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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81년: 춘추시대의 어원인 춘추의 마지막 기록 연도다. 또한 이 해, 제나라의 재상 전항이, 섬기던 군주인 제간공을 살해하고, 제간공의 동생이었던 강오를 세우자 공자가 노애공에게 제나라 정벌을 권했으나 노애공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전국시대의 특징인 주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났는데도 주변에서 춘추적 질서로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점, 강제와 전제의 전환 역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는 점 때문에 두 시대 경계의 가장 이른시기로 꼽힌다.
기원전 479년: 춘추좌씨전의 마지막 기록연도이자 공자의 서거년도다. 춘추시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약해져 가는 주나라의 봉건질서를 복고하려고 노력했던 공자의 서거는 주나라의 질서가 급격히 몰락해가는 전국시대의 시대적 표상이 시작되는 상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기원전 476년: 주원왕과 진여공공의 즉위한 해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이 연도를 선택한 이유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이후 시대의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훗날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가 되는 진나라의 국군이었던 진여공공의 시대에 삼가분진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을 두고, 진여공공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삼은 편의적 방법론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현대의 중국 역사학계는 주로 이 설을 채택한다.
기원전 473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연도다. '오월동주'로 대표되는 춘추시대 마지막 패자들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동주열국지류를 비롯한 대부분의 춘추전국시대를 다루는 매체에서는 이 시점을 춘추시대의 마지막 일화 쯤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기원전 453년: 삼가분진으로 희성의 진나라에 대한 분할이 이루어진 직후, 진나라의 최강 세력이었던 지씨가 진양 전투에서 참패해 멸망하고, 3경인 위씨, 한씨, 조씨만 남았는데, 당시 진나라의 국국이었던 진출공은 제나라의 권신인 전씨와 노나라의 권신인 계손씨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3경이 진출공을 역습하여 격파하면서 무산되었고, 이들이 꼭두각시 군주인 진애공을 옹립하면서 위씨, 한씨, 조씨가 본격적으로 자립했다. 일반적으로는 전국시대가 이때 시작되었다는 인식도 많으나, 이때는 3가가 진나라를 3개로 나눠 다스렸지만 아직 진의 희성 국군을 섬기며 제후를 칭하지는 않았고, 주나라 왕실의 인정 또한 받지 못했기에 기준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기원전 403년: 이때부터 진나라가 완전히 분할되어 조, 위, 한이 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국으로 승인받았다. 명목상 천자국이었던 주나라는 삼진의 분열을 막지 못해 주나라 왕은 천자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했으며 희진 영토로는 곡옥과 강만이 공식적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진나라의 국군이었던 진열공은 한때 신하였던 3경에게 문안을 드려야 하는 치욕을 당하게 되어 주나라의 봉건질서는 사실상 이때부터 완전히 붕괴되었다. 보통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연도를 최대한 늦추어도 이때부터는 거의 대부분 전국시대라고 보며, 이 시점이 전국시대의 특징인 주나라 질서의 붕괴와 약육강식이 본격화된 시대라고 본다. 북송 때의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이 연도를 선택했다. 국내의 세계사 및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도 이 연도를 기준으로 전국시대가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기원전 391년 혹은 기원전 386년: 제태공이 전제를 세운 시기를 전국시대의 기준으로 보는 시각이 소수 있으나 이미 삼가분진으로 봉건질서의 붕괴가 공공연해진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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