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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불교사상
최강현(홍익대 문과대 학장)
Ⅰ. 머리말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언어학에 있어서 일종의 의미론적 접근작업이다. 본래 의미론(Sementique)이란 말은 프랑스의 언어심리학자 브르엘(Breal)이 학술 용어화한 이후 점점 발전해 오게 된 것이다. 한편 아메리카의 언어학자인 블룸필드(Bloomfield, Leonard)는 언어와 심리의 관계를 심리주의면에서 일단 떠나서 주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필자는 전적으로 후자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지칭관계의 문제를 다룬 어휘적 의미론(역사의미론, 공시 의미론, 통시 의미론)과 지칭개념의 문제인 일반 의미론, 구조 의미론 등의 여러 방법중에서 어휘 의미론적 연구 방법을 원용하여 현재 우리 국어에서 쓰이고 있는 낱말과 속담을 통하여 불교사상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Ⅱ. 국어와 민족어
한겨레의 민족어(民族語)는 바로 그 겨레의 생성(生成)과 발전에 따라 형성, 변천되는 것이다. 겨레말과 국어(國語)는 꼭 같은 것이 아니다. 다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국가적 배경 아래 한족(漢族)들의 북경어(北京語)만을 국어로 인정하는 것처럼 민족어와 국어는 다르다. 서양의 스위스는 국어가 도이치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3종의 서로 다른 언어이고, 캐나다는 잉글랜드어와 프랑스어의 2종이 국어로 사용되고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경우는 단군의 후손인 배달겨레라는 단일 민족이기 때문에 한족(漢族)들만이 쓰고 있는 한어(韓語)가 곧 민족어이면서 동시에 한국어가 된다. 따라서 필자가 여기서 국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배달 겨레가 쓰는 한국어를 가리킴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여기서 꼭 알아야 할 일은 과거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경제체제로 변하면서, 지난날 무력에 의하여 합병되었던 러시아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나라들에서 소수의 여러민족들이 자기들만의 민족어를 지켜온 소수민족들끼리 자기 민족어의 어족들만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쳐가며 독립 투쟁을 계속하여 새로운 지역 분쟁으로 발전하면서 세계의 새 화약고가 되는 사례에서 국어와 민족어의 다른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민족어를 갈고 닦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비록 몇 천년간 지구 위를 떠돌며 타민족의 지배 속에 억눌려 살다가도 독립주권 국가 건설이 가능했는데 비하여 자기 민족어를 잊어버리면 그 민족 전체가 영원히 이 지구상에서 소멸된다는 교훈을 만주족(滿洲族)에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어의 큰 힘을 바로 알고, 우리 국어를 더욱 사랑하고 아껴야 할 것이다.
Ⅲ. '돌아가시다' 와 윤회사상
불교에서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남(生)과 늙어짐(老)과 앓음(病)과 죽음(死)을 네 가지 괴로움(四苦)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태어남과 죽음은 보는 곳에 따라 시작과 끝이 달라지겠지만, 극(極)과 극(極)의 먼 시간적 거리감과 공간적 상이감(相異感)이 있으나, 불교적 차원에서 "모든 행위가 무상함은 곧 나고 죽음에 있다(諸行無常是生滅)"는 진리에서 본다면, 인간이 태어남은 사실상 전생(前生)의 끝인 동시에 이승(此世)의 시작이 된다. 죽음은 이승에서 삶의 끝이라고 하겠지만,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내세(來世)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새로운 태어남이 되니,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태어남과 죽음이 사실 한 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이를 불교에서는 "태어남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태어남이다(生卽死死卽生)"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으로 중생이 삼계육도(三界六道)를 헤매면서 생사를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이 윤회사상이 깃들어 있는 낱말을 우리 국어에서 찾아보면, '돌아가다(別世)' 란 말이 있다. 웃어른이 운명(殞命)한 것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돌아가셨다(葉世,作故,仙化,入寂,涅槃 등등)' 라고 한다. 이 '돌아가셨다' 의 기본형은 '돌아가다' 인데, 그 구조를 분석하면 '돌아+가다' 의 합성어이다. '돌다'는 한자어 '歸, 廻' 이고, '가다'는 '去, 住' 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돌다'에서 중생이 행한 업인(業因)과 과보(果報)에 따른 삼세숙연(三世宿緣)대로 수레바퀴 돌듯 윤회(輪廻)한다는 뜻을 찾을 수 있다.
