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콘이 북한공산당이 왕조라고 말함은 분명히 서구중심주의로 말한 저널리스틱한 관점에서 '몽고주의'일파가 제공한 정보를 이해했을 것이다. 살짝 살펴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할아버지를 속인 이후에, 미국마저도 속여버리려는 바탕이 아닌가 여겨진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아무리 실패한 전체주의 독재 국가 군주래도, 단기적으로 국가내 독재자의 지지자는 80%를 상회한다. 그러므로, 북한동포와 공산독재 지도자를 나누며, 공산주의적 분석틀로 무장하고 자유주의 이념은 싹 다 갖다 버린 '몽고주의'의 이분법은 '반역사적' '반현실적' 분석이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스카보로 페어'에 나오는 싯구 같은 '원시적 불능'에 대해서, 만사마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몽고주의를 숭배하며 공산주의 이론의 분석틀로 무장하고 자유주의 이념을 갖다 버리며, 과학이 독재자에 쓰여질 때의 과학의 비중립적 사용을 부시대통령이 고뇌하며 토로해도, 과학은 일본식 근대에서는 오야붕이 영원히 중립적으로 쓰여진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이 할아버지들은 공통적으로 <'과학'은 만사마이다>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미국 군사 무기는 "만사마로서 가능하다"는 철썩같은 신념을 가지며, 만사마로서 가능하다는 립서비스를 요청했을 것이란 예측은 가능하다. <'과학은 만사마이다>란 신념은 공산당지도자가 군림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는 점은 철썩같이 지워지며, 우파의 도덕률이 과학은 만사마이다 라는 점을 비판하는 데 있다는 점이 숨겨진다.
독재주의 전체주의 국가에 시달렸을 때, 카리스마가 붕괴되었을 때 그것을 향해 방어하러 모이는 고리는 예측 가능하다. 몽고주의의 '하이틴 로맨스 소설'보다도 더 낭만적인 바탕에 기초하여, 한반도에 개입하는 행동을 꿈꾼다고 보면 정말로 실망스러워 진다.
http://news.media.daum.net/foreign/others/200505/28/munhwa/v9198976.html
그러면, 당연히 북한주민의 80% 이상은 초기에 총집결하여 북한군대의 남쪽 진군을 향한 의도를 시작할 것이다. (몽고주의는 늘 좌익의 더 큰 발자국을 위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헛발질만 골라서 하는 듯 하다.) 몽고주의는 대한민국 국민은 통일을 위해서 희생을 각오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으나, 몽고주의가 착각한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버무림하는 기획은 "알거나 알았다면 절대로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칠천만이 하나되어서 몽고주의 일파와 거리를 두는 계기로 되고, 대한민국 국민은 이리 저리 쏠리게 될 것이다. 즉, 어설프게 '김정일'만을 공격하겠다는 일로 한반도에 개입하여, 대한민국을 뿌리부터 붕괴시키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여겨진다.
마치, 언제든지 외국으로 떠버릴 준비가 된 사람인듯이, 혹은 세상을 살만큼 살아서 손해가 없다는 듯이, 대한민국 내부의 모습에는 전혀 계산 없이 국민의 마음과 다르게 혼자서 가면서, 자기 뜻대로 안따라오면 모두 좌파의 음모란 식은 문제가 있다.
특히, 부시대통령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보다도 더 황당한 생각을 하는 몽고주의 일파에게, 김정일 제거 이후의 국가 문제를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 결국은, 헤쳐 모여지는 소용돌이를 '친중친미'에 계급투쟁 노선을 수정해버린 여전히 공산당주도의 국가로서 개혁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북한 체제의 개혁을 위해서 북한동포에 압박하는 지도자 김정일 제거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해줄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몽고주의는 반대여론이 나올 곳을 틀어막았고 깔린 것은 좌파 지식 밖에 없기 때문에, 차선의 선택 효과로 좌익화되는 감성을 가진 군중들이 일어날 것이다. 결국, 몽고주의가 몽고인의 기상으로 말하는 '적확한 의미에서의 공산주의적 인간형'이 대한민국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할 모습은 계산이 되지 않는다. 할아버지들엔 1970년대식 지식체계에서 공산이론을 모두 모르는 상황에서 검증이 되지 않고, 젊은 학계에는 좌파만 남기고 씨말리도록 조종했다는 점에서 검증이 되지 않지만, 대의목적을 위해 희생은 감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바탕이 김일성공산당의 남침의 전제 조건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에겐, 몽고주의의 분석에 휘둘리는 네오콘의 모습은 울화병이 나게 된다.
