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거창엔 진눈깨비가 온다는 예보.
10시경. 제법 눈발이 날린다. 늦은 아침 식사. 아내가 돼지수육을 삶고 톳나물을 무쳐 대령한다. 이런 날, 어이 일배하지 않으리오. 눈이 내리면 조건반사적으로 생각나는 노래, 영화 '서편제'의 마지막 장면, 앞 못보는 송화가 또다시 거처를 옮겨 떠나가는 강둑, 진홍 저고리, 검정 치마, 기구한 이 여인의 앞길에 눈발은 하염없이 나려 쌓이는 피날레 장면의 배경음악, 김소희의 '구음'을 듣고 있었다.
카톡이 깨톡거린다.
경기 양주 사는 변수석 친구로부터다.
와우! 첫눈 치고는 대단한데? 벌써 산행을 나섰구나. 사진, 동영상 끝에 덧붙이는 말,
"올해 첫눈은 수줍음도 없다....."
아하, 첫눈 치고는 양이 많다는 뜻? 시 쓰는 친구의 친구면 이 정도 센스는 있어야지.
내가 댓거리를 했다.
"이거 씨이,
하늘도 지역차별이냐?
거창은 하늘이 아침밥 못얻어 먹은 씨어미 죽상이더니, 언 놈에게 등 떠밀려 강물에 빠져 엉겁결에 사람 목숨 구해 의인상 받은 놈 기자들 팡팡 터뜨리는 카메라 앞에서 표정 관리하는 우거지상이더니, 에라이, 환시인 듯 미세먼지인 듯 푸슬거리다 적막해지네?
에라이."
"한 문장으로 줄이면? 뭐래?"
"헐~~~~"
10:22, 두번째 소식은 서울 사는 사촌 여동생 종숙이로부터.
이 친구는 벌써 시심을 별렀다. 이대 출신 여자는 역시나다.
"#208일차
첫눈 오는날
첫 눈이 온다!
사르락 사르락 살포시 내린다
새까만밤 모두 꿈속에 있을 때
아무도 몰래 살짜기 찾아와
세상은 온통 하얀꽃이 피었다
라일락 눈꽃송이 사이사이로
귀여운 찌르레기 초롱한 눈망울로
포롱포롱 오가며 기웃거린다
미처 못떠난 가을단풍잎
차가운 눈발에 처연히 늘어진
어깨를 힘없이 떨구고 있다
아직 가을과 작별도 못했는데
새손님 맞을 준비도 못했는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오다니
아쉬움에 아련하고 설레임에
벅찬마음 가누지못하고
백설처럼 순수하고 고운 마음과
눈꽃처럼 예쁘고 사랑스런 사랑을
허물은 덮고 아픔은 치유되는 기적을
달라고 첫눈 내리는 날 소망을 빌어본다"
(첨부 사진)
답신했다.
"옛 과거시험지 평가 등급으로, "大通이요~~~!!!""
재답신:
"ㅎ ㅎ 과거시험지 어렵기로 소문난 거? 이제 수능도 쉬워진다니 대세따라 경향이 바뀌었나보죠?"
내 점수가 너무 후하다는 말.
식사후 먼저 온 메세지를 확인하니 오전 8:31, 부산 사는 대학 동기, 최현숙씨의 사진이었다.
부산은 대단히 매혹적인 국제항이지만, '눈'에 있어서만은 발언권이 거의 없다. 그런데 부산에도 눈이 이렇게?
오후 1시쯤 서울 사는, 노인 일자리 프로그램 일환 시니어 매니저로 근무중인 친구 허종룡의 전화를 실시간으로 받았다. 눈이 20cm 가량 쌓여 뜰에 있는 나무가지가 부러지고 이런저런 사고를 겪었단다. (내 알 바 아니고.) '눈길 조심하라'는 의례적인 인사로 통화 종료.
인천에 거주하는, 민족사관고교에서 인연을 맺은 이태룡 박사, 조선 말 항일 의병운동사를 천착하는 그로부터 또 사진 두 장이 답지하였다.
그래, 인간이 '눈'자에도 약하지만 앞에 '첫'자가 붙어버리면 다들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좌불안석해지고 첫인연, 첫사랑, 첫맹세, 첫날밤, 첫출산의 기억이 떠오를테다. 나와 공감할 누군가를 향해 이 반갑고 즐거운 첫눈 소식을 발신하고, "아이구야, 니도 그렇나, 내도 그렇다"는 마음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이 인간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하나, 첫눈 온 날 아침 풍경.
힘!
이것이 36만년을 버텨온 호모 사피엔스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