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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강수연,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배우 강수연이 1989년 폐막된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수상했다.
작품상,심사위원특별상,
주연여우상,주연남우상 등 본상 4개
부문 중 하나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따낸 강수연은 1987년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이어 두 번째로 권위 있는 국제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강수연은 시상식에서 분홍빛이
도는 한복을 입고 나와
“영화 속에서 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현지 기자들의
표현대로 독특한 동양미를 과시했다.
➡️ 2011년] 한국 미술 시장 이끈 '인사동 터줏대감' 김창실 선화랑 대표 별세
👉🏿 화랑협 사상 첫 협회葬으로 1957년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결혼한 후 부산으로 간 새댁은 약국 개업 기념으로 평소 좋아하던 도상봉의 10호짜리 '라일락'을 샀다. 틈만 나면 전시장을 돌아보고 생활비를 아껴 그림을 모았다. 1977년 4월, 서울 인사동에 화랑을 열고 수집가에서 화랑 주인으로 변신했다. "소녀 적부터 그림과 함께 생활하며 얻은 즐거움을 화가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었다"는 것이 당시 밝힌 창립 이유였다.
'인사동 터줏대감' 김창실(76) 선(選)화랑 대표가 18일 오후 7시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황해도 황주 출신인 그는 그림 수집이 취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지만 부모님 권유로 약대에 갔다. 그는 화랑 개관 당시 "장사는 잘 모르니 되도록 화가들의 대여 전시장으로 이끌어볼 생각"이라고 했지만 이후 특유의 '뚝심'을 발휘해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줬다.
개관기념전인 '김동수·송수남·하태진'전으로 시작해 30여년간 400여회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마르크 샤갈전'(2003년),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서거 1주년 기념전'(2005년), 이탈리아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전'(2007년) 등 굵직한 해외 작가들 전시도 치렀다. 1979~ 1992년 미술교양지 '선(選) 미술'을 냈고 1984년 상업화랑으로는 처음으로 유망 작가들을 지원하는 '선 미술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했다. 한국화랑협회장을 두 차례 지냈고 2009년엔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화랑 경영자로는 처음으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은 남편 이호현(동북관세법인 고문)씨와 아들 성훈(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경훈(이림법률사무소 변호사)씨, 딸 명진(갤러리 선 컨템포러리 대표)씨가 있다.
➡️2004년 봉산탈춤 보유자 윤옥씨 별세
➡️2004년 연쇄살인범 ‘묻지마 살인’ 유영철 검거
➡️ 2004년 영생교주 조희성씨 사망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영생교 승리재단 총재 조희성(曺熙星·72)씨가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증세가 악화돼 19일 오전 사망했다. 조씨는 지난 90년 교단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신도 6명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2003년 8월 구속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한편 항소심 과정에서 조씨는 “6·25 당시 북한군에 잡혀 총살을 당했지만 시체더미에서 깨어난 뒤 삶과 죽음에 대해 연구를 정진한 끝에 지난 80년 불치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생겨났다”고 주장한 바 있다.
➡️ 2002년 한국, 이탈리아 상대로 2대1 승, 꿈의 8강 달성
👉🏿그것은 기적이었다. ‘사상 첫 16강’에 만족하지 않고 열띤 응원을 보낸 온 국민과 23명의 축구대표선수들이 함께 만든 드라마였다. 한국이 안정환의 연장 골든골로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에 짜릿한 2대1 역전승을 거두며 2002 한·일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 8강 진출을 호언장담했던 일본은 빗속에 열린 16강전에서 터키에 일격을 당하며 울었다.
18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이탈리아의 16강전에서 한국은 설기현의 동점골에 이어 연장 후반 12분에 터진 안정환의 골든골로 이탈리아를 2대1로 꺾었다.
한국은 출발이 좋지 않았다. 전반 4분 얻은 페널티킥 득점 기회를 날린 것. 안정환의 오른발 슛이 너무 약했고, 방향을 잡은 상대 GK 잔루이지 부폰이 몸을 날려 막아냈다.
선제골을 내준 것은 전반 18분. 토티가 왼쪽에서 코너킥을 올리는 순간, 골문 앞에서 기다리던 비에리가 한국 수비를 밀쳐내며 헤딩 슛, 왼쪽 네트를 흔들었다.
