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크게 세우시는 자
출 11: 1
서기 2000년이 다가오면서 이미 익숙해진 '뉴밀레니엄'이라는 새로운 용어에 많은 사람들이 들떠 있습니다. 서구는 물론 우리 나라의 지방 정부까지 서로 질세라 금세기 마지막 일몰과 새로운 천년의 첫 일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거나 엄청난 돈을 들여 레이저 쇼를 계획하고 있고, 개인들도 이 대열에 합류하려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밀려다니고 있습니다.
마침 이러한 흥청거림에 경종이라도 울리듯 지난 22일 영국에서 대한항공 화물기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출발부터 추락까지의 4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관제탑으로 비상긴급 통화 한번 없이 이륙 후 불과 2Km 날고 곧바로 추락했습니다.
여러분, 이름도 생소한 뉴밀레니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혹 장사하는 사람들의 영업적인 속성에 끌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년도 계산이 15진법 또는 7진법이었다면 1999년에서 2000년 사이는 특별한 의미 없이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서기 2000년의 본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서기 즉 A.D(Anno Domini)란 그리스도가 나시고 난 뒤라는 것이므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믿지 않는 사람들이 뉴밀레니엄에 갖가지 의미를 부여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2,000년 전에 예수가 나면서 외쳤던 삶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면서 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함이 없이 이리저리 저들을 따라 밀려다니고 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오늘밤에 주님께서 오신다면 오늘 하루 무엇을 하시겠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늘 살던 대로 살겠다는 어느 목사님의 말은 얼마나 멋진 대답인지 모릅니다. 최선을 다해서 진실하게 살아왔으므로 그냥 그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1999년 12월 31일과 2000년 1월1일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보십시오. 사람이 그리고 내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2000년 1월1일이 되면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비행 중 가장 위험한 시간을 가리키는 마(魔)의 11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륙할 때 3분, 착륙할 때 8분을 가리키는데 전체 항공 사고의 74%가 이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 마(魔)의 11분을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상황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며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에서는 사고가 많이 나는 지점인 직진(直進)에서 방향이 전환되는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이 전환되는 시점에 마(魔)의 11분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들뜨고 흥청거릴지라도 정신차려야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할 가장(家長)과 주부, 이 세상의 지도자들 그리고 이 세상사람들보다 한 세대를 앞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차려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정신차려야 할 사람들만 제대로 서있다면 이 나라와 사회 그리고 가정은 바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정신차리지 못하면 이 시대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번 깨어서 기도하면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마땅히 서야할 자리에 서있는가? 그리고 2000년 1월1일부터 내가 서야할 자리에 서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에집트 왕 바로에게 마(魔)의 11분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바로가 그 시간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따라서 그와 그 백성들의 앞날이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준비하셔서 이미 아홉 가지를 주셨는데 그때마다 바로는 무엇인가 정신을 차리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숨을 돌릴만하면 바로가 강퍅해졌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실까지도 아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바로가 숨쉴만하면 다시 완악해진다 할지라도 아홉 가지 재앙 다음에는 열 번째 재앙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지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권투 선수들은 경기 도중 잽을 날릴 때 잽으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생각하는 권투 선수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잽이 상대방의 시선을 혼란시키기 위하거나 결정적인 KO펀치를 날리기 위하여 틈을 엿보는 전초단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홉 가지의 재앙으로 열 번째의 KO펀치를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아홉 번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 번째가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아무리 잘 버텼다고 할지라도 열 번째의 KO펀치에는 한 사람도 버틸 수 없이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하기를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좇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8절).. 왕의 모든 신하가 다 나에게 절하며 제발 내 백성을 데려가 달라고 사정하게 되는 무릎꿇을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KO펀치를 준비하시고 계시다가 언제든지 정하신 그 순간이 바로 KO펀치의 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끔 세계적인 권투시합 전에 선수들의 인터뷰 장면을 보면 자신이 몇 회에 상대방을 KO시키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간혹 맞히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허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허풍이 아닙니다. 1절에서 지금까지 아홉 가지의 재앙은 버틸 수 있었지만 마지막 열 번째의 재앙으로 너희를 여기서 완전히 쫓아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열 번째 재앙에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현명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서 확인해 봅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보면 지금 비록 삶이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는 대적을 향하여 KO펀치를 던지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대적이 무너지기 전에 그리고 나의 모든 어려운 상황이 풀리기 전에 미리 즐거워하고 웃는 사람이 정말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모든 상황이 풀린 후에 웃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미리 당겨서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들을 보고자 합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버티면 필경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의해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에는 법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이 돌고 온갖 재앙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때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가 자신들을 어렵게 한다고 생각하고 몇 번의 시험을 한 후 법궤를 빨리 보내자고 곧바로 결정하여 선물과 함께 이스라엘에 돌려보냈습니다(삼상5-6장).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들입니까? 이것이 참된 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깨어지고 무너지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아무리 믿지 아니하는 사람일지라도 항상 미리 경고를 주십니다. 에집트왕 바로에게도 아홉 번의 재앙으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번에도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 그 모든 재앙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우연은 없습니다. 예정하셔서 하신 일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자비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경고의 때가 지난 후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무서운 폭풍우에는 감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4-6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가 판단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돌아오지 않고 버팁니다.
