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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급강하 폭격기 융커스(Junkers) Ju 87(Stuka)
영국 전투기(Supermarine Spitfire)
영국 94mm 대공포와 서치 라이트로 무장한 방어 요새
독일 전투 폭격기(Messerschmitt Bf-110)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영국 전투 또는 영국 공중전(Battle of Britain, 독일어: die Luftschlacht um England)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에 맞서 1940년 6월 말 영국을 지킨 공중전이다. 이 전투는 역사상 모든 병력이 공군만으로 이루어진 첫 주요 전투로 묘사되고 있다. 영국은 공식적으로 1940년 7월 10일부터 1940년 10월 31일까지 편제를 재조직했으며 이는 독일의 대규모 야간 공습인 영국 대공습의 시기와 일치한다. 독일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세부사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1940년 7월부터 1941년 6월까지 영국 본토 항공전이 이어졌다고 본다.
나치 독일의 주요 목표는 영국이 평화 협상에 동의하도록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1940년 7월 루프트바페가 공중 및 해상 봉쇄를 시작하며 해안 수송 함선과 포츠머스와 같은 항구, 선박 중심 시설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 1일 영국 공군 전투 사령부를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루프트바페는 영국 공군에 대해 공중 우위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12일 후 이러한 공격은 영국의 비행장과 산업 시설들을 파괴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루프트바페는 전략적 기반 시설들과 비행기 생산 거점들도 목표로 삼기 시작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과 민간인을 상대로 전략폭격을 감행했다.
독일의 침공은 대륙 국가들을 점령하였고, 영국도 이와 같은 위협에 처해 있었지만 독일 최고사령부는 예상치 못한 해안 공격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영국 해군이 해상을 제패하는 동안 독일 해군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1940년 7월 16일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의 준비를 명령했고 이는 영국에 대한 상륙 작전과 공수 작전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루프트바페가 영국에서 공중 우위권을 확보한 뒤의 상황이었다. 영국 폭격기 사령부의 야간 공습으로 9월 독일군의 바지선 준비 작전이 폐기되었다. 루프트바페가 영국 공군을 압도하는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을 연기하고 결국 취소했다.
독일은 주간 공습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지만 독일 공군은 영국 대공습으로 알려진 영국에 대한 야간 폭격 작전은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영국의 방공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나 영국과의 휴전 협정 체결, 또는 항복을 얻어내는 것은 실패로 끝났고, 스티븐 번게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대규모로 패배하고 전쟁의 전환점이 된 첫 사건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을 꼽는다.
우리(영국)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우리는 비행장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we shall never surrender)!
베이강 장군이 프랑스의 싸움이라고 칭한 전쟁은 끝났습니다. 이제 곧 영국의 싸움(Battle of Britain)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싸움에는 우리 기독교 문명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 영국인들의 삶, 그리고 우리 제도와 제국의 영속이 걸려 있습니다. 이제 적의 노도와 같은 분노가 우리를 향할 것입니다. 히틀러는 이 섬에서 우리를 패배시키지 못한다면 전쟁에 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에 맞설 수 있다면 전 유럽이 해방되고 온 세계가 빛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패배한다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우리가 알고 사랑해온 모든 것이 뒤틀린 과학의 힘 아래 타락하여 새로운 암흑시대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입니다.
1940년 7월 10일∼10월 31일까지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영국 공군과 독일 공군 사이의 전투. 독일의 경우에는 1941년 5월 10일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에 이루어진 최후의 런던 공습을 한 시기까지를 영국 본토 항공전 기간으로 본다.
원래 영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브리튼 전투 또는 영국 전투이지만, 거의 공군끼리만 싸운 전쟁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관례적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 또는 ‘영국 본토 방공전’ 등으로 번역하는 편이며, 간혹 ‘배틀 오브 브리튼’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Siege of Malta도 ‘몰타 항공전’으로 번역되고,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과 방공작전도 ‘독일 본토 항공전’이라고 부른다. 공습이야 1차 세계대전 때도 없지 않았지만 이 2차 대전 때의 공습이 진짜 넘사벽 수준이었다.
이 전투는 역사상 최초의 ‘공군의 전쟁’으로 꼽힌다. 항공기가 군사 목적으로 쓰이고 공군이 등장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공중전이란 전투가 이뤄졌지만, 이 영국 본토 항공전 이전까지만 해도 공중전은 지상전 및 해전과 연관된 부차적인 성격이 강했다. 반면 이 본토 항공전은 제공권이란 개념이 완전히 확립되고 이것이 국가 간의 전쟁 전략과 연계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공군 혼자서 국가 전체의 명운을 걸고 전면전을 행한 최초의 사례이다.
