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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문학상 수상작 모음(2002년~2019년)
제1회 수상작 없음
제2회 수상작
이화梨花 / 조정인 시인
도처에 금가는 소리 고쳐 베는 봄밤
뚝! 지구 살 트는 틈새로 찬 물방울 듣는다
물방울 없다 마른 이마를 문지르며
내려선 마당
나무, 한 家系소리 없이 밀리는 미닫이 사이
내보이는 버선발,
낯설도록 흰 저 빛은
전생이 반납한 서랍에서 꺼낸 빛
뿌리의 계보,
빙하시대로부터
둥두렷 떠오른 익사체 얼음 서걱이는 무명옷,
저쪽 생이 제 모습 되쏘여 보여주는 거울 앞에
이화와 마주 선 새벽
나무 아래는
밤 새워 누군가 마음 지피던 온기
제3회
이팝꽃 그늘 외 2편 / 이해리 시인
고소한 뜸 냄새를 풍기며 변함없는 밥솥이
더운 김 뿜는 아침
동구 밖 이팝꽃 흐벅지게 피었다
고봉으로 밥 먹은 사람 드문 시대 고봉으로 피었다
구름이 퍼먹고 바람이 파먹고 못자리가 퍼먹고 나도
하얀 쌀밥꽃 남아돈다, 남아도는 쌀밥꽃 길가에 수북 떨어졌다가
자동차에 뭉개지고 수챗구멍으로 날아 들어간다
팅팅 불은 발풀들, 쌀이 남아돈다
쌀라면을 만들까 쌀로 된 햄버거를 만들까 나도 남아 고민 중인데
주체할 수 없는 잉여는 차라리 슬픔인지
아프칸의 그 어린 것 아프게 떠오른다
제 위장보다 홀쭉한 자루를 들고 포탄이 핥고 간 들판에
풀을 캐러 다니던 네 살배기,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백만 명이 고스란히 굶어 죽는다는데
북한의 꽃제비들은 한 보시기 밥 때문에 오늘도 사선을 넘어온다
내 배부름으로 세상 어딘가에 배고파 야위는 슬픔이 즐비한데
새벽 별같이 하얀 살이
숭고하던 쌀밥이 길바닥에 고봉으로 넘쳐난다
두려운 무기처럼 온 마을에 그늘을 드리운다
제4회 수상작 없음
제5회
석양, 바닷가 / 장정 시인
바라보면 온 몸에 물이 든다
넘치지 못하고
안에서만 오래 끓은 탓인가
품어 안아 스며든 빛살조각들이
한계선 닿아 수런거리는
도지다 스러지고
도지다 스러지다
겹겹의 숨결 모래 속에 부려놓는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색깔을 점멸하는 작은 불씨들
어둠에 젖어
망망한 진공 속에서 깨어나고 있다
그렁그렁 걸어 둔
눈물 빛 속 철없는
나의 애드벌룬
바라보면 온 몸에 물이 든다
제6회
그리운 동제 / 조명숙 시인
하동산, 정부미 한 말 씻어
가마솥에 동제 헛제삿 밥을 짓는다.
모락모락 구수한 밥 익는 냄새
활활 타는 장작 냄새 뒤석여
쌍계사 깊은 똥낭구 냄새
쌍계사 오릿길 벚꽃 냄새난다
널널한 양푼이에 찬밥 한술 말아서
이른 아침 일찍 나온 햇살 아래
굵은 왕소금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한 알 한 알 속이 꽉찬 염주알처럼
가을 벼농사 잘 되었다고
첫 방아 찧어 공양 시주 올린다.
쌍계사 큰 스님은 죽비를 내려치며
한 해 내내 무슨 농사 지으셨나,
알알이 속이 차서 쏟아지는 설법은
섬진강 유장한 말씀보다 서늘하고,
농사 중에 가장 힘든 농사
쭉정이 하나 없는 자식 농사라고
아들 딸 자랑 대회 같은
동제의 풍악소리 평화롭다.
갓 시집 온 삼대독자 맏 며느리가
한 주걱 퍼서 고봉밥을 담은
헛제삿밥 얻어먹은 천왕봉 옆구리에서
백설기보다 하얀 달빛이 쏟아진다.
