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29/이름고考]기록(錄)의 바다에서 헤엄치기(泳)
매주 수요일 아침, 공중파 프로그램 <아침마당>은 <도전! 꿈의 무대>를 펼친다. 아마추어 가수들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데, 도전자들마다 사연, 사연이 절절하다. 어제는 5승 우승자 10여명이 출연, ‘왕중왕’을 가리는 듯했다. 그중에 한 친구 이름(물론 예명藝名이겠지만)이 ‘최상’이어서 보다가 설거지를 하는 아내에게 “고등학교때 내 필명筆名이 ‘최상’이었다”고 말하며 실소失笑를 했다.
하여, 매급시 흘러가고 지나간 나의 이름과 별명, 호들을 생각해봤다. 아버지가 맨처음 지어준 이름이 ‘헤엄칠 영泳’에 ‘기록할 록錄’이다. 15년이 넘게 ‘생활글 작가作家’가 아닌 ‘생활글 작자作者(쓰는 놈)’를 자처하는 지라, 어느 글에서 아버지가 ‘기록의 바다에서 헤엄치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준 것같다는 너스레를 떤 적도 있지만, 제법 그럴 듯한 풀이가 아닌가 싶다. 왜 암짝에도 씰데없는, 우수마발牛溲馬勃같은 잡글들을, 시도 아니고 소설이나 수필도 아닌 졸문들을 쓴다며 꼭두새벽마다 투닥투닥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일까? 취미가 특기가 되어 드디어 생업生業(make money)이 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억지로 시키면 맞아 죽어도 못할 일. 생각할 때마다 또 실소를 하게 된다. 고질병이다.
아무튼, 초등학교 시절, 한 동네 김병철이라는 아저씨(수십년 동안 뵌 적이 없다)가 지어 놀리던 나의 별명은 ‘알록달록’과 ‘알록이’였다. 부잣집도 아니었건만, 이상하게 나를 '부잣집 막동이'(위로 형이 셋, 아래로 여동생이 셋)라고 부르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유독 그 아저씨만 그렇게 불렀다. 아마도 색깔 있는 옷을 주로 입고, 작은 키에 예쁘장한 얼굴(지금은 흉측하지만 그때는 진짜 그랬다)을 보고 지었을 것이다. 한동네 깨복쟁이 몇몇은 지금은 나를 보면 대뜸 “알록아!”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정감이 있을 수가 없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그 아저씨를 한번쯤 보고 싶다. 블로그 이름을 ‘알록달록’으로 정한 까닭이다. 지금도 소중한 여동생들은 나를 '꼬까오빠'라 불렀다. 꼬까는 꼬까옷을 입어 예쁘다는 뜻일 게다. 반면에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든 재살이(사고)만 치는, 이를테면 농번기 나락을 벤다고 나서자마자 발가락을 베어 병원을 달려가는 등 소동이 벌어지는 등, 나를 '유월버섯'이라 불렀다. 유월버섯은 보기에는 좋으나 독버섯 식으로 먹잘 것이 없는 버섯을 말하는 것이다.