또 '가다' 에서는 동작의 진행을 구체화한 방향을 더듬을 수 있으니, 이 방향이야말로 태어남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짐이라(死也一片浮雲滅)라고 읊은 도통한 스님의 게송(偈頌)과 같다.
중생이라는 인간 허깨비는 어디서 무엇하러 왔다가 어디로 가서 또 무엇이 되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는 마치 대기(大氣)의 조화(造化)로 맑고 드높은 하늘에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이 일어나는 갖가지 형태의 뭉게구름이나 먹구름과 같이 무상한 것이다. 금방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우리 인생은 막연히 이 세상을 '이승(此生, 現世)' 이라고 하고, 우리가 죽어서 가는 세계를 '저승(彼生, 後世)' 이라고 하면서 이승에서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저승이 두려운 곳이며, 가기 싫은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대로 이승에서 착하게 산 사람은 저승을 오히려 영생할 수 있는 옛고향으로 생각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중국의 선승 원오 극근은 나고 죽음을 이렇게 말하고있다.
태어남은 온전한 기미 그대로 나타남이고(生也全機現)
죽음이란 온전한 기미 그대로 드러남이다.(死也全機現)
이 말이야말로 선어(禪語)이다. 그리고 이 시구에 담긴 사상이야말로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이요, 윤회사상이라고하겠다. 이 시구에 의거한다면, 나고 죽음이 꼭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칼날을 수직으로 세워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서로 다른 양면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듯이 우리가 편의상 살아 있는 세상과 죽은 뒤의 세상을 구분하여 부르는 이승과 저승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음을 10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슬기로운 우리 조상님들은 언제부터 써왔는지 알 수 없으나, '살다' 와 '죽다'를 한문어의 '생(生)'과 '사(死)' 의 뜻으로 사용해 왔다. 뒤에 외래 종교인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흥성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윤회사상이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죄악을 많이 쌓은 절대 다수의 일반인들은 죽음을 싫어하면서 '죽다' 라는 낱말까지도 입에 올리기를 꺼리며 천한 말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건물의 층수를 표할 때에 '사층(四層)'을 '죽음의 층(死를)' 으로서의 연상을 피하려고 많은 고층 건물들에서F 라고 층수를 표하거나 아니면 아예 '4층' 자체의 층수를 없앤 사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함부로 쓰기 거북한 '죽다'를 대치하는 데에 불교적 교화 방편인 윤회사상의 이론이 원용된 것이다. 죽은 뒤의 행복과 평안과 영생(永生)을 누릴 수 있는 새 세계가 저승인데, 거기에는 이승에서의 업보에 따른 여러 등급의 다른 세계가 또 나뉘어 있으니, 좋은 곳이라든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다시 태어나려면, 이승에서 착한 일을 열심히 하거나, 아니면 악한 일만이라도 짓지 말 것을 가르쳐왔다. 그래서 저승에는 이승 사람들이 염원(念願)하는 이상세계(理想世界) 곧 극락(極樂)과 기피(忌避)하는 혐오세계(嫌惡世界) 곧 지옥(地獄)이 있는 것으로 교화(敎化)되었다. 이 보편화된 저승에로의 복귀를 상징한 말이 바로 '돌아가시다' 이고, 이 말은 곧 혐오어인 '죽다' 와 교체되면서 높임말로 둔갑하게 된 것이라고 풀이된다.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보조 어휘로 '고태골, 고터골,고택골' 로 표현되는 '공동묘지(共同墓地)' 또는 '무덤' 의 뜻으로 쓰이는 충청도 사투리가 있다. 이 말은 아마도 한문어 '탄생(誕生)' 과 '출생(出生)' 의 뜻으로 쓰이는 순수한 우리말의 '나다, 태어나다' 와 관계가 있는 듯하다. '나다'는‘生,出生,産,出産'의 뜻으로 쓰이면서 '죽다' 와 조응된다. '죽다' 의 높임말로 '돌아가시다' 가 생성되면서 동시에 '나다' 에 어디에서 낳아지게 되었는가를 밝혀주는 의미로 앞 가지에 '태(胎)' 가 덧붙어서 '태어나다(出於胎, 産於胎.,生於胎)'로 형성된 것이 아닌가 풀이해 본다.