북 이스라엘 시대의 아합이라는 왕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아내 이세벨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꿈같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부와 귀를 함께 누렸으므로 그들을 마음대로 움직인 왕과 함께 모두 좋았을 것입니다. 이를 보시다 못한 하나님께서 그 땅에 수년동안 우로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비의 시간 3년 6개월이 지났으나 그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칼을 드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갈멜산상에서 하나님의 종 엘리야와의 대결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왕상21-22장).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날을 가리켜 '주님의 날', '여호와의 날'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있습니다. 이 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비극의 날이 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서 계신다면 그 날은 축복의 날이 되고 잔치의 날이 될 것입니다. 본문 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에집트의 곳곳에서는 곡성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집, 즉 하나님의 사람의 집에는 웃음소리, 노랫소리만 있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지금 조금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있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의 날, 평안의 날을 주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 날은 단지 구원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은, 금 패물까지 주어 풍성하게 되어서 나간다고 말씀하셨는데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시기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 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1-3절).. 고통과 환난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엄청난 축복도 함께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큰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철저하게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난 후 하나님께 큰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 받은 그것으로 다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여호와의 날이 오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사람들 앞에서도 무릎꿇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집트 왕의 모든 신하가 모세에게 빨리 나가라고 부탁하는 대단한 권세를 여러분에게 주시고(8절) 여기에 더하여 바로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세를 심히 크게 보이는 인물로 생각하게 하셨습니다(3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한 계획은 대단합니다. 나이가 많아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세의 나이 여든이 되어 힘이 없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보이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40년간을 짐승처럼 살았던 모세는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을 큰 사람으로 세워 주실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너무나 모자란 모세가 에집트의 모든 백성들과 바로 앞에서 큰 사람이 된 것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 앞에 우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 모든 판단을 동원하여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옳다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큰 사람으로 세워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1999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한해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까? 그리고 새해에는 어떤 사람으로 계실 것입니까? 혹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미련스러울 정도로 충직하게 서 있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3절) 이 말씀이 그 분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
므낫세의 교훈 : 열왕기하 21장 ─────────────────
북 이스라엘이 모두 멸망한 후 남 유다의 위대했던 히스기야의 시대가 지나가고 그 아들 므낫세가 12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2절). 그리고 아버지 히스기야의 위대한 개혁으로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하였다는 3절 말씀은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 듭니다. 더구나 자기 아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쳐 여호와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자기가 만든 아세라 목상을 전(殿)에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6-7절).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었던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행한 악행보다 더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악행에 대해서 아울러 말씀하시기를 유다로 범하게 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이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16절) 하고 증언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이렇게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 바로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였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연장의 은혜를 받았는데 연장된 15년간의 기간 동안 태어난 아들이 므낫세였으며 므낫세의 아들 즉 히스기야의 손자인 아몬은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치 아니하더니 반역을 당하여 궁에서 피살당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22-23절).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일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 이후에 가장 경건한 왕을 들라고 하면 조금도 주저함 없이 히스기야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들이 이렇게 악명 높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성경에 그 이유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지만 어쩌면 히스기야가 나라의 일에 너무 열심이다 보니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추정일 뿐이므로 그냥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일, 세상의 일 심지어 교회의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내 자녀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해도 내 자녀에 대한 소홀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소홀함 즉 하나님에 대한 소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맡겨 주셨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보살피지 못했다면 그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핑계될 수 없는 부모의 책임입니다. 물론 자녀가 우상이 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자녀들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책임이 조금도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수주일의 문제에 있어서 만약 부모가 가르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거나 열심히 가르쳤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자녀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부모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1절) 하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그 어머니의 이름을 말씀하시는데 어머니의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어머니의 책임이 막중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본문의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 그 어머니는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책임을 통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므낫세를 언제 낳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만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15년간 생명연장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히스기야가 죽고 난 뒤 므낫세의 나이 12세에 등극하였으므로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생명이 연장되고 난 뒤 잉태되었고 출산하여 양육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병에 걸려 나은 후 15년간 어떤 자세로 이 아이를 낳았으며 양육하였는가를 보겠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대하32:2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연장이 히스기야의 교만의 씨앗이고 그 열매가 바로 므낫세였다는 사실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을 징벌하실 때 교만의 열매가 곧바로 자기에게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중에 치시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실 것은 지금 당장 교만의 열매와 그 아픔이 닥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교만은 자식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이 지은 죄의 열매가 자식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이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혹 여러분이 손톱만큼이라도 교만했다면 하나님 앞에 버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그 씨앗과 열매가 자녀들에게 이어진다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우리는 므낫세의 악행이 히스기야가 바빠서 혹은 그 어머니의 책임 또는 교만의 열매일 수 있다는 경우에 대해서 짚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답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꾸 짚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징계의 의미가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하여 환난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평소에 잘하던 사람이 위기상황에서도 잘하였는데 환난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 잘못한 것이 있지 않나?