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표면, 언어의 피부
- 송명화 <석류알 같은>을 중심으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의미 이전의 신체, 붉은 강도의 출현
- 석류의 육체와 기관 없는 신체의 이미지
송명화의 수필 <석류알 같은>은 의미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의미가 발생하기 직전의 강도(intensity)를 독자의 신체에 먼저 전달하는 글이다. 작품은 첫 문장에서부터 이미 해석을 거부한다. “핏물이 고였다. 비닐을 벗기자 껍질이 터진 석류들이 일제히 내게 안겨들었다.” 여기서 석류는 상징 이전의 상태로 등장한다. 풍요, 다산, 축복이라는 문화적 의미망은 즉각 유예되고, 독자는 먼저 터짐, 고임, 안겨듦이라는 감각적 사건에 노출된다. 이 장면의 석류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전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로 다가온다.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말한 기관 없는 신체(BwO)가 바로 이 지점에서 호출된다. 껍질을 잃은 석류알은 더 이상 보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기관이며, 각 알맹이는 독립된 목적도 기능도 없이 고통의 강도로만 서로를 압박한다.
작가는 이 강도를 심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라는 반복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신체적 비명에 가깝다. 아르토가 말했듯,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기 전에 먼저 몸을 태워야 한다.” 이 수필의 발단부는 바로 그 ‘태워진 언어’의 상태를 유지한다. 석류는 아직 비유가 아니며, 아직 세계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의미 이전의 신체, 곧 들뢰즈가 말한 심층의 강도가 표면으로 밀려 올라오는 장면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이 강도가 그대로 지속된다면, 글은 감정의 과잉이나 비극적 정서의 포화 상태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필은 심층을 파고들지 않고, 다음 장면으로 이동함으로써 표층의 가능성을 연다. 송명화의 <석류알 같은>은 ‘의미의 논리’가 말하는 표층의 윤리를 수필이라는 장르 안에서 탁월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이 수필은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더 얇은 표면을 구성함으로써 의미를 발생시킨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은 감동적인 산문을 넘어, 사건으로서의 문학에 도달한다.
Ⅱ. ‘강도’란 무엇인가
- 본격수필에서 의미를 앞서는 힘의 차원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말하는 강도(intensity)는 감정도, 심리도,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주체가 느끼는 ‘무엇’이 아니라, 주체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힘의 차이다. 강도는 “슬프다”거나 “분노한다”는 언어로 포착되기 전에, 신체를 먼저 흔든다. 떨림, 압박, 열기, 통증, 긴장과 같은 상태들이 바로 강도의 징후다. 이때 강도는 아직 해석되지 않았고,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강도는 의미의 원인이 아니라, 의미가 발생하기 전의 조건이다. 본격수필이 다루는 체험의 핵심은 바로 이 강도의 층위에 있다. 일상의 사건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만, 그것이 수필이 되는 순간은 사건이 남긴 감정이 아니라, 사건이 신체에 남긴 강도가 언어와 접촉할 때다. 좋은 수필이 ‘감정적’이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정은 이미 사회적으로 명명된 상태이지만, 강도는 아직 분류되지 않은 힘이기 때문이다. 본격수필은 이 강도를 곧바로 의미로 환원하지 않고, 일정 시간 지연시킨다.
이 지연의 기술이 바로 수필의 담론층이다. 담론층은 들뢰즈 사건의 존재론에 의하면, 심층에 해당된다. 담론층은 체험을 해석하는 층이 아니라, 강도가 의미로 굳어지기 전에 머무를 수 있도록 만드는 언어의 표면이다. 만약 강도가 즉시 감정 고백이나 교훈으로 번역된다면, 수필은 심층으로 추락한다. 반대로 강도를 완전히 방치하면, 언어는 신체의 비명이 되어 붕괴한다. 본격수필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강도를 견디면서도 의미로 강제하지 않는 문장을 구성한다.
송명화의 <석류알 같은>에서 독자가 먼저 마주하는 것은 ‘전쟁의 비극’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터짐과 고임, 붉은 색채의 압력이다. 이것은 분노나 연민이라는 감정 이전의 상태이며, 바로 강도의 출현이다. 수필은 이 강도를 설명하지 않고, 장면으로 배열함으로써 독자의 신체에 전달한다. 이때 독자는 이해하기보다 먼저 감응한다. 본격수필의 윤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수필은 의미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강도를 통과하게 한다. 그리고 의미는 그 이후, 표층에서 사건으로 발생한다.
Ⅲ. 표층으로 조직되는 사건
- 석류에서 전쟁으로, 개인에서 세계로
이 수필의 담론층은 석류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는 석류를 사건의 표면으로 들어 올린다. 그 결정적 전환은 다음 장면에서 이루어진다. “화면을 채우는 한 장의 사진에 눈을 크게 떴다. 폭격으로 부서진 교각과 다리 상판 아래에 빽빽한 석류알들…” 이때 석류는 상징이 되지만, 도식적 은유로 고정되지 않는다. 석류알과 피난민의 얼굴 사이에는 ‘같다’는 설명이 없다. 대신 이미지의 병치가 이루어진다. 들뢰즈의 말대로, 의미는 원인이나 해석의 결과가 아니라 사물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효과로 발생한다. 독자는 이 병치 속에서 스스로 사건을 경험한다.
