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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방생♥ 원문보기 글쓴이: 돌아오는 길
호흡을 센다.
바라는 마음도 없고..어떻게 되겠다는 마음도 없다.
모든 마음을 다 버리고
단지 호흡만을 센다.
저 멀리 강 건너에서 불 난 것을 구경하듯이..
무심히 파도가 철썩이는 것을 바다에 서서 구경하듯이..
이 몸이 파도에 철썩이듯 공기를 들이켜고 내뱉는 호흡을 하는 것을 지켜본다.
이 몸은 자기 스스로 공기를 뱉고 들이켠다. 어떨 때는 빠르게 ..느리게..혹은 보통으로..
어떨 때는 거칠게, 어떨 때는 고요하게 ,
어떨 때는 끊어짐이 있게, 어떨 때는 편안하게 계속 흐른다.
어떨 때는 강하게 들이켜고 멈추고
어떨 때는 강하게 내뱉고 멈춘다. 그후에 다시 호흡이 이어진다.
감정상태에 따라 호흡은 그 때그때 그 감정이 원하는 몸상태를 만들어주느라 애를 쓴다.
호흡을 지켜본다. 하루 종일... 하루 종일....
심심하다..지겹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호흡을 뭐하러 세나.. 왜 할일도 없이 호흡만 지켜보고 있나...
그 생각을 또 구경한다. 그 마음은 알아차리는 순간 올라왔다가 멈추지 않고 바로 사라진다.
어떤 생각과도 속지 않으면 그 생각과 자신을 동일화 시키지 않게 되고..그 생각과 자신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분리된 그 생각은 바로 사라진다. 생각이 머물려면 끊임없이 그 생각을 붙들지 않으면 안된다.
호흡을 스스로 조작하거나.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거나 고르게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호흡을 조작하는 것이다. 호흡을 조작하면 몸의 자동흐름이 엉켜서 더욱 복잡해진다.
몸은 나보다 현명하다. 몸이 스스로 호흡하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그저 지켜본다.
바다의 파도를 일부러 만들어서 철썩이게 해봤자..바다의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게 된다.
몸이 호흡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본다. 어떤 바램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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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을 지켜볼 힘이 약한 것은..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강아지처럼 그 생각에 따라가기 때문이다.
졸음이 오면 졸음을 쫒아가 졸음과 하나가 되어버린다. 곧 잠에 빠지게 된다.
추억이 떠오르면 추억을 쫒아가..추억속에 빠져버린다. 있지도 않은 과거를 현재로 꺼내서 지금 그 환상속에서 살고 있다.
호흡을 세는 것을 습관화한다면 환상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고..환상에 빠지기 전에 알아채기가 쉽다.
만약 어떤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면..스스로 그 생각을 계속 붙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직접 관찰해서 보아야 한다.
그럼 자신이 그 생각을 일으키고 붙들고 씨름하면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어요.
지나간 생각들이 내 머리속에서 나가지 않아요.
괴로움에 시달리면서 제발 이 생각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 괴로운 생각들은 내 머리속에서 나가지 않아요.
그런데 즐긴다니요..말도 안돼요. 이해를 못하는거 아닌가요.."
그런가?
내 마음 아닌가? 그 생각이 괴로와서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된다. 밥 먹기 싫으면 안 먹듯이....
그러나...
그런 힘든 기억과 아픔....혹은 달콤했던 추억과 헤어지는 고통과 학대받았던 기억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서
그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마음을 발견한다.
왜 그럴까?
그동안..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온갖 지혜와 감각을 동원하여 짧은 만족을 얻어냈었고..
인연이 다 해서 상대가 사라지고,
그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되면.. 그 마음은 미친 것처럼 펄쩍이게 된다.
만족을 얻는 순간은 다 합쳐서 ,아주 아주 길어야 수백초에 불과한데..
그것을 얻지 못해 괴로와 하는 시간은 몇 달 몇 년 혹은 평생..혹은 다음생..혹은 수십생..이렇게 집착이 끊어지지 않는다.
담배를 어서 가져오라고..
술을 어서 가져오라고..마음은 강하게 요구한다.
고기를 가져오라고...
애인이었던 가족이었던 그 여자..그 남자를 가져오라고..
빨리 가져오라고...급하다고...
여기 저기서 그 사람과 놀던 생각과 기억들 추억들이 그를 괴롭힌다.
만족이 깊을수록 불만족은 더욱 강하게 몰아친다.