나는 자유세계의 수호라는 점에서 미국의 행동이 '선'과 '악'을 넘어서 있다고 지적했으며, 나는 이 땅의 평범한 사람이 선택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평화통일입장을 지지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지지를 하되, 몽고이념을 따라서 분해되거나 좌파 이념에 대해서 망가진 국민성으로서는, 혼란기를 견뎌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며 이 토대를 전제로 하여 김정일만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에 철저히 반대이다. 만화책 전쟁놀이와 현실은 전혀 별개이다. 무엇보다 먼저 미국 네오콘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자세하게 별 피해 없을 것임을 주장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에 반미감정으로 서운하게 한 것에 대해서 그대로 복수를 해야 한다고, 뭔가를 말해주지 않을 수 있다고도 본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군인의 애국심에 기득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해도, 절대로 그 부분을 설명할 문화를 만드는 데 자금이 투자되면 안된다 하고, 몽고주의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젊은 보수 이념이 학계에서 권력이 안되도록 중개사 협회처럼 틀어막아, 젊은층을 좌경화로 만든 바탕에서, 또다시 좌파 정국에서 불신천하로 된 상황의 평안을 전제로, 몽고주의의 사실상의 공산주의 전제의 미국 행동 개입요청에 대해서, 대한민국민이 알거나 승인했다고 보면 큰 오산이다.
김정일이 곧 북한국가라는 데에서 분석을 시작하고, 몽고주의의 현실성이 거의 없는 정보는 빨리 별론으로 처리해야 한다. 시뮬레이션을 해도 선택 가능한 변수가 논리적 예측으로 나와야 하는데, 몽고주의 자체가 농촌사회 미신 기반의 공산주의 논리와 너무 닮아서 시뮬레이션 계산이 안 나올 것이다. 또, 적잖은 초중등생들은 몽고주의일파가 [조선일보]문화면등에 좌파화를 지지했기 때문에 뚤려버려 사악한 북한위주의 교육을 배웠겠지만, 그들 역시 굉장히 무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과학은 만사마가 아니고, 만사마같은 무기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한다. 아무리, 서류상을 놓고 봐도 6.25전쟁은 절대로 예측을 못한 의미로서 과도했다는 차원의 '불법'(의미 제한을 주목) 남침이 아니다. 그 당시의 지식인층은 다가올 국난의 징조가 선명해서 불안에 떨었으나, 그땅을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책임감으로 떠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대한민국 국민들이 국난의 징조를 알고도 평안하거나, 사악하게 오염되어서 평안하다고 보면 큰일이다. 고용유연화 기저의 유동성의 경제구조와 정착위주의 반만년 생활습관의 충돌로, 각자는 제 살기에 바쁘도록 되어 있다.
강대국의 '선'과 '악'을 넘어선 행동을 사실상 불러모은, 좌파정국의 여러 모습에는 '선'과 '악'을 넘어서는 긍정을 한다. 그러나, 이대로 몽고주의의 하이틴 로맨스 기반으로, 논리적으로 역시 무고한 대한민국 국민의 희생의 양이 커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북한공산국가의 모든 것을 김정일이 걸머쥐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김정일이 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하이틴 로맨스 소설 쓰는 몽고주의식 구분법이다. 김정일이 곧 국가이기 때문에 '독재사회'였다. 만약에 분리 가능한 개입이 가능했다면, 그것은 민주화의 정도가 있는 국가에 개입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주적론이란 말이 있었다. 국방백서에 삭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원초적 정신은 동의한다. 몽고주의자는 그 표현을 좋아한다. 군복을 입어본 아이큐 100이상의 20세 이상의 남자이면서, 6.25전쟁의 격변을 다시 겪지 말아야 한 비극으로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만일의 사태의 경우에 먼저 휴전선 아래의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에 처하고, 그 속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의 원빈처럼 어리버리로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말자는 말이다. 그런데, 몽고주의는 주적론을 공산당이론의 '반동'쯤으로 해석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국가안보와 안정화를 위한 논리적 집짓기가 아니라, 북한동포를 억압하는 주체사상속에서 그려진 남한의 '미제'(주체사상속 표현이 그렇다는 말)처럼 그리고 말았다. 그러니, 자유민주주의의 피를 받은 사람은, 몽고주의의 주장을 사악하다고 토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체사상을 맹신하는 일인숭배자들이 남반부의 동포를 미제에서 구출하듯, 몽고주의 1인 지도자를 맹신하는 이들이 김정일의 압제에서 북한동포를 구출해야 한다는 식의 이론을 내세웠을 때, 자유민주주의자의 할일은 몽고주의자에 돌팔매질 던지기이지 그 이론에 동의하기가 아니라고 본다.