한국은 후반 A매치(국가대표간 경기) 100회 출장을 기록한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를 투입하며 반격을 폈다. 극적인 동점골은 후반 43분 터졌다. 황선홍이 오른쪽에서 올려준 공이 상대 수비 파누치의 몸에 맞고 튕기는 순간, 설기현이 왼발 슛으로
상대 네트에 꽂아넣은 것.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것은 연장 후반 12분. 이영표가 좌중간에서 올린 공을 안정환이 달려들며 헤딩 슛, 천금의 골든골을 뽑아냈다. 전반 페널티킥
실수를 깨끗이 씻어낸 멋진 골이었다.
앞서 일본 미야기에서 열린 16강전에서는 터키가 전반 12분 터진 위미트 다발라의 헤딩골을 끝까지 지키며 일본을 1대0으로 제압, 7번째 8강 티켓을 손에 넣었다.
➡️2002년 5천억원 규모의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설립 발표
➡️ 1999년 1960년대 농구스타 박신자,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 에 헌액
👉🏿1960년대 한국 여자농구 최고스타였던 박신자씨가 1999년 6월 18일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박신자씨는 세계 여자농구 107년 사상 위대한 선수 및 지도자 25명에 포함되어 사진과 국제대회에서 획득한 메달 등이 영구전시되는 이같은 영예를 안았다. 명예의 전당측은 박씨가 1960년대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아계라고 말했다. 박씨는 1963년 제4회 페루세계선수권대회에서 유일한 동양선수로 베스트5로 선정됐고, 1967년 제5회 체코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며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준우승의 주역이 됐다.
➡️ 1998년 원로배우 김진규씨 별세
👉🏿영화배우 김진규씨는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까지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영화를 이끈 톱스타였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의 권유로 `피아골`에서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 데뷔, 단번에 스타로 발돋움했다. 1956년 사극 `옥단춘` 이후 `로맨스 빠빠(1960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새 엄마(1963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김씨가 성실하게 일에만 매달리면서도 가족들의 불행을 막지 못하는 맏이 철호 역을 맡아 열연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년)`은 한국영화 사상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199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제105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신임 IOC위원으로 임명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 주사파 발언
➡️1990년 윤보선 전(前) 대통령 별세
➡️ 1989년 차범근, 서독에서 축구선수 은퇴
👉🏿차범근은 서독 프로팀인 다름슈타트클럽에 단신으로 건너가 테스트를 받은 후 1979년 7월 12일 프랑크푸르트팀과 입단계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인 서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입단 첫 해 12골을 터뜨리며 소속팀을 UEFA(유럽축구연맹)컵 우승팀으로 끌어올리며 ‘갈색 폭격기’로 자리잡았다. 그의 서독생활은 1983년 7월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진가를 더했다. 이적료 1백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에 연봉 52만6천 마르크(1억6천만원)도 동양인 선수에게는 엄청난 액수였지만, 서독 축구팬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1989년 강수연,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1986년 침몰한 타이타닉호 수중촬영에 성공
➡️1983년 중국기 납치범 첫 공판
➡️ 1983년 중국 전인대, 국가주석에 이선념, 국가중앙군사위주석에 등소평 선출
👉🏿1983년 6월 18일 중공 전인대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에 등소평이 선출됐다. 등소평은 젊어서는 모택동을 지지했으나 1978년 3차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모택동을 비판하고 경제의 현대화 건설·사상 해방·문호 개방책이라는 대전환을 가지며, 1979년 미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3년 제6기 전인대 이후 등소평은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후 등소평은 1989년 6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11월 공산당 13기 5중전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장쩌민 총서기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1983년 일본 중의원 해산
➡️1983년 중미 4국 긴급 정상회담
➡️1982년 이디오피아 대 소말리아
침공으로 영토분쟁 재연
➡️1982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사망
➡️1981년 폴란드 공산당, 동구권 최초의
직접 비밀투표서 카니아 제1서기 당선
➡️1976년 코마네치,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1973년 미국,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지지 천명
➡️1970년 경북 고령 금산재서 버스 추락.