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혹 여력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한다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산술적으로 본다면 당초에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했던 소위 말하는 축복에 더하여 복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에게 이런 저런 일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자꾸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가지 은혜를 다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하나를 더 보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이유가 확실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이유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의미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유는 잘 모르지만 '더 잘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농사짓는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았는데 적어도 성경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다(창4:2-5).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예수를 이야기하고 예수의 십자가를 보여주시기 때문에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는 '왜'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1900년대(代)에 나에게 있었던 많은 고통의 이유를 잘 모를지라도 다가오는 2000년대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에 가까이 가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겠다고 하는 의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과 아울러 모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인생의 길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에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식을 모두 데려가셨고 마지막 남은 아내조차 자기를 거부하고 떠나갔으며 염병이라는 병까지 걸려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당해야 합니다. 인생이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들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의 한 평생을 보십시오. 그가 한평생 하나님만을 위하여 얼마나 봉사하였습니까? 그러나 그 아들은 사사로서 뇌물을 받은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사사란 재판관의 역할을 감당할 뿐 아니라 나라의 정신적 지주이며 가장 큰 어른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어떻게 가르쳤기에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다는 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거룩하게 봉사하심에도 불구하고 혹 여러분이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다면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인정해야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주셨으면 이유가 있어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이 진실하게 사신 여러분이 당하는 어려움으로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감사히 받겠다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하나 더 볼 것은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15년간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적인 대단한 축복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겸손하고 정직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단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는 히스기야가 15년간 생명이 연장되고 난 후 교만해져서 문병 온 바벨론의 사자에게 나라의 내탕고를 모두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가장 구체적인 계기였다고 말씀하십니다(왕하20:15-18).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처럼 므낫세를 잉태하고 낳아서 양육시킨 것이 히스기야가 생명이 연장된 후 15년간의 일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어떤 은사나 선물을 주셨을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명연장이나 부(富)와 귀(貴)와 같은 은사 자체에 대해서 말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받은 은사로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좋은 자녀를 받았다는 것은 그 자녀가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재산을 많이 받았다면 그 재산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무엇이 축복이며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무엇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은 결과가 축복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가 15년 연장된 생명으로 가져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께 생명 연장의 은혜를 받은 과정은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받은 그 자체만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교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바나바를 부러워하여 자기 재산을 팔아 내어놓았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판 값의 일부를 감추고 얼마를 가져다가 베드로 앞에서 판 값의 전부라고 거짓증언 함으로 잠시 차이로 죽고 말았습니다(행5:1-10). 여기서 이 사람들이 많은 재산을 가진 것이 과연 축복일까요?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생명이 연장되어 건강을 받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물을 받았지만 이들에게서의 세상적인 축복은 진정한 축복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화(禍)로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왜 악한 왕 므낫세를 벌주시지 않으시는 것인가?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히 벌을 주시지 않으셨고 다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는 악을 행하였지만 그는 아무 결과 없이 죽게 됩니다(12절-18절). 더구나 18절의 그 열조와 함께 자매 하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자연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이후에 가장 선한 히스기야의 아들로서 아달랴보다 더한 악을 저지른 므낫세를 그냥 곱게 보내시는 것에 대하여 인간적인 눈으로 보아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실 것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인데 역대하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장관들로 와서 치게 하시매 저희가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간지라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대하33:11-12).. 아주 오랫동안 환난을 당했으며 쇠사슬에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보응하시므로 내 눈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행함에 따라 상주실 자는 상을 주시고 벌을 줄 자는 벌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므낫세로 하여금 유다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55년 동안 통치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한 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33:12-13).. 그가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제하며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산에와 예루살렘에 쌓은 모든 단을 다 성 밖에 던지고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단 위에 드리고 유다를 명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하매 백성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대하33:15-17).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을 다시 짚어 보면 혹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상을 받을 때에는 여러분의 눈으로 보지 못할 뿐이지 이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감사한 것은 이렇게 악했던 왕이 회개하고 겸손하게 그 삶까지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지었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 유다에서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는 새로운 축복까지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받아 주실 뿐 아니라 거기에 가장 복된 것을 더하여 주신 다는 것입니다.
