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사람과산_김규순의 풍수이야기 2016년9월호
삼각산(三角山, 836.5m)은 좌우로 장막을 펼치며 남하하면서 계곡을 만든다.
한양도성으로 가기 직전 보현봉에서 동쪽으로 정릉천 서쪽으로 홍제천을 펼치고 있다.
삼각산 백운대를 중심으로 우이천과 창릉천이, 삼각산과 도봉산 전체를 아우르는 영역으로 중랑천과 공릉천이 좌우에서 서로 자웅을 겨루고 있다. 능선은 계곡과 평야를 만들어 물을 모아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계곡물과 샘물에는 그 산의 고유한 미네랄이 녹아 있다. 그 물을 마시며 산다는 것은 그 산의 정기를 마시는 것과 같다.
글 사진 || 김 규 순
삼각산은 어디에서 왔는가?
금강산 북쪽, 강원도 평강군과 함경남도 안변군 사이에 가로놓인 600m의 고개로 추가령지구대가 지나간다. 이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이 분기하여 임진강과 북한강 사이를 헤집고 남서방으로 전진하다가 한강을 만나서 우뚝 솟은 것이 삼각산이다.
삼각산 백운대에서 한양의 주산, 북악산으로 이어지기 전에 기운을 추스르려고 세운 봉우리가 보현봉이다.
보현봉을 발원지로 평창계곡이 선경을 이루며 평창동을 휘감으며 홍제천의 본류가 흐른다. 건너편 부암동에는 백사실계곡 백석동천의 자연주의와 인왕산 북벽 청계동천의 풍류주의가 대비된다. 이 공간은 예아 지금이나 삼각산의 정기가 피어오르는 곳이므로 문사(文士)들이 찾아들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삼각산의 보현봉>>>
가장 높은 봉우리가 보현봉이다.
그 아래로 평창동 고급주택지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노니는 장소에 불과했는데, 현대문명의 이기(利器)인 자동차가 현대인의 발이 되어 준 덕에 높은 곳까지 고급빌라가 들어서 있다. 평창동에 내린 빗물은 모두 홍제천으로 흐른다. 이 동네는 지기보다는 천기로 살아가야할 동네이며, 부자가 되어서 들어오는 곳이다. 보현봉 우측의 쌍봉이 형제봉이다.
청계동천과 백석동천
서울에서 자하문 고개를 넘어서서 좌측 인왕산 기슭은 청계동천(淸溪洞天)이라 부르고,
우측 북악산 기슭은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용채총화>에서는 이곳을 “도성 밖의 놀만한 곳으로 는 장의사(藏義寺)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냇물이 삼각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다. 골짜기 속에 여제단(?祭壇)이 있다. 그 남쪽에 무이정사의 옛터가 있다.”고 적었다. 홍제천의 물이 맑고 돌은 희고 깨끗하여 신비스런 경관을 만들고 있어서 많은 선비와 사대부들이 노는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탕춘대성>>>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상명대학교이다. 상명대학교 뒷 능선이 탕춘대능선이다.
병자호란이후 이곳에 성곽을 쌓았다. 사진 좌측아래에 나뭇가지로 살짝살짝 가려진 흰선이 성곽이다.
성곽의 끝은 홍제천과 만나며 홍지문과 연결되어 있다.이하응의 별서 좌측 원경으로 북악산의 후면이 보인다.
고종의 아버지로서 항상 권력을 쥐고 있겠다는 심산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청계동천
안평대군 이용의 집터를 지나 10미터 위쪽 우측의 바위에 새겨진 동네이름.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벽의 높은 지대에 있지만, 막상 올라가면 낮은 듯 여겨지는 묘한 공간이다.
고관대작이 머무른 별서의 주춧돌이 있으며, 내면을 관조하기 위한 연못도 조성되어 있다.
이곳이 백사실계곡이라고 불러지므로, 백사 이항복의 별서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이항복의 자택이 필운동에 있었으므로, 도보로 한 시간 정도 걸리니 별서로서 손색이 없는 입지이다.
필운동의 배화여자대학교의 필운관 뒤를 돌아들면 필운대(弼雲臺)라는 각자를 만날 수 있다.
백석동천 >>>
백사실 계곡에 새겨진 각자.
백사 이항복의 별서라고 전해진 곳에서 200미터 위 우측에 있다.
백사실 계곡에 남겨진 주춧돌과 연못 >>>
백사 이항복의 별서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그의 집이 필운동에 있었으므로 부암동과 거리가 멀지 않아 별서로 안성맞춤이다.
계곡물의 흐름이 빨라서 별도의 연못을 만들어 유유자적하고자한 모습이 그려진다. 위쪽의 가옥은 계곡물을 등지고 산을 바라보며 따뜻한 햇빛을 받고자 남향을 지었다. 별서에서는 종종 풍수를 무시하며 경관과 효율성을 중시한다. 이는 사는 집이 아니라 잠시 거하며 쉬는 집이기 때문이다.