다이나모 작전 이후 독일군 수뇌부에서는 연합군이 무사히 영국으로 탈출한 점을 감안하여 즉시 공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들의 전력으로 영국을 공략하기 어렵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영국을 항복하게 만드는 방향을 시도하였다. 물론 이때 히틀러가 공격을 허가했어도 독일의 빈약한 상륙 전력과 영국 해군의 세력을 고려하면 무모한 일이었다. 애초에 영국 본토 공략이 일사천리로 바로 가능했다면 연합군이 다이나모 작전을 성공시켰을 때 독일 장성들이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렸다.’며 탄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후 독일군은 영국을 견제할 정도의 부대만을 남겨두고 남쪽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6월 25일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프랑스의 1차 세계대전 승전비를 공병을 동원해서 박살내고 항복문서 조인식에 쓰였던 차량도 다시 끌어내 그 차량 안에서 휴전협정을 맺게 했다. 하지만 영국은 영상 편집을 동원해서 그런 히틀러의 행보를 비꼬면서 전의만 다지고 있었고, 희대의 선동가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미국에서 구입한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가지고서 “갱단 같은 처칠이 여러분을 사지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 살인마를 쫓아내고 제3제국과 대영제국의 평화를 지켜냅시다 여러분!” 이라고 선전했지만 오히려 영국 사람들은 “훗, 이래야 우리 수상답지!” 라면서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이 기간 동안 독일은 다양한 외교 경로를 통해 다양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영국과의 강화조약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영국은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영국이 항복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히틀러는 7월 4일 “영국을 공격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다이나모 작전 뒤 대략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만약, 프랑스를 점령한 직후에 쳐들어갔다면 영국이 궁지에 몰렸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의견도 있고 에르하르트 밀히 등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해권이 영국에게 있는 상황에 대체 어떻게 영국 땅을 공격하겠다는 건지...그들의 상관인 헤르만 괴링도 자기의 영광이 최대로 빛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히틀러는 “영국인들은 이성적이야. 상황이 이쯤 됐으니 우리하고 맞선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 거란 말이야.”라며 한 달 동안 각종 경로를 통해서 영국에 항복하라고 제안했다. 영국 정부도 고려는 해 보았지만 전쟁 이전부터 휴 다우딩 공군 대장의 지휘 아래 체계적인 방공망을 구축한 상태였고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항공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를 미친 듯이 생산하여 비축하고 방공 체계도 조금이라도 보강하는 등 필사적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어쨌든 총통이 영국 공격을 선언했고, 영국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긴 하였으나 일단 섬이었으니 수송선이 필수였다. 하지만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나치 독일의 서자 독일 해군 수상함대였다. 당시 독일 수상함대 전력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는지는 개전 직후 레더 제독의 발언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이제 우리(독일 해군)에겐 어디서 얼마나 멋있게 죽을지 고르는 것만 남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전역에서 독일 육군을 상륙하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이후 영국 함대가 몰려오는 바람에 구축함과 순양함 다수가 털려버렸다. 이 때문에 강력한 영국 해군을 상대로 상륙작전을 펼칠만한 여력이 없었고,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이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원래 독일 해군에서도 히틀러가 집권 전부터 재무장 계획의 일환으로 Z계획이란 해군 재건 작업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긴 했지만 원래 해군 육성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20년은 걸리는 사업이다. 게다가 Z계획은 1945년도에 1차 완료 될 예정이었으나 1939년도에 폴란드를 때리자마자 예상 밖이었던 영, 프가 전쟁을 선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당시 독일 해군 전력은 허술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Z계획은 물자와 자금의 부족으로 사실상 폐기상태가 되었으며 남은 여력은 U보트 생산에 집중된 상태였다. 그나마도 초기 전투에서 수상함 전력은 대부분 날아가 버렸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시점에서 영국 공격을 위해 독일 해군이 출격하면 그 날이 독일 해군의 제삿날이 된다는 점이다. 상륙 작전을 준비하기는 했는데, 라인강에서 쓰던 민간 선박까지 차출하여 상륙정으로 마개조하는 게 보통이었고, 독일 해군 육전대 출신 참전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런 물건들로는 애초에 도해(渡海)는 무리였다고 한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 일단 다이나모 작전에서 약간 체면을 구긴 괴링은 독일공군이 영국공군과 해군을 청소해 줄 테니 독일해군은 그냥 수송만 하면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영국 공격의 작전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이로 인해 오로지 공군끼리 맞붙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물론 괴링은 해군을 들러리 취급하면서 “공군이 다 해결해 줄 테니 해군 너님들은 육군만 실어주면 됨.” 이라고 말하자, 레더는 쾌히 승낙했다. 왜냐하면 이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해군한테는 불똥이 튀지 않을 테니까 레더, “나만 아니면 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고, 그게 안 되어도 밑져야 본전치기였다.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영국군은 공군의 질적인 부분은 비등했지만 양에서 독일군에 뒤쳐져 있었다. 하지만 영국군은 두 가지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영국은 레이더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독일 공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할 수 있었고, 독일 공군의 예상경로에 전투기들을 미리 배치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영국은 독일의 암호체계였던 에니그마를 해독해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독일 공군의 작전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이다는 암호가 새나간다는 걸 가려주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암호 해독으로 영국군이 사전에 대비해도 정작 독일군은 ‘암호가 뚫렸을 리는 없고, 레이다에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란 식으로 생각해버렸기 때문.