혹 은혜와 은사로 선물을 받았다면 교만하지 말고 받은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므낫세가 처음부터 자기 아버지의 선함과 경건함을 물려받아 55년간 통치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바라기는 1999년의 마지막 수요예배를 마치면서 2000년을 맞이하시는 여러분들이 므낫세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기를 하나님께서 소원하시고 계십니다. ♥
참회의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한이 없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지난 한 해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위험을 미리 막아주셨고 힘들고 외로울 때 저희들을 위로해주셨으며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에 새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힘을 공급해 주셨고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먹을 음식을 내려주셨으며 입을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챙겨주셨습니다. 추위를 피할 장막을 허락하셨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을 이루는 믿음의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우리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송 드립니다.
하나님, 그러나 이 감사와 찬송과 함께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참회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셨습니다만 주신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지 못했으며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건강을 주셨습니다만 그것으로 우리가 한 것을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다. 그저 나만을 위하여, 좁은 의미의 우리를 위하여 살았던 이 부끄러운 모습을 이 시간에 자백합니다. 소중한 시간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만 그 시간들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지 못하고 게으르고 나태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해 잘 못한 것이 많고 지은 죄가 많습니다. 말로 지은 죄, 때로는 생각으로 범한 죄가 많습니다. 행위가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서슴없이 했었고, 반대로 정작 해야 할 일들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줄 일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이 안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었고 더 높은 지위에 있다고 그들을 경멸했었습니다. 나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었던 것 같을지라도 그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세워주셨건만 우리는 거룩한 사람으로 살기는 커녕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한 해, 또 한 백년이 어느덧 지나가고 있습니다. 멀기만 한 것 같은 한 천년의 끝이 다 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 인생들의 끝도 곧 찾아올진대 하나님,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그 날을 맞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여 기도 드리옵나니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거룩한 걸음을 걷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그러한 인생을 준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안타까움과 씁쓰레함으로 되돌아보는 일이 없는 괜찮은 삶을 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조금은 덜 부끄러운 인생을 장식하는 앞으로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금은 보석을 빌리게 하라
출 11: 1-2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파라오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아홉 가지 재앙이 이집트를 강타했지만 아직도 파라오는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있습니다. 경고위에 경고가 더 해지고, 재앙 위에 재앙이 더 해졌지만 파라오는 더욱더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이는 마지막 날 대환란 때 짐승의 표를 받은 인간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대적하며 보여 줄 모습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이제 한 가지 재앙이 더 집행되면 파라오는 백성들을 내 보낼 것입니다. 그냥 내 보내는 정도가 아니라 쫓아 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빛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괴롭힐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그들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파라오와 이집트 위에 더 내린 뒤에야 비로소 그가 너희를 여기에서 가게 하리라. 그가 너희를 가게 할 때에는 반드시 여기에서 다 쫓아내리니](1).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기 전에 항상 말씀을 주셨고, 파라오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 결과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단 한 차례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앞을 미리 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잘 보여 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귀는 결코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마귀는 욥을 시험할 때 연달아 두 번이나 욥에 대해 예언했지만 틀리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욥을 치시면 욥이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욥1:1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다시 한번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욥2:5)라고 말했지만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파라오의 행동을 열 번이나 한번도 빠짐없이 정확히 예측하고 맞추었습니다. 반면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순전한 한 사람의 믿음에 대해 한 번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의 과정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볼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고 미리 말씀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예언의 능력, 미래의 역사를 현재처럼 보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출7:13, 22, 8:15,19, 9:12,35)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 이집트의 속박아래 있던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의 이적을 보고 놀라는 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점을 배워야 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점을 배워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 우리는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시며 성취하시는 분이란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파라오와 이집트 위에 더 내린 뒤에야 비로소 그가 너희를 여기에서 가게 하리라. 그가 너희를 가게 할 때에는 반드시 여기에서 다 쫓아내리니](1). 