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단상
일기를 쓰다 보니 이런저런
펜pen을 사용하게 되어 망상 한 생각 일으켜본다.
'연필'은 보통 철이 들기전 초등학생 시절에 많이 사용한다.
까만심이 닳으면 칼로써
조심스럽게 나무를 벗겨내고 속살을 다듬어야 한다.
누가 "연필 부인 흑심 품었네" 하고 우스갯소리를 지어냈지만
향냄새가 솔솔 나는 나무 속에
까맣게 숨어 있는 속살은 어쩌면 정말 흑심(?) 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생 때 연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 써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실수를 해도 용납이 된다는 뜻이다.
어쩌다 불량 연필이라도 사면 나무도 잘 깎이질 않고.
심의 질도 좋지 않아 침을 묻혀 꾹꾹 눌러쓰곤 했는데.
서울 편집장 시절에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워 연필로 교정을 보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하여간 연필의 최대 장점은
잘못 쓰인 글씨를 고쳐 쓸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만년필은 쓰기가 참 편하다.
연필처럼 깎을 필요도 없고 또 희미하지도 않다.
연필이나 볼펜처럼 꾹꾹 눌러써야 하는 불편도 없고
잉크만 보충해주면 정말
만 년 동안이라도 쓰일 것같이 술술 잘도 써진다.
그러나
물만 닿으면 글씨가 번져 못 알아보는 단점이 있다.
잉크를 사용하는 펜을 써본 사람은
누구나 잉크를 쏟거나 잉크가 번져 낭패를 당한 경험이 있을 거다.
내 유년 시절에
만년필은 보통 중학생이나 되야 쓸 자격이 됐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부잣집 애들은
벌써 만년필을 자랑하며 다니기도 했다
그것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무엇이든 나이에 맞게 물건도 사용해야 한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연필은 실수를 해도 용서받을수 애들한테 어울리는 것이고
두번 다시 고쳐 쓸 수없는 만년필은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청년부터 써야 맞는 것이다.
나는 철들면서부터 유난히 만년필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입학이나 졸업 선물은 만년필이 단연 으뜸이었다.
그때는
'파카'나 '몽블랑' 같은 외제는 비싸 엄두도 못 내었고
그나마 서민용인 '빠이롯드' 나 '아피스' 등이 인기였다
나도 이런저런 만년필은 사용해 보았으나
늘 가슴에 하얀 별을 간직한
몽블랑 만년필 하나 갖 는게 꿈이었다.
그 꿈은 출가한 후에나 이루어졌다
해인사 학인 시절.
몇 년의 용돈을 모아 그나마 싼 종류인
30만 원대 몽블랑 만년필과 보충용 잉크 한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처음 글을 써보던 감격을 잊지 못한다.
별로 글 쓸 일이 없어도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만 해도
왠지 시상이 절로 떠오를 것 같은 뿌듯한 몽블랑 만년필.
꽁지에 마크처럼 붙어 있는
하얀 별은 상류사회의 상징이려니 했었는데,
몽블랑 산 위의 녹지 않는
만년설을 상징한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그러니까 만 년이 지나도
가슴에서 녹지 않고
강물이 되어 흐르는 글을 써야 하는데
아직 나는 그 만년필을 쓸 자격이 부족하다.
지금도 걸망에 넣어 다니긴 하나
가끔 원고 청탁을 받거나 시를 쓸 때나
원고지를 펼쳐놓고 사용할 뿐 보통 땐 잘 사용하지 않는다.
어쩌다 만행 중에 짐을 정리하다가 걸망 한구석에서
파란 실로 짠 옷을 입고 있는 그 소중한 만년필을 발견하면.
문득 학인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한때
문학을 향한 열정이 있었던 자신을 돌이켜 보며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
지난번 지인을 거리에서 만났는데 연락처를 묻기에
만년필을 꺼내 주소를 적어줬더니 아주 신기하게 쳐다보며,
"이야. 요즘도 만년필 쓰는 사 람이 다 있네" 하며 놀라워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없다.
'볼펜'의 등장은 만년필이나 펜촉에
잉크를 묻혀 사용하던 세대들에게 혁신적인 상품이었다.
'모나미153 0.7'
몸통은 하양고 머리와 꽁지는 까만,
그리고 가느다란 속살과 다리엔 용수철을 칭칭 같은 불펜의 원조
그 볼펜이 지금도 내 책상에 있어 그 시절의 . 향수를 자극한다.
꾹꾹 눌러써야 하고, 쓸 때마다 생기는 분비물(?)이
공책을 더렵혀 자주 닦아주며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있으며.
오래 두면 잉크가 번져 글씨가 탁해지는 단점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장점은 물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모든 펜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붓'은 이제 실용성을 앞세운 온갖 필기구의 발달로 인해,
취미로 서예를 하는 분이나
그림을 그리는 분들의 전유물품으로 전락된 지 오래다.
그러나 붓을 사용해본 사람은 안다.
벼루에 물을 붓고 조심스럽게 정성껏 먹을 갈아
붓에 듬뿍 먹물을 찍어 하얀 한지 위에
일필휘지로 쏙쏙 글을 써 내려갈 때의 그 시원하고 통쾌함을.
문명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내주긴 했지
만 년을 거뜬히 버터내는 한지와 먹으로 쓴 붓글씨는
편리한 것만 추구하는
우리에게 진실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모든 것에는 앙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좋은 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그 너머엔 반드시 내리막이 존재한다.
꾹꾹 눌러 써야 하는, 그래서 팔 힘이 더 들긴 해도
볼펜이 버터주는 데가지 되도록 일기는 그것으로 쓰려 한다
이 힘든 무문관 시절을
좀 더 지워지지 않는 내 수행의 흔적으로 오래 남겨두기 위해서.
6.5.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