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학년 소풍에 어머니가 따라 오셨다.
소풍에 어머니가 따라오신 유일한 기억인데 맞는지는 애매해도
행선지는 북 쪽의 어느 절이었지 싶다.
소풍이 파하고
플렛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가 한 무리의 여자들과 노래하고 춤을 추시는 걸 봤다.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류의 노래로 한 구절만 기억한다.
'니까이 닷떼 돈돈만 아네.' 이런 말이었다.
우리 민요 '날 좀 보소' 에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 개작을 했지 싶다.
맨 정신으로 그러지는 않으실 테고 술을 좀 드셨을까 모르겠다.
우리 식구는 모두 술에 약하다.
그 날,나는 평소와 다른 어머니가 부끄러워 마음이 졸아 들었다.
6 학년이면 혼자 소풍을 가는 게 낫다.
더구나 어머니는
매번 오빠를 따라 다니셨고 나는 1 학년의 소풍도 혼자 갔다.
아마도 오빠 때처럼 학모끼리
친분과 경쟁으로 엮인 모임이 어머니께 생겼던 모양이었다.
어떤 소설가께서 자신의 수필집에
딸의 소풍 날 싸던 김밥의 변천사를 쓰신 걸 읽다가 문득 나도 하면서
떠올린 장면이다.
작가께서는 소풍날의 김밥 싸기는 아이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었노라 했다.
나는 어머니가 싸신 김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대신 소풍마다 '이나리 스시' 라며 주신 게 요즘의 '유부 초밥' 이다.
어머니는 또,선생님께 드리라며 도시락을 하나 더 주셨는데
소풍이 파하고 집에 오면 기다렸다는 듯
"선생님이 맛있다 하시더나." 라고 바로 물으셨다.
내가 알 턱이 없는 물음이었다.
'이나리 스시' 란
쇠고기와 우엉을 다져서 달게 조린 걸
밥에 섞고 참기름으로 버무려 유부 속에 꼭꼭 채워 넣은 것이다.
소풍 길에는
삶은 달걀 세 개, 캬라멜 두 통,전병류의 과자 한 봉지,
그리고 사이다와 지전 두어 장을 받았다.
별 날 것도 없는 소풍 가방이지만 설레어
소풍날 비가 오려나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을 몇 번이나 봤다.
소풍지에서 점심을 혼자 먹었는지
선생님이 계신 무리에 껴서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울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당시에 내가 서러움이 뭔지도, 비교할 줄도, 몰랐던 거다.
상급생이 되고 오후 수업이 있자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갔다.
연근이나 우엉 조림을 간혹 가져 갔지만
도시락 찬은 나나즈께 아니면 계란 프라이 하나였다.
그렇다고 찬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남의 걸 먹었던 거다.
밤에 제사를 지냈다며 가져온 문어 조림도 먹었고
맛없는 고구마 조림도 먹었고
등교길에 지가 한 봉지 달랑 사온 미역귀 튀김도 먹었다.
아이란 식물과 같아서 저절로 자라는 면이 있다.
그 때가 나의 전성기여서
점심 시간이면 아이들이 나한테 우르르 몰려 와 밥을 먹었다.
책상을 넓은 반석처럼 붙이고 반찬은 다들 복판에 내 놓았다.
꼬마 조폭은 아니고 내가 반장이었다.
뻘물이 가라 앉으면 수초와 물밑 풍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새벽의 머리와 가슴은
지난 기억의 소환도 새로운 일의 생성과 기록도 없어 텅 비어있다.
적라나한 나를 만나기 좋은 지점이다.
잠이 막 깬 새벽에
'엄마' 하고 나지막하나 간절하게 부르고 싶은 날이 있다.
오직 한 사람,
어머니께 무너지며 기대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선배님.
제가 아름다움을 정의할 능력은 없지만
소나기가 내리고 난,
어느 여름날 오후, 떨어진 빗방울에
태양이 빛을 내려, 반짝이게 하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글입니다.
저의 모친은 생존에 계시지만
가끔씩은 식탁 위에 떨어진 밥풀떼기 한알에서
저의 가슴에서도 맑고 맑은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답니다.
