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56
6월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aGeWiChll4 (김진호 비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 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요즘 참 난감한 문제 앞에서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수용하기 힘든 상황 앞에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이 일단 그를 위해 매일 기도하자. 매일 아침 그의 영혼과 그의 구원을 위한 지향을 두고 미사를 봉헌하자.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자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그의 안쓰러운 뒷모습이 측은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즉각적으로 상황이 호전되거나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층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예수님 시선의 폭은 좁디 좁은 우리의 안목과는 정말이지 천지차이입니다.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인내롭고 지혜로운지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이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오 복음 5장 45~46절)
사랑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참 요구가 많으신 분입니다. 때로 너무 지나칠 정도입니다. 솔직히 원수가 내게 끼친 해악을 큰 마음 먹고 참는 일은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가 내게 안긴 상처를 털어버리는 일 역시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사랑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과 축복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정신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 정신, 주님 마음이 우리 영혼 안에 깃들게 될 때, 그분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 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특유의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인간 세상 안에 악(惡)이 종식될 수는 없지만, 악은 누군가의 진정한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됩니다. 원수 사랑이 가능해진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전삼용) https://youtu.be/aeZQjGcaNHg
++++++++++++++++++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면 자녀도 사랑할 수 없는 이유>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낳기 전에 천주교를 믿는 것을 반대하는 시누이를 그렇게 미워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낳아보니 제가 고모의 얼굴을 꼭 빼닮았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자식은 엄마가 미워하는 사람을 꼭 빼닮는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태어나게 해 주신다면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EBS 다큐 프라임 ‘엄마가 달라졌어요’에 한 엄마가 딸은 그렇게 사랑하는데 아들만 지나치게 미워하는 사례가 나왔습니다. 아들만 보면 아무 이유 없이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잘 안되어 고통스러워합니다. 아들을 보면 그냥 밉습니다.
편애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는 이유는 그런 사람과 같은 사람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자기 자식이라고 미워하지 않으면 나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혹시 남자 형제 중에 미운 형제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심리 상담을 통해 어머니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 다음에 태어난 남동생만을 사랑한 엄마도 미웠고 남동생도 미웠습니다. 엄마의 모습을 닮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닮게 되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남동생처럼 여겨지고 딸은 불쌍한 자기 모습처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엄마에게 부모를 용서하는 심리치료를 했습니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어머니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용서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니 이전과는 다르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껴안고 미안하다고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하십니다. 그런 이유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내 삶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악영향 중 하나가 ‘편애’입니다. 편애하고 있다면 반드시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 편애하는 이유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르십니다. 사랑엔 편애가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편애하면 그런 성향이 있는 이를 또 미워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편애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 의해 사랑받지 못한 나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나옵니다. 여기서 나 자신은 뱀입니다. 자아의 보복을 대신해 주고 편애하며 자아를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에 맏이를 지독히 싫어하는 한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제보한 것입니다. 왜 첫째만 그렇게 싫어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앞뒤 안 가리는 자신을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를 닮았다고 싫어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첫째를 싫어하는 것 때문에 아내와의 사이도 좋지 않습니다. 올바른 남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잔소리를 쏟아붓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너무 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맏이에게 쏟아냅니다.
둘째는 아빠 다음이 자신이라 생각하고 형을 무시합니다. 형의 머리를 때립니다. 아버지는 또 첫째만 혼을 냅니다. 이렇게 서열이 엉망이 됩니다.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보면 어떠냐는 질문에 맏이가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자기 때문에 부모가 싸운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그동안 자신이 서운하게 했던 것에 미안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사실은 자신의 아버지가 착실한 형만 사랑하고 자신은 무시했던 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벌어 썼지만, 아버지는 형에게만 용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둘째에게만 용돈을 주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맏이에게 미안하고 사랑한다며 안아줍니다. 아내도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는 잔소리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가족은 그렇게 하나가 됩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미워지고 또 편애를 하는 것 같다면 빨리 살펴보십시오. 분명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기도하면서 동시에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바로 그 이유가 앞으로 나의 발목을 계속 잡으리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한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누릴 수 있고, 그분을 참으로 누릴 수 있으려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만일에 하느님이 ‘정의’만 있고 ‘자비’는 없는 분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이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자비와 사랑이 없는 하느님은 무서운 폭군 같은 심판자일 뿐입니다. 반대로, 만일에 하느님이 ‘자비’만 있고 ‘정의’는 없는 분이라면? 그러면 ‘악’을 물리치지 못하거나, 물리치지 않는 ‘무능한 신’이고, 우리는 그런 분을 하느님으로 믿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인간 세상이 ‘정의’만 있고 ‘자비’는(사랑은) 없는 세상이라면? (무자비하게 옳고 그름만을 따지고 처벌하는 세상이라면?) 자비와 사랑이 없는 세상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기계들(로봇들)만 있는 세상입니다. 만일에 인간 세상이 ‘자비’만 있고 ‘정의’는 없는 세상으로 바뀐다면? 그러면 그 순간 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무법천지로 바뀌면 ‘자비’도, ‘사랑’도 모두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자비는 정의를 통해서 제대로 실현되고, 정의는 자비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실현하기 위한 계명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원수를 사랑하여라.”가 이렇게 풀이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ㄷ-28) 이 말씀은, 무조건 잘해 주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자비를 통해서 정의를 완성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의 ‘사랑 실천’의 목적은 ‘하느님의 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선의 실현’은 ‘선한 방법’으로만(사랑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악한 방법으로는, 또는 앙갚음으로는 하느님의 선을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미움에 선행으로, 저주에 축복으로, 학대(박해)에 기도로 대응하는 것,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이 계명은 ‘감정’에 관한 계명이 아니라, ‘의지’에 관한 계명입니다. ‘선한 의지’로, ‘선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자비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1) ‘원수’가 나하고 사이가 나쁜 ‘평범한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계명에 포함됩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가?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를 따지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입니다. 사랑 실천과 화해는 상대방이 먼저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원수’가 나의 신앙을 박해하는 ‘박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말씀에서, ‘용서’는 ‘회개’와 ‘구원’을 뜻합니다. 그래서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저들이 지은 죄를 그냥 덮어 주십시오.”가 아니라, “저들이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직접 보여 주신 일입니다.
