”
어머니 봉양하는 : 원문의 ‘장모(將母)’는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사모(四牡)〉에서 “왕사를 소홀히 할 수 없어 어머니 봉양할 겨를이 없네.〔王事靡盬, 不遑將母.〕”라고 하였다.
기미(幾微)를 알고 : 원문의 ‘견기(見幾)’는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 5장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君子見幾而作, 不竢終日.〕”라고 하였다. 즉 현명한 이는 시국의 기미를 살펴서 떠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면 하루도 미적거리지 않고 즉시 떠난다는 말이다.
구모행〔叴矛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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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대장군이 왜노를 방어하였으니 / 四大將軍禦倭奴
마귀는 도산을 포위하여 공을 세웠네 / 麻圍島山有功實
동일원은 싸움에 패하여 전세가 불리하였고 / 董收敗兵戰不利
유정은 아직 비루를 다 만들지 못하였는데 / 劉造飛樓工未卒
오직 진린이 있어 적의 목을 많이 베었으니 / 惟有陳公獻馘多
동정 대첩 가운데 제일이라 꼽히네 / 東征大捷居第一
부월을 들고 처음 고금도에 갔을 때 / 斧鉞初臨古今島
기러기 우는 속에 서리가 귤에 가득 내렸네 / 鴻鴈聲中霜滿橘
누선을 타고 하룻밤 새 남해로 내려오니 / 樓船一夜下南海
삼엄하게 늘어선 창〔叴矛〕에 아침 해가 비치네 / 叴矛肅肅映朝日
어룡이 요동치는 관음포에서 / 魚龍震盪觀音浦
통제사가 위험에 처하니 누가 구할 수 있을까 / 統制履危孰能卹
진공이 바로 앞에서 겹겹의 포위를 뚫고 / 陳公直前冒重圍
단숨에 시랑 떼를 소탕하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네 / 一掃豺狼不少怵
배 안이 적막하여 사람 소리 들리지 않더니 / 船中寂然無人聲
불화살을 사방으로 흩뿌리니 불길이 확 번지네 / 噴筒四散火焰疾
풍신수길의 배 백만 척을 다 태우니 / 燒盡秀吉百萬艘
바다 밑 용궁까지 붉게 물들었네 / 海波盡赤連鮫室
황금갑옷을 입고 싸우는 저자는 누구인가 / 金甲臨戰彼何人
붉은 장막 나부끼며 구름 너머에서 나타났네 / 朱幕飄飄雲外出
천자의 군사가 이에 호준포를 쏘아서 / 天兵乃發虎蹲砲
오랑캐의 배를 쳐부수니 혼비백산하였네 / 蠻舶破碎氣蕭瑟
천자의 군사가 개선가를 부르며 중국으로 돌아가니 / 六師凱歌還中國
백 년 동안 온 천하가 고요하구나 / 百年之間四郊謐
산동 지방도 편히 잠들 수 있으니 / 山東郡縣可安眠
어찌 요동 사람들만 길이 편안하랴 / 豈獨遼人永世逸
네 …… 방어하였으니 : 정유재란 때 마귀(麻貴)ㆍ유정(劉綎)ㆍ동일원(董一元)은 남ㆍ북병을 거느리고 진린(陳璘)은 수군(水軍)을 거느렸는데, 제독(提督) 마귀는 동로(東路)를, 제독 동일원은 중로(中路)를, 제독 유정은 서로(西路)를 담당하고 제독 진린은 수로(水路)를 담당하였다. 이때 남ㆍ북의 군사를 합친 것이 모두 14만 2천 7백여 명이었다고 한다. 《象村集 卷56 天朝先後出兵來援志》
마귀는 …… 세웠네 : 정유재란 때 조선의 권율(權慄)과 명나라의 마귀(麻貴) 등이 군사를 연합하여 1597년 12월 22일부터 다음해 1월 4일까지 울산에 도산성(島山城)을 쌓고 웅거하고 있던 왜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니, 이것을 도산성 전투라고 한다. 황경원은 바로 앞의 시 〈마 대장군이 변방으로 출정함을 노래하다.〔麻大將軍出塞歌〕〉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읊었다.
