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17,22-27)
“What is your opinion, Simon? From whom do the kings of the earth take tolls or census tax? From their subjects or from foreigners?”
말씀의 초대
모세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이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특별히 선택하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러한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고, 그분께서 내리신 계명과 규정들을 잘 지키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는지 묻는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지만, 이 일로 하느님의 계획을 그르칠 수 없다고 여기시고 성전 세를 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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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성전 세는 스무 살 이상 된 남자에 한하여 해마다 ‘두 드라크마’(스타테르 반 닢), 곧 이틀 치의 품삯을 내어야 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의 과세에 대해서는 분개하였지만, 성전에 바치는 세금에 대해서는 민족적인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 세 납부의 여부는 유다인들의 관심거리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이 없다고 하시며 성전 세를 내십니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권리가 있기는 하셨지만,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하느님의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께 중요한 것은 ‘성전 세 납부의 여부’보다도,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하여 덜 중요한 가치를 희생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지혜는 우리에게도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많은 부부가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이기려고 인격을 무시하는 말투를 보이기도 하고, 고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소한 부부 싸움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복한다고 해서 서로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의 승리가 그 가정에 행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이러한 분란을 겪을 때마다 자신의 정당함을 굳이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면서 더 큰 가치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 예고와 나의 선입견
-김명숙-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통해 예수님은 장차 죽임을 당하겠지만 사흗날 부활하실 것을 알려주셨고, 제자들은 슬퍼했다. 메시아는 왕이 되는 거라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왜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첫 수난 예고 때도 베드로는 메시아가 수난 당하는 “그런 일은 없다.”고 반박했고(마태 16,21-23), 예수님은 인간적인 일만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서 분심을 쫓아내셨다. 유다인들은 고통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투사를 기다려왔고(루카 24,21), 제자들도 주님이 당하실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같은 이유로 유다인들은 지금도 ‘고난받는 주님의 종’을 노래한 이사야서 53장을 메시아를 향한 미래 예언으로 보지 않고, 바빌론 유배 때 고통받던 이스라엘로 해석한다. 메시아는 고통받지 않는다는 뿌리 깊은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수난과 부활 예고에 슬퍼한 걸 보면, 부활 또한 실제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다.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주님의 말씀과 행적이 영원히 남는다는 비유적 의미로 이해한 것 같다.
이제까지 배워온 경험과 지식만 믿으려는 우리 인간 본성이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만들어 내는가! 고정관념에 눈이 가려진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과정은 몹시 길었고,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때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보지 않고도 고정관념에서 일찍 해방될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홍수 같은 지식의 바다에서 내가 아는 것이란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편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 한가해서 이발을 하기 위해 미장원에 들렸습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꽤 사람들이 많았고, 저는 의자에 앉아서 저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학생 한 명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학생은 어떻게 오셨느냐는 말에 파마를 하러 왔다고 말하더군요.
드디어 제가 이발할 차례가 되었고, 그 여학생도 파마를 위해 제 옆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용사가 이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만 이렇게 말합니다.
“학생! 머리카락 가지고 이것저것을 장난쳐서 모발이 너무 상했어. 파마를 할 수 없겠는데?”
이 말에 학생은 울상을 지으며 “방학이라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랬더니 이렇게 되었네요. 어떻게 해야죠?”라고 말을 합니다.
아마도 학교에 가지 않는 방학이라 자유롭게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자유로움은 이 학생처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더 큰 상처와 불안감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하긴 저 역시 그 학생과 같은 나이 때에는 머리카락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장원에 가서도 꼼꼼하게 어떻게 저렇게 깎아달라고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참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많이 썼었음에 미소를 짓게 됩니다.
어렸을 때에만 쓸데없는 데에 온 힘을 쏟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들은 쓸데없는 데에 온 힘을 쏟으면서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에 성실하지 못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마치 목숨을 내어 놓을 듯이 달려드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반복하고 있습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들이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 이것만 있으면 다른 것들은 아무 상관없다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 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전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에 굳이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으시지요. 또한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가족이기에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성전 세를 내라는 사람들과 맞붙어 정의를 외치며 납세 의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성전 세를 내라는 유다인들과 부딪히면 과연 어떨까요? 아마 예수님께 계속 시비를 걸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테고요. 이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신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우리 전부를 거는 어리석음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에 우리 모두를 걸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게 사는 것이며,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무례한 사람의 행위는 내 행실을 바로 잡는 스승이 될 수 있다. 무례한 상황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먼저 내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한다.(공자)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양승국신부-
<어이없고 황당한 성전세>
탈출기는 성전세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께 예물을 올려야 한다.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탈출기 30장 13절)
그럼 반 세켈의 화폐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약 두 데나리온 정도였습니다. 통상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10만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성전세 납부 시기는 통상 과월절 전까지였습니다. 유다인들은 과월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 방문하여 납부하곤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세리들이 방문 징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전세의 용도는 유다인들 삶과 신앙의 중심인 성전의 유지, 관리, 보수 등 전반적인 운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세 수입이란 것이 당시 막대한 것이어서 로마로부터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까지 성전세 수입을 계속되었는데, 아무리 지출해도 남아돌다보니 나중에는 성전에 금으로 된 포도송이를 제작해 장식해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해외에 나가 살던 유다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칭했는데, 그들도 1년에 한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전세를 꼬박꼬박 바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방국가의 돈을 유다 세켈로 바꾸어 바치도록 되어 있어 환전상들은 막대한 환전차익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거룩해야 할 성전이 자꾸만 훼손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전세 납부를 면제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거지들은 납부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도 제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존경받는 랍비들도 제외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당대 선풍적인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큰 스승이셨기에 당연히 성전세 납부 제외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전세를 왜 바칩니까? 성전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의 주인에게 성전세를 바치라고 한다면 이처럼 웃기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어이없고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과 신앙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제자들은 당연히 성전세 면제의 첫 번째 대상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성전의 주인이셔서, 이 세상 전체,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셔서 성전세를 낼 이유가 전혀 없지만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셨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당신께서 추진하고 계시는 인류구원사업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기에 아주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처신하신 것입니다. 성전세라는 것 필요한 것이었지만 목숨 걸고 고수해야 할 절대 진리가 아니었기에 예수님께서 큰 마음먹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시는데, 참으로 그 내용이 의아하기 짝이 없습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왜 예수님께서 당시 제자 공동체 총무였던 유다에게 한 세켈 달라고 해서 베드로에게 주면서 “옛다. 빨리 갖다 바쳐라!” 하지 않고 낚시를 하게 보내십니까? 그리고 입을 열어보게 하십니까? 또 희한하게 고기 뱃속에서 동전을 꺼내 성전세를 바치게 하십니까?