모세와 아론은 지금까지 모든 일이 주님의 말씀하신 것과 같았음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번 역시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일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 그들의 마음에 어떤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파라오와 이집트의 신하들은 마음에 어떤 계획이 있었지만 그들의 계획이 서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계획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서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걸을 때 교회를 향한 마귀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뜻은 다 섭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뜻만이 서리라.](잠19:21). 주께서 계획하시고 손을 펼치시면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만군의 [주]께서 계획하셨은즉 누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으며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펼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7). 주님께서 파라오와 이집트를 향해 계획하시고 행한 일은 누구도 취소시키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5:2에서 파라오는 [...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출5:2)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그의 입술에서 주를 찬양할 수 있도록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얼마든지 회심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재앙을 통해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런 예는 역사적으로 느부갓네살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4:35-37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이제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공경하노니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다/ 진실하고 그분의 길들은 /다/ 공의로우시니 교만한 중에 걷는 자들을 그분께서 능히 낮추시느니라.](단4:35,37). 느부갓네살은 7년이란 세월동안 제국의 왕에서 짐승처럼 들에서 살고 난 후에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파라오는 이런 교훈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리실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집트의 모든 첫 태생을 죽이는 장자 재앙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 장자(첫 아들)은 집안의 기둥이요 모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전쟁이나 재앙이 닥쳤을 때 한 집안에 한 명을 살려야 한다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장자를 살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것은 이집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장자를 힘의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처음 난 모든 것 곧 함의 장막들에 있는바 그들의 힘의 으뜸인 것을 치셨도다.](시78:51,105:37).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무시했을 때 임한 재앙은 너무나 컸습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그가 너희를 가게 할 때에는 반드시 여기에서 다 쫓아내리니](1).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버려야 했고, 세상은 그들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고,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제 백성의 귀에 고하여 모든 남녀로 하여금 각각 자기 이웃에게 금은 보석을 빌리게 하라, 하시니라.](2). 주님은 이제 마지막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집트를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들에게 여비를 장만하도록 하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집트를 떠나면서 그 나라 백성들에게 ‘금은 보석을 빌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공격하고 불신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오랫동안 오역의 대표적 사례라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빌린다는 말은 언젠가 갚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후에 이집트에서 빌려간 금은 보석을 다 갚아야 했습니다(신26:68, 렘44:26, 호12:1, 대하12:9). 이 때 빌린 금은 보석은 후에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사용되기도 하고, 성막을 지을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들의 빌린 재물은 그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창세기 15:14, [또한 내가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창15:14). 이 내용을 보았을 때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인들에게 빌린 돈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400년 종살이에 대한 보상으로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겠지만 상당히 큰 액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재물을 취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종살이를 했던 인생들에게 충분히 보상해 주십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삼촌 라반 밑에서 약 20년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나올 때는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라반의 뜻과는 달리 하나님은 거부(巨富)가 되어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히브리 백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3:21-22,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리니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할 것이요, 모든 여인이 자기 이웃 사람과 자기 집에 거하는 여인에게 금 보석과 은 보석과 의복을 빌려서 너희 아들들과 딸들에게 입힐지니 너희가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할 것이니라.](출3:21-22). 빌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했습니다. 장자 재앙으로 인해 받은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금과 은, 의복을 다 빌려주었습니다(출12:35-36).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또 그분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금과 은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들의 지파들 가운데 허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시105:37)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빌리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이집트인들이 빌려주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특별한 계약서도 없이, 담보도 없이, 이자율도 정하지 않고 요구하는 대로 빌려주었습니다(12:35-36). 히브리인들은 떠나면서 이집트를 노략했습니다. 이런 채무 관계는 좀 특이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노략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패한 나라에게 행하는 행위입니다. 이긴 나라는 전쟁 배상액을 전부 부담시키고, 그 배상액에 해당하는 돈이나 천연 자원, 사람을 잡아가는데 이것을 노략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리심으로 이집트인들은 나라가 망하는 줄로 알았고, 온 백성이 다 죽는 줄로 알았습니다(12:33).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피해가 오기 전에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내 보내려 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승리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노략하겠느냐? 그 강한 자를 결박한 뒤에야 그의 집을 노략하리라.](마12:29). 