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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러라(룻2:1-13)-2024.5.12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후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위에 은혜’를 덧입고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장16절을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고백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말입니다(요1:14). ‘은혜 위에 은혜’라는 고백은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대체됨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으로 대체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급되는 은혜가 고갈됨이 없이 공급된다는 말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가 한번도 중단됨이 없이 흘러넘친다는 말입니다. 은혜위에 은혜가 계속해서 쌓인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어제 받은 은혜는 어제 족하고, 오늘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사는 것이며, 내일 또 다시 부어질 은혜로 내일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은혜위에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룻기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야기입니다. 시대적인 배경은 사사들이 치리하는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영적으로 많이 혼탁했던 시대이지요. 왜냐면 왕이 없으므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삿21:25). 다시 말해 각각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시대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무대는 베들레헴이요, 스토리는 엘리멜렉이라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들레헴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떡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떡을 찾아서 모압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년 만에 남자들이 다 죽음을 맞게 됩니다. 엘리멜렉이라는 남편이 죽고,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이 죽은 것이지요. 단순히 그 집안에 남자들의 수명이 짧아서 일찍 죽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억지스런 주장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지요.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억지로 추측할 이유는 없습니다. 믿음의 땅을 떠났기 때문에 일찍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그런 추측 말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된 나오미는 더 이상 모압 땅에서 살아야 할 명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갈등이 심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고국에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양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1:6). 그래서 과부 된 두 며느리와 함께 세 과부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오던 중에 나오미의 권고로 첫째 며느리는 모압에 주저앉고 둘째 며느리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데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다만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는 나오미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녀는 어떤 수모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베들레헴에 돌아오자 주민들의 반응은 냉랭하고 싸늘했습니다. 주민들이 떠들면서 입방아를 찧었던 것이지요(1:19). 나오미는 모든 것을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를 치셔서 괴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하나님의 징계로 얻어맞아 폐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치셨다는 말이지요(1:13).
그런데 나오미도 나오미지만 며느리 룻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젊은 여인이 과부가 되어 과부 시어머니를 따라 이방 땅 베들레헴으로 온다는 것은 보통 여인은 아닌 듯 싶습니다. 생소한 이방나라에 와서 과부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과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생의 모험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룻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굳게 결심했습니다(1:18). 하지만 두 과부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부딪혀야 하는 문제는 상상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당장 의지할 곳도 없고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과부들을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은혜의 방편을 마련해두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녀들에게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총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두 과부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위에 은혜’를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은혜위에 은혜러라’고 정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은혜를 아는 자가 있고, 은혜를 모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보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1) 은혜 받을 만한 때에 받아야합니다(1:22절)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은혜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은혜의 때가 아닌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창조이래로 하나님이 은혜를 완전히 중단하신 경우는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창세기7장에서 노아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도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는 은혜의 창문을 열어놓고 계셨던 것이지요(창7:13). 또한 창세기19장에서 소돔성을 멸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은혜의 창문을 열고 계셨습니다.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창19:16). 이는 한번도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된 적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날은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날이 하나님의 은혜의 날인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은혜 받을 만한 때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6장2절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말입니다. 은혜도 받을만한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은혜 받을만한 때가 창조이래로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은혜 받을만한 날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을만한 때와 구원의 날을 동일한 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받을만한 때가 물리적으로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각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에게 어떤 날보다는 어떤 날이 은혜받기에 좋은 날이 될 수 있습니다. 혹은 어떤 달보다는 어떤 달이 은혜받기에 좋은 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해가 어떤 해보다 은혜받기에 좋은 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나오미와 룻은 은혜받기에 좋은 타이밍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은혜 받을만한 때 말입니다.