이 부분에 너무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자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세상만물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깟 성전세 몇 푼에 연연하는 분이 아니심을 명명백백히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하시고, 또한 코믹하시고, 더불어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출발
-박진형 신부-
국민이라면 국민으로서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 가운데서도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는 납세의 의무가 있는데 세금을 냄으로써 국가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성전세도 모든 이스라엘인이라면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이었습니다. 즉,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해마다 성전에 일정량의 세금을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세상의 법을 지키는 일에도 뱀처럼 슬기롭게 대처하는 자세를 보여 주십니다. 세상 속에서 지혜로이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세상 가운데 신앙인의 자세를 취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창한 데서가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기초적인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기본에 충실하였을 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마태 7,25) 어떤 흔들림도 없고 어려운 난관에 부딪쳐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랑의 계명에 더욱 충실하면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오히려 더 나은 방향으로 주님을 올바르게 따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기초적인 것을 잘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쌓자
-임창현신부-
사람들은 공짜를 좋아한다. 그래서 물건을 살 때 무엇을 덤으로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선택이 많이 달라진다. 1.6리터짜리 맥주를 살 때도 예외가 아니다. 그냥 맥주 PT와 예쁜 꽃다발 같은 안주가 걸려 있는 맥주 PT가 같은 가격으로 나란히 있으면 손은 자연스럽게 안주가 걸려 있는 쪽에 닿는다. 이런 마음 때문인지 내가 어릴 적부터 포도송이를 채우는 동네 슈퍼 스티커, 열 번 미용을 하면 한 번은 공짜인 미용실 도장 등 적립 상품이 많이 있다. 이것이 발전하여 요즘은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 카드가 광고에 등장할 정도로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 이러한 포인트의 기본 개념은 많이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공짜, 곧 혜택을 많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사랑을 많이 이용하면 할수록 우리 영혼에 행복이라는 포인트가 쌓이고, 이는 하늘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 포인트를 쌓는 방법! 오늘 신명기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가 잘 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늘나라에 포인트를 쌓는 하느님 자녀가 되어가는 것이다. 오늘도 하늘나라에 포인트를 그득 쌓는 하루가 되길 희망한다.
통 크게 쓰기
-김찬선신부-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다.”
공동생활을 하다보면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깐깐한 사람과 대범한 사람입니다.
여간해서는 깐깐한 사람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수 없고,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와 함께 무엇을 하려면 당연히 사사건건 시비를 가려야 합니다. 반면 대범한 사람은 중대한 문제가 아니면 잘못이 있어도 눈 감아 주고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이 하려는 것에 동조합니다.
저희 형제들 중에 이 면에서 아주 탁월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늘 긍정적으로 봐주고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려고 하니 그와 함께 일을 하면 마음 편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늘 지지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깐깐한 사람은 일적이고 법적인 사람이고 대범한 사람은 관계적인 사람이라고 성격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사랑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북한에 식량을 보내면서 적잖이 마음고생을 하였습니다. 우리 정부의 눈치도 봐야 했고, 북한 측도 설득해야 했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많고, 생각이나 일처리 방식이 다르다 보니 사소한 것에서 오해가 생깁니다.
이런 것들을 따지다가 문뜩 생각하는 것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자는 말이고, “신부 선생, 통 크게 쓰시라우요.”하고 북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이 법이나 절차를 너무 따지지 말고 통 크게 사랑하자는 말,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자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오늘, 저에게는 비위를 건드리지 말자는 주님의 말씀과 통 크게 쓰라는 말이 겹쳐 들리는데 잘못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선한 고해성사
- 최재도 신부-
아마 2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한 월간지의 표지 기사로 ‘천주교의 신선한 고해성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한 성당에서 1년 동안 성당 재정을 모든 신자가 볼 수 있게 투명하게 공개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비밀리에 부쳐져 사용되던 종교 재산 사용 내역을 공개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모양입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게 하는 성당이 많습니다. 그 기사의 마지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주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을 다루는 데 그만큼 자유롭고 자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신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굳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됨을 분명히 알고 계셨지만 세상의 요구에 어느 정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당당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표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십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한 해 동안 사용한 재산 내역을 공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해오지 않았기에 세상은 ‘신선하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내 안에만 가두고 소통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마음이든 가두어 두면 문제가 되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내 안에 움켜쥔 것이 있다면 속시원하게 하느님 앞에, 세상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의 E-mail을 통해 알게 된 유머 하나 소개합니다.
