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6장 1절 – 11절)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 또한 유다여 내가…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개역개정)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참으로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습관적인 신앙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내용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경고와 심판보다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저지르는 죄악의 고발과 심판의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의 선언은 더 놀랍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1-3,참조 53:1-3). 아니,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하나도 없도다”는 선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까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그 하나님은 누구라는 말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내용은, 단지 우리의 고백과 지식과 제의와 교리적으로 아는 그 하나님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언 뒤에, 믿는다는 이들의 흔한 죄악을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시14:4)는 지적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악행을 일삼는 위선적인 신앙인들로 만연한 실체와 실상을 고발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선언합니다. 또 전도서는 우리 현실의 모순적인 죄악과 신앙인들의 실체를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전3:16)고 선언하며,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전7:20,새번역)고 일깨웁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아홉 편의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 전체적인 서론의 선언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4:1-3)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겸손히 우리 자신을 돌이켜 진정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설 것을 당부하는 것이 호세아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호세아의 첫 번째 설교(4:1-5:4)에서는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저지르는 죄악이 무엇인가를 경고했다면, 두 번째 설교(5:5-6:3)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보니 단지 자신들이 믿는 자라는 어리석은 “교만”으로 인해 저지르는 죄악 때문에 망하리라는 심판을 경고합니다.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교리를 적극적으로 시인하고 고백한다고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가 진정한 의미의 유신론자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선언이며, 신앙인이라면 선하신 하나님의 선을 실천하는 삶을 사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선언입니다. 1. 구원의 희망과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의 성경 본문은, 앞부분(6:1-3)은 호세아서의 두 번째 설교(5:5-6:3)의 결론 부분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서기위하여 돌이켜야 할 회개를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이어 세 번째 설교(6:4-7:7)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점과 이로 말미암은 “교만”의 죄악이 빚어낸 잘못된 신앙의 문제가, 사람들 사이에 “인애”를 잃어버리게 했다는 점에서 믿는 이들의 도덕적 죄악에 대한 책망과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전7:20,새번역)는 선언처럼,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완전히 의로운 사람 곧 ‘의인’(義人)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의 ‘의인’(義認)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 ‘의인’(義認)과 ‘의인’(義人)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 부르시는 구원의 메시지 곧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기에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럽고 부족한 죄악의 사람인가를 겸허히 깨닫고 매 순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의 자세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4:17)고 초청하셨고, “회개”가 단지 종교적 행위에 머물지 말 것을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라고 요청했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행26:20)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호세아 선지자도 두 번째 설교(5:5-6:3)의 결론으로서, 하나님의 심판 경고 앞에 민족적인 회개를 어떻게 외칩니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 오직 우리 구원의 희망과 회복의 은혜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호세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합니까? 결국 저들의 신앙과 삶이 죄악으로 하나님을 떠나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런 호소를 하는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5:5-6)는 선언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5:15)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 민족 앞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고 초청한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한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호소합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왕국을 멸망시켜 포로로 끌려가게 한다할지라도 그러한 저들을 다시금 치료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둘째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살려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6:2). “이틀 후”나 “셋째 날”은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운 시일에 이루어질 것을 상징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회복의 구원과 풍요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6:3). 어김없이 동터오는 “새벽 빛”과 때를 따라 황무지를 풍요하게 하는 “비”처럼,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확실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희망과 은혜가 하나님께 있기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는 회개의 촉구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6:3)고 재해석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알기 위해서 마음과 뜻을 다하여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자는 권면입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들 성경 구절과 신학적 교리적 지식을 많이 알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종교 행위로서의 예배를 열심히 드리면 신앙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호세아 선지자는 세 번째 설교(6:4-7:7)를 통해서, 믿는다는 사람들이 흔히 놓치고 사는 잘못된 신앙의 관행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따라서 호세아 선지자는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어떠한 탄식과 질문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합니까?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6:4). “에브라임”이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가장 큰 상징적 지파이기는 하지만, 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명칭이 아니라 “에브라임”이라는 지파 명칭을 통해서 북 이스라엘을 호칭합니까? 그것은 북 이스라엘의 10지파뿐만이 아니라 남 유다를 포함한 12지파 중에서 가장 큰 지파라는 점과, 이로 말미암은 그들의 “교만”이 북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남 유다에까지 곧 민족 전체에 빚어내는 죄악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한국의 대형 교회가 하는 일들이 많지만, 오히려 그 일들이 한국 교회에 미치는 악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가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는 것은, 이제는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며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새번역)고 하는 절망스런 한숨입니다. 저들을 깊은 죄악에서 돌이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경고와 회개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해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하나님의 허탈해하는 탄식의 표현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도대체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열망도 관심도 없는 저들의 잘못된 신앙의 열심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한 절규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민족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깊은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인 불의의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그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지적합니까?