동일원(董一元) : ?~?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 호는 소산(小山)으로 선부(宣府) 전위(前衛) 사람이며 1597년 12월에 흠차제독중로어왜총병 중군도독부좌도독 태자태보(欽差提督中路禦倭總兵中軍都督府左都督太子太保)에 제수되어 조선에 출정하였다. 《象村集 卷57 天朝詔使將臣先後去來姓名 記自壬辰至庚子》
동일원(董一元)은 …… 불리하였고 : 정유재란 때 도독 마귀(麻貴)는 양호(楊鎬)를 따라 울산에 주둔한 가등청정을 치고, 도독 동일원은 사천(泗川)에 주둔한 심안돈오(沈安頓吾)를 치고, 도독 유정(劉綎)은 순천(順天)에 주둔한 소서행장을 치고, 진린(陳璘)은 수군을 거느리고 해로를 경유하여 협공하였다. 그런데 여러 장수들이 서로 원활하게 협조하지 않고 가볍게 전진하다가 동일원은 복병을 만나 사천에서 크게 패하고, 다른 길의 군사도 모두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東閣雜記 下》 《記言 卷38 西厓遺事》 이때 적에게 패배당하여 죽은 동일원의 군사가 거의 1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西厓集 卷16 記壬辰以後請兵事》
유정(劉綎) : ?~1619.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로, 자는 자신(子紳)이며, 호는 성오(省吾)이다. 강서(江西) 남창부(南昌府) 홍도현(洪都縣) 사람이다. 1593년(선조26) 2월에 흠차통령천귀한토관병참장(欽差統領川貴漢土官兵參將)으로 보병 5천을 이끌고 조선에 와서 왜군을 방어하고 정왜부총병(征倭副摠兵)으로 승진하였다. 오래도록 경상도 대구 팔거현(八莒縣)에 주둔하였으며, 당시 큰 병란을 겪어 해마다 기근이 들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유정이 법을 만들어 군중(軍中)에 남아도는 미곡을 모두 팔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 덕택에 살아나게 되었다고 한다. 1594년 9월에 돌아갔다가 1598년에 서로(西路)의 제독으로 재차 와서 싸웠다. 《象村集 卷56 天朝先後出兵來援志》
비루(飛樓) : 성(城)을 공격하는 기구의 하나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적을 쏠 수 있는 시설이다.
유정(劉綎)은 …… 못하였는데 :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 권56 〈천조선후출병내원지(天朝先後出兵來援志)〉의 기록에 의하면, 1597년 9월 22일경에 유정이 한창 성을 공격할 비루(飛樓)와 포차(砲車)를 만들면서 제조가 다 끝난 뒤에 성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에 진린(陳璘) 역시 군사를 거두고 대기한 지가 10여 일이 되었다. 그런데 10월 1일에 유정이 진린을 만나서 ‘공성(攻城) 기구의 제작이 완료되지 않았고 군문(軍門)이 보낸 보충병 및 등자룡의 수군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군사들이 모두 도착할 때를 기다려 작전을 개시했으면 한다.’라고 하자, 진린이 ‘우리 군사가 공연히 노숙(露宿)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적이 필시 우리의 정세를 탐지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속히 전투를 벌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라고 하니, 유정이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한다. 진린(陳璘) :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로, 자는 조작(朝爵)이며 호는 용애(龍厓)이다. 광동(廣東) 나정주(羅定州) 동안현(東安縣) 사람이다. 1598년 6월에 흠차통령수병어왜총병관 전군도독부도독첨사(欽差統領水兵禦倭摠兵官前軍都督府都督僉事)에 제수되어 조선에 출정하였다.
네 …… 꼽히네 : 1597년(선조30) 9월에 명(明)나라의 총독 형개(邢玠)가 군사를 나누어서, 마귀(麻貴)는 울산을 맡고 동일원(董一元)은 사천을 맡고 유정(劉綎)은 순천을 맡고, 진린(陳璘)은 수군을 거느리고 통제사 이순신과 군대를 통합하여 해로를 맡아서 동시에 진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하여 동일원의 군사는 적에게 패배하여 죽은 자가 거의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얼마 후 일본의 관백이 병들어 죽자 적의 모든 진영이 다 철수해서 귀환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공도 세우지 못하였으나 다만 수군만은 바다 가운데서 맞아 싸워서 적의 전선(戰船) 수백여 척을 빼앗는 공을 세웠다. 《西厓集 卷16 記壬辰以後請兵事》
부월(斧鉞) : 장수를 임명하여 전쟁터로 보낼 때 왕이 수여하는 일종의 징표이다. 도끼같이 생겼으며, 군령(軍令)을 어긴 자에 대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상징하는 것이다.