이것을 좀 더 확대 해석하면, '태(胎)'와 '무덤(墓,墳,塚)' 이 같은 곳으로 유추될 수 있다. 쉽게 다시 풀어서 말한다면, 사람이 어머니의 태반(胎盤)을 통하여 출산되어 사고(四苦)를 겪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저승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가서 새 생명을 이어받아 '태어나게' 될 것이고, 사람들 눈에 보이는 육신(肉身)만은 무덤으로 가서 한줌 흙이나 재가 되고 마니, 이 무덤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는 태반으로 생각될 수 있다. 따라서 '고태골' 은 한자어로 바꾸면, '古胎谷' 이 되어 옛날 태반이었던 골짜기' 이고, '고택골' 은 '古宅谷'이 되어 '옛날에 살던 집이 있는 곳'이 될 것이고, '고터골'은古垈谷'이 되어 '옛날 집이 있었던 자리' 라는 뜻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죽다'가 '돌아가시다'로 파생된 것이나. '무덤' 이 '고태골, 고택골, 고터골' 등으로 파생된 것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뒤에 불교의 윤회사상이 보편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생성(生成)된 낱말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다시 요약 정리해 보면, 전세(過去世)에 살던 어떤 곳(前住谷)에서 각 중생의 업연(業緣)에 따라서 또 새로운 업인(業因)을 지으면서 고해(苦海)를 거품처럼 살다가 죽음을 맞아 전에 살던 곳(前住處)으로 돌아가서 다시 새 세계(未來世)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우리 조상들은 믿어 왔던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덧붙여 둘 것은 이 불교적 윤회사상에서 파생된 또 다른 낱말들로 '이승' 과 '저승' 이라고 하는 현세(現世)와 내세(來世)를 뜻하는 어휘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Ⅳ. 속담에서의 불교사상
이제까지의 논급은 어휘론적 의미론의 연구방법으로 살펴본 것이다. 이 항에서는 우리 선인들이 즐겨서 사용해 온 속담 속에서 불교의 사상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1. 노는 입에 염불하기와 정토사상
우리나라 신라(新羅)시대 노래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전해오는 '완전차자표기가(完全借字表記歌)' 가 있다. 이 노래의 대체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최鶴璇의 번역을 참고하여 필자가 줄끊기를 새로 해 본 것이다).
달님이여!
이제 서방으로 가십니까?
무량수불 앞에 되풀이해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 모아
'원왕생! 원왕생!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아! 이몸 남겨두고 사십팔 큰 소원 이루실까?
이 노래는 노래말 속에서 '원왕생(願往生)' 을 거듭 외치면서 서방세계에 가서 새로 태어나기를 소원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들이 신라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서방세계로의 귀의를 간절히 바랐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작품이라는 인식 아래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노래에서 지은이는 극락세계(極樂世界)로 통하는 불국토(佛國土)의 상징인 서방(西方)에서 영생과 안락을 얻으려고 달님을 통신 매개자로 삼아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나아가서 두 손 모아 전달해 달라고 빌고 있다. 그러면무량수불은 누구인가?
산스크리트(Sanscrit)인Amitayus, Amitabha의 번역으로, 이 부처는 수명(壽命)이 장원(長遠)하여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태장계(胎藏界)에서 이르는데 반하여 금강계(金剛界)에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부른다. 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수없이 부르고 따르면, 그 사람은 아미타불의 품에 안겨 영원히 살게된다는 것이다.