박근혜대표의 '평화통일'노력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개입적 변화를 사회변화를 인정할 때 인정하면서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책임감 다하는 국민으로서의 사명일 것이며, 이론의 속뿌리의 좌경성에 표피적인 좌파의 반발을 유도해서 우파진영에 떠넘기는 바탕과, 그 연장선상으로서의 몽고주의의 북한에 대한 무력개입론은 이젠 제발 금지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대표 금치산자가 '몽고주의'일 것이다. 즉, 그 어떠한 사려 깊은 자가 동의해도 그 주장은 무효가 맞다.
부시대통령에 몽고주의는 '미국인보다 더 친미'가 아니라, 정치 오야붕의 눈멀게 하고 사리사욕에 빠진 한국의 전형적인 관료형으로 봐야 맞을 것이다. 김정일이 폭군이며 부시대통령의 대의에 반대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상 반론을 할 구석도 모두다 차단되고, 대한민국의 국가안보 위주의 우파 정통 담론이 써야 될 곳에 전부 허물어뜨린 바탕에 따지듯 외치고 싶다.
'희망의 사과'를 심을 때 심되 하나님이 주관하는 '선'과 '악'의 구분의 심판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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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야후뉴스'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결과가 아주 많은 숫자로 나왔다. 그것은 부시대통령의 '레짐체인지'론에 몽고주의의 의사 개진이 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고, 몽고주의의 상설적인 유도로 '주적론'의 소멸적 해체가 되었다는 것의 심리적 검증이다. 몽고주의자는 주체사상의 부르주아 반동 처럼 주적론을 해석해서 표현에 집착해왔다. 그러나, 몽고주의의 앞뒤 안가리는 공산주의식 일본식 포용주의는 청년의 머릿속에서 국가안보를 해체했다. 국방의 의무를 느끼게 할 부분에서 유목적 국가관으로-좌익이 왜 갑자기 몽고주의의 입장을 좋아하는가? 누구 유리한 논리인가의 검증이다.-선택하는 것은 기억할 수 있다.
몽고주의적인 카스트논리로 상위계층을 풀어주면 병역의무의 하부의 사기 저하가 되고, 유목적 국가관으로 내세우면 국방의무의 욕망을 소멸시키고, 무분별한 북한동포 타령을 하면 전의를 상실케 한다. 표현의 삭제는 마치 사기꾼이 자기 흠 비판안당하기 위한 것 같아 보이기 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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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콘에 이 부분은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 우파의 대중인기에 장애를 주며 좌파 운동을 했었던 이들만 결속하며, 기독교 특정 정파 특정해석만 걸고 넘어지는 이들의 사고관이, 공산주의 이론 뒤집기라는 것.
대한민국 국민들이 비록 이혼해줄 때 이혼하지 말고 보복당해줄만큼 반대의사를 표명했으나, 그것은 전부 몽고주의자가 우파 권력에 차지하고 있어서 나타난 결과일 수 있음을,...... 그리고 대한민국의 몽고주의의 억압에 눌려진 젊음들도 분명히 무고하고 선량하다는 것.
오늘도 좌파정치권에는 정치권 보스를 눈가리는 충신을 가장한 사람이 물러났고, 그 차원의 연장선으로서 몽고주의자들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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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바다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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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으며 마르크스주의 사상체계를 공격하고 싶다는 욕망은 왜 어떻게 무너지는가? -스스로 '개혁'으로 아는 <21세기 대원군들> 비판-
한나라당과 박근혜대표의 행보, 그리고 [조선일보]의 편집방향은 바뀌어진 국민들의 사고체계에 맞추어서, 그 속에서의 보수주의적 가치가 어떻게 짜여지나의 모습이다. 다소 밀리듯 하면서 여론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게, '카리스마'가 없고 '야성'이 없다는 식의, 영화를 보면서도 스토리 라인과 촬영미를 못 보며 연기자에 폭 빠져 헤매는 저능 저열한 판단으로는 아무런 대책과 대안이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적잖게 그러한 '카리스마'와 '야성'타령은 이후에 나올 보수 세력의 더 많은 좌파에 타협에 의존한 인기에 의존하는 피드백 관계이기 때문이다. 더 강경 보수 논리의 원칙주의를 세워보았자, 논리적으로 더 많은 좌파정국에 타협이 나오게 된다.