반면 독일군은 Bf 109가 영국 본토까지 갔다가 돌아오기에는 연료가 아슬아슬하다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런던 남동부에서 싸울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쌍발전투기 Bf 110이 폭격기 호위를 할 수 있으며 폭격기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가 영국 공격을 금지하였지만 영국 본토 공격을 금지한 것일 뿐, 영국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도버 해협에 영국 공군이나 선박이 보이면 모조리 쳐부수라는 명령까지 내린 상황이었다. 이에 됭케르크에서 연합군이 철수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영불해협 상공에서는 거의 매일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템즈강 하구는 지옥불 모퉁이라고 불리게 된다.
당시 독일은 “도버 해협을 봉쇄하겠다!”라고 선언한 상황이었는데, 영국은 “해협 봉쇄 웃기네!” 라면서 굳이 육로로 수송해도 상관없는 물자들까지도 반드시 도버해협을 경유하여 바다로 수송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의 수송선단을 공격하기 위하여 슈투카와 이를 호위하기 위한 전투기들이 출동하였고, 이러한 독일공군의 출격을 레이더 또는 수송선단의 무전으로 파악하면 “뭐? 독일 공군이 쳐들어왔다고?!” 반격 안하고 뭐해! 라면서 호커 허리케인과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출동하는 형태였다.
1940년 7월 10일, 독일 공군은 우리가 제대로 공격하면 영국 공군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간보기 위하여 평소 10기 전후에 불과하던 공격부대를 확 늘려서 70기나 파견하였다. 이를 확인한 영국 공군은 그 즉시 54기의 전투기를 날려 보내 응수하였다. 도버 상공에서 맞붙은 양국 전투기들은 격렬한 공중전을 펼쳤으며, 영국이 3기의 허리케인과 1척의 수송선을 상실하였고, 독일은 4기의 Bf 109E를 손실하는 결과를 보였다.
다음날 독일은 30기를 동원하여 영국의 수송선단을 공격하였고, 영국도 9기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응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스핏파이어 2기를 상실하였지만, 그 사이 허리케인이 슈투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하면서 선단공격은 좌절되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독일이 55기를 동원하여 재차 공격하였고, 영국이 잘못 대처하는 바람에 고작 6기의 허리케인으로 요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공격부대에는 Bf 109가 없었고 그 덕분에 허리케인은 2기의 슈투카를 격추시킨 후에 유유히 귀환하였다.
이후 8월 11일까지 위와 같은 유형의 전투가 반복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영국은 45대의 스핏파이어와 64대의 허리케인을 포함하여 115대의 전투기를 손실했고 독일은 53대의 bf 109를 포함하여 80대의 전투기, 22대의 급강하 폭격기, 100대의 중형 폭격기를 손실했다. 손실 항공기 자체는 독일이 많았지만 본토 방공에 필요한 전투기의 손실은 영국측이 많았기에 독일로서는 상당히 재미를 본 상황이었고 본격적인 결투를 앞두고 이런 식으로 영국공군의 전력을 깎아내면 결과적으로 득이 되기 때문에 조종사들의 출격을 형식적으로 제지를 했어도 크게 간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국공군은 이런 식의 전투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며, 휴 다우딩 대장과 11 전투비행단 단장 키스 파크 소장은 가급적이면 전투기를 보존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손실되는 영국 전투기와 조종사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파크 소장은 혼자서 해협상공을 비행하고, 적기를 추적하는 것을 금지하는 엄명을 내렸다. 또한 다우딩 대장은 아예 “우리 이젠 선단 호위 못해줍니다.” 라며 배째라 식으로 나갔다. 당연히 해군의 원성과 내각(특히 처칠)의 압박이 있었으나 다우딩 대장은 전에도 그랬듯이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렇게 영국 공군이 해협에서 물러나면서 해협 전투는 독일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영국은 이 기간 동안 많은 교훈을 얻게 되었는데, 폭격기 요격에 초점을 맞춘 VIC 대형이 전투기간의 전투에서는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독일 공군의 전술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VIC대형이 비효율적인 것은 확인하였으나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편제를 완전히 뜯어고치지는 못했고 여러 가지 실험적인 대형들도 사용되게 되었다.
