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에는 참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진리(truth)라는 말이 요한일서에 가면 참(true)으로 바뀝니다.
참이란 말은 사실화된다는 뜻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고 하나 되게 하셔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실화 되도록 하는 것은 기독교의 독보적인 비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호 로고스’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 분(호 로고스) 곧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시며,
생명이 되고, 영광이 되고, 사랑이 되고 영원한 기업의 보증이 되십니다.
이 분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그 분께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롬8:34, 히7:25))
기독교외에는 구원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호 로고스’외에는
아무에게도 만물을 짓고 만물을 다스리고 구원하도록 그 권한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외에는 결코 구원이 없습니다(행4:12)
그 분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 독특한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진리와 참이란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맞는 말이면 진리라고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정작 나는 진리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다른 표현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요1:18)
말씀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과 영과 생명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여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실제로 묘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눈에 보이도록 하나님을 묘사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마누엘 하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아! 아버지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제출하라고 말합니다(요일4:12)
시편기자는 자신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갈망하여 그 얼굴을 뵈옵지만
신비한 표적으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로 인해 눈물을 흘립니다(시42:1-3)
눈으로 보려는 유대신앙으로 고착이 되어 예수님께도 줄기차게 요구했고
지금도 신 유대주의자들은 보이는 하나님을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출발한 부흥이라는 이름이 붙은 성령의 역사가 그런 등급일겁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면 영의 직관으로 '이 분이 바로 아버지로구나' 하는
느낌(직관)이 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아들이라면 '네가 내 아들이다' 하는 말 한 마디에
'맞다 이분은 나의 아버지시다'하는 느낌이 확 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옛날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에 이런 현상들을 많이 봤습니다.
요1장 후반에 보면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나오는데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그 때부터 그들로부터 요한의 제자로서의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증거가 나오는 걸 봅니다.
그들의 증거는 바로 “우리가 메시야(그리스도)를 만났다”(요1:41)입니다.
이들의 증거는“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요1:29)고
한 그들의 옛 스승인 세례요한의 증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아볼로처럼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그리스도의 성령의 세례를 모르고 사역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행19장 참조)
만약 예수의 지상사역만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천상사역과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모르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아볼로는 예수에 대한 지식만 가졌을 뿐 그리스도가 영으로서
빛과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행18:24-28)
예수를 믿고 성령세례를 더 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라고 보면 됩니다.
물로 인해 노아가 홍수에서 건짐 받고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건짐 받은 것처럼
물세례(침례)로 죄와 세상에서 벗어나고 성령에 잠겨 그리스도와
한 몸 한 영이 되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고전12:13)
그래서 바울은 세례를 주는 것이 그의 주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성령세례는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3복음서와는 격이 다릅니다.
공관 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말씀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일을 하셨는가
또는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이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요한복음은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요1:12절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다음 1:14절 말씀이 육신으로 되었다(incarnation) 선언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려 칼빈이 “교회는 제2의 성육신이다”라고 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신 ‘호 로고스’가 육신의 옷을 입은 사실은 잘 아는데 그 분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 되는 영적인 유기적 관계를 잘 모릅니다.
아니 말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자세히 보면 실제화가 안 되는 듯합니다.
예수의 보이는 몸이 성육신 하신 것이듯 지금은 성령 안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공동체가 또한 그 분의 몸입니다. 이 몸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셔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생각나게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탄식하며 중보기도도 하십니다.
바로 이 분이 말씀(호 로고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분이 바로 교회 가운데 곧 성도의 심령 가운데 계시니
그 분들이 교회는 제 2의 성육신이라고 말한 것일 겁니다.
따라서 요1:14절을 통해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만 보지 말고 그 분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시는 것까지 보아야만 성경의 의도를 제대로 추적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하시매' 하는 말은 텐트를 친다(dwelling among us)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처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요14:2)
그 분은 우리의 장막이십니다(계7:15)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거처가 되십니다(요14:23)
이 장막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계21:2-3)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의 텐트가 된다는 말에 딴 말을 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의 개인 텐트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 덮을 수 있는
대형 텐트이십니다. 그 분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에게 거처가 되십니다.
주님과 하나가 된 계명을 지키고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텐트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의 텐트 안에서 배우고 자라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 집니다.
그리고 독생자의 영광을 보아야만 존귀함과 가치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영광을 보아야 자기를 존귀하게 보고 구원의 가치를 높입니다.
질 그릇 속에 보화를 담았다는 고백이 바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여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고후4장)
요1: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죄 없다 하는 자들의 입을 막고(롬3:19) 죄를 시인하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끌고 가는 몽학선생(초등교사)입니다(갈3:24)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여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늘에 앉힌(엡2:6) 사실까지 우리가
수고한 것이 하나도 없고 다만 믿어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엡2:8)
진리는 그 은혜가 우리의 은혜로 실제가 되도록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니 진리의 성령입니다.
“내가 죄인이구나”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몽학선생(초등교사)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고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고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어휘들의 총칭이 바로 은혜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어 가는 원리 곧 공식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수학의 문제의 답도 공식에 대입하면 풀리듯 진리로 은혜가 실제화 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받는 것이며 진리는 받은 은혜를 추구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독생자의 영광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 안에 있으면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자신의 존귀한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정체감이 계속 위로 솟아오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무한한 존재의 가치성(천국의 보화)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시민의 자랑이요 존귀와 영광의 정체감입니다.
그래서 요2장에는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혼인을 하면 변화가 나타나는 건 당연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만나면 변하는 법입니다. 신기한 화학적인 화합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만나면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집간 여인이 금방 몸이 변하듯이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질적으로 변합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혼인하겠다고
벼르는 그리스도인이 많은데 그렇다면 자신 속에 모시고 한 몸이 된
그리스도는 약혼한 건가요? 약혼해서 동고동락하다가 그때에 혼인을 할 건가요?
3일 후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보이시고
그 다음에 돌 성전을 허시고 3일 만에 몸 성전을 이룩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한 영이 되어 성전이 된 몸을 가지고 나중에 혼인잔치에 참여한다고요?
그래서 신부단장을 한다고 단단히 준비를 하지만 변화가 더딘 이유는 주님과
한 떡이 되어 먹고 한 영이 되어 한 몸이 되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나도
모르게 몸을 행동으로 나르는 순간에 변화가 되어 가는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진리의 성령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므로 참이 되어 나타나게 되는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