24명 사망, 44명 중경상
➡️1968년 인텔 창업
➡️1967년 박춘우 유괴살인 사건 발생
➡️1965년 송추에 무장간첩침투
➡️1963년 민주당 창당(총재 박순천)
➡️1963년 한미경제위원회(ECC) 신설협정 체결
➡️1962년 페루 쿠데타, 대통령 체포
➡️1956년 티토, 네루, 나세르 3자회담
(적극적 평화공존 제창)
➡️1955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정상, 제네바회담
➡️ 1953년 이승만, 반공포로 전격 석방
👉🏿<1> 1953년 6월8일, 유엔군ㆍ공산군 양측간의 포로송환문제가 2년 만에 타결됐다. 조기 종전을 원한 유엔군측의 대폭적인 양보가 돌파구였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2개월 내에 맞바꾸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체코ㆍ폴란드ㆍ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4개월동안 이들의 귀환을 설득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정부와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데가 반공포로들이 6개월동안이나 이들의 설득공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2> 6월18일 새벽2시, 미군이 경비중인 부산ㆍ대구ㆍ광주ㆍ논산 등 포로수용소의 전원이 끊기고 철조망이 뚫렸다. 유례가 없는 반공포로들의 대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지만 주민들이 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3만5600여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자유를 찾은 포로가 2만7400여명이나 됐다. 그러나 8000여명은 다시 철조망 신세를 져야했다.
➡️1952년 중석불사건,
국회서 말썽 조사위 구성
➡️1949년 쿠바,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4년 일본 도조(東條)내각 총사퇴
➡️ 1942년 원폭 제조 ‘맨해튼 프로젝트’ 가동
👉🏿독일이 우라늄의 원자핵 분열을 성공시켰다는 소식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려지자, 실험실·제조시설 등을 비밀리에 건설하기 위해 육군부가 실무책임을 떠맡았다. 1942년 6월 18일, 이를 위한 공병대가 발족됐고 당시의 이름은 ‘대용품개발연구소’ 였으나 8월에 ‘맨해튼 관구’ 로 바꿨다. 이른바 ‘맨해튼 계획’ 이 시작된 것이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폭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맨해튼 프로젝트’ 도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됐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 1928년 아멜리아 에어하트, 여성최초로 대서양횡단 비행에 참가
👉🏿미국의 여성비행가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1928년 6월 18일 여성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참여했다. 그녀가 탄 `우정호`는 미국 뉴퍼들랜드를 이륙해 20시간 40분 만에 영국 웨일즈 파리항에 도착했다. 신문들은 그녀를 `레이디 린디`(여성 린드버그)로 불렀다. 이번 비행에 자신이 조종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한 에어하트는 마침내 1932년 5월 20일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해 꿈을 이뤘다. 에어하트는 이후에도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미국 대륙을 단독 횡단했고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까지 논스톱 비행했다.
➡️1925년 히틀러 ‘나의 투쟁’ 출간
➡️1921년 미국 최초의 지구궤도를 돈
우주비행사 글렌 출생
➡️1919년 경성 남산서 일본인의 신궁 세움
➡️1918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출생
➡️1907년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청년회원 등
2000여명 대안문 앞에서 양위 반대시위
➡️1907년 이인직 친일지
`대한신문` 창간(만세보 인수)
➡️1907년 내각전원,
고종의 양위를 강권(제3차 어전회의)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 1815년 나폴레옹,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1814년 3월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유럽 연합군에 패해 엘바섬으로 유배됐된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고 황제에 즉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연합군과 나폴레옹이 벨기에의 워털루에 진을 쳤다. 웰링턴이 이끄는 20만 연합군에 나폴레옹군도 12만 5천명의 병력으로 맞섰지만 전투에서 패했다. 나폴레옹은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죽었다. 워털루 전투는 유럽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체제는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완고한 복고체제를 유럽 전역에 다시 확산시켰다.
➡️ 68년 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 즉위
👉🏿68년 6월 9일 5대 황제 네로가 자살하자 로마제국 원로원이 68년 6월 18일 에스파니아 속주 총독 갈바를 제6대 로마제국 황제(제일인자)로 인정했다. 갈바는 공직에 나설 자격이 있는 30세부터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갈리아(프랑스)의 아퀴타니아 속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서기 60년에는 황제 속주인 에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8년동안 속주총독으로 근무했으나 한번도 속주민에게 고발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