더불어 이 기간 동안 전투기 조종사들이 격추시키지 못한 전투기도 격추시켰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보고받은 군에서 더 과장하여 홍보함으로써 사기를 높이려 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그래 적이 줄어들긴 들었겠지. 그래서 달라지는 게 뭔데?” 란 태도로 받아들인 반면, 독일은 “영국 공군 시망.”이라면서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입은 손실이 적은 건 아니었으나 영국의 항공기 생산량은 이를 보충하고도 한참 남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격추되어 전사한 조종사들도 많았지만 영국공군의 경우는 본토에 불시착해서 구조된 조종사도 많았던 반면, 적지에서 교전을 벌이던 독일군 조종사들은 격추되지 않더라도 기체에 이상이 생겨 적지한가운데 불시착하거나 RTB(Return To Base)하던 도중 바다 한가운데 추락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기지로 돌아올 연료부족로 시달리기 까지 했다. 즉, 기체는 보충이 되지만 손실된 조종사는 충원이 더디었으므로 영국 본토항공전은 하면 할수록 독일공군에게 손해였다. 그런데 정작 독일은 이런 과장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지휘하는 바람에 향후 점진적 오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는 격추 수 집계가 엄격했던 독일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영국공군이 수송선단 호위를 중단하고 물러났지만 도버 해협을 통한 수송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독일공군이 활개를 치고 있음에도 빈틈을 노려 물자를 수송하는 등 독일의 해협봉쇄 선언 자체는 무용지물이었다.
또한 독일의 항공전 교리는 1차적으로 제공권 획득 이였고, 제공권 획득을 위해 쌍발폭격기에 집중투자 되었다. 쌍발폭격기가 적의 공군기지를 공격하고, Bf 110이 폭격기를 호위하며, Bf109가 공중에 떠있는 적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공군기지와 방공시설 공격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폭격기를 호위해야할 Bf 110은 변화된 전술적 환경에서는 영국 전투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며 영국의 전투기 그룹 기지와 연안 항공대 그룹 기지조차 구분 못 할 정도로 영국 방공망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영국의 전투기 생산에 대한 정보 부족 등 핵심적인 정보들이 부족했다. 막상 공격은 시작했는데 끝이 안 보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더 심화시킨 것은 영국이 전투기 생산에 사활을 걸었기에 영국의 전투기 생산량이 독일의 생산량을 두 배 이상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앞에서 이야기한 과장된 격추수와 더불어 영국의 전투기 규모에 대해서 제대로 오판을 하게 된다.
1940년 8월 1일, 히틀러는 괴링에게 바다사자 작전에 앞서 영국공군을 완전히 괴멸시킬 것을 주문하였다. 이에 따라 방공망, 비행장, 항공기 공장, 상륙목표 지점을 제외한 항구를 공격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추신으로 “런던은 공격하지 않는다.”를 명시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제2 항공군을 지휘하던 알베르트 케셀링이 불만을 터뜨리면서 “런던에 불지옥을 보여주면 영국이 항복할 것.” 이라면서 강력하게 런던 폭격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히틀러 앞에서도 런던을 공격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는데 “자네 같으면 베를린이 폭격 당했다고 항복하겠나?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영국 전투기나 쓸어버리게!”라는 핀잔만 들었다. 이후로도 케셀링은 런던을 공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괴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은 8월 10일 영국 본토를 공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당일 날 날씨가 악화되어 8월 13일로 연기하였다. 그리고 8월 13일 아침에도 날씨가 좋지 않아서 오후에 공격한다는 명령(Adlertag, 독수리의 날)을 내린 상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요하네스 핑크 대령 휘하의 공격부대에게는 이 명령이 전달되지 못하여 이륙을 해버렸다. 케셀링이 다급히 귀환명령을 내렸지만 호위전투기들에게만 전달되어 폭격기 74기는 그대로 영국을 향해 날아갔다. 폭격기들이 무전을 수신하지 못한 이유는 보급된 무전기의 불량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핑크 대령이 명령을 들었음에도 씹고 공격을 감행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영국 역시 폭격기 편대의 수를 잘못 파악하여 고작 6기의 전투기만이 요격에 나섰고 당연히 요격 실패. 4기의 폭격기를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목표였던 비행장 폭격에 성공하였으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있던 독일군 역시 놀라운 성공에 환호하였다.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비행장 무력화, 전투기 10기 지상격파라는 보고를 올렸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점이다. 실제 비행장은 10시간만에 복구되었고, 격파했다고 보고한 전투기는 전투기가 아니라 브리스톨 블렌헤임 폭격기였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의 첫 영국 본토 공습이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진짜 폭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영국이 실수하지 않았다. 레이더에 나타난 정보를 바탕으로 각 지역을 담당하는 부대에 비상출격 명령을 내렸다. 특히 레이더를 통해 정확히 적의 위치와 수효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적재적소에 적당한 수의 편대를 배치할 수 있었으며, 거의 모든 독일 편대가 요격 당했다. 일부 운이 좋았던 부대만이 요격을 피해서 성공적인 폭격을 할 수 있었다. 독일 조종사들은 귀환하여 영국 전투기 90기 가량을 파괴하였고, 비행장 6개를 무력화시켰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실제 영국은 13기의 전투기만 격추되었고, 지상에서 파괴된 항공기들은 역시 대부분 폭격기였다. 그리고 무력화됐다는 비행장은 다음날 모두 복구 완료. 이 뻥튀기 보고를 별 여과 없이 믿고 다음 공격 계획을 수립하였다. 여담으로 이날 공습에는 8월 13일의 신나는 뇌조 사냥으로 기록된 슈투카 학살이 있었다. 이날 영국은 13대의 전투기를 포함하여 24대의 항공기가 격추되었고 독일은 48대의 항공기를 손실하였다. 폭격의 성과도 대단하지 않았기에 독일의 첫 본토 공습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뻥튀기 보고에 따르면 영국 남동부를 담당하는 11 비행단 전력이 반으로 줄어들어 영국은 북부와 중부에서 병력을 이동시켰을 것으로 예측하였고, 남동부에서 11 비행단을 상대하는 동안 스칸디나비아에서 놀고 있는 제5 항공군을 동원하여 취약한 북부와 중부 지역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독일군의 치명적인 오판이었고, 영국 측은 울트라를 통해 무선감청까지 해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거리의 문제로 Bf109는 올 수 없는 상황까지 겹쳤다.