할머니가 너무나도 예쁘고 귀여운 손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기 전화기 색깔이 뭐지?” “노란 색이요.”
“저 화분의 색깔은 뭐지?” “갈색이요.”
“우리 손주 똑똑하기도 하지. 그러면 저 시계의 색깔은 뭐니?”
그러자 손자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할머니, 이제 제게 묻지 마세요. 정 궁금하시면 할머니도 유치원에 가셔서 배우세요. 저도 금방 배웠으니까, 할머니도 금방 배우실꺼에요.”
할머니가 정말로 색깔을 몰라서 손자에게 묻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손자가 얼마나 잘 아는지, 그리고 유치원에 가서 잘 배우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손자는 이렇게 물어보는 할머니가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계속해서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나 당신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며,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께서 답을 직접 가르쳐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나의 부족한 머리로 판단하고 선택하기 보다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척척 알아서 해주시면 얼마나 편할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선택과 그에 따른 실천을 존중해주십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선택과 실천을 통해서 보다 더 잘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을 직접 주시기보다는 우리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선택의 문제를 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믿고 참아주시는 주님의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금을 내시지요. 사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는 것이 정상이겠지요. 그러나 공동체에 어떤 피해가 가질 않길 바라는 배려 차원에서 세금을 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배려. 특히 우리 인간들을 믿고 참아주시며,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주님처럼 배려 깊은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나만 무조건 옳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제는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랑으로 내 이웃들에게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배려와 사랑을 통해 우리는 내 삶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참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미소는 입 모양을 구부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것을 바로 펴 주는 힘이 있다(로버트 이안 시모어).
나’라는 틀을 깰 때
-김희준 신부-
올해로 피정집을 맡아 온 지 3년째에 접어듭니다. 별일 없다면 내년에는 아마도 새로운 소임이 주어질 것이고 새로운 곳으로 파견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소임이 주어질까? 어디로 가게 될까? 또 어떤 형제들과 함께 살게 될까?’ 생각하면 할수록 은근히 초조해집니다. 그만큼 피정집 일에 적응됐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지금 일에 적응되어진 만큼 다른 일은 잘 못할 것 같고, 지금의 사람들과 정든 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릴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을 고집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만큼만 행복해질 수 있고 내가 예상한 만큼의 열매만 거두어 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틀을 깰 때 생각지 못한 행복과 예상치 못한 열매들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성전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꺾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지니신 유일한 관심사는 목숨을 다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걸으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온전히 자신을 비우시고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꺾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새로움에 자신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새로움을 통해 더 큰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
-김찬선신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하고 묻는 성전 세 거두는 이들에게 베드로가 “내십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언젠가 오래 성당에 나가지 않던 신자를 면담한 적이 있는데,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된 이유를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분이 다니던 성당에 신축을 하게 되었을 때 하필이면 그 때 그분 가족 경제 사정이 너무 나빠져 신축 기금을 하나도 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죄스러워 교회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 이후 저는 교회에서 돈 얘기하는 것이 죄스러워졌습니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헌금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은 더 진짜 이유는 가난한 분들의 없는 돈 내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분들은 돈을 내시는데 저는 수도자라고 하여 한 푼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그분들의 도움으로 사는 제가 가난하게 살지 않는 것이 너무 뻔뻔스럽고 파렴치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금을 걷어 들이는 세상 임금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세금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를 빌어 하느님의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낸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금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봉헌된 가난을 사는가? 봉헌된 정결을 사는가? 봉헌된 순종을 사는가? 나의 의지와 소유한 것 모두를 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헌하고 오로지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가?
그렇게 나를 다 봉헌하였다면 프란치스코처럼 세금을 내지 않고 얻어먹고 살지라도 당당해도 좋을 것입니다. 수도규칙에서 그는 동냥을 청하는 자세에 대해 얘기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 뿐 아니라 복되신 동정녀도 제자들도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으며 동냥으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어 주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권리입니다. 그리고 동냥을 얻는데 수고하는 형제는 큰 보상을 받을 것이며, 동냥을 주는 사람에게도 큰 보상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을 지닐 수 있다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을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전삼용신부-
한 때 우리나라에서 일부 종교인들의 사치스런 삶이 쟁점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 평이 넘는 빌라에서 살고 삼억이 넘는 자가용을 타고 별장까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도들이 주는 것이라 말하고, 다윗이나 솔로몬, 예수님도 다 부자셨다며 자신들의 사치를 정당화합니다.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님은 당신은 머리 누일 집도 없으셨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하시고, 하느님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방송이 되자, 많은 국민들이 종교인들도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저도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뜨끔하였습니다. 미사예물과 활동비 명목으로 한 달에 백만 원 정도의 돈을 받고 있기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세금을 내본 적이 없었습니다.
