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모습은 1885년에 빅토르 위고 가 안치된 이후로 내부에는 19세기에 클로비스 왕,
생 루이, 잔 다르크와 같은 영웅의 역사적인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벽화 를 제작합니다.


그중에서도 퓌비 드 샤반의 “성 주느비에브”가 유명하며 중앙의 돔 천장에는 1811년
에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제작된 성 주느비에브를 숭배하는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왼쪽 골목길로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이는데 여기가 소르본느 대학
인데..... 1253년 로베르 드 소르본느에 의해서 신학교 로 출발해 중세에 소르본느는
교수들이 칼을 찰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등 위세를 떨치던 사제들 교육 기관 이었습니다.

소르본느 대학 은 한때는 국가 기관 위에 군림하며 백년 전쟁 중에는
프랑스 왕을 무시하고 영국 왕을 지지 하기 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설립 이후 700년 가까이 소르본느는 귀족이나 특정인 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엘리트 교육기관 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 일어나고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공화 정부는 귀족적이란 이유
로 모든 대학교를 해체 하였으며 소르본느의 공용어이던 라틴어 사용을 금지 하였습니다.

그 후 나폴레옹 이 다시 “제국대학교”를 세웠지만 2차 대전후 까지도
프랑스의 대학 교육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중 1968년 유명한 5월 학생혁명 이 일어나니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국 대학생 1백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급기야 시민, 노동자들도 학생 혁명에 가담하니 열악한 대학
환경과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교수들에게 항의하였으며 교육 기회의 균등 을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1,968년 5월 학생 혁명 이후 소르본느 는 입학 시험을 폐지 하고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교육 기관 으로 탈바꿈 했습니다.

소르본느가 중심이었던 파리 대학은 해체 되어 13개의 독립된 대학 으로 분리되었고
파리 대학교에서 떨어져 나간 학교들은 고유 이름 대신 번호 가 붙여졌습니다.

소르본느 도 중심인 신학부가 떨어져 나가고 문학부가 중심이된 파리 4대학 으로
개편되었으니..... 이제는 파리에 있는 13개 대학 중의 하나일 뿐 입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오랜 대학의 역사와 전통 을 자랑하는 소르본느 답게 고색 찬연한
캠퍼스 와 육중한 바로크식 건물등 파리 4대학의 분위기 는 여전히 위압적 입니다.

지금도 파리 4대학 곳곳에는 문학부를 상징하는 빅토르 위고, 의학부를 상징하는 파스퇴르
사회학의 창시자 꽁트 등 소르본느를 졸업한 석학들의 석상 이 여전히 서 있습니다.

파리 4대학에는 문학, 지리, 철학, 역사 등 인물 계열과 어문 계열 등 모두 24개의 학과가
있는데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만 합격하면 누구나 들어갈수 있습니다.

파리 대학의 등록금은 일년에 우리 돈으로 사십만원 정도라 돈 때문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은 없지만 "직업의 귀천이 없는 사회" 라 굳이 대학에 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 보이는 건물은 오늘날 파리대학의 본부 로 예배당과 도서관, 고문서 학원 등을
총괄하여 소르본느 대학 이라 부르는데 파리 제 3,4대학 이 들어서 있습니다.

사르트르 는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느 대학의 심리학 교수 앙리 들라크루아의 지도하에
고등교육 수료증서 취득 논문, "심리생활에서의 이마주, 그 역할과 본성" 을 제출합니다.

다음 해에 소르본느 교수 자격 시험을 치르지만 불합격한 후 낭인생활
중에“우연성”의 철학자 구키 슈조 와 만나 토론에 열 을 올립니다.

잉여가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조건임을 깨닫고 그의 실존 철학이 탄생했다고 말해지는데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 은 직업도 가족도 돈도 친구 도 없으므로 잉여인간 이라?

또 “현상학”과 사르트르의 만남은 1,933년에 독일에서 귀국한 아롱 을 둘러싸고 여기
몽파르나스의 카페 에서 칵테일을 앞에 두고 이루어진 일 이었다고 하는데....