“정보부에서는 기분 좋은 보고를 올릴 수 있겠군. 하지만 문제는 우리 폭격기들이 계속 요격 당한다는 거야.”
“영국 놈들이 북쪽의 예비병력까지 투입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북부와 중부에 폭격기를 집중시키도록 하지.”
“그렇지만 장군님, 우리 전투기는 거기까지 호위로 붙을 수가 없습니다만……?”
“하지만 영국 전투기의 작전반경도 벗어난 곳이지. 제아무리 스핏파이어가 빨라봤자 남쪽에서 북쪽까지 순식간에 날아올 순 없을 거 아닌가!”
악천후로 인해 출격이 하루 연기되어 8월 15일 제2 항공군, 제3 항공군이 1,500기 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남부를 공격하는 동안 제5 항공군은 북해를 가로질렀으나, 당연히 대기하고 있던 영국공군 14전투비행단에게 요격당해서, 20%가 격추당했으며 대파된 기체는 30%가 넘었다. 결국 너무 큰 피해를 입은 제5 항공군은 영국 작전에서 제외되었다.
8월 18일에 독일은 영국 공군을 파괴하기 위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다. 이날 영국은 지상파괴 8대를 포함하여 35∼42대의 전투기를 손실했고 독일은 69∼71대의 항공기가 격추되었다. 비록 손실비는 영국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양쪽 다 이런 식의 손실이 계속되는 상황은 감당할 수 없었다. 이날 양쪽이 입은 손실은 영국 본토 항공전 기간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영국 항공전의 결정적인 날인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보다 더 큰 규모였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에서 이 날은 ‘가장 힘든 하루(The Hardest Day)’라고 알려져 있다.
독일군은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우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슈투카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였으며 그대로 전선에서 퇴출되었다. 그리고 폭격기를 보호해줄 것으로 예상했던 Bf110이 변화된 전술적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확인하고 폭격기 호위에서도 제외시켰다. 대신 Bf109E가 호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폭격기 조종사들은 손실이 커지자 좀 더 잘 호위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괴링은 Bf109E에게 근접 호위를 명령했다. 이에 전투기 조종사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괴링은 이런 불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희 편대를 위한 스핏파이어를 주셨으면 합니다!
아돌프 갈란트, ‘필요할 게 있으면 뭐든 말해보라’는 괴링에게.
“정말 말도 안되는 명령이었어요. 전투기 조종사는 자신의 속도와 고도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쪽에서는 스핏파이어가 날아오는데 폭격기에 바싹 붙어서 비행하는 건 전투기는 물론이고 폭격기한테도 별 도움이 안됐어요. 결국 우리 쪽 인명손실만 더 커졌죠.”
귄터 랄,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 최대의 공중전❯의 인터뷰에서.
8월 24일 괴링은 다시 한 번 영국 공군 기지, 레이더 기지, 항공기 생산 시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또한 그동안 수집한 무선 상황과 전황을 분석하여 주요 공군기지를 목표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일부러 해협상공에서 오락가락하면서 레이더를 통해 예상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근접 호위로 인하여 이전과 달리 스핏파이어가 독일 전투기를 상대하는 사이에 허리케인이 폭격기만 요격하는 전술의 효율도 떨어졌고 상대적으로 안전해진 폭격기는 안심하고 목표물에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호위에서 제외된 Bf 110에도 폭탄을 달아서 목표지점에 폭탄만 떨어뜨리고 잽싸게 돌아오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리하여 2주간 33회의 대규모 공격 중 24회가 영국 공군 기지에 이루어지게 된다. 주로 공격받은 기지는 비긴 힐, 호른처치로 각각 4회의 공격을 받았고 데번과 노스 웰드가 각각 2회의 공격을 받았고 그 이외의 기지들도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무렵 독일은 본격적으로 야간에도 공습을 시도하였으며 아직 야간 방공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이 없던 상황이라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였고 스코틀랜드 인근지역까지 진출하여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트래퍼드 리맬러리 : 더 많은 적을 잡으면 그만 아니오! 목표물에 폭격하기 전의 폭격기 10대보다 폭격을 끝낸 폭격기 50대를 잡는 게 훨씬 낫지 않소?