역시 불교와 개신교의 많은 종교인들은 세금 내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합니다. 나름 소신 있게 주장하는 내용이, 신성한 일을 하는데 왜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받는 돈들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수입 명목일 때는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 더 당연할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 다른 신부님께 우리도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제들은 이미 세금을 내고 있다는 하셨습니다. 교구청에서 일률적으로 내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법적으로는 내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문제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내기로 결정하였고 이미 오래전부터 세금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같은 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의 종교인들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법적으로 안 내도 되는 것을 왜 내며 신자들이 낸 교회의 돈을 축내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안 좋은 인상을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어리둥절해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당신의 스승은 성전 세를 내십니까?”라고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미리 아시고 베드로가 물어보기도 전에 예수님은 당신은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는 사람임을 설명해주십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느님께서 사시는 집이고 하느님의 아들이 그 집에 산다고 하여 아버지께 돈을 바칠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일을 하는 예수님이나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에서 돈을 받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예수님은 꼬치꼬치 따지지도, 그들을 설득시키려 하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낚시를 하여 물고기 입에서 나오는 돈으로 당신 것과 베드로 것을 내라고 하십니다. 즉, 그런 식으로 쓰는 돈은 내 지갑을 가볍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성전을 위해 내는 돈이란 것 자체가 하느님보시기에 좋은 것이고, 또 굳이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기에 하느님께서 다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전거나 자동차의 타이어에는 공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고무만으로는 충격을 온전히 흡수할 수 없어서 고무 안에 공기를 넣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훨씬 충격이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우리 안에 충격 흡수를 위한 공기를 지니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손해나는 일 같아도 작은 일들은 그냥 접어 넘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일에 갈등을 불러 일으켜서 큰일까지 망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것입니다. 죄가 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굳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갈등을 빚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로 결정하신 때부터 하신 모든 일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죄로 우리의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꼬치꼬치 따지며 사는 것도 좋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신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피할 수 있는 분쟁은 피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저께 저는 인천의 송도유원지에 다녀왔습니다. 우리 성당 초등부 여름 물놀이를 이곳에서 했었거든요. 저는 꼬마들과 신나게 물놀이를 했지요. 그런데 초등부 꼬마들은 저를 어떻게든 물 먹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십 명씩 몰려와서는 어떤 아이는 제 발을 잡고 넘어뜨리려고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제 머리 위에 올라타서는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일부러 물 먹는 척을 했습니다. 충분히 아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서 도망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힘없는 척 하고 그래서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척 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아이들은 더욱 더 신나합니다. 물론 정말로 허우적거리는 것도 아니고, 그 더러운 물을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수영장 다니면서 익힌 수영 실력이 있는데, 힘도 없는 초등학교 꼬마들한테 붙잡혀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단지 아이들 재미있으라고 그런 척 했던 것입니다.
한참을 이렇게 놀고 있는데, 초등학교 1학년 꼬마아이가 제게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요.
“신부님. 이제 제가 신부님을 지켜 드릴게요.”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모든 아이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서 수영장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는 제가 너무나 안 되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지켜 주겠다고 제 앞에서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다른 꼬마아이들이 저를 물 먹이려고 할 때면, ‘안 돼.’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꼬마아이가 너무나 예쁘더군요. 사실 이 꼬마의 보살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힘도 없었고, 수영도 잘 못하는 아이였으니까요. 그러나 이 꼬마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했지요.
문득 주님과 우리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 사랑을 드리겠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이 아이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할까?”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무시할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에 주님께서는 너무나도 기뻐하실 것이며, 우리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더 많이 주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나와 있듯이, 우리를 끊임없이 배려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즉,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까지 배려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유로 성전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지 않고, 당신께서 누구인지 밝혀질 때를 기다리며 세상의 법을 따르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지요.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기에, 우리 역시 사랑으로 주님 앞에 다가가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구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데 최선을 다합시다.
아버지 신부님 -김호균 신부-
제 책상 위에는 1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신부님(신학교 입학 때 추천하신 분)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던 그 순간 기대고 있던 기둥이 쓰러진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며칠 동안 슬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한번은 시험을 너무 못봐서 학사경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성적표를 보여드렸는데 신부님이 두꺼운 돋보기 안경 너머로 한참을 보시더니 “괜찮아,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 그러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물 담을 그릇을 찾다 보면 소주잔 같은 것도 있어야 하고, 컵도 있어야 하고, 큰 통도 있어야 하듯이 사람도 그런 거야.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쓰는 거야. 그저 자기가 담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담으면 그게 가장 적절한 거야. 우리 마르코도 마찬가지야 걱정하지 마라.” 돌아가시기 20여 일 전쯤 편지 한 통을 주셨는데 “요즘 세상이 워낙 혼탁하니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제, 성덕으로 사는 사제’를 원한단다. 마르코도 그렇게 살아주었으면 좋겠구나”라는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신부님의 말씀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록새록 돋아나면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분의 행적을 깊이 이해했던 제자들의 마음에 공감하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남궁영미 수녀-