위의 광덕 스님은 노래의 끝 구절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렇게 간곡히 기원하고 있는 나를 무량수불께서 데려가주지 않고서 어떻게 아미타불이 스스로 서약한 사십팔 큰 소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까지 다그치고 있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염원한 서방세계로의 왕생 의식은바로 불교의 정토사상(淨土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토란 곧 예토(穢土)의 반대말로, 원래는 불보살(佛菩薩)들이 사는 나라로 오탁(汚濁)과 악도(惡道)가 없는 곳을 말하였는데, 뒤에 서방왕생의 사상이 융성해지면서 특히 서방 극락국을 가리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이후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불교가 더욱 번성해지게 되매 이 정토사상이 저절로 일반 서민들에게 퍼져서'노는 입에 염불하라' 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노는 입에 염불하기' 란 곧 '할 일이 없이 그저 노느니 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좋다' 는 공리적 교훈성(功利的 敎訓性)을 담고 있으나, 필자의 좁은 소견에 궁금한 것은 왜 굳이 '염불(念佛)'을 하라고 지정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염불' 이라면, 중국의 당(唐)나라 선도화상(善導和尚)이 『아미타경』을 10만여 권이나 베껴서 널리 보급한 이래 '염불왕생(念佛往生)'의 뜻으로 쓰이면서 아미타불에 귀의하겠다는 서원(誓願)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육자명호(六字名號)를 염송(念誦)하는 경우와 '아미타불(阿彌陀佛)' 의 사자(四字) 명호만을 외는 경우를 의미한다. 조선 숙종 때의 명연(明衍) 스님이 지은 『대미타참략초요람보권염불문(大彌陀懺略抄要覽普勸念佛文)』에 따르면, 책의 맨 앞 머리에서 '모든 부처가 아미타불만 같지 못하다(諸佛不如阿彌陀佛)' 라고 하고, 이어서 '모든 부처를 염함이 아미타불을 염함만 같지 못하다(念諸佛不如阿彌陀佛)'라고 한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 속담이 언제부터 쓰여 왔는지는 그 정확한 연대 추정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살고 있었을 당시로서는 하층 일반서민들이 얼마나 간절히 정토세계에서의 새로운 삶을 갈구하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극락세계의 주관자인 아미타불의 명호를 천성(千聲), 만송(萬誦) 거듭거듭 외우면, 왕생 정토하여 아미타불의 품에 안겨 구품연화대(九品蓮華臺)에서 영생과 영락(永樂)을 누릴 수 있다는 정토사상이 우리 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요충성(要衝性)에서 비롯된 내우외환(內憂外患)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유추해 본다. 현세의 생활이 얼마나 불안하고 고달프고 견뎌내기 어려웠으면 온 국민의 일치된 염원인 인사말이 '안녕하십니까?' 인가를 생각해 볼 때에 언제부터인지는 역시 불분명하지만, 이런 인사말이 통용된 이후부터는 하루도 마음 놓고 편히 살 수 없는 이승의 삶을 차라리 청산하고 저승에나 가서 새로운 삶을 기대해 보자는 소박한 현실 기피 의식이 종교적으로 불교의 정토사상과 일치했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2. 절간의 쥐와 자비사상
우리 속담에는 부처와 절간을 소재로 한 것들이 의외로많다. 그러나 그 주제는 대부분 불교 사상을 반영하기보다는 불교를 배척, 비방하거나 스님들을 모욕하는 것들이다. 필자가 수집한 이 관계 자료 70여 속담 중에서 불교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절간의 쥐 같다'는 예를 하나 찾아내었다. 이 속담은 우리 주변에서 버릇없이 제멋대로 방자히 처신하는 동료 또는 아랫사람을 비유하여 그렇게 표현한다. 이는 불교의 자비 사상때문에 사찰에서는 일체의 생물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므로 (요즈음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잡힐 염려가 없는 방자한 쥐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법당 안팎을 함부로 돌아다닌다는 데에서 연유된 것으로 풀이된다.
『법구경(法句經)』의 「도장품(刀杖品)」에는 이런 가르침의 말씀이 있다.
모든 생물은 죽기를 두려워한다
모든 생물은 채찍질을 무서워한다
저의 생명을 아끼듯 견주어서
남을 죽이려 채찍질 하지 말라
이 얼마나 진솔한 가르침인가? 어려운 고사도, 숙어도 없는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체험할 수 있는 평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다. 사실 부처님은 파리 한 마리, 모기 한 마리, 이 한 마리조차도 죽이는 것을 금하셨고, 풀 한 포기, 한 그루 나무까지도 꺾거나 베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수 많은 여러 종교 가운데서도 유독 불교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자비사상이다.
오늘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바로 이러한 불교의 자비사상을 본받아 내 목숨을 아끼듯 남의 생명도 존중해 주어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때에 극락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안양(安養)이요, 서방(西方)이요, 정토(淨土) 세계가 될 것이다.
V. 맺음말
이제까지 언급한 것을 요약, 정리하여 맺음말로 대신하기보다 서툴지만 저 유명한 조주(趙州: 778-897)화상이 그의 제자에게 준 게송(偈頌) 한 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느니
낱말도 옳고 여러 말도 지당타
하나는 결코 하나만이 아니며
둘이란 결코 둘뿐인 게 아니다
하늘엔 해와 달이 뜨고 지는데
창 앞의 산은 깊어, 물이 차갑다
해골은 모든 감정 없는데 어이 섰나?
수풀은 용의 노래 즐기니 살아 있네
어렵다. 말은 쉽지. 현실은 어려운 것
살펴서 밝게 골라. 그리고 네가 봐라
『벽암록(碧巖錄)』에서
승가 10호에서 옮김.
1993년 8월호 미주현대불교 제 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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