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1번 뿐' 조건 조각 공부
데생.실기 독학으로 홍대 합격
군 제대 후 성탄 카드 그려 판매
수익 전액 백지광고 사태에 참여
인체 다뤄 에로틱 작품 오해도
최근엔 공간 다루는 작업 치중
조각가 이일호는 1946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일호의 어머니는 아들 둘을 데리고 군산 송창동으로 이사를 갔다.
이일호는 유년시절을 군산에서 보내었다.
7년 연상의 형이 이일호에게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
군상상고를 나온 형은 평택의 미군부대에 군무원으로 취직했다.
금광국민학교를 거쳐 평택으로 와서 평택종합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일호는미술에 소질이 많았다.
평택종합고등학교의 미술교사는 동양화가 임송희(1938~)였다.
흙을 주무르는 모습을 본 임송희는이일호에게 홍익대 조소과에 진학하기를 권했다.
이일호는 미술대학에 너무나 들어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청년 가장인 형이 큰 결심을 했다.
동생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단, 시험에 떨어지면 그다음 기회는 영영 없는 걸로.
평택에는 대학입시를 위한 미술학원이 없었다.
데생과 조소 실기도 독학으로 돌파해야만 했다.
사실적으로 그리는 건 잘했지만 입시가 요구하는 뎃상과는 달랐다.
함께 홍대 미대 입시를 본 네 명의 고교 동기들과 기차를 타고 상경하여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갔다.
이일호 혼자서 합격했다.
평택으로 내려 가는 기차 안에서 친구들의 눈치가 보여 기쁨의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고교 미술 선생님이 조소가 진학 권유
대학을 다닐 때는 형이 미군부대에서 외국인 회사로 전직했다.
금호동 산비탈에 어머니와 아들 둘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65학번인 이일호는 2년 후배인 67학번 신성희.염동진.전국광 등과 친했다.
조소과의 염동진은 어린 날 인천에서 살 떄부터 가수 송창식과 죽마고우였다.
서양학과 신성희는 송창식과 서울예고 동기였다.
송창식은 친구들이 많은 홍대에 와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었다.
이일호는 이들 패거리와 어울렸다.
이일호에게는 청계천에서 구입한 중고 기타가 있었다.
기타는 그당시에 구하기 힘든 귀물이었다.
이 정보를 송창식이 알게 되었다.
송창식에게는 기타가 없었다.
이일호가 적어 준 금호동 주소로 송창식이 기타를 가지러 왔다.
송창식은 그 기타를 홍대에 올 때마다 기타를 꺼내어 노래를 불렀다.
그 기타는 결국 송창식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쎄시봉의 작은 무대에 조영남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등장했다.
송창식도 쎄시봉에 합류했다.
송창식이 쎄시봉에 출연할 때면 이일호 등 홍대 친구들이 가서 박수를 치며 송창식을 응원했다.
육군으로 입대한 이일호는 강원도 인제에 배치되었다.
조각을 전공했다고 그에게 주어진 병과는 치과 위생병 기공사였다.
보철물을 제작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졌다.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기타를 칠 시간이 주어졌다.
이 기회에 작곡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휴가를 나왔을 때 청계천에 가서 화성학 책을 샀다.
독학으로 화성학을 공부하며 기타의 어려운 기법도 익혀나갔다.
군대를 제대한 이일호는 몇 년이 지난 1972년, 세스프리 그룹에 가입했다.
전국광.이일호.이병용.김태호.김용익.황효창.노재승.장식.양승욱.김명수.김광진 등이 멤버였다.
여기서 많은 토론을 하며 새로운 세계를 모색했다.
문제는 생활이었다.
미대 출신들은 연말이면 크리스마스 카드 제작에 몰입했다.
이일호가 만든 건 12장짜리 달력식 카드였다.
이쁘게 그림을 그려서 인쇄소에 맡겨 대량으로 제작했다.
인기가 있었는데 고가였는지 후배들이 뛰어다니며 판촉을 했는데 판매가 썩 좋지는 않았다.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나니 이일호의 손에 쥐어진 건 7만원뿐이었다.
고작 7만원을 벌려고 내가 이 고생을 했나 생각하니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광화문을 걷는데 동아일보가 보였다.
1974년 12월부터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났었다.
신문사를 응원하는 일반 시민들이 격려 광고를 대신 내주었다.