제가 사는 곳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 화양계곡으로 유명한 속리산 자락입니다. 1996년에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8년을 기다린 끝에 파견을 받았습니다. 지역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학교 ‘하늘지기 꿈터’에서 생활한 지 이제 4년이 다 되어갑니다. 하루하루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그리 만만치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성장해 가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나 자주 제 생각이나 판단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그 생각과 판단이란 것이 대의명분일 때도 있고, 예의나 옳고 그름에 대한 저의 가치 판단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아무리 옳고 의미 있는 것이라 해도 제 생각이나 판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묻고 스스로 생각해 선택하고 책임지도록 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느끼듯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많이 약해진 요즘 아이들한테는 차라리 “이 길이야!”라고 제시하고 이끄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묻고 생각하는 동안 기다리는 것. 그 긴 과정을 무력(?)하게 기다리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늘 제자들에게 직접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이런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늘 제자들 스스로 생각하여 답을 찾게 하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스승의 모습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잠잠히 지켜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안의 잠재된 힘을 믿으며 인내롭게 기다려 줄 때 아이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할 일이란 저를 비워내는 일일 것입니다. 당무유용(當無有用)! 빔이 쓰임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메시아의 비밀 그리고 성전세 -황태웅 신부-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한가지는 당신의 수난예고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지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응은 그들이 기대했던 주님께 대한 실망이었고 낭패였습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며 기적도 행하고 가르침도 주시기를 바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루빨리 당신 왕국을 세우고 자기들을 등용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 주님께서 수난하시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단히 나무라셨습니다.“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네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요. 또 부활이야기를 하시지만 수난하게 될 예수님을 미리 알았다면 그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마음도 편하고 또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좀 잘되기 원해서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된다고 하지만, 십자가는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이야기를 미리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또 어떤 분이신지를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는 당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 빼놓고 다른 가르침이나 기적으로만 으로는 당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고, 우리 모두를 어떻게 구원 해주실 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이 주님이십니다”하고 외쳤을 때 “입 다물어라”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조차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것도 몇 번이나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메시아의 비밀” 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메시아의 비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베드로 일행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후 성령의 내려오시자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져야하는 우리자신의 모든 어려움,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피하고서는 즉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또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을 만류했다가 야단맞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자가 피하고서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도 없고, 주님의 질책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두 번째는 성전세금을 내는 문제입니다. 그 당시 유대아에서는 남자가 20세가 되면 매년 성전세를 냈습니다. 세금을 내는 돈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리스 돈 드락메가 아니라 유대아 자기나라 돈 세겔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돈으로만 성전세를 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하던 그들이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다른 돈은 일상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성전세금을 내는 데는 불가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신으로 숭배되었으니 당연히 우상입니다.
우상이 새겨져 있는 돈,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우상이 된 돈이 성전마당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돈 그것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하느님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마당의 환전상 자판을 뒤집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또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관들과 다른 종사자들은 성전세를 면제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시몬아 세상 임금들은 누구에게서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냐, 아니면 남들이냐?” 베드로는 “남들입니다”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하고 확인하십니다.
그러니 주님도 또 베드로도 성전세를 면제 받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 없다”하시고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정해진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이 교회 내 일 때는 교무금이 되겠습니다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는 잘못도 범하겠지만,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될 것입니다......◆
<독서> : 하느님을 깊이 체험함으로써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예언자 -경규봉 신부-
에제키엘은 사제 가문 출신의 예언자이다. 그는 기원전 597년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에 포로로 끌려왔다. 그는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였으며, 사제이면서도 사제로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는 그발 강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가 되었다. 그발 강가는 사로잡혀 온 유다 백성이 하느님께 예배드렸던 강가인데, 이곳에서 그는 이사야가 하느님을 체험했던 것처럼 하느님에 대해 깊이 체험한다.
사제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로 활동하지 못하고 포로로 끌려와 귀양살이를 해야 하는 에제키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느님 백성이라고 굳게 믿던 자신들이 그처럼 이민족에게 짓밟히고 포로가 되어 하느님께서 주신 땅을 떠나고, 이국에서 종살이를 해야 하는 그는 하느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선조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하느님께서 선조들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셨는가를 깊이 묵상했다. 동시에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깊이 묵상했다.
이러한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까닭은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더 악하게 죄를 짓고 하느님을 배반했기 때문임을 가르쳐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죄악이 가득한 예루살렘이 완전히 폐허가 되고 멸망하리라고 예언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의 도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유다 백성이 적의 칼날과 기근, 전염병으로 죽게 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기원전 587년 그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은 바빌론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자신도 포로로 끌려와 고통을 당하면서 남아있는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이 멸망할 것을 예언해야 하는 에제키엘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그는 육신적으로도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의 고통이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처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깊이 당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신심 깊은 예언자 에제키엘로 하여금 세상에서 위안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도록 해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포로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어려움을 이겨냈다.
유다 백성이 귀양살이에 지쳐 낙담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며 격려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신앙인으로 변하도록 이끌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더 큰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며, 당신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체험하는 큰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실패를 하고 그로 인하여 고통 속에 헤맬 때가 많다. 가족이나 친지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당할 때도 있고, 사업의 실패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때도 많으며,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때도 많다.
그런 때일수록 세상을 보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자. 세상 것으로 나를 채우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우려 하자.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자.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맡기자.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서 당신을 찾고 부르짖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모든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을 만큼 크게 당신을 체험하도록 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당신을 체험함으로써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새벽을 열며
지난 5월, 저는 팔 골절로 병원에 다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의 X-Ray 검사실 앞에서 느꼈던 일을 하나 말씀드릴게요.