룻기1장22절을 보십시오. 나오미와 룻이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은혜 받을만한 때에 돌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추수기는 어디나 여유가 있고 풍요롭습니다. 하지만 추수기가 아니었다면 상당히 어려운 시간일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도 선조들로부터 보릿고개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가을인 9월 아니면 10월에 벼를 추수한 뒤 보리를 심는 이모작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리는 제대로 맺힐 때까지 딜레이가 좀 긴 작물이라는 것인데 이로 인해 추수한 쌀이 바닥나는 5월과 6월에는 아직 보리가 제대로 여물지 않아 보리를 수확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쌀도 보리도 없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허기를 채울 작물을 찾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칡뿌리나 풀뿌리를 캐서 죽을 쒀서 먹거나, 나무껍질 가운데에서도 주로 소나무 껍질을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소나무 껍질을 송피라고 불렀습니다. 게다가 진흙까지도 보릿고개의 먹거리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나무껍질이나 흙 모두 인간은 소화할 수 없는 성분이 대부분이라서 먹을 땐 어떻게 먹었는데, 나중에는 탈이 나고 심각한 변비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이지요.
다행스럽게도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가 추수를 시작할 때였음으로 가장 좋은 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혜받기 가장 좋은 때였던 것이지요. 믿음의 눈을 열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때는 항상 가장 좋은 때입니다. 최상의 때요, 최고의 때인 것이지요. 이는 은혜받기 좋은 때라는 말입니다. 추수가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기만 하면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었거든요. 실제로 두 과부들은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어야 했던 것이지요. 이삭의 은혜로 살아야 했던 거예요. 참으로 그 은혜는 크고 놀라운 은혜였던 것이지요.
룻기서 2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합니다. 먼저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은 모두 다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나오미, 룻, 보아스 말입니다. 나오미는 은혜를 소개하는 사람이요, 룻은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이며, 보아스는 은혜를 공급하는 사람입니다. 역할만 다르지 모두 다 은혜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은혜를 유통시킵니다. 은혜를 전염시킵니다. 구속사로 볼 때에 보아스는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룻은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요, 나오미는 성도와 그리스도를 연결시켜주는 중보자로 등장합니다.
먼저 은혜를 사모하는 룻이 나오미에게 요청합니다(2절). 나로 밭에 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은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만일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이삭 줍는 것을 은혜로 여긴 것이지요. 이삭 줍는 것마저도 자기의 수고로움으로 보지 않고 누군가 자기에게 베풀어주는 은혜로 본 것입니다. 룻의 생각이 옳은 것입니다. 그녀가 아무리 노동력이 강할지라도 누군가 그녀에게 이삭 줍는 밭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한 톨의 식량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녀는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여호와를 아는 신앙에 눈이 떠있었던 것이지요.
그 말을 들은 나오미가 두말하지 않고 허락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은혜 구하는 자에게 은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도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면 은혜 받을만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본문1절에서는 이미 룻이 은혜 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아스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한번도 룻에게 이 사람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입니다. 그러면서도 유력자입니다. 유력자는 상당한 부를 가진 자요,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보아스라는 이름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낭실 앞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우편의 이름이 야긴이요, 좌편의 이름이 보아스였습니다(왕상7:21). 보아스라는 이름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그가 유력자라는 뜻이지요. 룻은 보아스에 대한 어떤 정보도 모르지만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줍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3절에는 ‘우연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연히’라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우연히’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인 것이지요.
룻이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습니다. 그런데 그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룻이 이삭을 줍는데 ‘베는 자를 따라’ 이삭을 줍는 것입니다(3절). 이는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왜냐면 추수하는 동안에는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추수꾼이 추수를 다 끝내고 난 뒤에야 이삭을 주우러 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룻은 ‘베는 자’들 뒤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줍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베는 자’들이 어떤 제제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보아스가 추수하는 밭에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추수꾼들에게 묻습니다. 뒤에 따라 다니는 소녀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는 자들은 이미 이 소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잘못하면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그들에게 덧입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 은혜위에 또 다른 은혜가 입혀집니다. 그 은혜는 밭주인의 은혜였습니다. 베는 자들의 말을 들은 보아스는 또 다른 은혜를 룻에게 유통합니다.