행복하십시요 ㅡ
어머니를 떠 올리면 눈물이 나는 건
모두의 마음일 겁니다.
눈물이 참 묘하더군요.
남의 결혼식에 가서 신부 입장을
보는 데 눈물이 나 남 보기
민망해 자리를 뜬 적이 몇 번 있어요.
이스트우드님은 울보이시군요.
마음이 여리신 줄은 진작 알았습니다.
어머님을 향한 우드님의 사랑이
감동입니다.^^
국민학교 중학교 때의 소풍은 왜 그렇게나 신났을까요?
아마 낯선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수 있어서 그랬던거 같습니다
그당시 소풍 음식은 김밥 , 이나리 스시( 유부초밥) , 계란 , 쏘세지 , 과자 등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그나마 컷다구 소풍도 별로로 생각이 듭디다
고등학교 이후에는 소풍 보다는 수학여행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생각나니 즐겁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옛 기억이 선명하지 않고
잊은 게 많습니다.
소풍 기억도 저게 유일합니다.
고등학교 때는 도시락없이
갔지요.
친구네 친척 결혼식에 가서
국수로 소풍 점심을 떼운 것도
기억합니다.경험이 새로워서요.
저도 먹는 재미로 소풍이 좋았습니다.
충성 후하하하
나이 차이도 있겠고 도회와 시골의 차이도 있겠지만 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네요.
그저 보리밥에 새우젓 얹은 도시락.
늘 들에 나가시는 어머니이기에 투정부릴것도 바랄것도 없었는데
그래도 어머니가 그리운건 똑같은 것 같습니다.
네,그립습니다.
밑의 두 문단을 위해
앞에 사설을 늘어 놓았습니다.
가장 허물없는 사람이
어머니 이시다 싶습니다.
석촌님과 같은 마음에 감사 드립니다.
건강하십시요.^^
무언가 어머니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는 듯 해서...
그 당시라면, 김밥이라도 가지고 갈 수 있고
과자등 마실 것등을 가지고 가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괜찮은 집이네요.
어머니는 남아 선호와 개방적인 여성인가요.
우리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일기 시작했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도 부모님은 아들을 우선했지요.^^
지언님의 어린시절,
소풍가는 날에 함께 했습니다.
글이 좀 이상했나 봅니다.
ㅎㅎ
어머니가 한 분이라
저한테 못 오셨을 뿐입니다.
더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잊은 부분이 많아요.
차별 받고 크지 않아
지금도 남녀는 평등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글이 그래요.
자정이 다 되어 갑니다.
좋은 새 날 맞으십시요.
고맙습니다.^^
저는 제가 학교 들어가서 갔던 소풍들 보다 학교 들어가기 전 작은형 소풍을 따라갔던 기억이 더 선명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어머니 손을 놓고 형 옆에 붙어서서 같이 걸어가던 어느 봄날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막내의 귀여움이라는 이미지가
마음자리님께 늘 따라 다닙니다.
다리가 아팠을 텐데
봄날의 따스한 기억으로 남으셨네요.
점심에 먹으려고
감자 샐러드 만들어 놓고
들어 왔습니다.
더위에 몸 조심하시고 건강하십시요.
울지언님 글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김밥 양쪽을 계란을 입혀 만들어 주셨었던 지금은 제곁에 안계신 울어머니 생각이 떠오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엔 음료수가 삼각 비닐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서오능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그 당시 울부모님 께서 소풍 길에 함께 동행하기도 하셨었습니다. ^^~
계란 김밥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요.
저는 아직 한 번도 못 해
봤습니다.
어머니께서 솜씨가 좋으셨네요
삼각비닐 오렌지 저도
많이 사 먹었습니다.
소풍길에 장사꾼이 따라 왔지요.
구멍 뚫으면 물총이 되던
재미난 음요였습니다.^^
새벽녘 마음의 소리를 슬며시 엿보다 보니
어린 시절 소풍의 주억과 어머님이 생각 나셨군요.
