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조선의 전쟁이야기 - 이수일의 여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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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9. 04:13조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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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일의 여진 정벌
1)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수일의 여진 정벌 개요
선조의 재위기에 이르러 조선은 더 이상 대외정벌을 정책적으로 준비하거나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국정 운영 목표와 대외정책의 방향이 크게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조선초기와 달리 여진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고, 동시에 해당 지역에 대한 조선이 영향력도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탕개(尼湯介)와 같은 여진 추장은 조선의 변경 지역을 여러 차례 침입했다. 조선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의 활약으로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1587년(선조 20)에는 추도(楸島)의 호추(胡酋) 마니응개(亇尼應介)가 녹둔도(鹿屯島)를 함락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선조는 북병사(北兵使) 이일에게 지시해 2,400여 기(騎)의 병력을 동원해 여진 정벌에 나서도록 해서 큰 전공을 획득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고 난 조선은 여진 세력의 침입이 계속되자 공세적인 정책을 통해 이들을 제압하고자 했다. 특히 선조는 큰 전란이 끝난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신료들과 함께 북벌(北伐)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대간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선조의 북벌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선조는 결국 1600년(선조 33)과 1601년(선조 34) 두 차례에 걸쳐 정벌을 단행하도록 지시했다. 이수일은 두 차례의 정벌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전승을 이끌어 냈다.
1599년(선조 32) 함경 감사(咸鏡 監司) 윤승훈(尹承勳)은 선조에게 북벌에 관한 내용 15조항을 조목별로 상세하게 보고했다. 같은 해 음력 7월 7일 윤승훈의 계획을 검토했던 비변사(備邊司) 역시 북벌에 찬성하면서 선조에게 여진 정벌을 건의했다. 선조는 윤승훈과 비변사의 의견에 따라 북벌을 결심했다. 대간들은 북벌 계획의 중지를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선조의 북벌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병조(兵曹)와 장수들과 함께 정벌군의 출병 시기와 군사의 배치 계획 등을 논의했다.
같은 해 음력 12월 28일 비변사는 북정군의 출동 시기를 다음해 3월 보름께로 정하자는 의견을 선조에게 진언했다. 아울러 황해 · 강원 · 경기의 무사 도합 5백 명과 경포수(京砲手) 1백 명, 황해도 포수 1백 명, 평안도 포수 6백 명을 병조와 훈련도감 및 각도 감사로 하여금 미리 선발해서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가 제때에 보내도록 하자는 계획도 함께 제시했다. 선조는 비변사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다음 해 음력 1월 비변사는 병력 동원의 어려움을 이유로 북정의 연기를 건의했다.
결국 1600년(선조 33) 음력 4월 14일 조선은 호적(胡賊)에 대한 정벌을 단행했다. 정벌 과정은 음력 5월 8일 조정에 보고되었다. 당시 조선군은 음력 4월 14일에 출동해서 다음 날 평명(平明)에서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진격했다. 좌위병은 초면(初面) 부락 뒷산에 매복하여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중위병과 우위병은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당시 이수일(李守一)은 중위병을 지휘했다. 조선군의 협공에 적들이 일망타진될 듯 했는데, 차유령(車踰嶺) 아래와 기우동(祈雨洞) 어귀에 호적의 복병(伏兵) 4~5명이 정벌군을 보고 즉시 보고해 많은 적들이 도망가게 되었다.
조선군은 장주 부락(張主部落)에서 마을외 부락(亇乙外部落)까지 무려 1천여 집을 한꺼번에 불태우니 적들은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남녀노소가 모두 흩어져 산 위로 올라가 바라보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정벌군은 움 속에 묻은 곡식까지 모두 파내 불태웠고, 밭에 심었던 곡식은 물론 마을외 부락의 성채(城寨)도 다 불태웠다. 조선의 정벌로 여진 부락의 종족들이 멀리 도망쳤을 뿐 아니라 이웃 부락과 조선을 이미 배반했던 회령 지역의 추장들까지도 모두 항복 의사를 밝혔다. 이외에도 정벌군은 115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획득했다.