X-Ray를 찍기 위해서 검사실 앞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나 많았고, 저는 심심해서 진열되어 있는 잡지를 꺼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잡지 속의 많은 것들이 언젠가 본 듯 낯익은 것이에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얼른 앞표지를 보았지요. 작년 잡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잡지를 작년에 보았던 적이 있었던 것이지요.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잡지를, 그리고 새로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잡지를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잡지를 덮어서 다시 진열대에 꽂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미 읽었기 때문에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이 잡지처럼 세상의 앞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오해나 착각으로 인한 실수도 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점을 보러 철학관을 다니고 굿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그런데 곧바로 이런 생각도 나는 것입니다. 제가 잡지를 곧바로 덮어서 다시 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미 알고 있어서 어떤 새로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앞일을 미리 알아버린다면 가슴 설레게 하는 새로움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내가 보았던 잡지라고 곧바로 덮어버린 것처럼, 나의 삶도 지겨워서 덮어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나의 앞일을 알 수 없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삶 그래서 가슴 설레게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또 다른 배려가 아닐까요?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배려인 것이지요.
사실 얼마나 부족한 우리들입니까? 그래서 실수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그렇게 실수를 하면서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요? 따라서 실수하기 전에, 그리고 다른 길로 가기 전에 우리의 방향을 바꾸시고 싶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꾹 참으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배려는 성서에서도 너무나 많이 나오지요. 오늘 복음만 봐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조금이라도 잘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미리 말씀해주시는 배려를 행하십니다. 또한 사람들과의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내지 않아도 되는 세금을 내시는 배려의 모습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항상 우리 인간들을 배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런 배려를 우리는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그런 배려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주님께서는 ‘나만 미워한다’는 극단적인 생각만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배려하시는 모습을 하나하나 따져보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사랑받고 있습니다.
남을 배려합시다.
빠다킹 신부
참된 권위 - 김광태 신부-
얼마 전에 있었던 지방선거 유세기간 동안 하루빨리 선거가 끝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과연 선거가 끝나니 조용해서 좋습니다. 국가와 자기 지역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의 진지한 호소를 소음으로만 치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봉사하겠노라고 뽑아달라는 그들의 호소를 들으면서 속으로 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제발 선거가 끝나고도 우리를 그렇게 극진히 섬겨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주제가 일반화된 당시 현실을 반영하여 통치자는 백성을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자녀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왕도 아니었고, 왕이 되길 원하신 적도 없고,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피해가신 그분이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직을 추구하는 이유는, 당신을 잡아 죽이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신 그분의 삶과 방식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많은 추종자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김흥주 신부-
◆스페인 유학시절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나는 한 인간 집단이 다른 민족을 상대로 저질렀던 잔악한 죄악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소름끼치는 두려움과 참담한 분노를 느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정말 아우슈비츠는 하느님께서 왜 침묵하셨으며 또 왜 그들을 죽음에서 구하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셨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그곳 지하 감방을 둘러보던 중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얻을 수 있었다. 그 지하 감방 13호실은 아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갇혀 있던 곳인데, 바로 거기에 막시밀리아노 콜베라는 위대한 성인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천주교 사제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콜베 신부는 혹독한 중노동과 갖은 형벌에 시달리면서도 사제로서의 의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치 병사들로부터 더 많은 고통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감방에서 한 사람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용소 책임자는 같은 감방에 있던 열 사람을 골라 아사형을 내렸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기혼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 콜베 신부가 그 사람 대신 아사형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수용소 책임자도 콜베 신부의 뜻밖의 행동에 놀랐지만 결국 그 뜻을 받아들였고, 콜베 신부는 굶주림의 고통을 겪다가 독극물 주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다른 유태인들과 함께 불에 태워져 없어졌고, 지금은 그곳에 그를 기리는 꽃다발만 놓여 있을 뿐이지만 그의 놀라운 희생정신과 위대한 사랑은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그 당시 수용소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콜베 성인을 통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들과 분명 함께 계셨던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한 인간의 생애가 이렇게 숭고하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폴란드 태생 꼰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회원이자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Militia Immmaculatae) 창립자이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천상탄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정신없는 제게, 아직 제 자신조차도 극복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제게, 성인의 생애는 너무나 커보였습니다.
역사상 자신에게 다가온 마지막 순간인 죽음 앞에서 콜베 신부님처럼 그리도 침착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전기를 꼼꼼히 읽어보면서 신부님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러 나가셨습니다. 가장 값진 선물을 받은 어린이처럼 죽음 앞에서 기뻐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인간의 생애가 이렇게 숭고할 수 있다는 것, 당당할 수 있다는 것,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윽고 때가 되어 나치들이 콜베 신부님이 머무시던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짐짝처럼 실려 죽음의 수용소로 떠나가면서도 신부님께서는 동료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는 선교하러 떠나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여비까지 딴 사람이 치러주니 얼마나 큰 이익입니까? 이제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께 ‘우리는 만족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립시다.”
드디어 신부님께서 죽음의 아사 감방으로 자진해서 내려갈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누군가 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도망친 사람이 끝내 잡히지 않자 소장은 모든 수용자들을 집합시켰습니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소장은 10명을 선발해서 아사감방으로 보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갑자기 아사감방으로 가게 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유난히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아,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을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되었구나!”
그 순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포로가 대열을 이탈해서 소장 앞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이었습니다.
“원하는 게 뭐냐?”
“저 울고 있는 사람 대신 내게 죽겠소?”
“도대체 왜 그래?”
“나는 늙었고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어도 아무 것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천주교 사제요.”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의 시선은 소장의 얼굴 너머 먼 곳으로 향했습니다. 먼 산 너머로 활활 자신을 불태우며 넘어가는 아름다운 석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그 순간 마지막 미사라도 봉헌하듯이 그렇게 당당하게 서 계셨습니다.
마침내 소장은 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좋다, 함께 가라.”