중학교때는 교복에 다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명찰에 이름을 모두 한자漢字로 박았다. 괜히 생각이 많을 때인지라, 내 이름 한자가 싫어 ‘최쾌상崔快相’이라는 명찰을 달고 다니다 담임의 눈에 띄었다. “어, 이 맹랑한 놈 봐라. 교무실 내 책상 옆에 가 꿇어 앉아 있어” 그게 대체 무슨 잘못이고 죄라고 죄인처럼 꿇어앉아 있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선생‘놈’들마다 시커먼 표지의 출석부로 내 머리통을 재밌는지 한번씩 탕탕 갈기고 갔다. 작명의 연유나 물었다면 좋으련만, 나의 행위를 개무시했다. 심지어 자기의 이름이 ‘권영평’인데 그럼 나는 ‘쾌평’이냐며 비웃기까지 했다. 이름이 무슨 진철인 도덕선생조차 ‘그럼 나는 쾌철이냐’며 놀렸다. 참 웃기지도 않는 사건이었다. 세상에 자기 이름 자기가 바꿨는데 ‘근신 일주일’이라니 말이 되는가. 내 딴에는 ‘서로서로 유쾌하게 살아가자’는 뜻으로 지은 기똥찬 이름이었는데 말이다. 지금도 어느 광고문구 ‘유쾌 상쾌 통쾌’ 이른바 ‘삼쾌三快’를 보거나 들을 때마다 희미하게 옛 생각이 떠오른다. 거문고 명인에 ‘신쾌동’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1975년 11월 고3. 예비교사(학력고사를 거쳐 지금은 수능-수학능력시험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를 억지로 본 후, 마음 맞은 친구와 교실에서 밤새 가리방(등사기)을 긁어 만든 게 겨우 둘이 지은 시 30여편을 모아 엮은 ‘2인동인시집’ <맥아麥芽>였다. 지금도 졸업앨범 속에 전편이 아니고 너덜너덜한 몇 쪽이 보관돼 있다. 그때 사용한 필명筆名이 ‘최상崔相’이었다. 친구는 이름이 손세협이었는데 필명을 '발세옹拔世翁'이라고 했다. 꼴에 문청(문학청년)이었던 모양. 다음날 오전에 국어선생님에게 한 권 드렸는데 떠들어보지도 않고 쓸데없는 일을 한다며 야단 먼저 쳤다. 참으로 무식한 선생‘넘’이었다. 깐에는 뿌듯해 칭찬도 받고 싶었건만. 선생들은 너도나도 쥐뿔 ‘창의創意’도 모르면서 걸핏하면 두드려팼다. 나는 솔직히 비행학생이나 조폭의 똘마니나 양아치도 아닌데, 왜 그렇게 때려댔을까. 오죽했으면 억지로 입학한 대학이 교수들이 때리지 않아서 좋다고 했을까. 흐흐.
고3때 한 친구가 나에게 ‘개밥’이라는 별명을 짓고, 자기 혼자만 부르고 난리를 쳤다. 내가 밥(도시락, 벤또)을 아무렇게나 비벼 게걸스럽게 먹는 것을 보고 개가 밥 먹는 것같다며 지은 것같은데, 그 친구가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다른 친구들이 따라부르지 않아 다행이었다. 졸업 30주년 기념 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대뜸 “개밥‘이라고 하여 경악했지만 반가웠다. 나도 질세라 ”(개밥에) 도토리“라고 응답했다. 그는 전북 완주에서 에너지관련 발전소 사업을 크게 한다고 했다. 개밥은 ’저 혼자‘의 내 별명이었을 뿐이다.
대학시절, 왜 그랬을까? 가난과 궁핍을 감추려 한 까닭도 분명히 있지만, 1년내내 잘 빨지도 않으면서 검정옷(스모루라고 불리는 군복을 염색한 것)을 입고 다녔다. 겨울에는 아예 군복 야전잠바를 입고 사각의 통성냥 한 통을 넣고 다녔다. 거리의 철학자가 따로 없었다. 한때는 배꼬머리에 검정 베레모를 쓰고 검정고무신까지 끌고 다녔으니. 쯧쯧.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단속경찰관들을 피해 종로 뒷골목으로 숨기도 잘 했다. 완전히 ‘바보들의 행진’속 주인공이었다. 입대 전날 머리를 빡빡 미는데 눈물이 다 났다. 아내 말로는 “더러워 못봐주겠다”지만 그때의 '멋진 모습'이 달랑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다. 그때 여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 ‘BSM'이었다. 블랙슈퍼맨(Black Super Man). 흐흐. 별 짓을 다했다. 꼴에 영문도 모르고 들어간 영어영문학과. 영어 이름도 필요했다. 영자의 알파벳 표기도 여러 가지겠지만, 나는 무조건 '영'은 ‘젊다’는 young으로, '록'은 '바위'을 뜻하는 rock으로 정해버렸다. 젊은 바위, 청암靑巖, 어쩐지 멋지게 보였다. 록rock 발음의 정확도는 개의치 않았다. 리승만도 ‘리’를 RHEE라고 하지 않았던가. 