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일기
최승자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 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산방일기(山房日記)
이상국
새벽 한기에 깨어 마당에 내려서면 녹슨 철사처럼 거친 햇살 아래 늦매미 수십 마리 떨어져 버둥거리고는 했다. 뭘 하다 늦었는지 새벽 찬서리에 생을 다친 그것들을, 사람이나 미물이나 시절을 잘 타고나야 한다며 민박집 늙은 주인은 아무렇게나 비질을 했다.
주인은 산일 가고 물소리와 함께 집을 보며 나는 뒤란 독 속의 뱀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럽도록 붉은 마가목 열매를 깨물어보기도 했다. 갈숭어가 배밀이를 하다가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어디서 철버덩 소리가 나 내다보면 소리는 갈앉고 파문만 보이고는 했다
마당 가득한 메밀이며 도토리 멍석에 다람쥐 청설모가 연신 드나든다. 저희 것을 저희가 가져가는데 마치 도둑질하듯 살금살금, 청설모는 덥석덥석 볼따구니가 터져라 물고 간다
어느덧 저녁이 와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 몸을 숨겼던 밤이 산적처럼 느닷없이 달려들어 멀쩡한 집과 나무와 길을 어둠속에 처박는 산골, 외롭다고 풀벌레들이 목쉰 소리를 하면 나는 또 산 너머 세상의 의붓자식 같은 내 인생을 생각하며 밤을 새고는 했다
그림일기
진은영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그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日記
황동규
하루종일 눈. 소리없이 전화 끊김. 마음놓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음.
길 건너편 집의 낮불, 함박눈 속에 켜 있는 불, 대낮에 집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불, 가지런히 불타는 처마. 그 위에 내리다 말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눈송이도 있었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나비채를 휘두르며 불길을 잡았음. 불자동차는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달려옴. 이하 생략.
늦저녁에도 눈. 방 세 개의 문 모두 열어놓고 생각에잠김. 이하 생략.
"혼자 있어도 좋다"를 "행복했다"로 잘못 씀.
西窓日記
서정춘
망忙 하여라
해 저문 하루치의
노을 비낀 유리창은
머큐로크롬 빛깔이다
여기서 쳐다보면
마음 속 즈문 상처 우련 붉어라*
조리사 일기 1
김광선
- 겨울나무
소 한 마리분의 내장을
부위별로 정리해놓고 가을도 끝난
나무 아래 섰다
아직도 그 선명한 빛이 가시지 않은
고기를 담근 통
한껏 흘려보낸 물빛처럼 노을이 피었다
물컹거리는 비린내보다도 허리의 통증
씻어내려 삼킨 막소주 한잔으로 모자라
담배연기 폐 깊숙이 밀어넣는다
풀풀 날린다 흩날릴 것도 없는
시푸르딩딩 겨울 초입 저녁나절
민망한 듯 잎새 몇개 겨울나무 뜨악하다
몸짓만이 남았구나
바람 앞에서 초연할 수 없었던 의지
맨가지로 빈 하늘 받치고 섰구나
찬물에 퉁퉁 불은 손을 쓰다듬는다
이 손끝에서
많은 사람들 포만하여 행복했을까
내 아직 푸른 수액은
어떤 혈관으로든 타고 흐를 수 있을까
찬밥덩어리처럼 굳은 가슴 언저리
떨림도 없이 또 몇잎
떨구는 까칠한 줄기 쓰다듬으며
다독이듯 내내 쓰다듬으며
군산일기
임찬일
살점을 발라낸 고요한 생선의 뱃속처럼
텅 빈 고깃배들이 뼈다귀만 앙상한 모습으로
밤바다에서 흔들리고 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생선의 가느다란 헐떡거림을 연상시키듯
늦은 저녁 고깃배에서 퍼 내리는 것은 몇 백 상자의 찬바람
포장마차의 불빛이 꽃밭처럼 환하게 피어 있고
저 건너 장항의 불빛도 따스하게 건너오는
군산 항구의 생선 비늘 쌓인 횟집에서
우리는 농어와 소주를 시킨다