히브리인들은 힘들이지 않고 이집트인들의 금은 보석과 의복들을 빌렸고, 노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후에 신약의 구속적 모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의 종이요, 마귀의 노예였습니다. 율법의 종이요, 세상의 종이었습니다. 30세에 구원을 받았다면 30년동안 죄의 종노릇 한 것이며, 마귀의 수하로 있었던 것입니다. 60세에 구원을 받았다면 60년을 죄의 종이요, 육신의 종노릇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세상을 노략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금은, 보석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자녀들을 노략합니다. [정사(政事)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2:15).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의 혼만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 모두가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산은 더 이상 마귀를 위해서 사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마귀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고 그들을 혼을 이겨올 때 그들의 모든 소유 역시 주님의 것이 됩니다. 이것은 종살이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신명기 15:12-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 곧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려서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그를 놓아주어 너를 떠나 자유롭게 가게 할 것이요, 그를 보내어 너를 떠나 자유롭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떼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즙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이집트 땅에서 노예 되었던 것과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구속(救贖)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내가 이 날 이것을 네게 명령하노라.](신15:12-15). 본래 종은 칠 년만에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풀어 줄 때 빈손으로 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인은 후히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파라오는 보내줄 마음도 없었거니와 행여 보낸다고 해도 그들의 양떼와 소 떼는 남겨 두고 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이집트인들의 재물을 빼앗거나 강탈할 수는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속히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필요를 주어서 이집트에서 내 보내려 했기 때문에 이 일은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빌리게 하셨고, 노략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다시 돌려 주려고 하시면 돌려주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빌려온 것들, 노략한 것들을 다시 이집트에 돌려주게 하실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노략하게 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금, 은, 보석을 모두 약탈당했는데, 이는 그 때 빌려온 것들을 주님께서 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금, 은, 보석을 빌리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물질적인 것을 빌리지만 영적인 것으로 갚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이 것들을 빌려씁니다. 대신 영적인 것들로 갚습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물질을 빌리지만 영적인 것으로 갚습니다. 원래 순례자의 길은 금과 은이 필요없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이집트의 금과 은이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에게 금은 보석을 빌리게 하신 것입니까? 이 구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고민을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백성은 금과 은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이 없었지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하나님의 사람, 특히 전도자들은 이런 것들을 탐내서는 안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의 사역자로서 일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내지 아니하였고](행20:33)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면서 이집트인들의 재물에 손을 대거나 약탈을 하거나 훔치거나 달라고 요구하거나 위협한다면 성경은 마르크스의 무산계급 혁명을 지지하는 책으로 변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인들에게 금, 은을 빌리라고 했지 결코 요구하거나 빼앗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금과 은이 있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는 가난한 것보다 부자들에게 임할 재앙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금과 은은 부식되었으니 이 녹이 너희를 대적하여 증거하며 불과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하여 재물을 모아 쌓았도다.](약5:3). 주님은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각 마을로 보내시면서 지갑 속에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돈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준비하지 말고](마10:9). 금과 은은 세상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속받는 것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代贖)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1:18).
주님은 모세를 통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준비하게 하시면서 왜 이집트인들의 재물을 빌리게 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만약 이 말씀에 따라 세상 사람들에게 돈을 빌린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원칙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22:7, [부한 자는 가난한 자를 다스리고 빌리는 자는 빌려 주는 자의 종이 되느니라.](잠22:7)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롬13:8)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채무에 대해서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곳 미국 생활은 삶 자체가 빚에 눌려 있습니다. 차를 사고, 집을 사고,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하는 것도 온통 은행 대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버는 만큼 살고, 번만큼 쓰는 생활이 아니라 사는 만큼 갚아야 하고, 쓰고 싶은 만큼 빌려서 버는대로 갚아 나가는 제도입니다. 저는 이 사회의 제도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는 제도라면 우리는 건전한 채무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채무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가능한 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내게 돈을 빌려 주거나 무엇을 빌려 줄 때 형제 사랑에 바탕으로 한, 받기를 포기한 그런 빚이라면 받아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안 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정말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통해서 은혜의 선물로 주는 것이라면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내게 필요를 구할 때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더욱 비성경적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마5:42)고 했기 때문입니다.