(2)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합니다(8-9절)
만일 은혜가 아니라면 밭주인이 와서 베는 자들을 책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한 톨의 곡식이라도 더 거두어들이고 싶은 것이 주인의 욕망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베는 자들의 정보를 들은 밭주인 보아스는 책망은 고사하고 은혜를 덧입혀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를 공급하는 자에게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인간에게 다양한 은혜를 공급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은혜주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말입니다. 은혜는 하늘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보아스는 당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보좌를 예표로 보여준 것입니다. 보아스의 추수 밭은 당시 룻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자리였던 것이지요. 보아스의 추수 밭은 하나님이 룻이 받을 은혜를 예비해두신 장소였거든요.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를 유통하기 위해 보아스를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광야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에서 나그네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은혜는 오아시스입니다. 광야에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마실 물만 있으면 됩니다. 물을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오아시스입니다.
룻은 그곳에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친히 룻에게 자기가 베풀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합니다. 그 은혜는 그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은혜였습니다. 8절과9절을 보십시오. 보아스는 그녀에게 베풀 은혜를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다른 집의 밭으로 다니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는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워도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말로 다른 집에 가서 이삭을 줍다가 어려움 당하지 말고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우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주워서 삶을 연명하는 자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목이 마르거든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이는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은혜입니다. 물이 귀한 지역임을 감안할 때 이삭을 주우면서 목마름을 해갈시켜주는 은혜야 말로 더없이 귀한 은혜입니다. 마치 자기 집에 일군이나 되는 것처럼 배려를 해주는 은혜입니다. 세상말로 자기 집 일군들이 누리는 혜택을 다 누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더욱 귀한 은혜는 ‘어떤 소년들도 이 소녀를 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안정적인 일터가 생겼습니다. 일터에서 일군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신변보장까지 받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위에 은혜인 셈이지요.
이 은혜가 사람이 의도적으로 개입해서 만든 은혜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도 개입한 적이 없고, 누구와도 상의한 적이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은혜가운데 가장 귀한 은혜는 사람을 붙이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사람을 붙이셔서 당신의 은혜를 공급해주십니다. 은혜를 흘러가게 하시는 것이지요. 보아스는 룻에게 줄 수 있는 은혜의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그는 기업 무를 자의 가장 유력한 사람입니다. 물론 보아스보다 빠른 기업 무를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그런 사람들보다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고, 그는 기업 무를 자의 은혜를 거절하지 않고 베풀었던 사람입니다. 룻에게 있어 보아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최고의 공급자였던 것이지요. 이런 사람을 붙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큰 은혜입니다. 때문에 잊지 마십시오. 보아스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가 보아스를 통해서 공급되었을 뿐입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하고 전달하는 통로요, 은혜를 유통시키는 도구입니다. 은혜의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은혜의 과정이나 은혜의 결국도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최고의 은혜요, 최상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당신의 자녀에게 은혜위에 은혜를 덧입혀주시는 분이십니다.
(3) 은혜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10-13절)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요? 은혜의 가치를 아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은혜의 가치를 아는 자는 은혜를 사모합니다. 은혜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은혜를 사모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은 모두 다 은혜의 가치를 아는 자들입니다. 나오미도 하나님 은혜의 가치를 잘 아는 자요, 보아스도 은혜의 가치를 잘 아는 자입니다. 룻도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였습니다. 비록 그녀가 언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소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분명히 하나님 은혜를 아는 자였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가치를 믿는 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주변사람들에게 덕을 세워야 하고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모압 며느리 룻이 볼 때 나오미의 믿음이 신통치 않았다면 감히 그녀를 좇아 베들레헴까지 왔겠습니까? 혹은 나오미의 믿음이 덕을 세우지 못했다면 그녀가 믿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최소한 나오미와 룻 사이에는 우리가 말하는 고부간의 갈등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오미의 믿음을 통해 내 믿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 믿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 믿음인지, 혹은 본이 되는 믿음인지를 말입니다. 결정적으로 룻의 믿음이 좋아 보이는 것은 나오미의 믿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말을 들은 룻은 은혜에 감격을 합니다. 그녀는 은혜의 가치를 아는 여인이요, 은혜를 사모하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베푼 은혜를 보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은혜는 아주 파격적인 은혜였던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녀는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먼저 자기 신분의 초라함을 고백합니다. 자기는 이방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앞에서 이방여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영적인 고백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선민인데 반하여 자기는 이방여인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은혜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비천한 여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녀는 은혜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은혜 받을만한 사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지금 너무나 과분한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들려줍니다(11절). 아마도 그 소문은 나오미로부터 나왔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침묵하면 절대 알 수 없는 내용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나오미가 룻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소문은 보아스에게까지 들려진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녀를 축복합니다(12절). 여호와께서 룻의 행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행한 대로 보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룻에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하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지금 되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이는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시오,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자기는 하나님의 날개역할을 하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으로 이삭을 주우러 온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날개역할을 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이 상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12절). 이로 볼 때 보아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실 12절의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고백한 것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11장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주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요, 상주시는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보아스는 룻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생색을 내지도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어떤 조건도 달지 않았습니다. 모든 시선을 하나님을 향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아스를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런 보아스를 향해 룻이 다시한번 고백합니다. 당신이 나같이 하찮고 볼품없는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시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13절하). 그러면서 그녀는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13절상).