무엇보다 우파이면서 우파를 찍어누르며 좌파를 높이 세우며, '안전한 좌파'가 있다는 식으로 [조선일보]에서 검인도장을 찍어주던 생활습관에서, 아직도 온전한 단절 없이 옹고집을 부리는 스스로 개혁으로 아는 <21세기 대원군들>이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65-80%의 파워로 좌파정국을 좌파가 이끌어서 요모양으로 이끈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파 중심에서 좌파쪽으로 문호를 개방해준 '정신영역'분야가 있었음은 절대로 면책되지 않는다. 우파 자유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을 때 이 부분을 어물쩡 넘어가면, 권력을 잡자 마자 곧장 '레임덕'기로 접어들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나는 '보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른 것을 자주 장님 코끼리 비유로 든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보이는 바가 다름을 삐삐 시대, 피씨통신 시대, 인터넷 시대의 대중의 평균적 감수성으로 든다.
우파들은 대학생을 찍어내는 시대에 좌파들의 문화정치 국면에 알게 모르게, 그 속에서 대안을 내서 이겨야만 정치권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우파들의 각성을, 그냥 오야붕이 알아서 할 일쯤으로 치부하며, 대학생이 희귀하던 시대의 '엘리트'라는 옹고집을 유지한다. 그러니, 사람의 생각은 얼마든지 착각과 오류가 가능해도, 그 착각과 오류 때문에 '정신전쟁 분야'에서 6.25전쟁에서 좌익에 문호를 개방한 군대 내 5열의 행동을 했다는 지적에도, 전혀 반성의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다. 대학이 희귀하던 시대에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이야, 할아버지가 다수인 보수 세력들에서 다수결로 따져서 판정하자는, 스스로 개혁으로 아는 21세기 대원군의 판단하자는 제언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나는 어려서 일제 말기나 6.25 전쟁을 겪고, 철이들어 가난 극복에 싸워야 했던 특정한 세대가 대한민국 사회의 권력의 중심임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 세대가 가장 지적인 훈련을 쌓을 무렵에 어땠는가를 지적하고 싶다. 그때는 사방이 덜 배웠고 더 농촌적이었고-학생운동이 1990년대 초중반에 의기소침함은 농촌적 정서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좌파정국은 도시 속에 농촌적 문화를 강제적으로 주입한 것의 성공이었다. 그러니, 도시 문화가 줄어드니 경제가 노인화될 수 밖에 없다- 여기 저기나 노력하면 개발하거나 개발될 곳 투성이이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우파들은 할아버지들의 대학때 생각으로 쌍방 커뮤니케이션 논리의 기본을 너무 도외시한다. 원칙주의를 하고 잡아도, 권력이 없으니 '꼬장꼬장한 낡은'무늬같은 것과 비슷할 것이다. 1970년대에 대학생들이 꾼 꿈과, 지금의 꿈의 비교를 리얼하게 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한 사상의 유용성과 시대적 가치가 문제가 가능하다.
여기서, 할아버지들은 한 사상이 시대 속에서 생겨나서, 시대속에서 발달되고 시대속에서 소멸한다는 이 시대 대학생들이 다 아는 내용을 모른다. 솔직히 '모르면 배워야 한다'고 본다. 윈도우 프로그램 처럼 이 정도 수준은 향후에도 계속 깔릴 뿐이며, 1970년대식 지식체계는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지식 체계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도 그냥 차용하는 원론적 수준이다.