광고비는 대개 5000원 선이었다.
이일호가 7만원 전부를 내겠다 하니 꽤 큰 광고면이 주어졌다.
이일호는 광고면에 자신이 작사 작곡한 '꽃나라'의 악보를 게재했다.
저항적인 노래였다.
작사 작곡을 '이산'이란 이름으로 변명했다.
친구인 디자이너 한상후가 멋있게 디자인을 한 꽃나라 악보의 게재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큰 이슈가 되었다.
동아방송에서 이곡을 대대적으로 선전해주겠다고도 했다.
이 노래를 나중에 나동민이 불렀다.
공중파 방속국에서는 송출되지 않았고 이화여대 교내방송에서 히트곡이 되었다.
나동민은 김민기와 친했다.
이 노래를 들은 김민기가 이일호를 만나고 싶어했으나 이일호는 거절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대학로를 걷는데 회식을 마친 듯한 김민기 일행이 '꽃나라'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일호는 혼자서 슬며시 웃기만 했다.
7만원 사건 이후로 이일호는 엉뚱한 일에 힘쓰지 말고 조각에 전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흙으로 소품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흙은 너무 부드러워 만지다 보면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형태가 나오기도 했다.
흙 속에서 이미지가 계속 나오는 게 신기했다.
반은 의식적으로 반은 무의식적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생각지도 안은 걸작이 나오기도 했다.
흙 작업을 하면 할수록 허술한 곳, 채워야 할 곳이 보였다.
1000여 점 정도의 소품을 만들고 나니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이해가 돋아났다.
런던 터바인홀 개인전 연 이미래 작가가 딸
이일호는 여전히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끔 아현동 후배의 화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다.
이 화실의 미대 입시생이었던 나동민이 이일호의 노래를 극찬했다.
나동민은 나중에 노찾사의 프로듀서를 맡은 등 이 계통의 실력자였다.
그의 소개로 전인권을 알게 되었다.
이때 이일호의 화실은 이대앞에 있었다.
나동민,이광조,전인권,강인원 등 후배 음악인들이 자주 이일호를 찾아 왔다.
이일호는 이들에게 '따로 또 같이'라는 작명을 해주었다.
'따로 또 같이'의 멤버는 이주원.나동민.전인권.강인원 이었다.
1979년인가, 그 무렵 이일호가 작사 작곡한 곡이 '헛사랑'이다.
'헛사랑'이 들어간 "따로 또 같이'의 레코드는 지구레코드에서 나오기로 했으나 불발되었다.
서라벌 레코드가 '따로 또 같이'에서 탈퇴한 전인권을 잡았다.
전인권은 이일호를 찾아와 작고료 60만원을 건네다 주었다.
이 무렵 이일호는 조각가 김영중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이일호에게 60만원은 아주 큰 돈이었다.
전인권은 이일호에게 자신의 음반을 내려 하니 몇 곡을 더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일호는 한 달 동안 대여섯 곡을 작곡 작사해 전인권에게 건넸다.
이일호는 조각가이기에 작곡,작사가로 이름이 나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한때는 여러 가수들이 작곡을 부탁했으나 거절했다.
'헛사랑'의 작곡 작사가가 나동민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82년부터 5년간 국립경상대학교 교수로 지내면서 진주에 머물렀다.
음악 활동은 완전히 절연했다.
전업작가 생활로 뛰어들었다.
이일호는 에로틱 조각으로도 유명하다.
전통적인 조각의 주요 소재인 인체의 형태와 욕망을 적극적으로 다루다 보니 그리 된 것인데 오해가 많았다.
최근에 와선 인체 조각보다는 공간을 더루는 개념적 작업에 더 치중하고 있다.
이미 20년 전에 이일호는 주변의 후배들에게 AI 세계를 설파하고 다녔다.
한인간의 개체로서의 존립 근거는 인체가 아니라 그가 가진 기억이며 그 기억은 곧 데이터다.
따라서 기억의 데이터를 간직하고 있는 한 인간은 영생한다는 게 그의 논지였다.
보험사는 인체를 기반으로 한 생명보험이 아닌 기억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방식의 보험을 설계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국인 최초로 런던 테이트 모던 의 간판 전시장인 커바인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미래 작가가 그의 딸이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그 아버지의 그 딸이다. 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 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