고금도(古今島) : 전라남도 강진(康津) 앞바다에 있다.
누선(樓船) : 이층으로 된 배를 누선(樓船)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누선은 곧 판옥선(板屋船)을 말하는 것이다.
남해(南海) : 경상남도 남해를 가리킨다.
관음포(觀音浦) : 경상남도 남해의 관음포이다.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순국한 곳이다. 1598년에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고, 이때 이순신 장군이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맞았다. 통제사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가리킨다.
어룡이 …… 않았네. :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 권56 〈천조선후출병내원지(天朝先後出兵來援志)〉의 기록에 의하면, 1597년(선조30) 10월 24일에 적이 배를 모두 이끌고 관음포(觀音浦)에 와서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소서행장이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 나갔다. 이에 진린이 수군을 독려하여 사천(泗川)의 왜적을 모조리 죽이고, 적이 이순신의 배를 몇 겹으로 에워싸자 우리나라 배에 바꿔 탄 뒤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구원하였다고 하였다.
배 …… 번지네 : 신흠의 《상촌집》 권56 〈천조선후출병내원지〉의 기록에 의하면, 1597년 10월 24일 관음포 전투 중 진린이 쇠 방울을 흔들어 군사를 거두었는데 배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해지자 적이 의심하여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중국군이 높은 위치를 이용하여 불화살을 적선에 흩뿌리니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면서 적선 수백 척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온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고 하였다.
바다 밑 용궁 : 원문의 ‘鮫室’은 바닷속에 산다는 교인(鮫人), 즉 인어(人魚)들의 궁궐로, 용궁을 말한다. 호준포 : 나무로 만든 포의 일종으로, 웅크린 호랑이처럼 생겨서 ‘호준포(虎蹲砲)’라고 하였다.
황금갑옷을 …… 혼비백산하였네 :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 제56권 〈천조선후출병내원지(天朝先後出兵來援志)〉의 기록에 의하면, 1597년 10월 24일의 관음포 전투 중 매우 높다랗고 위에 붉은 휘장을 친 적선 한 척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세 사람이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군사를 집결시켜 집중 공격을 퍼부으며 황금 갑옷 입은 한 사람을 쏘아 맞추었다. 이에 적선들이 도독 진린은 놔두고 그 배를 구원하러 갔으므로 도독의 군사가 이 때문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에 이순신의 여러 부대와 세력을 합쳐 호준포(虎蹲砲)를 쏘아 그 배를 산산조각내자 나머지 적들이 혼비백산하였는데, 그 결과 거의 모든 배를 불태워버릴 수 있었다고 하였다.
천자의 군사 : 원문의 ‘육사(六師)’는 ‘육군(六軍)’과 같은 말이다. ‘사(師)’는 군사의 단위로, 주나라 군대 편제에 1군은 12,500인이며, 천자는 6군을 갖는다고 하였다. 《周禮注疏 卷28 下官 司書》
산동 지방 : 중국 산동(山東)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왜구의 노략질에 많이 시달리던 곳이다.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 민백상에게 내린 교유〔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大丘都護府使閔百祥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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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綏章)을 가지고 오랑캐를 무찌른 일은 〈한혁(韓奕)〉에서 노래로 불렸고,개규(介圭)를 가지고 사방의 나라를 제후로 삼은 것은 〈숭고(崧高)〉 장에서 높이 칭양되었다. 이 때문에 왕가에서 번병(藩屛)을 세울 때는 반드시 어진 이를 택하였고변방의 관원에게 황월(黃鉞)을 빌려주는 것은 대개 중책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생각건대 영남 땅은 나라의 울타리이다. 곧 북으로는 태백산을 등지고 진지로 삼아 지역을 나눈 성이 72개가 되고, 남쪽 끝으로는 바다를 따라 방어진을 설치하여 적의 침략을 막고 있는 곳이 수천여 리나 된다. 지역에서 유학을 양산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조정에 많이 진출하였고, 왜관에서는 오랑캐들을 잘 길들여 귤과 유자를 실은 배가 강한(江漢)을 타고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영남 일로가 흉도들의 사건에 연루되어 24년 동안 관리들이 등용되지 못하였다. 현송(絃誦) 소리 쓸쓸하니 이름난 고을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만 쉴 뿐이었고, 의관(衣冠)이 적막하니 교목(喬木)을 바라보며 마음만 오래 상하였다. ____더구나 오랑캐의 근성은 원망하기 쉬운지라 밖에서 일어나는 변란이 많았고, 백성의 의식은 소요를 좋아하는지라 안에서 생기는 우환이 헤아릴 수 없었다.