그 괴로운 기억들은 나를 죽고 싶게 할 정도로 절망에 빠뜨린다.
그러면서도 그 만족이 독약이었음을..자신을 올가미에 빠뜨린 바로 원흉이었음을 통찰하지 못한다.
마치 파리가 꿀을 탐내서 먹다가 들러붙어 죽듯이...
파리는 꿀이 맛있다는 것만 알고 그 꿀이 얼마나 강력한 집착이 되어 벗어날 수 없게 하는지는 통찰하지 못한다.
꿀이 달기만 하고 맛있기만 하고, 들러붙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런 것만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꿀이 아니다.
동료가 붙어서 수없이 죽어있는 것을 보고서도, 자신도 조금씩 야금야금 먹다가 결국에는 점점 더 먹다가..
단맛에 취해서 결국 들러붙어 죽어버리고 만다.
그 마음이 만약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면 그 생각들이여 일어나지 말라고 하자.
내가 괴로와 하니까 일어나지 말라고 하자.
일으키지 말라고 하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그 생각과 감정들은 결코 내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닌 그 생각에 속으면 안된다.
그것들은 그동안 일으킨 생각의 횟수만큼...반복의 경험만큼 자동으로 일어나는 것 뿐이다.
그것을 보고 괴로와 하고 또 그리워 하면..아뢰야식에 저장되었다가 다시 또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다만 일어날 때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또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 파도는 사라지고..그 생각덩어리의 반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있는 그대로 본다면..
마음은 쉬게 된다.
어떤 생각이 일어났을 때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다만 그것은 영상에 불과하다. 그림자..헛된 이미지일 뿐이다.
그 이미지들은 나를 괴롭힐 힘이 없다.
스스로 그 영상과 자신을 동일화 해서 그 안에 빠져서 기꺼이 슬퍼하거나 괴롭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 선택은 ..그 헛된 영상을 계속 만들어가면서 스스로 빠질 것인가 , 아니면 ,있는 그대로 보면서 그 소멸을 곧 볼 것인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만약 그 영상에 빠지기를 선택했다면..그것은 본인이 즐기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다. 분명하다.
그렇지 않은가?
깨어있으면 그 영상이 나타날 때 선택할 수 있다. 강아지가 되어서 그 영상을 따라갈 것인지..
그 영상을 제 삼자가 되어 바라보고 ..사라지는 것도 바라볼 것인지를.
영상은 추억은 나를 괴롭힐 힘이 없다.
영상과 추억이 나를 괴롭히려면 ..그 빈 영상이 떠오를 때 직접 그 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일인 다역의 연극을 해야 한다.
싫다면서 왜 기꺼이 힘들게 연극까지 하면서 괴로움을 반복해서 겪는가.
나의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주인으로서의 삶은 순간 순간 늘 깨어 있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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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을 센다. 호흡을 세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무의식에 박힐 만큼 호흡을 센다.
들이켜고 내뱉는 숨. 자동이다.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숨은 저절로 쉬어지고 있다. 심지어 깊은 잠을 잘 때에도...
그러니까 호흡을 조절할 필요가 없다. 조절해선 안된다.
다만 호흡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호흡을 들이쉬고 내뱉거든
내뱉는 숨에서 하나 하고 세어서 열까지 센다. 들이켜는 숨에서 세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내뱉는 숨에서 하나 하고 센다.
열에 이르면 다시 하나로 돌아가서 센다.
아침에 눈을 떠서 호흡을 세는 첫 숨부터, 눈을 감고 잠을 자는 마지막 숨까지 모두 알아채도록!!!
숨을 세는 마음은 떠오른 생각을 쫒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고요하다.
나중에는 떠오르는 생각들이 거의 없다. 자동으로 일으켜지는 생각이 거의 없게 된다.
오줌이 마렵거나 배가 고프거나 춥거나 덥거나 하는 생각 이외의 떠오르는 생각은 없다.
마음은 맑아서 허공처럼 된다.
허공처럼 되는 것도 망상이다. 그것도 역시 바라본다.
마음이 무엇을 짓던 그 마음을 바라보고 지켜본다. 그리고 호흡을 센다.
마음은 호흡에 딱 붙어있으므로..
마음에 무엇이 떠오르던 동일화되지 않는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던 마음은 습관처럼 호흡만 세고 있다.