3) ‘원수’가 정말로 나쁜 ‘악인’일 수도 있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밭을 빼앗으려고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서 그를 죽였고, 결국 그 포도밭을 차지했습니다. 왕의 권력으로 살인과 강도짓을 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봇의 가족에게 가서, 무턱대고 왕과 왕비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고, 정의의 실현에 반대가 되는 일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아합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셔서, 아합 왕실 가문의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즉결 처분을 하지 않으시고 멸망을 ‘예고’하신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고, 사랑을 주신 것인데, 그런데 아합은 자기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멸망을 조금 늦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사죄도, 손해배상도 하지 않았고, 포도밭을 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아합 왕실의 가문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멸망했고, 이제벨은 처형당해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2열왕 9장-10장) 그 일은, 억울하게 죽은 나봇을 대신해서 하느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신 일입니다. <너무 큰 ‘권력의 악’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다면, 즉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무의미한 상황이라면, 하느님의 심판에 그를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래야 너희가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아버지의 자녀라면, 자녀답게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가 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자녀답게 사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싶으면(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에 참여하고 싶으면) 너희도 이웃에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 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나눔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서점에 갔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땅에 떨어진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사서 읽으면 저는 책 속에 있는 보물을 얻게 됩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쉴 수 있듯이 제가 읽은 책은 저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서점에서 2개의 보물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오강남 교수의 세계 종교 둘러보기와 팀 마샬의 지리의 힘입니다.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책의 내용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또 다른 보물을 찾았습니다. 한국에서 시력을 잃어버린 학생이 미국에서 혜안을 찾았던 이야기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서 승무원은 휠체어를 탈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공항으로 학생을 마중 나온 하숙집 주인은 승무원에게 큰 소리로 야단쳤습니다. ‘학생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다리는 멀쩡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학생의 손을 잡고 안내하면 될 일이지 왜 휠체어를 태우느냐?’ 학생은 하숙집 주인의 말을 듣고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다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것은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숙집 주인은 부모님처럼 학생을 도와주었습니다. 학생의 실력을 보고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시켜 주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서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은 학생을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안 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포기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미국에 와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되었고,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생은 투자 분석가가 되었고 'JPM(제이피모건)’이라는 유명한 회사에 입사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 경제의 흐름을 볼 수 있었고,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들은 시각장애인이 투자회사의 분석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가능성을 보았고 조금만 도와주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회사에 입사한 청년은 4시에 일어나서 6시에 출근했다고 합니다. 모든 서류를 스캔하여 컴퓨터에 입력하였고 음성파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서류를 들은 후에 정확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청년의 분석은 정확하였고, 많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참고서를 점자책으로 만들어주었던 어머니의 헌신과 나를 정상인과 똑같이 대해주었던 하숙집 주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물은 겨자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밭에만 묻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장애가 있을지라도, 죄를 지었을지라도 가능성을 볼 수 있다면,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넘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에게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자신을 참으로 낮춘 아합을 보시고 그에게서 재앙을 거두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부족하고 부당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편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50],3). 하느님께서는 죄인이며 참으로 보잘것없는 우리를 자비로이 부르시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여섯 가지 대당 명제(마태 5,21-48 참조) 가운데 마지막인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미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좀 더 주목하게 되는 구절은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는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중심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핵심 조건으로 원수에 대한 사랑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고,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본받고 따르며 아버지의 모습을 비추는 이들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서양 격언에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의 일이며,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일,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고,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 사랑과 자비로 주위의 모든 사람을 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우리는 성질이 까다롭고 마음이 편하지 못한 이는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고, 부르는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누구나 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사랑" 하면 : 상대가 누구냐?를 생각하게 되는데, 1) 부모 자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겠고, 2) 남녀간의 사랑도 3) 혈연 관계를 떠나 서로가 친한 사이에 온후하고 부드러운 애정이 깃든 사랑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4) 그러나 오늘 복음이 가르키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가페적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란? : 자신의 희생이 깃든,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비심이 깃든, 착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하다 보면 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고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정에서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정의 문제를 넘어서 의지에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자 결의,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자기 희생이 동반됩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연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대하시며,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우리 중에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에 우리 믿음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 : 26의 말씀대로 : ..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아가페적 사랑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 함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용서하시며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을 계속 미워하면서 기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마음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은 미운 그 사람을 위해서 진정한 기도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 기도하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
