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조선의 보물, 온 생애를 걸어 지키다 (임진왜란 중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한 선비 안의와 손홍록)
적은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산중을 울리는 함성과 횃불은 여기저기 켜졌을 것이다. 정읍 내장산 기슭, 임진왜란 중 유일하게 남은 조선왕조실록을 피신·보관 중이던 선비 손홍록과 안의. 신하는 임금을 버리고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백성들은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며 자신의 목숨조차 보존하기 어려운 그때, 그들은 생의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 남은 조선왕조실록을 370일간 보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하던 조선의 4대 사고 중 충주, 성주, 춘추관이 소실되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만이 남아 있었다. 손홍록과 안의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30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며 전주 경기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7일간 실록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겨왔다. 그때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였다. 노구를 이끌고 매일 밤 불침번을 서며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시간이 무려 1년 5일, 안의만 174일, 손흥록이 143일, 함께 숙직한 일수는 53일이었다. 그들의 매일은 수직상체일기라는 기록으로 남겨졌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5년간 계속되었다. 결국 안의는 도중에 병을 얻어 67세(1596년)의 나이에 숨졌다. 공을 바랐을까? 벼슬을 바랐을까? 선조가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한 것을 보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명령을 거스르는 김영환을 포살(砲殺)하라 (6.25전쟁 중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보존한 김영환 대령)
1951년 9월 18일, 공군은 해인사 주변으로 낙오된 인민군 900명을 폭격해 달라는 요청을 육군으로부터 받았다. 당시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4대의 전폭기는 네이팜탄 등 수많은 양의 폭탄을 적재하고 있어 투하 시, 해인사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인민군 소재지를 파악한 미 군사고문단에서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을 향한 폭격 명령을 시달했다. 그러나 대령은 미군과 반대로 명령했다. “각 기는 편대장의 뒤를 따르되 지시 없이 폭탄과 로케트탄을 사용하지 말라.”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소사공격하라고 했다. 대원들은 편대장의 명령대로 해인사 뒷산 몇 개의 능선을 넘어 적을 공격했다. 그날 저녁, 미 공군 고문단의 장교가 김영환 대령에게 왜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지 물었다.
“공격을 요청한 곳은 사찰입니다. 사찰은 국가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공비보다는 중요합니다. 공비란 어디까지나 유동물(流動物)이며, 해인사는 단지 그들의 움직이는 통로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그 사찰에는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국보이며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인 문화유산입니다.” 이 일로 이승만 대통령은 “말 안 듣는 김영환을 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즉결처분은 모면한다.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 공적비의 비문처럼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 동안 불멸의 위업을 남겼다.
절을 불태우는 건 한나절, 유지하는 데는 천년도 부족하다 (6.25전쟁 중 천년고찰 화엄사를 지킨 차일혁 경무관)
1951년 5월, 전투경찰 지휘관들은 공비들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을 소각하라는 작전상 지시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그때 차일혁 경무관은 자신에게 묘안이 있다며 상관과 함께 화엄사로 갔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문짝을 모두 떼어내 대웅전 앞에 쌓아라.”
상관은 의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차 대장 어차피 태워버릴 거라면 문짝만 따로 떼어내서 무엇에 쓰겠소.” 그는 상관에게 답했다. “원래 사찰을 소각하라는 이유가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 아니겠소. 이렇게 문짝을 뜯어냈으니 관측과 사격이 훨씬 용이해지지 않겠습니까.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합니다. 문화를 잃으면 우리 마음을 잃고 우리 마음을 잃으면 우리나라를 잃게 됩니다.”
차일혁 경무관의 매일은 늘 치열했고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가득찼다.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다. 그의 짧은 생에는 <진중일기>라는 기록이 남아 민족의 영원한 사표(師表)가 되었다. 전투 중, 그를 지켜본 어느 노인은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를 남겼다. “綱紀整肅世率服 了事謙恭民衆悅(엄숙한 군기 세상 사람들을 감복게 하고, 매사 겸손하니 민중에게 기쁨을 주도다)”
덕수궁 폭파를 포기한다 (6.25전쟁 중 덕수궁을 지켜낸 미군 중위 제임스 해밀턴 딜)
아래의 글은 덕수궁을 폭파 위기에서 구한 날,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가 남긴 일기를 요약한 것이다. 그는 타국의 문화와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았다. 화엄사를 지킨 차일혁 경무관은 딜 중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눈앞의 적보다 역사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1950. 9. 25. ‘덕수궁’의 안과 정원에 적군이 집결했고 이 지점을 포격하면 틀림없이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을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포격 개시”란 말 한마디에 오랜 역사를 가진 고궁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순간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앤더슨 대위와 상의했고 우리는 이 고궁을 살리는 데 최대의 노력을 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적군이 궁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다면 아군의 사상자가 많아질 것이고, 동쪽이나 북쪽으로 가야 적군을 격멸하고 고궁을 살리게 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모험이었다. 초조한 시간이 한참 지나 적군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나는 포격 개시를 지시했다……오늘날 덕수궁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흐뭇함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옛 왕궁을 살려 보존하는 것은 옛날의 생각이나 구조를 따라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에 맞는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한국 국민들이 틀림없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참고문헌
네모의 기록이야기(전가희, 선인, 2020), 문화재청 누리집, 차일혁기념사업회 누리집, 해인사 공덕비(김영환 대령), 폭파 위기의 덕수궁(제임스 해밀턴 딜 외), 한강역사이야기마을(노들나루 동작진)-가야사 해인사 중심의 공비토벌기(서상순 중위), 폭파 위기의 덕수궁(kbs 역사스페셜)
글. 전가희(『네모의 기록이야기』 저자, 경남도청 주무관)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3-06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