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11 - 앵발리드에서 장례식을 가진 6.25 전쟁 프랑스 대대장 몽클라르를 회상하다!
6월 17일 아침에 파리 루부르 박물관 을 지나 카루젤 개선문 을 구경하고는 튈르리 정원
에서 설문 조사 를 가장한 소매치기 에게서 간신히 벗어나 세느강변 에 도착합니다.
세느강변에서 콩코르드 다리 를 지나 알렉상드르 3세 다리 Pont Alexandre
Ⅲ 를 걸어서 세느강 을 건너서는..... 앵발리드 에 도착합니다.
앵발리드 는 군사박물관, 군사입체모형박물관에 생루이 데 앵발리드 교회 등이 모인 곳
으로 1670년 루이 14세 는 4,000명 부상자와 노병들의 생활 근거지 로 지었다고 합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당시 바스티유 를 습격할 때 군중들이 사용한
2만 8000정의 무기 는 바로 여기 앵발리드로 부터 탈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앵발리드 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40년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가 영국 정부와
협상 끝에 세인트헬레나 로 부터 나폴레옹 황제의 유해 를 이장해 국장 을 치른 것입니다.
그 외에도 앵발리드 에서는 장례식 이 가끔 거행되는데 노벨의학상 수상자 프랑수아 자코브,
모르와 전 총리, 아프가니스탄 전사자 파스칼 코레이아, 레바논 전사자 에릭 라온등 입니다.
그중에 2,008년 3월에는 1차대전 마지막 생존자 인 라자르 폰티첼리의 국장 이 거행됐으니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이 참석해 푸알뤼(참전용사) 를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에게는 또 다른 장례식이 인상적이니 1,964년에 죽은 몽클라르 중령
( 중장 ) 의 국장이 드골 대통령 의 참석하에 여기 앵발리드에서 엄수 되었습니다.
몽클라르의 본명은 샤를 베르느레 인데 1차 세계대전에 큰 공 을 세웠고 2차대전시는
제13 외인부대장 으로 전투에 참가하던 중에 영국으로 철수하는 드골을 따라갑니다.
이후 몽클라르는 프랑스로 잠입해서는 독일군에 대항 해서 레지스탕스전 에
참가하니.... 김창수가 독립운동시에 김구로 개명 하듯 그도
몽클라르 라는 가명 을 사용했는데 육군 중장이던 1,950년 6.25전쟁 이 터집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때에 독일의 점령하에서 파괴되어 복구가 시급 한데다가
해외에는 알제리 와 베트남 등 프랑스 식민지 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을
저지해야 하니 군대를 파병 해야 하는 터라 한국전에 참전할 여유 가 없었습니다.
2차 대전후 베트남의 호치민이 독립을 선언 하자 현지에 주둔중인 프랑스 군인들이 이를
저지하는 가운데 프랑스 본국에서도 1946년에 군대를 파병해 10년을 싸우던 중에
1954년 디엔비엔푸 패배로 독립을 인정 했으며 이 해에 알제리가 독립전쟁 을 일으키니
1962년 까지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알제리인들은 150만명이 죽고서야 독립 을 이룹니다!
프랑스는 베트남 전쟁중 에서 병력을 파병할 여유가 없었지만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
으로서 의무를 외면할 수가 없으니 프랑스 정부는 깊은 고민 끝에 지원병을 모아 1개
대대 병력 을 파견하는데 몽클라르 중장은 중령 계급장을 바꾸어 달고 참전하는 것이지요!
군대는 승진과 명예 를 위해 목을 메는데...... 육군 중장이 스스로 강등을 요청 해서
육군 중령 이 되어,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중공군의 공격 을 받자 휘하
1개 소대 병력에게 적진을 향해 총검돌격 을 명해 격퇴하니 미군들은 혀를 찼다고 합니다.