물론 이 은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도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하여 공급하십니다. 은혜를 유통하는 자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룻은 당신을 통해 은혜입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13절상).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주변에 있는 사람을 통해, 혹은 사물이나 당신이 피조한 모든 도구를 통해 베푸시는 분이시지요. 다만 은혜의 가치를 아는 자에게 은혜를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를 아는 보아스에게 당신의 은혜를 맡기시고, 은혜를 사모하는 룻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서도 은혜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살아가는 자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가치를 아는 자에게 달린 것입니다. 은혜의 가치를 아는 여부에 따라서 은혜를 누릴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룻은 하나님 은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이요, 은혜를 사모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룻을 은혜 받을만한 땅 베들레헴으로 데려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은혜 받을만한 때에 맞추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강가로 나가게 하시고 은혜를 공급하는 자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은혜를 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알게 하심도 은혜요, 보게 하심도 은혜이며, 누리게 하심도 은혜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앙이 얕은 자는 룻이 이삭을 주운 것만 은혜로 여깁니다. 혹은 보아스라는 유력자를 만난 것만 은혜로 여깁니다. 이른바 눈에 보이는 것, 혹은 손에 잡힌 것이나 얻은 것만 은혜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고 오묘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보다 훨씬 앞선 은혜가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이런 모든 과정 속에 개입하셔서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가 성숙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아니하시면 아무 것도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가장 천하고 연약한 자를 택하셔서 당신의 은혜를 입혀주십니다. 은혜받기 가장 좋은 때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은혜 받을 장소로 나오게 하십니다. 은혜를 유통하는 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양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모압 여인 룻이 받은 은혜의 때는 추수할 때요, 은혜 받을 장소는 보아스의 밭이었으며, 은혜를 유통할 자는 보아스였습니다. 당시 그녀가 받은 가장 시급한 은혜는 가시적으로 볼 때는 이삭을 줍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에서 마음 놓고 이삭을 주워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은혜야말로 두말할 것 없는 소중한 은혜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기쁘시게 하시는 은혜입니다(13절). 눈에 보이는 은혜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은혜가 훨씬 더 크고 소중한 것입니다. 사실 룻은 모압 땅을 떠나온 이래로 이처럼 따뜻한 위로와 인정을 받아 본 적이 한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은혜는 눈에 보이는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돈으로 집을 살 수 있을지라도 가정을 살수는 없고,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을 살 수는 없으며, 돈으로 시계를 살 수 있을지라도 시간을 살수 없고, 책을 살 수 있지만 지혜를 살수 없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은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없어서는 안 될 가장 크고 위대한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결과물이 보이는 은혜일뿐입니다.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은혜에 집착하지 말고 보이지는 않아도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은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다. 룻이 은혜의 주인공이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여인 룻을 만지고 만지셔서 은혜의 보좌로 나오게 하시고,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하고 유통시키는 엑스트라인 셈이지요.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 이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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