좋은사람들의 이야기처럼 풍성한 해물이
상 바닥을 덮었을 때 이곳의 인심은 몇 배나 넉넉하게
우리를 배불리 채워 주었다 결국 접시를 다 비우지 못한 채
유리창에 붙어 농어처럼 할딱할딱 숨쉬는 바다와
그 위로 건너오는 장항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이 저녁 나는 세상의 누구에게로 건너가는
한 등의 불빛인가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우리는 밤에 불을 보고 길을 찾아가듯이
내 사랑도 그대에게로 가는 어둠의 바다위에서
혼자 깜박거린다 거기 그대가 불처럼 켜 있으므로
빈자일기(貧者日記)
김두일
바람 끝을 잡는다며
지도에도 없는 땅으로 평생을 떠도시다가
가진 거라곤 병든 몸만 남아 되돌아온 우리 아버지
먼지보다 앙상한 몸, 무겁게 일으켜
밤이면 밤마다 졸참나무 가지를 베어내셨지
올빼미 같은 산지기 눈초리 피하기 위해
밤보다 더 어두운 낯빛을 하고
다섯 식구 누워서 잠들 수 있는
마루바닥 얼기설기 이어 붙이곤
차갑게 식은 몸으로
비로소, 바람 끝 잡고 재가 되신 건
내가 아직 아주 어릴 때였지
군불 한번 제대로 지피지 못하는 단칸 마루바닥엔
아버지 손금만큼 가시가 박혀있어
날카롭게 날을 세워 등을 찔러대고
가시 박힌 등짝엔 고름이 마르지 않았어
어머닌 틈만 나면 등으로 바닥을 미셨지
아마도 거북이처럼 등딱지를 매달고 계셨는지도 몰라
그래 내가 아주 어릴 때였어.
낙엽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것이 시간이던지
먹고 또 먹어대도 주린 속 채우지 못하는 나이만 먹고
낡은 마루보다 더 늙어버린 어머니가,
등에 박힌 가시가 아프다며 바닥에 눕던 날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아버지처럼 훠이훠이 떠나셨지
때에 전 고무신 한 짝 댓돌에 남겨놓고서.
등에 박힌 가시가 살이 된 것을
처음 본 것도 그 날 이었어
아직도 내 자리엔 가시만 젊어
빈자리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저 가시들
내 몸엔 졸참나무 줄기가 자라고 있는지도 몰라
제 몸으로 빚은 것이란 고스란히 빼앗기고서야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졸참나무 수액이
구석구석 돌고 있는지도 몰라
이제 몸을 찍어내고 싶어
가난한 시간에 더 이상 빚지지 않게
몽산포 일기
이정하
Ⅰ
그대와 함께 걷는 길이
꿈길 아닌 곳 어디 있으랴만
해질 무렵 몽산포 솔숲 길은
아무래도 지상의 길이 아닌 듯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참으로 아득한 꿈길 같았습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 좋았던 나는
순간순간 말을 걸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 속마음
서로가 모르지 않기에.
그래, 아무 말 말자. 약속도 확신도 줄 수 없는
거품뿐인 말로 공허한 웃음짓지 말자.
솔숲 길을 지나 해면으로 나가는 동안
석양은 지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운 낙조를 보며
그대는 살며시 내게 어깨를 기대 왔지요.
함께 저 아름다운 노을의 세계로 갈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그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대는 그저 쓸쓸한 웃음만 보여 줬지요.
아름답다는 것,
그것이 이토록 내 가슴을 저미게 할 줄이야.
몽산포, 해지는 바다를 보며
나는 그대로 한 점 섬이고 싶었습니다.
그대에겐 아무 말 못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그대 가슴에 저무는
한 점 섬이고 싶었습니다.
Ⅱ
걷다 보니 어느 덧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여전히 바다는 우리 발 밑에서 출렁이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제 제 갈 길로 가야 합니다.