① 우리가 빌려 줄 때는 돌려 받기를 포기해야 하며, 심지어 아무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찬들의 채무 관계의 기본입니다. [너희가 만일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려 주면 무슨 감사의 /말을/ 듣겠느냐? 죄인들도 준 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들에게 빌려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기 때문이니라.](눅6:34-35).
② 우리가 빌려 줄 때에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네가 만일 네 곁에 있는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주거든 너는 그에게 빚쟁이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지니라.](출22:25). 저는 어떤 성경대로 믿는 교회라고 자랑하던 교회가 개척 교회를 자발적으로 1,500만원을 빌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돈을 받기 위해 법원에 재판을 걸었고, 이자들을 청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성경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제 멋대로 믿는 것입니다.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주지 말고 이득을 얻으려고 네 양식을 빌려 주지 말지니라.](레25:37). 이 두 가지 원칙만 지켜진다면 성도들은 돈 문제로 인해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③ 우리는 자신의 몸을 주께 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주]께 빌려 드리되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주]께 빌려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주]께 경배하니라.](삼상1:28). 한나는 서원 기도를 통해 주님께 사내 아이를 얻었는데 아이를 낳자 마자 곧 바로 서원한 대로 주께 드렸습니다. 드리면서 ‘[주]께 빌려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역시 사무엘을 맡으면서 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습니다(삼상2:20). 주님은 우리의 헌신을 받으실 때 전적인 소유권이 있지만 빌리시는 것처럼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몸을 빌려 드리고, 주님은 영적인 것으로 갚으십니다.
④ 우리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김으로 주께 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께 빌려 드리는 것이니 그분께서 그가 베푼 것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우리는 선을 베풀고 빌려 줄 때 채무 관계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려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받지 못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⑤ 우리는 빚진 자였는데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의 삯을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그러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마6:12).
⑥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빚진 자는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바리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없는 자에게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빚을 다 갚아야 할 사람이 빚을 다 갚기 전에는 마음의 평안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 마음의 평안이나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진 빚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채무는 꼭 해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⑦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참으로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기뻐하였거니와 또한 그들은 저들에게 빚진 자들이니 이는 만일 이방인들이 저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하였거든 육신의 것으로 저들을 섬기는 것도 그들의 마땅한 본분이기 때문이라.](롬15:27). 우리는 많은 면에서 유대인들에게 영적인 빚을 지고 있습니다. 세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유대인들을 박해했지만 많은 면에서 그들의 빚을 진 채 살아갑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면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육신적으로 세상의 빛이며, 소금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잘 대해 주어야 합니다. 온 세상은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류의 정신적, 물질적 자산을 많이 남겨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세상에 복을 주십니다.
⑧ 잘못된 채무 관계는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롬8:12). 최악의 악성 채무 관계는 사기 채무입니다. 갚지 않아도 될 돈을 평생토록 갚도록 짐이 부과되어 고생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빚진 자들이지만 육신에게 진 빚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 필요도, 순종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는 기회를 타서 육신을 통해 우리를 속입니다. 마귀는 육신의 정욕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육신의 소욕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출처: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원문보기 글쓴이: DMpastor
10가지 재앙
출 11: 1-3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 장대한 스케일, 수많은 등장인물들,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통쾌한 장면들... 하나님께서 시나리오를 쓰시고, 하나님께서 감독하시고, 하나님께서 제작하신 하나의 우주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적 드라마 출애굽기는 내용적으로 볼 때 크게 세 편의 연속된 사건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 사건입니다.(1-6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라는 한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둘째는 출애굽 사건입니다.(7-18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셋째는 출애굽 이후 사건입니다.(19-40)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본문 말씀은 두 번째 사건의 한 부분입니다. 출 7:14-11:10까지 이어지는 소위 “열 재앙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8:1)
물론 바로가 보낼 리 만무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리 없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장정만 60만입니다. 남녀노소 전체를 합하면 200만 정도의 인구입니다. 저들이 노예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막대한 노동력을 잃어버린다면 애굽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맛보기로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입니다. 이쯤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선선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요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보입니다. 그것을 본 바로가 거절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매를 드셨습니다. 바로 애굽 땅에 재앙을 퍼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려 10차례나 계속됩니다. 바로 왕이 버티다 버티다 결국 두 손을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냅니다.