키스 파크 : 그 목표물이 내 비행장이란 것을 잊지 말게, 리맬러리! 그리고 자넨 50대는커녕 10대도 못 잡을 걸세?
원래 남동부에서 제11항공단이 독일공군과 싸우는 사이 트래퍼드 리맬러리의 제12항공단이 제11항공단의 본진을 지켜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리맬러리는 전공을 세우기 위한 독일기 요격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파크는 여러 번 리맬러리에게 자신의 기지를 지켜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리맬러리는 이를 무시했고 이를 보다 못한 다우딩이 리맬러리에게 파크에게 협조하여 기지를 지키라고 명령하였으나 이에 반발하였다. 나중에나마 마지못해서 이를 받아들였으나 직속부하였던 더글러스 베이더가 제안한 대편대 전술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20∼30기 이상의 전투기가 상공에서 편대를 이루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 독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11항공단의 본진방어가 취약하여 방어망이 뚫리면 그대로 폭탄세례를 얻어맞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로 인해 키스 파크와 리맬러리는 회의에서 만나면 서로 잘잘못을 따지며 싸우는 사이였다.
이게 심각한 문제인게 11그룹은 28개의 비행대대로 구성되어 15개의 비행대대로 구성된 12그룹보다 훨씬 큰 전력을 보유했으니 그만큼 기지를 잘 지켜줘야 하는 상황인데 저러고 있었다. 12그룹은 15개의 비행대대중 7개가 허리케인으로, 6개가 스핏파이어로 구성되어 있으니 질적으로는 11그룹에 뒤쳐지지 않는데도 대편대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다. 파크는 다이나모 작전의 전훈으로 대편대 전술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제어하기 어려워서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리맬러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던 것. 이로 인하여 11그룹은 독일 공군과 공중전+공습 받는 기지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면서 싸워야 했다.
이 무렵 독일군은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영국 전투기가 200기 전후만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영국이 보유한 전투기는 850대가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이기간 동안 독일이 거센 공격을 퍼부었음은 명백하지만 이러한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통설은 9월 4일까지 지속된 독일의 공격에 11항공단 세력은 궤멸위기에 몰렸고 이 기간 동안 470여기의 전투기가 상실되었는데, 독일의 효과적인 전술로 인해 항공기 공장도 파괴되어 손실을 보충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조종사 요원이 상실되어 훈련병이나 다른 기종을 조종하던 조종사들을 동원하여 땜빵 하였고, 더 나아가 당시 언어 소통문제로 동원하지 않았던 외국인 조종사들까지 끌어다 써야할 정도로 처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이러한 통설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전투기 조종사 인원이 7월부터 계속 증가하였는데 7월에 1,200명이었으나 8월에는 1,400명으로 오히려 200명이 늘어났으며 9월 중순까지 100여명의 조종사가 더 늘어나서 조종사의 숫자는 결코 감소한 적이 없으며 전투기 또한 매월 450대 이상을 생산하고 있어서 전력의 감소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독일 조종사의 손실 또한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오히려 전투기 조종사의 숫자만을 따지면 영국의 조종사가 1,500명이고 독일의 조종사가 1,200명으로 오히려 루프트바페의 조종사가 더 부족했다는 것. 리처드 오버리는 이 결과를 두고 ‘만약 전투기 사령부가 소수라면, 독일 조종사는 더 소수이다.(If Fighter Command were the few, the German fighter pilots were fewer.)’라고 평가했다.
히틀러가 잿더미로 만들겠다던 이곳 런던에서 우리 국민들은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8월 24일 야간 폭격이 이루어지던 어느 날, 독일군 폭격기 두 대가 길을 잃어 영국 상공에서 헤매다가 대공포화를 받게 되자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급히 폭탄을 버리고 기지로 복귀했다. 문제는 이 눈먼 폭탄이 떨어진 곳이 런던 시가지였다는 것이다. 양측 수뇌부 모두 이는 야간작전 중에 벌어진 사고 정도로 생각했고 실제로 8월 24일 이후로 런던에 대한 폭격은 없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벼르고 있던 차에 “더러운 제리(독일군의 지칭하는 말)들이 민간인을 공격했다!” 라고 주장하면서 베를린 폭격을 주장하였다.