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6:4). “너희의 인애”는,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저들의 마음을 가리키고, 둘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사랑 곧 “인애”를 아침 안개인 “아침 구름”과 “이슬”로 비유합니다. 이것들은 해만 뜨면 사라지기에 “쉬 없어지는” 곧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로 비유함으로써, 믿는 사람들에게서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중요한 표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자세 아닙니까? 따라서 사도 요한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며,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7,12)고 말씀한 의미를 깨닫고 순종하는 이들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일깨우기 위해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6: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선지자들”을 세워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백성들과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의 심판 경고를 통해서 자각과 각성의 회개를 요청했지만 모두가 묵살했습니다. 그것은 극히 소수의 “선지자들”을 빼고는, “선지자들”조차도 다수가 거짓된 종교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끊임없이 왜곡시켰습니다. 그들은 입술의 고백과 제의적 종교 행위로는 ‘사상적 유신론자’였지만, 탐욕의 우상숭배에 물든 그들의 삶의 행태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거부하는 ‘실천적 무신론자’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된 신앙 행태의 변화와 회개를 요청하는 어떤 놀라운 선언을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제사”와 “번제”는 제물을 불살라 바침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에 대한 속죄와 헌신을 상징하는 예배로서의 종교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종교 행위가 필요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종교 행위가 목적하는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 것에 대한 자각과 각성의 요청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은, 단지 “제사”와 “번제”에 멈추는 ‘종교 행위자들’이 아니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까지 나아가는 보다 성숙한 ‘신앙 행위자들’이 되기를 바라신다는 의미입니다. 3. 믿는 자들이 저지른 죄악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막상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리적인 신학 지식과 단편적인 성경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지식적 유신론자들’이면서도, 막상 신실하게 그 삶을 묵묵히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성경적 유신론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들을 지식적으로는 무신론자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며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이라는 점에서 ‘실천적 실제적 무신론자들’이라고 지칭합니다. 이것이 호세아 선지자와 그의 설교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4:1-3)라고 탄식하며, 주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 자세를 새롭게 요청하시는 이유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보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라는 탄식을 앞세웠다고 생각합니까? 흔히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은 있다고 착각하는 습관적인 신앙 행태들에 대한 경종을 불어넣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을 제일 먼저 강조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 가장 우선되는 “언약”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앙의 죄악에 빠지게 된 근원을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6:7)고 일깨웁니다.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담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을 망각하고 어기는 그 자리에, “진실”과 “인애”가 사라지며 벌어지는 일들이 하나님께 거짓 행위를 일삼는 “반역”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번역에서 대부분의 믿음이 “진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인 ‘Faith’로 표현되고 있고, 종교 행위로서 입술의 고백적인 믿음을 ‘Belief’라는 영어 단어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들이 복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는 순간, 신앙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을 어떻게 비유하여 경고합니까?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6:8-9). “길르앗”은 길르앗 라못 성읍을 가리키며 “세겜” 성읍과 함께, 악의가 없이 살인한 자들의 도피성으로 지정된 곳(수21:21,38)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곳이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과 “강도 떼”로 변한 “제사장의 무리”로 가득하여 “피 발자국” 곧 핏자국과 온갖 악한 일을 도모하고 실행하는 “사악”한 성읍이 되었다고 고발합니다. “세겜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 통로입니다. 제사장들이 이런 동족들을 시기하여 물품을 약탈하고 심지어 죽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어야 할 거룩한 성읍들에서 주님께서 발견하고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탄식합니까?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6:10). “이스라엘 집”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그 타락의 죄악을 주도한 곳은, 자신들이 가장 큰 지파라고 자부하며 “교만”했던 “에브라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주전 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 남 유다 백성들은 저들의 파멸을 마음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죄악을 돌이키는 기회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같은 민족의 파멸을 기뻐하고 비웃으며 당연시했습니다. 이처럼 같은 동족에 대한 “인애”를 잃어버리고 비정한 남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동일한 심판의 경고가 어떻게 선언됩니까? “또한 유다여, 내가…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6:11). “추수할 일”은, 신앙인들이 심고 뿌린 대로 거두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심판 때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 경고대로 “유다” 백성 역시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며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6:3)고 하는 민족적인 회개를 촉구하셨던 것인지를 아시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 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와 뜻인지를 새롭게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백성들처럼 동일한 죄악에 물들어 동일한 심판의 파멸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아모스 선지자는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암9:8,10)고 경고합니다. 이 뒷부분을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나의 백성 가운데서 ‘재앙이 우리에게 덮치지도 않고,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못할 짓만 하는데도 내 백성이라고 하여 칼에 맞아 죽지 않게 하겠느냐?”(새번역,공동번역)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14:1,53:1)라고 하는 탄식의 선언에서, “어리석은 자”는 부족하여 미련한 죄악의 사람을 가리키는 성경의 일상적인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믿지만 교만하여 자기 악행을 당연시하는 불신앙적인 방자하고 뻔뻔한 죄악의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을 통하여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4:1)라는 선언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 곧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며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하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6:1,3)는 외침은, 호세아서의 핵심 주제이자 선지서와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도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21:13)라고 탄식하셨던 음성을 가슴에 담고, 최근 한국 기독교인이 왜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되었는지를 안다면, “진실”과 “인애”를 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매순간 주님께로 돌아가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