열 명의 사형수들은 맨발에 셔츠 차림으로 죽음의 감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마치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자처럼 제일 뒤쪽에서 따라갔습니다. 머리를 약간 옆으로 기울인 채, 가슴 속으로는 천국을 그리면서...
“나의 모후, 나의 주님, 나의 어머님, 오 원죄 없으신 동정녀시여, 당신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나는 지금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콜베 신부님의 죽음은 이런 측면에서 자청한 죽음, 예정된 죽음, 계획된 죽음, 준비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이 마지막 순간, 장엄하게 낙화할 순교의 순간을 꿈꾸어왔던 것입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순교자적 생애는 지하 감방에서 활짝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죽음은 어쩌면 한 점 티 없는 어린 양이셨던 예수님, 순결한 봉헌제물이셨던 예수님의 삶을 판에 박은 듯이 빼닮았던 죽음이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수철신부-
어느 분들의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의 여정을 듣다 보면,
‘아, 삶은 고해(苦海)구나!’라는 불가의 말씀이
탄식처럼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어떻게 그 어려운 삶의 여정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살아왔는가 생각하면 순간,
‘아, 삶은 기적이구나!’하는 감사의 탄성도 절로 나옵니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서도 이런 진리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성 베네딕도의 영적 여정,
유혹과 시련 가득했던 인생 고해의 여정이자 동시에
기적으로 가득 찼던 인생 기적의 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삶은 고해입니다만 뒤집어 보면 또 삶은 기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고해와 기적은 한 삶의 실재의 양면입니다.
‘삶은 고해다’라는 쪽만 바라보면,
삶은 절로 부정적 비관적이 되고 어둡습니다.
빛과 생명, 희망도 없습니다.
반면 ‘삶은 기적이다’라는 쪽을 바라보면,
삶은 긍정적 낙관적이 되어 밝습니다.
빛과 생명, 희망이 가득합니다.
똑같은 현실도 어떻게 보고 사느냐에 따라,
부정과 긍정, 비관과 낙관의 양 극단으로 갈립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언제나 긍정적이요 낙관적이라 유머도 풍부합니다.
삶이 하느님의 기적임을 깨닫기에 감사와 찬미가 그들을 지배합니다.
성서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여 어둠 속에서 빛을, 죽음 속에서 생명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제자들과 비교할 때
그분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이 면이 단연 돋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예고에 비관하여 슬퍼했지만,
예수님은 사흗날에 부활할 것을 믿기에 담담한 모습입니다.
성전세의 납부 문제도 예수님은 딱 부러지게 부정적으로 거부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스캔들이 되지는 않을까 긍정적으로 정황을 참작하여
성전세를 바치라 하지 않습니까?
호수에 가서 낚시하여 첫 번째 잡는 고기의 입을 열어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하면 그 돈을 세금으로 바치라는 기적 이야기 역시,
예수님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할수록 긍정적이고 낙관적이 됩니다. 삶이 모두 하느님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땅과 하늘에 가득하도다.’라는 화답송 후렴처럼,
주님의 기적으로 가득 찬 세상임을 봅니다.
바빌론 유배지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의 찬란한 영광을 체험한 에제키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체험이 있어
예언자들은 그 어둡고 엄혹한 세상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낙관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성무일도와 미사를 통해
알게 모르게 체험하는 하느님이
우리를 긍정적이자 낙관적인 사람으로 바꿔줍니다.
삶이 기적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빛과 생명, 희망으로 가득 채워 줍니다.
아멘.
-유영일 신부 -
현대는 거의 예외없이 모든 나라가 세계화의 과정속에서 급속하게 20:80의 사회로 재편되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지만 소수의 용기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조직적으로 이 현실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라하로, 그리고 지난 7월 20일에서 22일 사흘간 제네바에서 열린 주요 8개국 정상회의에서는 15만 명이 넘는 대규모시위대가 주도권을 장악해버렸고 그 와중에서 1명이 총에 맞아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이런 소수 선각자들의 활약이 회담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일정 부분 고통을 당하는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이 근원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습니다. 1987년 민주화의 봄을 되돌아보십시오. 수많은 학생들과 국민들이 피를 흘리고 투쟁을 해서 6.29선언이라는 항복을 받아냈지만 그것이 왜 속이구가 되었습니까? 국민들의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은 지속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거의 200-300년 동안 발전되어온 민주주의를 30년 이상 유지해온 군인정권 하에서 이루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국민들의 의식수준만큼 발전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복음을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이중으로 수탈당하고 있는 민중의 편에서 무력으로 그 불의한 체제를 뒤엎어버리고 하느님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혁명을 원하지도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기존의 질서와 제도에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의 변화 없는 체제나 제도의 변화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죄악으로 얼룩진 이 세상을 무력이나 제도나 법을 통해 인간의 힘으로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변화는 개개인의 철저한 회개를 통해 우리가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할 때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견하시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꿋꿋하게 그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늘 제1독서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너 이스라엘아! 너희 주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 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 따라가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가 받을 할례는 마음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고집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사랑에는 조건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인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마음을 쏟아 사랑해주셔서 그들의 후손을 선택해주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해주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질서 하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고통을 겪고있는 반면, 가진 자들은 과실은 챙기고 책임과 의무는 노동자, 농민 등 가난한 자에게 전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역사상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먼저 내놓은 적은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의식이 변화되어 요구할 때 그들은 할 수 없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수많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구원역사는 하느님의 주도하에 가난한 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암울하다해서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역사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가난한 자들임을 명심하고 우선 우리의 마음의 껍질부터 벗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는 고집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아멘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칩니까?”
