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볓빛'이라는 표현이 있다.
지금 밤하늘에 반짝이는 저 별빛도 알고 보면 수백, 수천년 전 출발한 빛이다.
지구에서 티라노사우루스가 한창 활보하던 시대에 어떤 별을 떠난 빛도 있을 것이고,
이순신장군이 달 밝은 밤 한산섬에서 바다를 내려다볼 무렵 대장정을 시작한 빛도 있을 터이다.
가슴이 아련해지는 이 묵은 별빛의 비유는 혁신의 비밀을 엿보는 데도 도움이 되는 표현이다.
우리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혁신도 따지고 보면 하늘에서 느닷없이 툭 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것들이 모이고 , 다시 조합되고 쌓여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혁신은 묵은 별빛이다. ' (이정동, '축적의 길', 151쪽)
지난 정부에서 경제과학특보를 지낸 서울대 산업공학과 이정동 교수는 '축적의 전도사'다.
대한민국이 중진국의 함정(더 정확하게는 '중간소득의 함정')을 돌파하고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1단 로켓을 쏘아 올린 후 2단 점화가 지연되면서 성장엔진이 점차 식어가고 있는 이유도,
모두 축적의 유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이 교수는 주장한다.
대한민국호가 뛰어난 '실행력'을 바탕으로 놀랄 만한 성과를 이뤄냈지만, 백지 위에 밑 그림을 그리는
'개념설계'의 부재로 기술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실행력의 축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또 다른 단축 단계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한다는 주문이다.
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지켜보며 뜬금없이 이 교수의 '축적의 길'(지식노마드 펴냄)을 떠올렸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오랜 세월 한국이 쌓아올리고 누적해온 문화적 축적의 결과물이라는생각에서다.
강둑은 그냥 툭 터지는 게 아니다.
한 사회가 이룩한 성과는 오랜된 것들의 축적, 혹은 그것들의 누적의 경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은 자신이 이룬 부의 상당 부분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가 벌어준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있다.
세상은 한 사람의 고수나 천재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작가도 이번에 수상 소식을 접하며 비슷한 말을 했다.
'선배 작가들의 모든 노력과 힘이 제게 문학적 영감을 줬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겸양이 아니다.
한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과 이른바 K컬처의 놀라운 성과를 단순하게 연결짓는 건 분명 단견이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이 기적이 아니었듯이, '한강의 기적' 역시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한 작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한 작가의 소설과 시는 지난 백년간의 한국문학 전통 위에 놓여 있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은 사람들의
입과 눈물이 자양분이 되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전 세계를 강타한 K컬처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한림원이 한 작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한 직후 이 소식을 긴급 타전하면서
'점점 커지고 있는 한국문화의 세계적 영향력을 반영한 결과'라고 썼다.
'1인치의 장벽'을 넘어선 '기생충'의 봉준호와 아름다운 한국어로 노랫말을 쓴 방탄소년단(BTS)이 '묵은 별빛'이 되어준 셈이다.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만든다.
K컬처와 K문학이 이룬 성과에 버금가는 결과물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터져나오지 말란 법이 교수는 이를
'베이스 캠프 효과'라는 말로 설명한다.
에베레스트처럼 높은 산에 올라갈 땐 베이스캠프에서부터 시작해서 한단계씩 올라가게 마련이다.
한 작가가 만들어 놓은 마음속 베이스캠프는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 높아진 베이스 캠프는 젊은 세대의 패기와
도전 정신을 자극해 정상에 오르는 그날을 확 앞당길 수 있다는 얘기다.
이때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가 그리고 국가가 해야 할일은 그들의 도전과 실패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축적'될 수 있도록 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정순민 문화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