유엔군은 중국군 참전으로 패퇴해 서울을 잃고 반격을 준비하던중 중공군의 2월공세 를 맞아
프랑스대대 가 배속된 미군 23연대(프리만 대령) 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에 주둔하는데
병력이 모자라니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벌판에서 1.6km 방형진지 를 구축하고 4주경계
에 돌입하는데 중공군 126사단등 2개 사단이 사방에서 포위공격하니 병력은 5분지1로 열세라!
중공군이 피리와 꽹과리 를 치자 그는 수동식 사이렌 을 틀고 중공군과
처절한 육박전 을 벌이면서도 진지를 사수 하니.... 그 덕분에
미군 23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해 서울 수복의 계기 를 마련합니다.
전투후 그가 프랑스 대대원 에게 했다는 말이 있어 인구에 회자 되니.....
“그대들은 이제 영광의 포로 가 된 것이오!”는 유명한 말로 남았습니다.
프랑스군 참전비 는 양평에서 멀지 않은 수원과 의왕시 경계지점인 지지대 부근에
있는데..... 지지대란 지명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 을
참배하고 되돌아 오다가 뒤돌아 보며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해 붙여졌다고 합니다.
거기 260여명 사망자 가 묻힌 참전비 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을 가진
나폴레옹의 후예들이여 영원 무궁토록 빛나리라”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지사지(易地思之) 라! 맥아더나 이승만 이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역지사지
를 알았더라면 대동강에서 진격을 멈추고... 중국에 더 이상 북진하지 않을 것이며
평양을 포함해 평안도와 함경도에 북한 정권을 인정 한다고 했으면, 중공군은 참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김일성은 우상화 전이니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실각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휴전선은 대동강에서 원산 까지 그어졌을 것이며 그후 소련이 해체될 때 통일의
기회 를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임진왜란때 평양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자 명나라가
참전을 결정했듯 중국은 압록강에 세계 최강의 미군이 주둔 하는걸 용인할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전쟁도 적국의 입장을 배려하는게 아군의 희생을 줄이는 법이라는걸 몰랐네요?
저 6.25전에 유엔군 전사 및 실종자 수는 4만명 으로 고위층은 워커 8군사령관 부자와
밴플리트 장군과 클라크 장군 및 아이젠하워 장군 등 3명의 아들도 죽었으며...
또 적군인 중국도 모택동 주석의 아들 모안청 이 중공군으로 참전하여 전사 했습니다!
신동아 잡지에 보면 한국의 지도층 천여명을 조사했더니 야당의원 아들 소위 와 일본
육사 출신 장군 아들 하사 등 2명 전사 라! 소위 사회 지도층 들은 자식들을 뒤로
빼돌렸으니, 이후 한국의 대통령 후보자와 총리 후보자 중에 "병역 미필자" 가 그리도
많았던 것이지요? 대쪽 판사면 뭘합니까? 본인과 아들등 셋 모두가 군에가지 않았는데....
예전에 여기 앵발리드 에서 군사박물관 을 본적이 있는데 중세 기사들의 갑옷, 창,
칼, 방패, 말에서 부터 근세 프랑스군의 총이며 칼, 대포, 군기,훈장,
군복, 군기에다가 병사들의 행진 및 전투 대형에 이르기 까지 수만점의 유물 이라!
프랑스인들은 어디서 이 처럼 수없이 많은 전쟁 유물 들을 대량으로 모을수 있었을까요?
루이 14세와 나폴레옹 시대에 유럽을 정복 하여 세계제국을 이룩한 모습이며,
1860년 중국의 북경 을 함락한 당시의 작전 지도와 전투 모형 이 크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1861~5년 나폴레옹 3세때는 멕시코를 침략해 정복한 지도등 유적이며,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 해 가는 과정과 아프리카 정복 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1900년 의화단 궐기시 미국, 독일, 영국, 이태리, 일본, 러시아 등 8개국 이 함께
베이징을 점령한 사실이 전시되어 있으니 “프랑스의 영광”을 웅변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기 가 생겼으니 1866년 천주교 박해 를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서는 강화도를 함락
하고 한강의 노량진 까지 수심을 측정하며 수도 서울을 위협 했던 저들 프랑스 군인들!
