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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사 60:1-3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어느 날 영국의 유명한 의사에게 한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그 환자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였고 번민에 가득 차 보였습니다. 의사는 진찰 후에 그가 극도의 스트레스로 우울증 걸려 있음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충고해 주었습니다.
스트레스는 몸을 치료하는 것보다 정신적 휴식이 더욱 중요합니다. 약을 쓰시기 전에 먼저 극장에 가서 ‘그리말디’의 희극을 관람하십시오. 그 곳에서 실컷 웃고 마음을 풀어주십시오. 그 후에 다시 치료를 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말디’라는 사람은 당시 런던에서 굉장한 명성을 얻고 있던 희극배우였습니다. 그 사람은 관객들을 웃음으로 사로잡는 재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말을 듣던 환자가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약으로 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약으로 처방이 안 될까요?”
그러나 의사는 끝까지 자신의 처방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실은 제가 바로 ‘그리말디’입니다.”
의사는 이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런던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즐겁게 해 주던 그가 그 자신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우울증에 빠져 웃지도 못하고,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일인데, 우리나라에서 ‘행복 전도사’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자 방송인인 최모씨가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한 사건으로 온 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쓴 저서에서 일관성 있게 ‘희망과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행복 그거 얼마에요, 행복이 뭐 별건가요, 유쾌한 행복사전, 행복의 홈런을 날려라 등등...” 이 외에도 행복에 관한 그녀의 저서가 많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저서들과 방송을 통해 평소 “슬픔, 처절한 아픔, 고통의 순간에도 행복을 노래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실패와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실체를 알고 보니, 정작 본인은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우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도 “행복전도사”라는 굴레에 갇혀, 치료도 받지 못하고 내색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깊은 불행의 수렁에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원리가 있듯이 행복에도 분명한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행복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장난감이나 과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이 일시적인 행복감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곧 싫증이 납니다. 그 때 아이는 무엇을 찾습니까? 엄마입니다.
아이에게 있어 행복의 근원은 엄마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함께 있을 때 과자가 더 맛있고, 엄마가 함께 있을 때 노는 것이 더 즐거운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돈이나, 학력이나, 권력이나, 명예, 좋은 차, 좋은 아파트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곧 그러한 것에 싫증을 내게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꼭 갖고 싶었던 것, 그것을 가졌을 때 얼마동안 행복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 기쁨은 곧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또 다른 기쁨을 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것처럼, 나 자신을 이 땅에 있게 하신 분과 함께 있을 때, 진정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엄마가 꼭 필요하듯, 우리의 모든 인생에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고 자녀 삼아주신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이 관계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희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열심히 놀다가 엄마를 잃은 아이가 엄마를 찾지 못해 울다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그 아이에게 기운을 주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어디에 가면 네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닐까요? 지쳐서, 더 이상 기력이 없어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네 엄마를 저기서 봤다”라고 말하면 아마도 그 아이는 죽을힘을 다해서 다시 일어나 엄마를 찾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엄마만이 자기의 절대적인 보호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의 절대적인 보호자인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그들의 절대적인 보호자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민족 멸망 직전의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스스로 그들의 보호자인 하나님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장인 59:1-3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께서 도우시려고 해도 도울 수가 없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진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그들은 악한 일에 너무도 깊이 빠져 하나님을 긍휼을 입을 수 있는 자격마저 상실했던 것입니다.
또 그 앞부분인 54장에 보시면 이스라엘은 자식도 다 잃어버리고, 남편도 다 잃어버린 과부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런 꿈도 소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56:10입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여러분, 파수꾼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적들이 쳐들어오거나 위험에 빠지게 되면 소리치고, 알리는 것이 그들의 임무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다 “맹인이요, 무지하며, 벙어리고, 잠자는 자니” 그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은 바벨론에게 침략 당해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의 70년간 포로생활로 연단된 뒤에 고레스칙령으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때의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것만 해결되면, 이 이 때만 넘기면, 이 고비만 넘기면 하고 앞으로 있을 소망을 붙들고 이겨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문제가 해결되고 그 고비를 넘기고 나서도, 비슷한 상황이 계속되거나 더 큰 난관을 만나게 되면, 더욱 낙심하여 완전히 주저앉게 됩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희망과 기대를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예루살렘 성은 기대한 것과는 달리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더구나 주변 민족들은 그들이 돌아온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들의 재건을 방해하고, 억압하고, 탈취했습니다.
이에 낙심한 예루살렘 주민들은 원망을 늘어놓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일어나라” 히브리어로 ‘쿰’입니다.
여기서 ‘쿰’ 이라는 말은 신약성경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면서 말씀하셨던 ‘달리다굼: 달리다-소녀냐, 굼-일어나라’, 바로 그 단어입니다. “달리다 굼 - 소녀야 일어나라”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죽은 소녀가 ‘일어나라’고 한다고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니 죽은 소녀는 듣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달리다굼’ 명령하셨을 때에 그 소녀는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일어나라” 명령하심으로 죽은 소녀를 살렸다면, 좀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일으키시는 것이야 그렇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좀 지쳐서 엎드려 있는 우리를 일으키시는 것이야 예수님에게는 아주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도 ‘쿰’이라는 예수님의 음성들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그 모든 문제에서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일어나라”는 이 말씀을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일어날 힘까지도 공급해 주시므로, 우리가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의 문제입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에 있더라도 “일어나라”는 이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가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났으면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라”라는 말씀이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라면,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사회적인 사명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사명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4-1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빛’은 창조의 근원이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너희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으로는 자기 속에 어둠이 없도록 겸비하고, 밖으로는 세상의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옛 습관들을 청산하고 끊어내야 합니다.
특히 ‘빛’을 말라기서 4:2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면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빛’ 곧 ‘치료하는 광선’을 비출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외양간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 송아지처럼 기뻐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의 빛,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비춰짐으로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치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놀라운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어지는 2절에는 빛을 비춰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는데 ‘어둠과 캄캄함’입니다. 여기서 어둠과 캄캄함은 죄악과 죽음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죄악과 죽음의 세력이 온 땅과 온 인류를 덮고 있기에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부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세상의 빛’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의 원천은 아닙니다. 우리는 반사체입니다.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해 주듯이, 거울이 햇빛을 반사해서 그늘진 곳을 밝혀 주듯이, 우리의 사명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 구원의 생명의 빛을 전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고, 그 임재 안에 머물기만 하면, 마치 우리 자신이 빛인 것처럼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거울의 표면이 매끄럽고 깨끗할수록 더 잘 빛을 반사할 수 있듯이 우리의 마음이 맑고 깨끗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전심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의 광채가 우리에게서도 잘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할 때 일어나게 될 여러 가지 일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 때, 믿음에서 떠나갔던 우리자녀들이 돌아오게 될 뿐만 아니라, 이웃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들도 범사에 잘되고 형통함을 맞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그 빛을 통해 우리의 삶에 형통함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인 것입니다.
또한 이 형통함은 우리 믿는 자들만의 형통함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기에,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그곳이 형통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과 생명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이 말씀 앞에 믿음과 헌신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평안하기를 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주어짐을 오늘 다시 깨닫습니다. 저희들 모두, 이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빛으로 삼음으로 어두운 이 땅 가운데, 일어나 빛을 발하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구원의 빛을 땅 끝까지 전하는 복음이 일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