또 얼마나 있어야 이렇게 그대와 마주할 수 있을지,
이런 날이 우리 생애에 또 있기나 할는지,
둘이서 함께한 이 행복한 순간들을
나는 공연한 걱정으로 다 보내고 말았고,
몽산포, 그 꿈결 같은 길을 걸으며
나는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내 발 밑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그대 또한 내 삶의 한가운데
밀려왔다 기어이 밀려가리라는 것을
그대와의 동행이 얼마간은 따뜻하겠지만
다 큰 쓸쓸함으로 내 가슴에 남으리라는 걸.
몽산포, 그 솔숲 길 백사장은 그대로 있겠지만
그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걸.
몽산포, 그 꿈결 같은 길,
아아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을 간다는 건
못내 쓸쓸한 일이라는 걸.
사랑 日記
이성복
1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늙은 風車, 휘이 돌려 보시지
몸은 녹슬은 기계, 즐거움에 괴로움 섞어
잠을 만드는 기계
몸은 벌집, 苦痛이 들쑤신 벌집
몸은 눈도 코도 없지만 몸을 쏘아보는 獵銃엽총과
몸을 냄새 맡는 누리의 미친개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낡은 신발 값과 같으니
----當代의 몸 값은 신발 값과 같으니
當代의 몸이 헤고 닳아, 참으로 연한 뱃가죽 보이누나
2
한 마리 말을 옭아매는 馬車의 끈은, 끊어지지 않는
馬車의 사랑 馬車의 꿈 사랑한다 가엾은 내.....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가늘은 낚싯줄은
물고기의 사랑, 사랑은 입으로 말하여지고 사랑은 입을 꿰
뚫고
그래, 개를 걷어차는 구둣발은, 구두를 닮은
소가죽의 사랑 픽, 쓰러지며 소가 남긴 사랑
죽은 나무는 자라지 않지만 죽은 나무의 괴로움은 자
라고
지금 밀물은 바로 그 썰물이었으며 愛人은
愛人을 닮은 수렁이었고 愛人을 닮은 무딘 칼이었고
愛人을 닮은 不安이었고
그래, 온 몸으로 번지는 每毒의 사랑
문드러지면서 입술이, 허벅지가 表現하는 아기자기한 사랑
어머니, 저의 밥은 따뜻한 죽음이요 저의 잠은 비좁은 壽
依요
어머니 저는 낙타요 바늘이요 聖者요 聖者의 밥그릇이요
어머니, 저는
견디어라 얘야, 네 꼬리가 생길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마라,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네가 갈 때까지
네 혓바닥은 괴로움의 혓바닥이요 네 손바닥은 병든
나무의 나뭇잎이요
3
어느날 엄마, 내가 아주 배고프고 다리 아파 목마른 논에
벼포기로 섰다면 엄마, 그 소식 멀리서 전해 듣고 맨발로
뛰어오셔 얘야 가자 아버지랑 형이랑 너 기다리느라
잠 한숨 못 잔단다 집에 가자 내가 잘못했어 엄마, 그러시
겠어요?
그러실 테지만 난 못 돌아가요 뿌리가 끊어지면 물을
못 먹어요 엄마,제 이삭이나 넉넉히 훑어 가시지요
어느날 엄마, 내 살 길이 아주 가파르고 군데군데 끊어지
기도 한다면
엄마, 얘야 내 등에 업혀라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지 너만
보면
마음 아프구나 하시며 내 살 길처럼 타박타박 걸어가시겠
어요?
엄마 걸어가시겠어요? 발굽이 부러지면
등으로 기어 날 안고 가시겠지만 엄마, 난 못 가요
내 四肢는 못박혀 고름 흘려요
엄마, 어느날 저녁 구름을 밀어내며 얘야
여기 예루살렘이야 痛哭으로 壁을 만든 나의 안방이야
요단, 잔잔하단다 요단, 지금 건너라, 빨리 가시면
내가 건너가겠어요? 어느게 나룻배인가요? 아니예요
그건 쓰러진 누이예요 엄마, 누이가 아파요
첫댓글 길 건너편 집의 낮불, 함박눈 속에 켜 있는 불, 대낮에 집 밖에서
"혼자 있어도 좋다"를 "행복했다"로 잘못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