[대구대교구 정황래 시몬 신부님]
<‘용서’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유일한 방법>
아이들이 넓은 성당 마당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가끔은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야들아, 너거 와 싸우노?’ 그러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씩씩대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가만있는데 자가 먼저 그랬다 아잉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해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모든 범죄들은 자연스러운 창조 질서와 관계들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분명히 죄로 인해서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깨어지고,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들은 불완전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번에 대부분의 분들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나된 목소리로 응원을 하며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분들이 기분 좋게 모여서 술자리도 더불어 가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기분 좋게 건배를 하다가 그만 유리컵이 부딪쳐서 깨져 버렸다고 합시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깨진 유리를 빨리 치우고 그 기분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진 유리를 치울 생각은 않고, ‘니가 잘못해서 깼니, 원래 깨져 있었니, 주인아줌마가 컵을 잘못 갖다 줬니,’하며 계속해서 따지기만 한다면, 분명 누군가가 더 화가 나서 유리컵을 하나 더 깨뜨리게 될 것이고, 그것을 누가 지나가다가 밟기라도 하면 다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악순환이 그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리기 될 것입니다.
어제 이 시간을 통해서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누가 먼저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 깨진 유리로 인해 일그러진 그 얼굴을 펴기 위해 먼저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 번의 죄로 인해서 그 죄의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함께 하기 위해서 모인 그 시간의 의미가 이 깨진 유리로 인해 순식간에 싹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부터 누구든지 깨진 유리를 먼저 치우고 다른 컵을 가져와서 함께하는 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용서’를 통해 ‘완전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평화 방송 청취자 여러분,
깨진 컵, 우리가 먼저 치웠으면 좋겠습니다. 함께하는 이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활짝 펴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거룩한 몸으로 우리를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 모아 받아 모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
[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사랑’이라는 단어>
오늘은 어제 복음의 연장선에서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하여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은연중에 그 사랑과 연관된 어떤 대상을 함께 생각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남녀 간의 사랑도, 서로 친한 사람들 간에 오가는 사랑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대상이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미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오간데 없고 치미는 분노와 함께 원수에 대한 악한 감정만이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옛말에 “아버지의 원수는 더불어 함께 하늘을 이지 않고, 형제의 원수는 병기를 돌이키지 않고, 친구의 원수는 나라를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원수 뿐 아니라 아버지와 형제와 친구의 원수를 만나거든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가치관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을 거슬러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사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에 거슬러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경우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특히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침묵하거나 화제를 바꾸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소신을 서슴지 않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으로 그친 것뿐 아니라, 몸소 당신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또 사랑하심으로써 당신이 하신 말씀에 힘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맘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정에 이끌리는 행위이지만,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감정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 문제를 넘어선 의지의 문제이며, 자기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실천코자 하는 결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신적 사랑으로서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인간적 사랑을 넘어선 신적 사랑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비를 내려 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대하시며, 우리 중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에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 곧 아가페적 사랑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대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닮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분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도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먼저 그를 위해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미움을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은 미운 그 사람을 위해서 진정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가득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자리 잡고 있다면, 진정한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 보십시오. 어느새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연민’의 감정이 일게 될 것이며, 점차적으로 그 연민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어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은 단순히 정에 이끌리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서 기인함을 잊지 마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사랑하는 것이기에>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기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기에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
있을 따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기에
내가
사랑하지 못할 까닭은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핑계만
있을 따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기에
내가
사랑하고자 한다면
나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러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 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 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사랑! 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 이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완전한 사랑!>
'완전한 사랑'은 '조건 없이 너를 위해 죽는 사랑'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살아낼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마태5,43-48)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야 할 완전한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마태 5,46.47)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로 너를 용서 못해!' 라고 외치는 우리들인데... 어떻게 이 말씀, 이 완전한 사랑을 실행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할까?