민백상(閔百祥) : 1711~1761.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지(履之),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의 손자이고, 관찰사 민형수(閔亨洙)의 아들이다. 예문관 검열과 정언ㆍ사서(司書)ㆍ수찬 등을 역임하고 1748년(영조24)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그 뒤 대사성과 대사간을 지냈다. 아버지를 포함하여 신임사화에서 화를 입은 인물의 신원을 주장하고, 가해자인 소론일파의 처벌을 극론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760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다음해에 죽었는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도(西都) 밀행에 책임지고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좌의정 이후(李 ?) 등과 함께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경상도관찰사 …… 교유 : 이 작품은 민백상이 경상 감사를 제수받은 1748년에 지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수장(綏章)을 …… 불렸고 : 수장은 귀천을 구별하기 위해 깃대 끝에 장식한 잡색의 새털이나 소의 꼬리털이다. 〈한혁(韓奕)〉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주 선왕(周宣王) 때 제후인 한후(韓侯)가 조회 와서 왕명을 받고 돌아갈 때에 시인이 전송하며 지은 시이다. 이 시에 “왕께서 한후에게 물건을 내리시니, 새 깃으로 장식한 쌍룡기와 수레 포장에 아롱진 가로나무와 검은 곤룡포에 붉은 신과 말 가슴걸이에 금 눈썹걸이와 수레 앞턱을 동일 가죽에 호피 덮개와 말고삐를 매는 금고리로다.〔王錫韓侯, 淑旂綏章, 簟笰錯衡, 玄袞赤舃, 鉤膺鏤鍚, 鞹鞃淺幭, 鞗革金厄.〕”라는 구절이 있다.
개규(介圭)를 …… 칭양되었다 : 개규는 사자(使者)를 보낼 적에 주어 신표로 삼았던 물건이다. 〈숭고(崧高)〉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주 선왕의 외숙인 신백(申伯)이 사읍(謝邑)에 봉해지자 시인이 시를 지어 칭송한 노래이다. 그 시에 “그대에게 개규를 내려 네 보물로 삼게 하노니, 가거라 왕구(王舅)여, 이 남쪽 땅을 보전할지어다.〔錫爾介圭, 以作爾寶, 往近王舅, 南土是保.〕”라는 구절이 있다.
번병(藩屛)을 …… 택하였고 : 원문의 ‘樹屛’은 번병(藩屛)을 세우는 것이다. 《서경(書經)》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명하여 후(侯)를 세워 번병을 세우심은 뜻이 우리 후인(後人)에게 있으시니.〔乃命建侯樹屛, 在我後之人.〕”라고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어진 신하를 봉하여 제후로 삼는 것은 그를 세워 번병으로 삼기 위해서이다.〔封立賢臣爲諸侯者, 樹之以爲藩屛.〕”라고 하였다. 변방의 …… 것 : 원문의 ‘侯衛’는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의 합칭으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을 가리킨다.
월(鉞)은 황월(黃鉞)이다. 출정할 때 임금이 금빛 도끼로 병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치기 위하여 목야(牧野)로 가는데 “왼쪽 손으로 황월(黃鉞)을 쥐었다.”라고 하였다. 《書經 牧誓》
귤과 유자 : 남쪽 지역의 산물. 일본에서 조선에 보냈던 공물이다.
흉도들의 사건 : 1728년(영조4)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인좌(李麟佐) 등 소론(少論) 강경파와 일부 남인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난을 가리킨다.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하여 안음ㆍ거창ㆍ합천ㆍ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 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토벌 당했다.
24년 : 원문은 ‘二紀’ 1기(紀)는 12년으로, 즉 24년을 뜻한다.
인용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