이 얘기를 대중에게 전한 이는 보부아르 이니 그들은 죽을 때까지 서로 대화 반려 였으나,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며 사르트르에게도 보부아르에게도 다른 연인은 존재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여기 오고싶었던 이유는 한국 철학의 대부로“ 평생을 앎과 지식의 추구”
를 위해 살았다는 박이문 선생이 여기 소르본느 대학 출신 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가 일어나자 “계속 한국의 군사정권 하에서
살다가는 사람답게 살기 어렵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또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고싶다" 는 열망도 있고 해서 이화여대 교수직 을
버리고 프랑스로 건너와서는 여기 소르본느 대학에서 불문학 을 공부했습니다.

박사 학위 논문이 출판되었을때 파리에 유학중이던 일본인 불문학자 하스미 시게히코 는
서점에서 책을 접하고“동양인도 이런 논문을 쓸수 있구나” 하고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평생을 노력했지만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찾으려는 노력조차
헛되지만 각자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는 일은 필요하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교수가 되고 프랑스 문학박사와 미국 철학박사 를 땄고
150권에 달하는 저서와 500편의 시 를 썼으며 수필이 교과서 에 실렸지만.....

나이들면서 삶에 대한 환상이나 착각 에서 벗어나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의 삶 을 살려는 노력으로 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나요?

인생과 진리에 무슨 답 이 있는 것처럼 환상과 거짓을 파는 사람이
널린 세상에서 선생은 "답이 없다" 고 감히 말하는 것이네요?

수위가 문을 지키는지라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소르본느 광장에 있는 프랑스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뜨 꽁뜨 Auguste Comte 의 기념비 를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여기 소르본느 광장 에는 또 브랭서점과 브랭 철학서점 이 있는데
베르그송 Bergson 등의 철학 서적을 판매한다지만 나야 불어는 까막눈 이니....

시장 조사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 이 20~50대 1,000명에게 “중산층”에 대해
물었더니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하거나 전문직에 종사 하며.....

해외여행을 자주하고 여가생활 을 충분히 즐기며 30평형대 아파트 에 거주하며
1억원 이상의 여윳돈 을 보유하고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 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중산층 = 돈" 인 것이라!!!

중산층의 가치관등 내면 에 대해 물었더니 책은 많이 읽을것 같지는 않으며 그나마
독서하는 분야는 비즈니스와 경제및 자기계발 서적 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산층 은 국가 공동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개인적인 이익 에 훨씬 더
민감 하며 보수와 진보가 아닌 실용적인 사람 들이라고 말하네요?

78% 는 자신이 중산층은 아니지만 84% 는 계층 상승을 희망했으나 그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는데, 이유는 중산층의 재산은 개인의 노력보다는 부모로 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라나요?

그런데 이 나라 프랑스의 퐁피두 전 대통령은, “중산층이란 외국어 하나 정도는 구사하고
즐기는 스포츠 가 한두가지 있어야 하며 악기 를 다룰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네요?

또 요리 에도 자신만의 일가견 이 있어야 하며 환경문제 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행동 해야 한다“ 고 하니..... 한국인과 유럽인들의 생각은 왜 이처럼 다른 것일러나?

미국인과 영국인 및 독일인 들도 프랑스인과 생각이 유사한데 페어플레이를 실행
하고 약자를 보호 하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 할줄 알아야 중산층 이랍니다?

여기 소르본느 까페 (Tabac de la Sorbonne) 는 파리지앵과 파리지앤느 들의 여유 를
느끼게 하건만 시간이 없으니 그냥 밖에서 구경만 하고는 중세 박물관 으로 갑니다.

젊은이들의 거리 라는 생 미셀 광장 까지 보고는 생미셀 다리 로
세느강을 건너 파리의 발상지 인 시테섬 으로 갈 예정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소르본느 대학교......
우리 같으면 서울대학교를
옛날의 저 예비고사만 합격하면
누구든지 입학하도록 만들어 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