'완전한 사랑'은 내 것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으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내가 완전히 죽어야 실행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완전한 사랑'이며, 이 완전한 사랑을 해야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지금 여기에서 완전한 사랑을 하려고,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합니다.
'믿는 이들의 죄는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복된 죄인'입니다. 그러니 죄인답게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 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화답송)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집 근처에는 제 또래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형, 누나들과 놀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친구의 존재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새로 이사 왔는데, 그 집에는 제 또래의 아이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제 또래의 친구였고, 이제 낮에도 함께 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났습니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날, 저는 제가 제일 아끼는 딱지를 주었습니다. 친구에게 좋은 것을 먼저 줘야 친해질 수 있다는 형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호의를 먼저 베풀었음에도 저와 함께 놀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준 딱지만 보면서 이리저리 만져볼 뿐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딱지를 다시 빼앗았습니다. 놀자고 준 것인데, 놀지 않으니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딱지를 뺏긴 친구는 “내 딱지, 내놔!!”라고 말하면서 울었고, 저는 “내 딱지야!!”라면서 울고…. 아주 난장판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합니다. 하지만 선물만을 바라보고 선물을 준 사람을 외면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미워질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정작 주님의 사랑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는 구약의 말씀을 먼저 이야기하십니다. 이 구절은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이웃 사랑을 이야기할 뿐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구약성경 전체를 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적대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다 너그럽게 대해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사랑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보지 않으면서, 적대시하고 미워하는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먼저 집중할 수 있을 때, 그분이 주시는 모든 은총에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소원, 삶의 궁극 목표>
- 완전한 사람, 성인聖人이 되는 것 -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ㄱ).
사소한 일 같지만 저에겐 새삼스런 깨달음입니다. 어제 6월13일 어머니 17주기 기일을 맞이하여 어머니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그동안 가뭄으로 묘지위에 잔디가 죽어가고 있었고 유난히 푸른 잡초가 있어 뽑아보니 10cn 이상의 긴 뿌리였습니다. 영혼도 그냥 방치하면 깊이 뿌리내린 잡초같은 죄들로 가득 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어 세탁에도 잘 빠지지 않는 얼룩이 특별한 세탁으로 말끔히 빠진 깨끗한 옷을 보면서도 회개가 없는 영혼은 완전히 죄에 쩔은 얼룩으로 가득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얼룩진 옷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입었던 것은 내심 마음이 깨끗하다 자부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겉을 보지만, 하느님은 겉이 아닌 속 마음을 보십니다.
언젠가 수도형제의 평범한 두 답변도 잊지 못합니다. 너무 완벽한 처사에 우려를 표명하자,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다려 봅시다.”라는 답변에 내심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하느님이 심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아니 자신이 심판을 자초한 것이지요. 열사람이 완벽하게 지켜도 한 사람의 도둑을 막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이렇습니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노자 도덕경 73장에 나오는 말마디가 자주 생각나곤 합니다. 하늘의 그물이 크고 성긴 듯 하지만 결코 빠트리는 법이 없다는 뜻으로,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죄를 벌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란 말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란 말마디도 같은 믿음의 표현들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맞이하는 죽음 앞에서 그가 하느님 그물망에 걸려 있음을, 그 누구도 하느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음을 봅니다.
바로 어제 제1독서에서 우리는 무죄한 나봇의 감쪽같은 죽음을 봤습니다. 이제벨과 아합의 완전 공모共謀로 인한 쥐도 새도 모르는 완전 범죄였지만 하늘의 그물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오늘 계속되는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등장하여 아합을 만나 미구에 있을 하느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전합니다.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개들이 나봇을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엘리야의 호된 질책에 급기야 아합은 뉘우쳤고, 잠시 죄에 대한 응보가 유보됩니다만 후대에 있을 것이 예고됩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참 섬찟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심판은 엄중합니다. 하느님은 결코 무골호인無骨好人같은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서 이런 정의의 관점을 놓쳐서는 절대 안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하느님의 정의를 가르친다면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가르칩니다.
