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밥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일을 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누구라도 대뜸 “밥 먹고 합시다”라고 외친다. 이어서 “그래,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밥 먹고 계속합시다.”라고 맞장구를 친다. 일보다 밥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을 하다가도 걸핏하면 음식 타령을 하는 사람을 두고 ‘밥보’라고 부른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음식을 너무 밝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 우리가 즐겨 찾는 산림도 사람에게 편안한 안식처이겠지만 동식물에게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다. 식물은 더 많은 햇빛을 받으려고 빨리 자라는 경쟁을 벌이고, 동물은 먹이사슬에 따라 치열하게 움직인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단식을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가령 아이가 고가의 장난감을, 청소년이 신종 스마트폰을 손에 넣기 위해 떼쓰며 단식을 하기도 한다. 공자도 밥을 잊는 단식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단식을 했을까?
- 170번째 원문
• 葉 : 나뭇잎을 뜻하면 ‘엽’으로 읽고, 사람의 성씨를 나타내면 ‘섭’으로 읽는다. 전자는 엽서(葉書)로 쓰이고, 후자는 송나라의 유명한 사상가로 섭적(葉適)이 있다. 섭공(葉公)은 초나라 정치가이자 군사전문가이다. 그가 당시 섭(오늘날 허난성 지역)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섭공’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 於 : 어(於)는 장소, 비교, 목적을 나타내는 개사(介詞)로 우리말의 조사에 해당된다. 별도의 뜻은 없지만 기능에 따라 ~을(를), ~보다, ~에게 등의 맥락으로 쓰인다.
• 對 : 대(對)는 상대, 짝의 명사로 쓰이고, 대답하다의 동사로 쓰인다.
• 奚 : 해(奚)는 어찌, 어느, 무엇을 뜻한다.
• 忘 : 망(忘)은 잊다, 저버리다의 뜻이다.
• 憂 : 우(憂)는 근심하다, 걱정하다, 상(喪)을 뜻한다.
• 老 : 노(老)는 늙다, 나이 들다, 쇠하다의 뜻이다. 여기서 나이가 점점 들어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는 맥락으로 늙음, 노화, 황혼을 나타낸다.
• 至 : 지(至)는 이르다, 다다르다, 미치다의 뜻이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조국 노(魯)나라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칠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정치적으로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풍부한 학식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명망을 얻었다. 때때로 공자를 찾아 자신의 궁금증을 풀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섭공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
섭공은 공자를 만나기 전에 자로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사전 정보를 파악하려고 했다. 평소 공자에게도 대드는 자로였지만 스승에 대한 평가는 주저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서 공자는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썼다. 오늘날 말로 하면 공자가 ‘자소서’를 쓴 셈이다.
발분망식(發憤忘食), 락이망우(樂以忘憂).
부지노지장지운이(不知老之將至云爾).
16글자를 되풀이해서 읽으면 한 편의 동영상을 보는 듯하다. 공부를 하다가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공자는 “밥 먹고 합시다”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풀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다. 공자는 그 화에 지배되지 않고 오히려 그 화를 이끌어 문제를 계속 붙잡고 있다. 답을 찾을 때까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밥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답을 찾고 나면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올 만하다. 하지만 공자는 허기보다도 즐거움에 압도되어 지금 자신이 어떤 집안 일로 근심 걱정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생활의 고통을 지각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즐거움의 크기가 근심의 크기를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그 결과 공자는 두 개의 세계에 살게 된다. 하나는 아내가 바가지를 긁고 아이의 등록금을 벌어야 하는 일상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알고자 하는 진리를 찾느라 근심을 잊을 수 있는 즐거움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의 무게가 짓눌려오는 노년의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의 자기 소개서는 한마디로 하면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I am still hungry.)”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찾은 것에 만족하지 않았기에 고픈 배를 참아가며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한국 축구 대표팀을 맡았던 히딩크 감독은 평가전이나 A매치 경기에서 이기고도 늘 “아직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계속 이기고 싶다는 욕망을 그렇게 표현하고 결국 2002년 월드컵 4강이라는 전대미문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몇 번의 승리에 배가 불러서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월드컵 조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가 훗날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논어]라는 책만큼 영향을 준 것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자가 쓴 자기 소개서에 담긴 16글자 중 ‘발문망식(發憤忘食)’이다. 오늘날 대학의 인문학이 낮은 취업률로 인해 이곳저곳의 공격을 받기도 하고 외면을 받기도 한다. 공자와 그 후학들이 활동하던 시절도 지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자가 자신의 후계자로 가장 아꼈던 제자 안연은 40세 전후로 일찍 죽었다. 그의 요절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운명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발분망식이 왜 그렇게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공자 후학들은 가난한 삶과 어려운 환경을 맞이하며 발분망식(發憤忘食)에서 저술과 창작의 동기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이 녹록치 않다고 해서 “나는 안 돼!”라며 좌절하지 않고 “내가 왜 못해!”라는 결기를 낼 수 있다. 지금 당장 좋은 작품을 써내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최근 [미생] 만화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윤태호 작가는 방송에 출연해서 20억을 벌어 빚 갚는 데에 썼다는 이야기를 했다. 윤태호 작가는 [미생]을 그리면서 오랜 시간 동안 별다른 벌이가 없어 부인이 생활비를 처갓집에서 빌어서 생활했다. 시청자들은 20억의 엄청난 금액에 주목할지 모르지만 만화가는 좋은 작품을 그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기나긴 시간을 오로지 버텨냈다. 그 일념도 좋은 만화를 향한 발분망식에서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 사후에 그의 발분망식에 가장 크게 공감했던 사람으로 사마천(司馬遷)이 있다. 사마천은 흉노족과 전투에서 패했던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한 무제(武帝)에게 무고(誣告)를 했다는 혐의를 받아 궁형을 당했다. 거세를 당하고 환관이 된 사마천은 인간적 모멸로 몸서리를 치며 “죽느냐 사느냐”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붙였다가 살기로 결심하며 지난 날 “고통 속에 살았던 인물”을 생각했다.