가난한 시절이어 별 먹을거리 없어도 소풍날은
항상 즐겁고 들뜬 시간이였지요..
김밥 삶은 달걀, 카라멜 몇 조각,
아련한 느낌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행복하세요.
수필집을 보다가 지난 소풍을
떠올려 봤습니다.
기억나는 소풍이 별로 없어요.
불과 2 주 전에 본
저자명을 잊어 못 쓰겠습니다.
한스님의 외로움에 화답겸
올렸습니다.
한스님도 행복하십시요.^^
지언님은 그때 말로 "잘 사는집 애" 셨나 봅니다 .
김밥에 계란 약간의 군것질거리 돈 ,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
그래도 사이다 한병은 꼭 사서 세살 밑의
동생한테 갖다 주었지요 .
소풍날은 땡 잡는 날이잖아요.
다들 그렇게는 들고 왔습니다.
다른 애들보다
많이 가져가지 않았어요.
남겨 오는 게 없었거든요.
저는 제가 다 먹고
남겨 온 게 별로 없었습니다.
동생이 없어요.
잘 살지 않았습니다.
보통이었지요.
반칙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소풍과 나와 어머니는 기억이 없고
아버지께서 얼만만큼 가다가 오셔서
간식거리 주셨고
점심시간에 다른 선생님이나
담임 선생님 또는
같은 관사에 살고 계신,선생님
즉 이웃이 저를 챙겨주셨던,기억만
떠오릅니다.
주로 관사가,학교 안에 있었고
언제나 여러 이웃이 교직자 가족이여서
한가족처럼 늘 즐겁고 행복 했었던
나의,어린 시절이
지금의 이웃과 절친으로 살아가는
밑바탕이 아니었을지
언제나 그립고 그리운 아버지 사랑에
잠시 잠겨봅니다.
지언님 글에서 넘치도록 받았던 사랑
제 어린시절 챙겨봅니다.
관사 사람들과 어울린 경험이
참 좋은 자산이라서
윤정님의 사회 생활에 많이 도움이
되셨구나 합니다.
복 중의 복이지요.
초등 시절이 저의 전성기라
적은 건 사실입니다.
한 4 년이 저의 최 전성기였고
그 이후는 마음이 많이 괴로웠어요.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거든요.
해서 지금 복권을 사야지 합니다.
짧은 전성기를 하느님이
늦게 보상을 해 주실 것 같은
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사지는 않았습니다.ㅎㅎ
어디서 파는지
얼마에 사는지도 몰라요.
윤정님께서 댓글로 친숙한
판을 깔아주셔 마음껏
수다를 떱니다.
기분이 오랫만에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선생님 도시락을 저만 싸 간 건
아닐 겁니다.
돌아보니 그 시절이
가장 빛나던 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이 일찍 오고는 안 오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뒤로는 좋은 일이 없어요.
내가 곤란할 때
어머니만 떠 오른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고요.
주말 잘 보내시고요.
감사합니다.구봉님!
한밤중에 지언님글에 60년전인 나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당시 소풍이라면 많이 걸으니까 원족이라고도했고
사이다 사는날이 소퐁가는날이지요
이 밤중에 김밥이야기하시니
처제가 만든 김밥이 먹고싶네요
처제의 솜씨가 뛰어나 어디서도
그런 김밥을 못 먹어봤어옷
그옛날 초등교 시절에늠 헛쉬 쵸코물을 가지고 다니는 수원시장 아들이 부러웠고
중고교 시절에는 서오능등 능에서먹는 김밥이
좋았지요
아, 우리엄마는 자식들 소풍가는날은 물론이고 자식이라면 특히 맏아들이라면 꿈벅
죽으셨는데..
~~엄마~~~!
저는 요즘 일주일에 두어 번은
김밥을 쌉니다.
점심용으로요,제가 먹어요.ㅎㅎ
이맘 때면 밥맛을 잃습니다.
안 먹으면 힘이 없어요.ㅎㅎ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지요.
요즘 어머니 생각이 부쩍 납니다.
호반청솔님!
여름 잘 나시고요.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