이래서 통절한 회개와 더불어 자비하신 하느님께 향하게 됩니다. 정의를 유린하는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정말 착하게 살아야 함을, 끊임없이 하느님 자비를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착하게 잘 산 부모들의 은덕恩德은 후손에도 영향을 미치니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8)
오늘 복음은 여섯 대당 명제중 마지막 여섯 번째 “원수를 사랑하여라”입니다. 참고로 앞의 다섯 대당명제는 “1.성내지 말라, 2.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3.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4.맹세하지 마라, 5.보복하지 마라.”입니다. 바로 “6.원수사랑”과 더불어 여섯 대당명제 전체의 결론이 되는 말씀이 윗 마태5장 48절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사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우리의 진짜 의로움이요 우리 모두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비슷해지다가 죽음 앞에서는 똑같아집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도 공부 적게 한 사람도, 재산 많은 사람도 재산 없는 사람도, 예쁜 사람도 예쁘지 않은 사람도 다 똑같아 집니다.
“저 박사예요.”, “저 대학 영문과 나왔어요.” 평범해 보이는 어느 자매의 말도 생각납니다. 삶에 묻혀 보이지 않으니 환기시키려는 의도같았습니다. 제가 볼 때는 모두가 같았습니다. 페인트 칠한 것이 벗겨졌을 때 보이는 것과 흡사한 이치입니다. 차이는 얼마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주님을 닮은 참된 고결한 삶을 살았느냐에서 결정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끝까지 하느님을 닮아 훌륭한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서 인품의 향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예수님의 체험적 고백처럼 들립니다. 바로 예수님 한 분 만이 이렇게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삶, 자비로운 삶,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는 일은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인 예수님을 닮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여정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아가므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하담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점차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지혜로운 빛의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저절로가 아닌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한 여정이요 이런 노력과 함께 가는 은총입니다. 수도생활에서 참으로 강조되는 것이 노력努力입니다.
여기서 완전함이란 온전함이요,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영어 발음은 거의 구분이 안됩니다. 이론적 완전함이 아니라 실천적 완전함이자 온전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완전함이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늘 아버지를 닮은 완전함이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는, 자기 형제들에게만이 아닌 모두에게 인사하는 끼리끼리 유융상종의 사랑을 넘어 모두를 사랑하라는 보편적 사랑, 아가페 사랑을 할 때의 완전함입니다.
참으로 호오好惡, 우열優劣과 무관한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연민과 사랑, 존중과 배려입니다. 사실 사람은 그 누구든 깊이 들여다 보면 그만의 사정을 지닌 자기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참으로 너나할 것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측은하고 가엾고 불쌍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주님은 무조건 아가페 사랑을 명하십니다.
참으로 어쩔수 없는 운명처럼 타고난 것도 많습니다. 타고난 얼굴이 변변치 못하다 생각되어 그 위험한 성형 수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참 딱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타고난 것들이 참 무궁무진 끝이 없어 잘못 타고났다 절망하면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타고난 것도 많지만 용감하게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널려 있습니다.몇날이 아닌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사랑을, 기쁨을, 희망을, 생명을, 빛을, 감사를,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요 한마디로 주님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인이, 훌륭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언제든 좋습니다. 이래서 분투의 노력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궁극의 목적이자 보람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면담성사시 드리는 당부는 단 하나 “성인聖人이 되십시오.”라는 말마디입니다.
그러니 누가 알아주든 말든 보아주든 말든 제 삶의 꽃자리에서 이런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참기쁨도 참행복도 이런 아가페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무지로 인한 죄악의 유혹은 어림없을 것이고 죄악도 도저히 우리 영혼에 뿌리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학교에서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初步者일뿐이요, 죽는 그날까지 배워야하는 사랑의 평생학인平生學人일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북돋아 주시어 이런 아가페 사랑 실천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에게 강복하소서, 천하 만방이 당신을 두리게 하소서."(시편67,8).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https://www.youtube.com/watch?v=j4DFMKJF2jA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사랑의 실천을
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사랑이란
사랑의
실천으로
주고받는
기쁨이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사랑을 배우는
사랑의
존재들이다.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 없이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올바른
실천이
사람을
만든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원수를
용서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참사람이다.
사랑의
길 위에서
사람이
되어간다.
올바르지
않은 것을
버리고 바꾸고
회개할 때
우리 또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간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다.
끊임없이
가장 좋은
사랑을
향하고
가장 좋은
사랑을 나누기
때문이다.
사랑이 사람을
만들어간다.
하느님 사랑을
믿는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