조선의 정벌은 1601년(선조 34)에도 계속되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수일은 군사를 인솔하고 온성(穩城) 일대 여진 세력의 요충지였던 수을허(水乙虛)와 교로(交老) 지역을 정벌했다. 당시 조선군은 우위(右衛)에 사수(射手) 4백 75명, 경초관(京哨官) 최인관(崔仁寬)의 군사 49명, 평안도 포수(平安道砲手) 86명, 도합 6백 10명의 군사를 동원했다. 좌위(左衛)에는 사수 8백 16명, 경초관 이정배(李廷培)의 군사 93명, 평안도 포수 1백 명, 도합 1천 9명을 따로 동원했다. 마지막으로 중위(中衛)에는 사수 4백 74명, 경초관 원협(元協)의 군사 49명을 동원해 정벌군을 편성했다.
이수일은 여러 장수 및 군관과 영속(營屬) 등 도합 2천 5백 19명을 거느리고 음력 1월 27일 술시(戌時)에 온성부에서 출병하여 이튿날 동이 틀 무렵 두 부락을 공격해 일시에 포위했다. 조선군의 움직임을 호인(胡人)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벌군의 소리를 듣고서야 황급하게 도망가자 화전(火箭)과 사포(射砲)를 종횡으로 동시에 쏘아 상대를 제압했고, 아이들은 포로로 잡았다. 아울러 가옥을 불사르고 땅에 묻어둔 곡식을 찾아내 버렸다. 한편, 소 · 말 · 돼지 · 개 등의 가축도 모두 소탕했다. 당시 정벌군이 참획한 것이 2백 29급이고, 사로잡은 자가 7명이었다.
2)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수일의 여진 정벌 관련 문헌
선조 34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수일의 여진 정벌과 관련된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와 비변사 등이 북벌을 추진하던 배경과 논의 과정 등이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이수일의 여진 정벌과 관련된 기록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수일은 이일과는 달리 개인에 관련된 자료를 확인하기 어려워 선조 33년과 선조 34년의 정벌 상황과 경과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의지해야만 한다.
咸鏡北道兵馬節度使 臣李守一 謹啓爲征討事 ··· <중략> ··· 臣則薄伐小醜 主將輕動 非不知不可 而發此烏合之卒 遠赴三息之地 脫有失誤 後悔莫及 坐以煎慮其成敗 非徒不若躬率而指揮 且監彼地山川形勢 賊路遠近探悉 故率諸將及軍官營屬等 合二千五百十九名 本月二十七日戌時 自穩城府發軍 翌日黎明 馳到賊窟 兩部落一時圍抱 同賊胡等 邈然不知 始聞兵馬之聲 蒼黃奔走之際 火箭射炮 縱橫俱發 澌殺壯賊 探俘兒胡 焚其家舍 拔其埋穀 牛馬猪犬等物 或射殺 或劍擊 或被燒者 不知其幾許 蕩滅無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신 이수일은 정토(征討)를 행한 일로 삼가 아룁니다. ··· <중략> ··· 신이 생각할 때, 소추(小醜)를 정벌하는 일에 주장(主將)이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와 같은 오합지졸을 조발하여 멀리 90리나 되는 지방에까지 갔다가 혹시 잘못되는 일이 있을 경우 후회막급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앉아서 성패가 어찌될지 애태우는 것보다는 직접 거느리고 가 지휘하는 것만 못할 뿐 아니라, 그곳 지방의 산천 형세를 살펴보고 적로(賊路)의 원근을 탐지하는 것도 좋을 듯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장 및 군관과 영속(營屬) 등 도합 2천 5백 19명을 거느리고 본월 27일 술시(戌時)에 온성부에서 출병하여 이튿날 동이 틀 무렵 적의 소굴인 두 부락에 들이닥쳐 일시에 포위하였는데 적호(賊胡)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병사와 군마의 소리를 듣고서야 황급히 도주할 때 화전(火箭)과 사포(射砲)를 종횡으로 갖추어 쏘아 장적(壯賊)을 남김없이 죽이고 아호(兒胡)를 찾아내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들의) 가옥을 불태우고 땅에 묻어둔 곡식을 퍼내버리는 한편, 소 · 말 · 돼지 · 개 등의 가축들은 사살하거나 혹은 칼로 쳐서 죽이거나 불태워버린 것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소탕했습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권134 宣祖 34년 2월 15일 갑신
(Vol.24, p.200)
[네이버 지식백과] 이수일의 여진 정벌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