떠오른 생각에 참견할 마음이 없으므로..(마음은 호흡세느라 바쁘다)
그 떠오른 생각은 곧 사라진다. 그 사라진 마음도 바라본다.
하루 종일 그 마음을 바라보며 호흡을 센다.
우리는 몸은 드러누워 쉬지만..마음 쉬는 법은 모른다.
기껏 테레비나 영화를 보면서..자신의 치성한 현실의 고뇌로부터 도피해서 남의 현실속에 잠시 빠지는 것이다.
그것도 돈을 주고서...시간을 들여서...어느 공간을 찾아가서...참 번거롭다.
상상의 현실속에 빠지는 동안은 내 현실을 잊을 수가 있다. 하지만..그 마음은
영화속의 현실에 빠지느라고 지쳐있다. 마음은 쉬지 못했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은 오히려 탐진치와 사랑 미움등이 치성하게 일어난다.
영화가 끝나면 현실은 그대로다. 피곤한 몸과 , 현실에 지쳐있는 마음도, 복잡한 현실도 그대로다.
마음은 이렇게 쉴 수가 있다. 간단하게 호흡을 세면서...
잠시 시간을 내어 자기 자신의 몸의 호흡을 지켜보며 센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하나에서 열까지..
마음은 깨끗이 세탁해서 다림질 된 흰 옷처럼
망상도 ..잡념도 없이 하루 종일 명료하게 깨어있다.
그 맑은 의식은 행복이 샘솟듯 솟아오른다.
그 행복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본래 우리에게 있었던 행복이다. 늘 ..언제나..
자기 자신의 호흡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시간도 돈도 안든다. 복잡하지도 않다.. 세금도 안낸다. 어디로 갈 필요도 없다.
언제나 자신의 호흡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려고 하기만 한다면....
이제 호흡을 세다가 마음이 가라앉으면 기쁨이 자각되고..
그 기쁨을 또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호흡을 센다.
마음에 무엇이 떠오르던 그것을 제 삼자가 되어 구경꾼이 되어 , 관찰자가 되어 바라본다.
떠오른 것은 곧 사라진다.
미묘하고 고요한 기쁨이 일면 그 기쁨이 좋아서 탐착한다면..그 마음은 강아지가 되어 그 기쁨과 동일화 되었다.
그럼 거기서 선정은 끝나버린다. 그 기쁨 또한 생각일 뿐이다. 마음일 뿐이다.
마음은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던 그가 하자는 대로 둔다. 이것이 마음의 절대자유의지이다.
자신을 옥죄는 선택도.. 자신을 윤회로부터 벗어난 성자가 되는 선택도 지금 이 마음의 의지에 달려있다.
만약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쁨을 받아들여 빠져서 자신과 동일화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 기쁨은 사라진다.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더욱 더 잔잔해진다.
마음은 더욱 고요해지고 더욱 평화로와진다.
이제
그 마음에서 아주 강력한 평화와 행복이 밀려온다.
이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이다.
너무나 행복해서 견딜 수가 없을만큼 큰 평화와 행복이 밀려닥친다.
마치 홍수와도 같이...집채같은 파도처럼..짙고 짙은 행복과 평화에 빠진다.
역시 호흡을 바라본다. 그 행복과 평화를 또 바라본다.
그것과 동일화 하고 거기에 집착한다면 선정은 거기서 끝난다. 더이상은 나아가지 못한다.
만약 여기서 머무르고 싶다면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를 수 있다.
위로와 사랑이 필요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 자신의 사랑의 배고픔과 공허 슬픔을 말끔히 치유할 수 있다.
짙고 짙은 행복과 평화를 얻는데까지 가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 머무른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모아서 호흡을 세고 선정에 들어 언제나 이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강력한 행복과 평화를 맛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도문(道門)에 들어
기쁨과 행복과 평화에 목매기 때문에....이것과 하나되기만을 바라고..떠나지 않는다. 머물러 있는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공부를 마친다.
그 행복과 기쁨에도 머물지 않고 이제 지켜볼 수 있을만큼 성숙해지면
그 행복과 기쁨도 역시 지켜본다. 마음은 호흡만 세고 있다.
그 강력한 행복과 기쁨도 붙잡지 않으면 .. 역시 흘러가버린다.
마음이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한 경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 마음을 계속 지켜보면
마음은 더욱더 맑아지고 깊어지고 고요해진다.
그 마음은
마음에 무엇이 떠오르던 그것과 자신을 동일화하지 않는 힘을 지니게 된다.