실학사상을 말할 때 '트렌드'가 좌파적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김윤식사태의 주인장 김윤식교수가 김윤식사태의 짜고치는 고스톱으로 <학계가 좌파가 장악했다>는 공식선언을 하기 전까지, 온순한 양이었다. 물론, 실학연구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개방된 눈으로 구구절절히 마르크스주의 논리인, 김대중전대통령과 김영삼전대통령의 민주화 선언은 순박하게 착한 것으로 결정적인 몇 단어를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보려는 사람의 의지의 투영이다. 어떠한 사상체계의 방향성을 보려면, 담당 주체들의 경향성을 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이 정도도 좌파 우파 보수와 진보 안가리는 원론적인 것이다.
할아버지들이 대학때 무엇을 배웠던 간에, 지금의 국민 대다수는 최근 15년 이래 대학가를 장악한 보수 신문이 열라 홍보한 학자들의 그것으로 안다. 할아버지들이 알던 내용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민주화선언문'에 마르크스주의 상징어구가 없다고 안전하다고 바라보던 특정한 세대의 착각이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과거를 우파도 '새롭게 재조명'해야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들이 대학 다닐 무렵에 여기나 저기나 더 개발 요소에 더 농촌적인 풍경과, 농촌은 없다 전부 도시뿐 하는 좌파정치의 부동산정책과 도시는 없다 도시에도 농촌공동체뿐 하는 어물쩡 모호적인 집단주의 심리 속에서, 왜 꼭 과거의 논리는 극도로 모호하게 모호한 방식으로 1970년대식 코드로만 되어야 할까요? 21세기의 대원군인 할아버지들이 고집하는 그 내용들을 고집하면 고집할 수록, 결국은 할아버지들이 대학 때 '지배층'비판과 좌파에 대한 은근한 선망 밖에 더 있었나요?
결국, 대학 나온 할아버지들의 은근한 양반 심리가 최고이며, 그렇게만 모든게 되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단순한 트렌드. 데스트라시가 이야기한 헛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이 수준이 아니라, 옛날 지식가지고 미래도 그게 먹힐 것이라고 우기는 21세기 대원군들이, 이젠 계산 가능한 감수성으로 좌파지식인 중 온건파를 지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자식 세대에 반공주의의 이론구조를 찍어눌르는 것을 좋아했던 배경-반공주의 중단은 지지자 없으면 안됩니다. 대학생층의 오류 뿐만 아니라, 21세기 대원군 할아버지들의 오류도 있었던 것입니다-일 것입니다.
상전벽해가 될만큼 좌파 지식판을 만들어놓고, 우파 대학가 지식체계를 전멸을 시켜놨으니, 21세기 대원군 할아버지들의 '실학'타령이 좌익적 스탠스가 맞음에도 불구하고 반론은 '장유유서'에 거부되는 식이나, 노인층 다수는 새로움을 모르니 좌익에 이득되도 노인층 다수인 보수세력은 다른 길 간다는 판단이 가능할 것입니다.
21세기 대원군 할아버지들은 대원군이란 사람이 별게 아니라, 그 시대에 20-30년전에 알던 지식만을 고집하는 꼬장꼬장한 노인네였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축복 받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고 싶다는 욕망은, 좌파 논리를 극복한 대안이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인데, 몽고주의를 신봉하는 21세기 대원군 할아버지들은 우파 학계를 궤멸시켜서 몽고주의만을 유일사상 체계로 떠받들어버리니, 오늘날 사고 체계에 걸맞는 반론이 서야될 자리가 없는 것이죠. 결국, 할아버지들의 양반놀음을 거부하는 개혁적이라는 이름을 빌은 송시열이 행님 할만한 양반놀음을 위해서, 좌파위주 사회를 깨려는 젊은층의 설자리가 막혀지는 것이죠. '데빌스 애드버킷'이란 영화는 인간욕망과 현실의 연결관계를 다룹니다. 이러한 영화는 '허학'인가요? 오늘날 새로운 유행 문화를 해독할 새로운 관념과 분석틀이 없거나, 억지로 과거틀로 끼워 맞추는 것이겠죠.
주사파들이 틀렸다고 주장함을 그냥 곧이곧대로 믿는 대학생들이 다수라고 하면서 '입증해봐'하는 공간에서도 외쳤는데, 할아버지층만 고정되도록 [간큰 가족]식의 '통일사기극'에 잘 말릴 풍조 만들었다고, 지금의 우파 사이트 네티즌은 좌파지식인만 손들어준 조선일보와 1970년대 지식체계밖에 몰라 하는 논리에, 제가 굴복한다고 보시면 큰 오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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