(하기사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신부 10명과 1만명의 조선인 천주교도가 학살 되었으니?)
이른바 병인양요! 그때 강화도 왕궁 보물고 에서 약탈한 금은이며 의궤 등 귀중한
서적들이 부지기수 인데, 떼제배 TGV 팔아먹으려고 다급해 지니까....
“서적은 다 돌려주겠다”며 우선 2권 을 들고 미테랑 대통령 이 서울에
달려와서는 청와대로 김영삼 대통령 께 전달하려 들어가는데.....
동행했던 프랑스 도서관 여직원들 이 울며, 불며 몸부림치며 책 2권을 가슴에 품고는
안내어 놓는 바람에 어르고 달래며 위협해 겨우 한 권 만을 반환 받았습니다.
미테랑 대통령 도 참 난감한게... 여직원이 가슴에 품은 책을 뺏는게 쉽지 않았으니?
프랑스로 돌아간 두명의 여직원 과장 은 국가의 문화재(?) 를 지키지 못한 역사의
죄인 으로 그 책임을 진다면서....“국립 도서관 사서직을 사직”해 버립니다?
그러자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이 일제히 문을 닫고 전국적으로....
"거국적인 문화재 지키기 운동" 을 벌였던 것이지요! 우리 한국에도 이런
직원이 없었을까요? 연속극 허준 에서 보니 醫書(의서)를 지키려고 사력 을 다하더라만?
임진왜란 때에 왜군들이 한강에 도착하기도 훨씬 전에 겁을 집어먹은 임금 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밤에 도둑 고양이 처럼 야반도주 했습니다!
가마꾼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대부분의 후궁과 왕손들은 걸어서 달아나야 했지요?
그러자 서울의 관리들과 양반들도 염치불구하고 달아나니 임금에게 버림받아
성난 백성들 이 왜적이 침입하기도 전에“경복궁을 우리손으로 약탈하고
불지르는”처절한 혼란 속에서 누가 궁궐의 문화재를 지킨 사람 은 없었나요?
박물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1866년 병인양요 때의 기록이나 유물이 없으니 프랑스
직원을 붙잡고 재우쳐 물었으나.... 그 녀석은 영어라고는 못하고 나는 불란서
말을 한마디도 못하니...“벙어리와 귀머거리의 대화”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네요?
아니? 저 병인양요 침략 이 너희 프랑스에는 한줄 전시할 거리도 안되는 그저 그런 볼품
없는 사소한 전투 였었나? 조선 침략의 기록 좀 보여다오! 우리나라 조선이 그다지도
대수롭지 않았단 말이냐?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조선군에 쫃겨 간 것이 아니라...
아무 사전 준비 없이 북경의 함대를 급히 파견했을 뿐더러, 때마침 베트남에서 반란
( 베트남인 입장에서는 독립전쟁? ) 이 터져 부득이 철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부 학살로 오긴 했지만 600명 수병으로서는 내륙에 한양 까지 점령할수는 없었지요?
앵발리드 를 나오니 큰 도로인 앵발리드 대로 인데 맞은편에 로댕미술관 은
외관만 보고는 걸어서 몽파르나스 묘지 와 뤽상부르 공원 을 찾아 갑니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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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첫댓글 반갑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프랑스의 중장이 중령으로 강등해
6.25 전쟁에 참전한 것은 고맙지만....
또 다른 얼굴인 침략제 제국주의
프랑스의 대외 팽창을 보면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백만명이 죽어야 했던
베트남과 알제리를 생각합니다.
앵발리드는 프랑스군사의 역사가 가득한곳입니다 언젠가 또갈것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배낭을 꾸릴 날이 오겠지요?
누군 인류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다"
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지만.....
인간들은 ㄱ려국은 극복해 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