-양승국신부-
<물고기 안에서 은전(銀錢)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여름휴가를 잘 다녀오셨나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휴가도 제대로 못 다녀오신 분들께는 죄송스러운 말씀인데, 저도 짧게나마 휴가못간 아이들과 함께 서해안을 다녀왔습니다.
언제보아도 일품인 서해낙조도 보고, 부드러운 서해모래의 감촉도 만끽하고, 꽤 높은 파도도 즐기면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직접 잡은 물고기 안에서 ‘은전(銀錢)’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회도 뜨고, 매운탕도 끓이면서 잠시나마 천국을 맛보고 온 기분입니다.
또 다시 돌아온 일상의 나날, ‘이곳 역시 천국이다’ ‘이곳이 내 성화(聖化)의 장소다’ 생각하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용어들은 꽤 생소합니다. 공부를 좀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전세’는 무엇인지? ‘관세’며 ‘인두세’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께서도 성전세를 바치시는데, 왜 바치시는지?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는 방법이 꽤 기묘한데(맨 먼저 낚인 고기를 잡아 고기 입속에 들어있는 은전을 꺼내 세금을 바침), 그것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등.
성전세: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은 성인(20세)이 되면 성전유지 및 보수를 위한 세금을 바쳐야했습니다. 여인들과 노예, 미성년자들은 면제되었으나 굳이 원하면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받지 않았습니다.
관세: 각종 물품, 곡식, 가축, 노예 등의 매매에 따른 세금, 그리고 다리나 문을 통과할 때 내는 통행세가 여기에 속합니다.
인두세: 토지나 주택 등 부동산에 부과되는 직접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세금을 바치셨는가?: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칩니까?”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베드로가 “예, 바치십니다”고 대답하는 것을 봐서 예수님께서는 꼬박꼬박 세금을 바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말하는 성전보다 훨씬 더 귀한 분, 성전 중의 성전인 분이기에 성전세를 따로 바칠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또한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왕자로서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겸손하게 세금을 바치십니다. 왜냐하면 아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분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그런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기묘한 방법(고기를 낚아 입안에 들어있는 한 스타테르 짜리 은전으로 세금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세금을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성서학자는 잡은 고기를 베드로가 시장에 가서 1스타테르에 내다팔았다. 그리고 그 돈을 세금으로 바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까지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구절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낚은 물고기를 통해 세금을 바치기 위해 필요한 돈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보시오! 나는 사제 중의 사제인 대사제이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이며, 여러분들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온 메시아입니다. 새로운 성전인 나한테 감히 세금을 내라구요?”하고 정확히 입장을 정리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 중에도 한참 아래쪽의 왕인 세상의 왕에게 겸손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큰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해주신 권한을 단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바로 그것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십니다.
참으로 하찮은 직책, 별것도 아닌 자리에 앉기만 하면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우쭐거리고 끝도 없이 ‘나대는’ 우리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십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인 예수님께서 겸손하게도 세상의 왕에게 세금을 바치십니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로 생각합니다.
† 수난예고와 성전세의 관계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이 한데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관한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세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자유에 관한 말씀이다.
우선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은 공관복음 모두에 보도되지만 마태오는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마르코와 루가는 그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마르 9,30-32; 루가 9,44-45)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마태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말로 고쳤다.(23절) 이로써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교육이 한 단계 진척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제자들의 귀엔 수난과 죽음은 크게 들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크게 들리는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것은 스승의 다가올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예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그러나 그 애도 뒤편에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숨어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하는 마음 말이다. 이 마음이 제거되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가야 하실 길과, 제자들이 가고 싶은 길 사이에 갈등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와 연결된 성전세 납부 문제는 마태오복음에만 수록된 고유 자료이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기 전까지 제관들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일년에 한번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물론 베드로도 성전세를 내야 했다.
성전세는 이스라엘 은전 반 세겔이었다. 성전세를 징수하는 사람의 물음에 베드로가 예수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말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처음 낚아 올린 물고기 입 속에서 두 사람 몫의 성전세 한 스타테르(이스라엘 은전 한 세겔)를 발견한 것이다. 이 사건이 베드로에게는 기막힌 일이었겠지만 예수께는 대수가 아니다. 사람은 다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만물은 언제나 말씀이신 예수님을 위해 쓰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베파게의 당나귀: 마태 21,2-3, 최후만찬을 위한 방: 마르 14,13-16 등)
그렇다면 왜 마태오가 두 번째 수난예고의 말씀과 성전세 납부 문제를 서로 붙여놓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에 수난예고와 성전세 납부는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가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한데 묶어 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마태오복음이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성전은 이미 불타고 없었으므로 성전세 또한 없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관세나 인두세를 물리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야훼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이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훼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신 말씀도 여기에 근거한다.(요한 2,14-21; 마태 21,12; 26,61; 27,40; 마르 14,58; 15,29) 하느님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셈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찾지 않으시고 때로는 실정법(實定法)에 권리를 양보하신다. 입법자와 집행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리 하셨다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때가 오면 새로운 성전이 지어져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며,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가 선포될 것이다.
이는 인자(人子)가 자신의 죽음으로 취득한 자유이며,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지켜낸 아들에게 선사된 자유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는 누구나 이 무한한 자유를 나누어 누리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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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