큰아들 이름을 순우리말 ‘한울(한 울타리, 내 필명 '상相'을 지을 때의 마음으로 지었다)'로 표기할 때 동사무소 직원이 한자가 꼭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면 ‘은하수 한漢’에 ‘새을 乙’자로 쓰고 ‘을’을 ‘울’로 읽겠다고 하려고 했다. 둘째아들 '한솔’의 ‘솔’도 ‘거느를 솔率’자로 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한자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후 십수 년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으로 조용히 살았다. 2004년 성균관대 홍보위원이 된 후 성균관교육원의 원로 선배님이 ‘어리석을 우愚’'샘 천泉‘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우천이라는 호가 너무 좋았다. 愚자는 ’대현약우大賢若愚‘에서, 泉은 나의 고향동네이름 ’냉천冷泉(찬샘)‘에서 따 지으셨다며 “자네는 참 결이 고운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주던 그분은 몇 년 전 유명을 달리했다. 15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이후 지금껏 나는 본명보다 호를 더 많이 사용하고, 친구들도 호로 불러주는 것이 아주 익숙해졌다. 좋은 일이다. 본명보다 몇 배 더 정감있게 들린다. 특히 80대 후반의 웃사람들이 나를 우천하며 정겹게 부를 때 그렇다. 늘 ‘어리석은 샘(물)’이 ‘샘이 깊은 물’처럼 살기를 다짐하는 소이연所以然이다.
마지막으로 작명作名에 대해서 기쁜 일 하나는, 큰 아들이 제 아들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맨먼저 추천한 것이 ‘모루’였다. ‘장인 공工’처럼 생긴, 쇠를 두들길 때 쓰는 쇠받침을 아실 터. 영어 ‘투모루tomorrow’할 때의 ‘내일’을 뜻하는 모루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감상 놀림받기 십상이라며 완곡히 거절을 하는 게 아닌가. 애비의 깊은 뜻을 몰라줘 서운했지만, 대안으로 제시한 게 ‘윤슬’이었다. 흔히 ‘윤슬이 무척 아름답다’로 쓰이는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호수나 강의 잔물결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채택여부에 마음을 조였으나 아들과 며느리가 순순히 받아줘 정말 기뻤다. 윤슬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고 중성이름 같긴 하지만 요즘 대세에도 맞는 것같다. 오래오래 흐뭇할 것이다.
추기: 코로나19 팬데믹에 택배산업이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 나의 표현으로는 예전보다 몇 배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지만, 종이상자든 스티로폼상자든 비닐봉지든 그야말로 난비亂飛하고 있다. 쓰레기분리운동을 우리나라처럼 잘 하는 나라가 없다하지만, 이 수많은 쓰레기들의 재활용 등 처리를 어떻게 할까? 참으로 걱정이다. 거북이나 바닷고기 배 속에 가득찬, 결국은 그들을 죽게 하는 플라스틱이나 스트로폼 뭉치 등을 보았을 것이다. ‘생각 깊은’ 나의 아내는 상자를 칭칭 돌려감은 투명테이프를 어렵게 떼어내 분리해 버리느라 낑낑댄다. 그렇게 버려야 그나마 재활용을 할 수 있단다. 쓰레기로만 산을 이루고 바다가 되는, 이 쓰레기공해를 어이 할꼬? 환경보호, 그것이 문제로다!
첫댓글 조목 조목 옛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누애똥고녕의 글이 아침부터 전화기를 붙잡게 하네요
어쩜 그리도 기억의 강을 잘 더듬는가요,
고맙고 감사하고 글 속으로 아침부터 풍덩빠져듭니다
우천의 글을 읽으면서 3쾌하게 웃었네.
1. 생활작자 2. 최쾌상 3. BSM
* 고교 3년동안 한번이라도 같은 반을 했어야 했는데, 아쉽구만.
내가 기억하는 영록군은 삐~딱하게 보였다네, 그러니 그 당시 샘들은 더더욱 삐딱하게 본 것 같구려.
그려, 그놈의 편협이라는 놈이 진짜 문제아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