주 문왕(周文王)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썼고, 공자는 진(陳)과 채(蔡) 지역에서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으며 [춘추]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을 잃고서 [국어(國語)]를 지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사마천은 억울한 누명으로 인해 자신이 받은 고통에 아파만 할 것이 아니라 문왕․공자․좌구명의 길에 따라 승화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그의 고통은 치욕에 그치지 않고 살아야 하는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사기]를 ‘발분지서(發憤之書)’라고도 말한다.
이들은 모두 하고자 하는 뜻에 막히고 맺힌 바가 있어서 자신의 길을 펼칠 수 없었다. 따라서 지난날의 일을 풀이하여 다음 세대에게 생각을 펴 보이려고 했다. (此人皆意有所鬱結, 不得通其道, 故述往事, 思來者.)- [보임안서(報任安書)]
공자는 훗날 사마천과 같은 궁형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가며 자신이 찾아낸 평화의 길을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달갑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사회적으로 고립되어갔다. 이 고립은 사마천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비할 수 없지만 그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자신의 생각을 허무하게 만드는 고통을 주었다.
아마 자신을 찾아오는 제자가 없었더라면 공자는 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제자들과 좋은 세상의 그림을 그리고 그를 위한 방도를 찾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가 단어로 문장으로 변해서 [논어]가 탄생했다. 사마천도 궁형 이후 꽁꽁 맺힌 한과 똘똘 뭉친 심사를 글로 풀어내서 [사기]를 써냈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와 사마천은 울분이 창작의 동기라는 점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 되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자신의 약한 부리로 껍질 안쪽을 쪼아야 하지만 그 힘이 약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밖에서도 쪼아야 한다. 새끼가 안에는 쪼는 것을 ‘줄(咄)’이라 하고 어미가 밖에 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줄과 탁이 같은 시간에 일어날 때 병아리는 두꺼운 껍질을 뚫고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
공자가 아무리 학식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혼자였더라면 기나긴 시간의 고통을 견뎌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주위에는 자신을 찾아와서 인문의 가치를 공감하고 인문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논어]에 나오는 토론의 마당이 펼쳐질 수 있었다. 공자는 이 마당에서 거니는 기쁨을 이렇게 읊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德不孤, 必有鄰.)- [논어] ‘리인’편 25장
즉 보이는 옆이든 보이지 않는 먼 곳이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공자는 느꼈고, 이 느낌은 그가 고독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공자와 제자의 관계도 줄탁동시의 사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제자 염옹.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줄탁동시가 왜 중요한가? 그것은 발분망식을 한 다음에 사람을 계속 끌어갈 수 있는 힘을 채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 제자 중 염옹(冉雍. 자는 중궁(仲弓))은 출신이 나빠서 그걸 핸디캡으로 여겼다. 공자는 중궁을 얼룩소에 비유한 적이 있다.
털빛이 붉고 뿔이 가지런하더라도 얼룩소 새끼라면, 제관이 그 녀석을 제물로 쓰려고 하지 않겠지만, 산과 강의 귀신이야 어찌 그 녀석을 내버려두겠느냐?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논어] ‘옹야’편 6장
소가 제물로 쓰이려면 색깔, 생김새, 영양 상태 등 다양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 얼룩소는 조건을 다 갖춰도 제물이 될 수가 없다. 얼룩소 자체가 결격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는 산천의 귀신이 조건을 다 갖춘 제물을 흠향(歆饗)하리라고 보았다. 이 이야기는 중궁의 태생을 얼룩소에 견준 비유이다. 중궁의 신분이 변변찮아서 누구도 눈여겨보려고 하지 않았다. 공자의 눈에는 중궁의 신분이 들어오지 않고 그의 인품과 열정이 들어왔다.
공자와 중궁의 관계도 줄탁동시에 해당된다. 공자가 있기에 중궁은 인문학을 배우고 싶고 힘들지만 살려는 의지를 돋을 수 있다. 아무도 중궁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공자는 그를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알아준다는 것은 매달릴 절벽에서 손을 내미는 것과 같았다. 중궁과 공자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넘어서는 세기의 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이런 친구를 만난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다
.
세상에는 우정 이야기가 큰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없다. 내가 아플 때 위로하고, 내가 쓰러질 때 손잡아주고, 내가 외로울 때 이야기 들어주며 내가 기쁠 때 함께 떠들어주는 친구야말로 어둠에 있는 나에게 앞길을 비춰주는 등불과 같다. 거꾸로 이런 친구와 우정을 계속 나누려면 쉽게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발분망식해야 한다. 발분망식(發憤忘食)과 줄탁동시(咄啄同時)는 나와 친구가 오래 함께 길을 걸어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첫댓글 발분망식(發憤忘食)과 줄탁동시(咄啄同時)를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啐啄同時 ;노사간에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도출할수있다.(경영학적인 용어)
.
어제는 모르고 지났습니다만
咄啄同時가 啐啄同時라고 봅니다.
咄은 ‘꾸짖을 돌’이며
啐은 ‘지껄일 줄’입니다. 미안합니다.
.
잘 배웠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