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예술 -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햇수는 고작 29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인류의 역사가 피로 얼룩져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막심한 폐해를 경험한 인류는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철썩같은 다짐을 했건만,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을 헤매는’ 인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전쟁의 잔혹성을 겪으며 “이제 예술에 관한 한 자명한 것이 없어졌다는 것이 자명해졌다.”라고 한탄했는데,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 역시 전쟁에 대한 분노와 연민을 화폭에 담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전쟁 기간 중에 조르주 루오는 저 유명한 <미제레레>(Miserere) 연작을 구상하게 된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Miserere mei, Deus : secundum magnam misericordiam tuam)에서 주제를 가져온 것으로 1번부터 33번까지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내용으로, 34번부터 58번까지는 ‘전쟁’을 주제로 하였다.
그의 연작은 전쟁 그림에서 흔히 찾아지는 군인들의 전투 장면이나 살인 장면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포화의 잿더미 속에 슬퍼하는 사람들과 아버지 곁을 떠나는 아들, 어머니와 사랑의 눈빛을 교환하는 아이, 모욕을 당하거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등으로 되어 있다. 그의 연작은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보다는 인간의 어둡고도 비극적인 실존에 대한 고뇌, 치유와 회복을 향한 그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다.
홉스(Thomas Hobbes)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연상시키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Homo Homini Lupus)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 목격된 주검을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준다. 바닥에 나뒹구는 해골들은 병사들을 절망의 수렁 속으로 초대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인간을 증오한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아버지>는 전쟁터로 끌려가는 부자 작별의 장면을 담은 흑백 판화이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전장으로 나가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훔친다. 아들 곁에 있는 죽음의 사신인 해골은 아들이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비통한 그림이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2017년 듀크 대학교에서 열린 루오의 <미제레레전> 강의에서 그의 작품을 ‘사회적 저항예술’(Social Protest Art)로 부르면서,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에 활력을 불어넣고 표현”한 그의 예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증폭시킨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20세기 판화의 정점인 <미제레레>를 피카소의 ‘게르니카’,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와 함께 대표적인 저항예술로 손꼽으며, 그의 작품은 비록 현재와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 속하지만 그림 속 인물과 감상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도덕적, 정서적 참여를 일으켜 작품 속 투사된 세계의 인물에서 실제 세계 속으로 전이(transference)되는 힘을 지닌다고 보았다.
<미제레레> 연작은 전쟁 동안에 드러난 사회적 불의와 인간의 비참함, 죄악 된 속성을 노출함으로써 세상에 침투한 불의를 폭로하고 거기에 저항한다. 루오 자신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겼던 화가였으며, 자신의 생애를 ‘그림자의 포로’(prisoner of shadows)로 기술했으리만치 희생자들과 약자들의 편에 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루오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그리스도의 수난이었다. <미제레레> 연작의 프롤로그를 “예수 곤욕을 당하시다.”(2)로 열고 에필로그를 “그가 상처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8번)로 장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부조리와 타락은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일어나라 죽은 자들이여”(54번)에서는 여호와께서 에스겔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을 일으키셨듯이(겔 37장) 절망의 자리에서 죽은 자들이 한 명씩 부활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에스겔의 묘사대로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피부가 덮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고전 15:22) 종말론적 비전을 투영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인간의 근본문제를 응시하기 위해 통상적인 방식보다는 전복적인 방식을 동원한 루오의 접근 태도이다. 현실의 비극을 조명하기 위해 루오는 화려한 색채나 고상한 아름다움을 지양하고 칙칙한 색과 꺼리는 이미지를 소환했다. 일반적인 미적 전통에 안주하는 대신 자신을 대안적 범주, 즉 사회적 저항예술에 위치시켰다. 지하 납골당에서나 마주할 수 있을 법한 인간의 처연한 모습은 구원에 목말라하는 군인들과 가족, 전재민(戰災民)을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직시케 한다.
루오는 전쟁 기간에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마음으로 ‘미제레레’에 몰두하였다. 월터스토프는 훼손된 진리에 저항하는 그의 몸짓에서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서 표현된 불의와 고통 및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말년에 루오는 “나는 평생을 ‘황혼’을 그리는데 바쳤다. 이제부터는 ‘새벽’을 그려보고자 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전쟁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고려하면 세상은 아직도 ‘황혼’ 속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언제쯤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까?
첫댓글 위대한 화가 루오의 작품을 감상하며 시편 51편을 담은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성가곡을 감상합니다.
참 오랜만에 마음 깊이 차분해지는 오후시간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