얼음이 된 사람들, 교각 아래에 석류처럼 알알이 박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늘을 쳐다본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의 위성도시인 이르핀의 강에 놓인 거대한 다리가 폭파되었다. 잘려서 어긋난 다리 상판밖에 지켜줄 구조물을 갖지 못한 피난민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말을 잃은 어른들과 보채기를 잊은 아기까지 한 덩이로 얼어붙었다. 바로 여기 포탄이 날아든다면 어찌 될 것인가. 아니 미사일이 될 수도 있겠지. 밤이 되기 전 공습을 받는다면 어디에 숨을까. 얼기설기 부교를 엮어 보려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아 집단공황상태에 빠질 지경이다. 여기 저기 널린 이웃들의 주검은 불안이라는 화마에 불을 땐다. AP통신은 이 사진에 ‘죽음의 다리’라는 이름을 붙여 세계에 전쟁의 포악함을 고했다.
- <석류알 같은> 중에서
이 지점에서 송명화의 수필은 전형적인 전쟁 고발문과 분명히 갈라선다. 작가는 분노를 직접 설파하지 않고, 도덕적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얼음이 된 사람들”, “말을 잃은 어른들과 보채기를 잊은 아기”라는 표면적 묘사를 통해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연상시키는 방식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악이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석류알처럼 모여 있는 피난민들의 얼굴은, 특별한 비극이 아니라 언제든 재현 가능한 사건으로 독자의 현재를 침범한다. 수필의 담론층은 바로 여기서 작동한다. 체험은 개인적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와의 접촉면에서 사건으로 재배치된다.
무슨 어이없는 연상일까. 갑자기 수류탄手榴彈이 떠올랐다. 터질 때 탄알 파편이 사방으로 퍼지는 유탄이라 석류나무 류榴자를 쓴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전쟁터의 아픔을 보며 석류를 떠올리는 나의 불경스러움에 이마에 굵은 주름을 잡는다. 석류를 일컫는 말은 많다. 이해인은 ‘바람에 익힌 가장 눈부신 환희’라 하였고, 폴 발레리는 ‘자신의 비밀스런 구조를 꿈꾸게 하는 빛나는 파열’이라 하였다. 이 고혹적인 과실이 어쩌다 ‘죽음의 다리’에 모인 인파를 상징하게 되었더란 말인가. 기자와 인터뷰한 이들의 안위가 궁금하다. 로켓포 환청에 시달린다는 올렉산드르는 지금 안전할까. 전쟁해설사가 되어 부차에서의 고문과 전쟁 참상을 알리고 있는 예브게니, 전선으로 물품 보내기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알료나는 아직도 무사할까. 기사 속 인물들 이름을 하나씩 소리 내어 불러준다.
- <석류알 같은> 중에서
특히 “수류탄手榴彈”이라는 언어적 연상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작가 스스로 “불경스러움”이라 자책하지만, 바로 그 불경함 속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폴 발레리의 말, “시는 설명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지연이다.” 이 문장을 빌리자면, 이 수필의 석류는 독자를 멈추게 만드는 지연 장치다. 작가는 “이 고혹적인 과실이 어쩌다 ‘죽음의 다리’에 모인 인파를 상징하게 되었더란 말인가.”라고 하면서, 기자와 인터뷰한 예브게니, 알료나의 안위를 걱정한다. 여기서 석류는 더 이상 과실도, 상징도 아닌 사건의 표면이 된다.
Ⅳ. 결구라는 최종 표면
- 다리, 껍질, 그리고 침묵의 윤리
<석류알 같은>의 결구는 이 수필이 본격수필로 성립하는 결정적 지점이다. “이르핀의 다리는 석류 껍질이다.” 이 문장은 모든 해석을 종결시키는 정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의미를 열어두는 봉합이다. 다리는 껍질이며, 껍질은 보호막이다. 그러나 이 보호막은 이미 찢겨 있다. 작가는 ‘무엇이 보호막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뿐,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침묵의 여백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완성으로서의 표층이다.
이어지는 밥 딜런의 노래 인용은 교훈이 아니라, 반복되는 질문이다.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이 질문은 수필을 닫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를 다시 세계로 돌려보낸다. 결구에서 ‘나’는 사라지고, 사건만이 남는다. 독자는 작가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견디게 된다. 이것이 본격수필 결구 미학의 핵심이다. 들뢰즈의 말로 바꾸자면, 이 결구는 기관 없는 신체의 강도를 다시 심층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언어의 피부 위에 고정한다. 그래서 이 수필은 분노로 끝나지 않고, 절망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대신 “사붉은 음료 한 잔”이라는 이미지가 남는다. 이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 “진정한 예술은 해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지속시킨다.” <석류알 같은>은 바로 그 지속의 형식이다. 이 수필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건이 말하게 한다. 석류는 의미의 도구가 아니라, 의미가 태어나는 표면이 된다. 그리고 그 표면 위에서 독자는 더 이상 안전한 독자가 아니라,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