그동안 별다른 임무가 없었던 존 옥슬리 장군이 지휘하는 폭격기 사령부는 8월 25일 밤 베를린에 휘틀리 폭격기로 야간 폭격을 시작하였다. 괴링은 두 번 다시 베를린이 폭격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였으나 다음날 또다시 폭격을 당했다. 여기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괴링은 평상시에 베를린의 방공망이 완벽하다고 호언장담하며 “베를린 상공에 적 항공기가 1대라도 나타난다면 나를 마이어라고 불러도 좋다.”고까지 했다. 물론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겠지만 정말로 공습을 받아 버렸으니. 이 공습 이후 베를린 시민 사이에서 괴링을 깔 때 마이어씨라고 불리며 까이게 되었다
한편으로 독일군 지휘부는 작전의 진행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선에서는 한참 전부터 조만간 영국 공군은 전멸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속해서 영국 공군의 요격이 계속되고 있었고 이로 인한 피해도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 또한 이전부터 케셀링은 ‘런던 때리게 해주세요’ 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한스 에쇼넥 또한 영국 공군은 망하기 직전이니 런던을 공격하면 남은 영국 공군 전력을 전부 끌어내서 소탕할 수 있으며 사기 또한 확실히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젯밤, 영국 놈들은 베를린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겁한 영국 놈들은 감히 대낮의 독일 상공에 기어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폭탄을 떨어뜨린다면, 우리는 그 열 배, 백 배, 천 배의 폭탄을 떨어뜨릴 것입니다. 그들의 도시를 하나도 남기지않고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이제 둘 중 하나가 참혹한 패배자가 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사회주의 국가 제3제국이 아닙니다! 영국인들은 궁금해합니다. 왜 안오지? 왜 독일이 오지 않지? 기다리라고 하세요. 기다리라고 하십시오. 그는 옵니다. 그는 옵니다!”
결국 독일군은 런던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히틀러는 런던을 공격하되 테러 폭격이 아닌 산업시설, 통신 시설등 주요 시설을 우선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일단 런던 공격이 결정되자 예전부터 런던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던 케셀링은 이 결정에 열렬히 환영하였으나 제3 항공군 사령관 후고 슈페를레 장군은 잔존 영국기가 900기는 될 것이고 Bf109의 항속거리가 짧아서 위험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의 의견이었고 런던을 폭격하면 자연스레 영국 전투기가 런던으로 몰려들 것이고 오히려 독일 전투기들이 영국 전투기를 일소할 수 있는 기회이고, 9월 21일로 예정된 바다사자 작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 따라 9월 7일 런던 폭격이 결정되었다.
첫 런던 폭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독일 공군이 런던을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동부로 오는 줄 알고 있었기에 영국 공군이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일 폭격기 편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런던으로 갈 수 있었으며, 당시 방공시설들이 남동부에 주로 배치되어 있었기에 대공포의 위협도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런던 곳곳이 불바다로 변하였다. 뒤늦게 도착한 영국 전투기들이 47기 정도의 독일기를 격추시킨 정도였다. 이를 영국군의 방공능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고 판단한 괴링과 독일 공군은 크게 만족하였다. 9월 8일에도 역시 별다른 피해없이 런던을 폭격할 수 있었다. 한편 11그룹은 그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입은 손실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독일군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폭격 작전으로 영국 육군 및 홈가드에겐 큰 혼란이 벌어졌다. 독일이 런던 폭격을 가하기 직전, 독일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안 영국군은 본토 방위 작전인 ‘크롬웰’의 1단계를 발령했다. 여기서 1단계는 “독일군이 침공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므로 경계 태세를 최고 단계로 잡을 것” 이었다. 그런데 이 세부 내용이 홈가드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홈가드 대원들은 이 명령을 “독일군이 지금 공격해오고 있다”라는 것으로 받아들여 버렸다. 이 때문에 홈가드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쓸데없이 열의가 넘친 홈가드 대원들이 경비하고 있던 다리나 주요 시설물들을 파괴하려 하고, 야간에 움직이던 가축 등을 독일군으로 오인하고 총을 쏘고 경보를 알린다며 마을의 종들을 울리는 등 큰 소란이 벌어졌다. 게다가 “독일군이 공격하고 있다”라는 홈가드의 보고를 받고 정규 육군부대도 덩달아 움직이는 등 큰 혼선을 빚었다. 이런 혼란은 다음날에야 진정되었다.
9월 9일, 마침내 어느 정도 전력을 복구한 11비행단이 출격하여 해협상공에서 런던 직전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폭격기들은 폭탄을 아무 곳에나 투하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11비행단을 돌파한 폭격기들은 12비행단의 대편대와 맞딱뜨려야 했다. 무엇보다 런던까지 날아오는데는 남동부로 오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대편대를 이룰 시간이 충분하였고, 폭격기들이 도착할 시간에는 이미 대편대를 형성하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 남동부를 방어 할 때에는 쓸모없던 더글라스 베이더의 대편대 전술이 대규모 폭격기 부대를 상대할 때에는 유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에서 가장 큰 부담은 독일의 Bf 109E 전투기 조종사들이었다. 런던까지 가는 동안 11비행단의 전투기를 상대해야 했고, 런던에서는 12비행단의 전투기를 상대해야했다. 게다가 항속거리 문제로 인해 런던 상공에서의 체공시간은 5∼10분에 불과했다. 그 사이에 영국 전투기를 제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연료 부족으로 눈물을 머금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를 했다가는 해협이나 프랑스 해협에 불시착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폭격기의 피해는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났고, 결국 독일 공군 사령부는 Bf 109E 전투기에게 근접호위를 지시하였다.