월암 >>>
월암(月岩)이라고 새겨진 각자.
바위에 걸터 앉아서 달을 바라보는 자리인지, 그 누구의 호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전자인 듯하다.
청계동천의 무계동(武溪洞)에는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었다.
무계정사는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꿈에 본 경관을 찾아 지었던 정자이다.
안평대군(1418-1453)은 1447년 어느 봄날 꿈에 본 광경을 안견에게 그리게 했다.
그것이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 <몽유도원도>이다.
안평대군은 도성 넘어 무계동에 별서를 짓고 살았으나 계유정난(1453) 때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로부터 그의 흔적은 지워졌다. 혹자는 안평대군이 정치를 떠나 무릉계곡에 은거하며 조용하게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무계동은 형제간 권력다툼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는 곳이다.
지금 무계동은 한 쪽 구석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고 사실주의 근대단편소설의 선구자 현진건(1900-1943)이 무계동에 살았다고 전하나 건물은 온데 간 데 없고 다만 무계동 각자 옆에 전통가옥 한 채가 수리 중이다.
무계동 >>>
안평대군 이용의 집터로 알려진 곳.
무계정사가 있었다고 전하나,
계유정난에서 친형인 수양대군에게 잡혀 사사당한 후 그의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
무계동의 글씨는 이용이 남긴 글씨 중에 몇 남지 않은 작품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근대에 지어진 전통한옥이 수리중이다.
삼계동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서 뒤 바위에 새겨진 동네이름.
무계동에서 한 블록 아래에 삼계동(三溪洞)이 있다.
지금 이곳에는 석파정과 흥선대원군(1820-1898)의 별서가 남아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서>>>
적어도 17세기부터 여기에 별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집은 안동김씨 김홍근의 집이었다.
그는 영의정까지 지낸 세도가였으나 살아있는 권력 흥선대원군에게 집을 빼앗긴다.
인왕산의 암반 위에 세워진 별서이다.
석파정
흥선대원군 별서에서 가장 구석진 계곡에 지어 놓은 중국풍의 정자.
흥선대원군은 자기의 호를 따서 석파정이라고 불렀다.
흥선대원군 별서의 바위에 새겨진 각자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한수옹(권상하)이 친구 정이(조정만)에게
신축년에 글을 써주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巢水雲濂菴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是 辛丑歲也)
권상하(1641-1721)와 조정만(1656-1739)은 김홍근보다 150년 앞선 시대의 사람이므로
이곳이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간 곳임이 틀립없다.
홍제천
홍지문과 탕춘대성을 지나 홍제천을 따라 600미터정도 걸어가면 옥천암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는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이라고 적힌 마애보살좌상(보물 제1820호)이 있다.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 양식이므로 고려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물줄기를 따라 몇 리를 따라 내려가면 불암(佛岩)이 있다.
바위에 불상을 새겼고 시냇물이 꺾여 돌아 북쪽으로 가다가 곧장 서쪽으로 흐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읍을 정하면서 기도한 곳으로 전해지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이 여기서 기도하여 나은 아들이 고종이라고도 전한다. 조선의 처음과 끝의 기운이 서려있는 곳이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옥천사 >>>
태조 이성계의 기도처이자 고종의 어머니가 기도한 곳.
조선의 시작과 끝이 옥천사의 기운과 함께 한 것은 아닌지.
평창동과 홍지동의 경계지점, 홍제천 위에 세검정이 서 있다.
세검정에는 한양의 북방 외곽을 담당하였고 북한산성의 경비를 담당했던 총융청이 있던 곳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명분없는 쿠데타로 정평이 나 있는 인조반정 때에 주모자들이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결정하고 칼을 씻었다고 전한다.
세검정 >>>
총융청이라는 조선 군부대가 있엇던 곳으로 인조반정의 음모를 꾸민 장소로 전해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4가지 요소가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지리(地理), 둘째 생리(生利), 셋째 인심(人心), 넷째 산수(山水)이다.
홍제천이 있는 부암동은 한양 사는 사대부나 선비들에게 산수였다.
세검정이 도성 밖이지만, 소나기 내릴 때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물기운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계곡이 깊지 않아서 소나기 내릴 때만 넘칠 듯한 물을 볼 수 있었으니
다산 정약용은 소나기가 내릴 만 하면 세검정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정약용의 <유세검정기>에서는
“세검정의 뛰어난 경치는 소나기 내릴 때 폭포를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중략) 정자에 올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으니 난간 앞의 수목들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데,
부러질 것 같아서 술기운이 싹 가시는 듯했다.
이 때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고 산에서는 물이 사납게 쏟아져 내려와 숨 쉬는 잠깐 사이에 계곡을 채우더니 그 소리 또한 요란하였다. 모래가 쓸려 내려오고 돌이 구르면서 사나운 물이 솟구치면서 정자의 초석을 때리는데 그 기세가 사납고 맹렬하기 그지없었다. 정자의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니 두려워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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