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홀로코스트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그 대학살을 겪은 유대인들은 국가라는 형태의 주권을 얻지 않고서는 자신들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세웠다.
독일 매체 도이체벨레에 따르면 그 역사적 경위로 독일은 이스라엘에 대해 특별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 이스라엘의 존재와 안전은 단순한 정책목표에 그치지 않고 독일의 국가 존재 이유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2008년 이스라엘 국회인 크네세토에서 이렇게 연설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사과했다.
"독일의 역사적 책임은 우리 나라의 국가 이성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안전은 독일 총리인 저에게는 필수적인 것으로 거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국가 이성이란 서양 정치사상의 개념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뜻한다. 현 총리 올라프 숄츠는 10월 7일 하마스의 대규모 이스라엘 공격 이후 이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이 순간 독일이 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안전은 독일의 국가로서의 존재 이유다.
독일 총리와 외무장관들은 재빨리 이스라엘을 방문해 군사 지원도 표명했다.
이런 정부의 움직임 속에서 시민들도 이스라엘에 동정적이다. 독일 일간 슈테른에 따르면 10월 14~16일 온라인 조사에서는 독일인의 약 58%가 이스라엘의 가자에 대한 군사공격이 적절하다고 응답했다.
◎ 봉쇄되는 팔레스타인 측의 목소리
이 같은 독일의 이스라엘 지지 움직임은 폭넓은 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이체벨레에 따르면 특히 10월 18~22일 개최된 세계 최대 국제서적박람회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서 두드러졌다.
이 박람회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아랍 여성 작가를 표창하는 독일 문학상 리베라추 프라이스 시상식이 당초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수상작이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지아 시브리의 이스라엘 폭력을 그린 작품이어서 행사는 연기됐다.
이 북페어 디렉터는 또 개최에 앞서 이 행사는 이스라엘 편에 완전히 연대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어줄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가 많은 국가 조직의 반발을 샀다. 세계에서 가장 무슬림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 출판협회를 비롯해 말레이시아 교육부, 아랍에미리트 샤르자 북오솔리티, 에미레이트 출판협회, 이집트 아랍출판협회 등은 이 박람회 참가를 취소했다.
특히 인도네시아 출판협회는 주최자의 자세를 의문시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주최자가) 이스라엘 편에 서서 플랫폼을 제공하겠다는 결정은 대화의 이상과 상호 이해를 쌓는 노력을 해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잊고 이스라엘 편을 드는 것은 세계 전체를 이해한 마음에 책 한 권만 읽는 것과 같다."
한편 이스라엘 참가자들도 대부분 자국에서 벌어지는 일의 영향을 감안해 참석을 취소했다.
◎ 이스라엘 비판과 반유대 사상의 혼동
이번 분쟁은 독일 시민 수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온라인 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친팔레스타인 시위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며 독일 각지에서 금지됐다.
또 독일 일간지 차이트에 따르면 베를린시 교육부 장관은 시내 학교에 팔레스타인을 상징하는 스카프나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등이라고 적힌 사인을 금지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들 정부의 결단은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위배될 수 있다는 법률가들의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경찰과 충돌해 체포자가 나오는 사태가 속속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10월 19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친팔레스타인 시위에서는 174명이 체포되고 65명의 경찰이 부상했다.
한편 10월 22일에는 베를린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여기에는 프랭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도 참석해 이스라엘 연대를 호소했다.
◎ 국제법 위반도 용인
독일이 이스라엘의 국익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하면 그것이 민주주의 인권 국제법의 경시로 이어질 수 있다.
이스라엘은 2005년까지 가자 지구를 점령했다. 철수 이후에도 이 땅을 포위해 온 점으로 미뤄 유엔은 가자가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으며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10월 2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가자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은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연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