마음에 무엇이 떠오르던 그것을 지켜볼 수가 있다.
이제 마음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던 그 생각에 치우치거나 동일화하거나 하지 않는 평정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 힘은 너무도 고요하고 강력해서 깊은 안정감을 가져온다.
이 깊은 안정감은 옆에서 불이 나던.. 사고가 나던.. 패싸움이 벌어지던
흔들림 없이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가 있게 된다.
놀라지도 허둥대지도 않는다.
마음은 선정에 나와서도 깊은 고요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침착하고 고요하고 치밀하고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다.
실수는 하기 힘들어진다. 모든 것은 원했던 대로 의도대로 실수 없이 행해진다.
이제 눈을 감고 선정에 들면 약한 행복감의 상태를 지나 깊고 깊은 행복감의 상태를 지나 깊은 안정감의 상태에 이른다.
이 깊은 안정감의 상태에도 머물면 역시 공부는 여기서 끝난다.
그것도 역시 바라보아야 한다.
머물지 않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안정감에도 머물지 않고 동일화되지 않은 마음은 더욱더 깊어지고 더욱더 고요해진다.
이제 호흡은 일일이 하나 하나 세지 않아도 마음은 언제나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자동으로 호흡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하나 하나 흘러가는 것을 다 볼 수 가 있다.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흘러가는 마음이 있을만큼 부주의할 수가 없다.
하물며 그 일으킨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빠지기 힘들다.
만약에 그 생각에 빠졌다면 스스로 원해서 빠진 것이다.
그것을 스스로 자각한다.
마음의 노예였었는데...이제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수 있게 된다.
언제나 ..어디서나..애쓰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마음을 스스로 보고 있다.
뛰든 걷든 노래를 하든 밥을 먹든...
마음은 그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호흡을 바라보고 있다.
진리를 찾기 위해 세상 끝 히말라야까지 가지 않고
자기 코끝에 있는 호흡을 지켜보기만 하면
자기 몸과 마음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도는 저 멀리 있지 않다.
저 멀리 있다는 생각에 속지 않는다면
도는 행해지기도 쉽고 이루기도 쉽다.
돈도 안든다.
복잡한 것을 즐기고 , 번잡하고 감각에 깊이 물들어 기쁘고 요란하고 정신없이 산만한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참된 평화와 행복을 가르쳐주기 힘들다.
그가 그것에서 지쳐서..나가 떨어져서 그것을 괴로와 하면서 울고 ..슬퍼하면서
그 때는 좋았는데 이제 힘들어서..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때..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방법을 모를때..
그는 새로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호흡을 세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서...
부처님께서도 이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으셨고, 깨달으신 후에도 바로 이 방법으로 보임까지 하셨다.
돈도 시간도 경비도 공간도 필요없다.
이미 콧구멍은 있고..몸은 숨을 자동으로 쉰다.
하는 것은 오직 그 호흡을 세는 것이다.
호흡을 조작하지 않고 세기만 하는 것이다.
잠시 잊었으면 호흡을 세는 것을 기억할 '때 다시 호흡을 센다.
이렇게 계속 세면..호흡세기가 마음의 식에 저장되고..
그래도 계속하면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호흡을 계속 세면..다시 태어나도 아뢰야식에 저장된 기억대로
태어나면서부터 호흡을 셀 수 있다. 호흡을 인식한다. 호흡을 지켜본다.
선정에 들어 제 일선정부터 제 사선정에 이르기까지 저절로 진행될 수 있다.
다만 동일화 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수행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도 아뢰야식에 저장되기 때문에...
호흡세기는 윤회를 끊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호흡을 하기 때문에 장애인도 할 수 있고 노인도 할 수가 있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할 수가 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도 할 수가 있다.
죽은 자는 할 수가 없다. 그는 호흡을 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살아있으면 감옥에서든 식당에서든 화장실에서든 언제든 원하면 호흡을 셀 수가 있다.
목욕을 하면서도 버스에 타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호흡을 셀 수 있다.
호흡을 세는 동안은 마음이 청소되는 시간이다.
모든 번뇌는 이 마음에 들러붙기 힘들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온갖 마음들이 용솟음치면서 올라오면 무심히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사라진다.
자신이 붙들지만 않으면..
사라지는 것도 바라본다.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구체적인 수행법을 알고 싶었는데 갈증이 해소되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