10차례 재앙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피 재앙입니다. 애굽의 모든 강과 하수가 피로 변했습니다. 둘째,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가 애굽의 온 땅을 덮었습니다. 셋째, 이 재앙입니다. 땅의 티끌들이 이로 변했습니다. 넷째, 파리 재앙입니다. 애굽의 온 천지가 파리로 뒤덮였습니다. 다섯째, 악질 재앙입니다. 애굽의 가축들이 악질로 죽었습니다. 여섯째, 악성 종기 재앙입니다
. 애굽 사람들과 짐승들이 지독한 피부병인 악성 종기에 고통을 겪습니다. 일곱째, 우박 재앙입니다. 애굽 전국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여덟째, 메뚜기 재앙입니다. 애굽 전역에 메뚜기 떼가 창궐했습니다. 아홉째, 흑암 재앙입니다. 흑암으로 애굽 전체가 어둠에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다 끔찍한 재앙들입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재앙들입니다. 이 재앙들 10가지가 쏟아짐으로써 바로가 항복을 선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냈습니다.
이 10가지 재앙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1. 하나님을 나타내심
출애굽기의 10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7:5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7: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8:22를 보면 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그리고 9:14, 9:16, 8:10 등을 보면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이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함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실제로 10가지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심판하시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것들은 참신이 아님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피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생명의 젖줄입니다. 나일 강은 사막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애굽은 땅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이 사막인 애굽 땅에 사람들이 살고 대제국이 세워졌습니다. 전적으로 나일 강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애굽인들은 나일 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닐루스’(Nilus)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신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일 강이 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 죽음의 자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일 강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생사는 나일 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관하신다는 엄숙한 선포입니다.
다음으로 흑암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은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태양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1년 365일 대낮에는 태양이 저 하늘에 떠서 온 천하를 호령합니다. 당연히 고대 애굽 사람들은 저 태양을 신 중에 최고의 신으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이 바로 태양신 ‘라’(Ra)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대낮에도 3일 간이나 애굽 온 천지가 흑암으로 뒤덮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태양 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태양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태양이 사람들의 생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10 가지 재앙이 모두가 다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것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이 사건으로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호 4:1, 6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망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나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6: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이점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서 여호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확인시키심
이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시키신 바가 있습니다. 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시고 이 점을 다시 확인시키셨습니다. 7: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백성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바로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이 일방적인 선택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10가지 재앙 사건을 조금 세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 가지 재앙 중에 치명적인 재앙들은 애굽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재앙, 악질 재앙, 우박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장자 재앙입니다. 이 재앙들은 애굽 땅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 땅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재미있는 관점으로 설명했습니다. 렘 31:31-3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셔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혼인 서약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택하셔서 결혼 예식을 올리기 위해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혼 예식장은 저 시내산인데 지금 그곳으로 데리고 나가시려고 바로에게 이 재앙을 내리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아주 특별한 사랑]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난 정말 많이 공부했어. 하나님에 대해 말야.“ 자신 있게 말하지만, 누군가를 인정할 수 없어서 누군가 부럽다 못해 미워져서 혹은 자신이 못마땅해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는 당신. 부드러운 미소와 섬김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당신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친 손에 반지를 끼우고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주시고 고운 옷을 당신에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 잠겨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
이 10 가지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재앙이 임하자 처음에 바로는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러다 재앙의 강도가 심해지자 한 발 물러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말을 뒤집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바꾸셔서 보낼 마음을 바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재앙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9:12, 10:20, 10:27에 반복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바로가 악성 종기 재앙이 임했을 때, 메뚜기 재앙이 임했을 때, 그리고 흑암 재앙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생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바로가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이 10가지 재앙의 최종 목표가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자 재앙까지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자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출 12:21-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한 마디로 유월절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유월 곧 넘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살았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고 심판에서 구원받고 이 땅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10 재앙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심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새 이스라엘인 우리를 위해 놀랍게 역사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