근접호위를 하게 되면 폭격기가 상대적으로 안전해질 수 있었지만, 대신 영국 전투기에게 수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영국 공군이 방어하기에 쉬운 상황을 만들어주고 말았다. 결국 폭격기 부대의 손실이 증가하자 독일 공군은 9월 11일 주간폭격 중지를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폭격기의 손실을 줄일 수는 있었지만 역으로 영국 전투기의 씨를 말린다는 계획 자체가 틀어져버렸다. 이후 런던에 대한 야간 공습은 70일 가량 계속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9월 21일 바다사자 작전 수행을 앞두고 9월 17일까지 영국 공군을 완전히 괴멸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전황에 다급해진 괴링은 9월 14일 다시 주간폭격 재개를 선언하고, 9월 15일 다시 1,100 여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런던 공습을 감행하였다. 영국은 레이더를 통해 폭격기의 접근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30여기의 전투기를 날려보내 응전하였다.
먼저 요격에 나선 것은 11항공단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 내내 영국의 기본적인 전술이었던 스핏파이어가 Bf 109E를 상대하고 그 사이 상대적으로 비행성능이 떨어지는 허리케인들이 폭격기들을 탈탈 털어먹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 결과 상당수의 폭격기가 피해를 입고 격추당하거나 폭탄을 버리고 귀환했다. 간신히 런던상공으로 접어든 공격부대는 100기 이상의 전투기로 구성된 12항공단의 대편대와 맞딱뜨려야 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폭격기들이 격추당했으며, 독일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독일 공군은 폭격기 56대, 전투기 12대가 격추당하는 피해를 입은 반면 영국 공군의 피해는 항공기 29대를 손실하는데 그쳤다. 9월 15일은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Battle of Britain Day)라 하여 영국 공군에겐 가장 자랑스러운 전투로 꼽힌다.
이 날의 전투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는 당시 처칠과 키스 파크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11항공단 사령부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처칠이 키스 파크에게 출격하지 않은 예비 전력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 보자 키스 파크는 “단 한 대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전투기를 이륙시켰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괴링은 이와 같은 참담한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고, 9월 17일까지 계속되는 공격에서 더 큰 피해를 주어 만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9월 16일과 17일 날씨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항공작전이 불가능해졌고 그 사이 영국 공군은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결국 히틀러는 공군의 실패로 인해 9월 21일에 바다사자 작전을 돌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고, 작전의 연기를 선언하였다. 전면적인 공격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였지만 그래도 영국에 대한 공습을 계속하도록 주문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독일군에게 구체적인 작전지침 따위 없이 런던을 폭격하라는 명령만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다. 이로 인해 9월 27일까지 주간 폭격은 계속되었으나 피해가 계속되자 다시 야간 폭격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10월 13일 영국침공은 1941년 봄에나 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영국 침공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공인하였다. 그럼에도 독일 공군의 야간 폭격은 계속되었지만 10월 31일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영국 공군의 전력을 소멸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항공작전은 중지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독일은 산발적인 야간 공습을 계속했다. 그리고 영국은 아직 이에 대한 대응체계가 미완성인 상태였던 까닭에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11월 14일 코벤트리의 대참사를 꼽을 수 있다. 군수공장이 몰려있던 코벤트리에 독일 공군은 야간 공습을 감행하였고 사실상 지도에서 지워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이 폭격에 대해 독일군은 지도에서 도시를 지워버린다는 의미로 코벤트리화라는 단어를 붙였으며, 이런 식의 야간 공습이 계속되었고 그런대로 재미를 보던 독일 공군은 12월 29일, 런던에 대대적인 야간 폭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런던 역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이런 식의 독일 공군의 산발적인 야간 폭격은 1941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북서부 해안에 있는 공군을 서서히 동부전선으로 옮겨야 했으므로 공습의 빈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영국 공군을 상대할 정도의 전력만 남겨둬야 했는데 이 경우 영국 공군이 오히려 기세등등하여 역공을 가할 수 있었다. 특히 1941년에 접어들면서 영국 폭격기 사령부가 독일 도시에 대한 보복 공습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5월 10일 500여기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한 런던 야간 공습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런던이 다시 불바다가 되었지만 독일군의 야간 공습을 상대하면서 실력이 늘어난 영국 공군과 런던의 대공포대의 활약으로 20여기 정도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 이 공습을 마지막으로 독일 공군은 런던에 대한 야간공습을 중지하였다.
독일군이 물량에서 앞서 있었음에도 영국군의 효과적인 작전으로 영국을 끝내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처럼 서부, 동부 양쪽 전선에서 싸우다가 패배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돌프 히틀러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