제7회
불혹의 집 / 전영관 시인
늦도록 야근이라도 했을까 두런두런
손 씻는 버드나무 야윈 팔 사이로
고단한 새벽만 우련하다
해쓱하게 마른버짐 핀 얼굴로 산은
종아리까지 발 담근 채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갈대들의 연두 빛 걸음걸이를 헤아리는 중인데
청태 자욱한 자갈밭에 드문드문
헤집어 놓은 자리들 뽀얗다 지느러미 뭉툭해지도록
거친 바닥을 밤 새 뒤척인 흔적이리니
세월이 잔잔하게 무두질한 강물도 속내는 그렇지 않아
우락부락 높낮이가 있고 마름과 줄풀의 허름한 자리도
예정되어 있으리니 철 이른 연밭
무진무진 찾아든 열사흘 달빛이 물안개와
결 곱게 버무려지면서 불혹의 집을 세운다
유혹 아닌 것 없고 흔들리지 아니한 순간도 없더라만
봄이면 구멍 숭숭한 연근 속으로 환한 꽃빛이 들어차고
미물들도 알자리를 저리 뽀얗게 마련하는 것과 같이
물푸레 손잡이 닳아지도록 날품팔이 아버지
망치질로 노임 채우던 소리의 깊이를
날계란 하나와 밀가루 한 움큼 계란떡으로 어머니
올망졸망 오남매 두레상으로 부르던 소리의 넓이를
철들은 줄 알았던 불혹의 어린 아들은
부지런한 아침볕이 짚어주는 물가를 따라가며
성신 눈으로 가늠해본다
지금껏 어떤 터를 헤집고 있었는지
그 자리 오롯이 우리 식구 모여 앉아 있는지
제8회
그릇 / 이인주 시인
운문사 연화대에 그대 모시러 갔다가 이미 꽃으로 피어 있는 그대를 보았다 하늬바람 잔잔한 미소 하나가 정오를 가르며 환히 피어나고 있었다 실뿌리 아늘아늘 담아낼 그릇 하나 없는 빈 손바닥, 낡은 지문이 가문비나무처럼 흔들렸다 그 손안에 그대를 엮어두고자 하는 우매함이 雲門 밖 풍경소리로 떨어졌다
그대가 나를 깨었는가 내가 그대를 깨었는가 허공에 부침하던 어떤 뜻이 죽비로 내리쳤다 아프다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멍울이 명치를 메어왔다 길이란 길은 죄다 등 돌리고 있었다 질문들의 참혹한 막다름이 마음의 모서리를 들이받았다
부서진 종소리가 그대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다 틈과 틈이 거느린 하얗게 빛나는 가문비나무 몇 그루, 초두루미처럼 웅숭깊다 부서져 비로소 완성되는 나, 민무늬와 빗살무늬 사이 그대가 만지면 부스스 깨어나는, 바람과 햇빛 물과 불의 거처에 순연한 내가 누워 한 잔의 백련차로 우러나고 싶다 한나절, 갸륵갸륵 갸륵한 물새들을 본다 넓이를 모르는 연못을 건너는 연밥그릇이 아름답다
제9회
물 한 모금 / 김영 시인
해수욕장 폐장하는 날 비가 내렸다
내 모래무덤에도 비가 내렸다
빗소리가 봉분을 찔러댔지만
뜨거운 모래 속의 알몸은 안전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메마른 대지에 퍼붓는 욕지거리
메우지 못한 웅덩이마다 욕창이 덧나고
푸른 상처가 너덜거리는 바다엔
발굴되어 허물어진 귀
또렷하게 젖어가는 증거물들
자정으로 가는 빗소리는 가파르고 촘촘했다
밤새 뒤척이며 뒤적였지만
빗소리가 지닌 혐의는 찾을 수 없었다
한나절 태양이면
빗물이 충분히 증거를 말릴 수 있는 시간
문득 목이 말랐다
지독한 허기였다
제10회
환승換乘입니다 / 김주명 시인
그날 저녁, 마트에서 조개들을 만났다 사각 비닐팩에 꽁꽁 얼려져 있었다 내란 음모에 가담도 못해보고 잡힌 유민流民의 형틀 같았다 껍질이 없으니 나와 동족인지 알 수 없지만은 벗은 아픔일까 맨살에서 스며나온 점액질에 나는 발 묶였다.
우마牛馬의 수레를 타고 온 내게 버스는 6분 후에 도착한다고 안내판이 일러준다
바다로 가는 길은 졸음일까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열반에 든 석고 반죽처럼 꿈쩍도 없다 제법 익숙한 노래들을 안내방송이 연신 잘라 먹는다 점점이 어깨 벌어진 네온 간판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사라진다는 생각은 결코 녹아드는 졸음을 가두지 못했다
고개 떨어뜨릴 때마다 마주보게 되는 얼굴,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바다는 침잠된 삶의 끝에서 푸르렀다 종점이라고 여기가? 등 떠밀리듯 내려선 여기는 칼바위 갯골, 손 뻗어 몰려드는 밀물이 내 몸의 손잡이를 잡고 첫발을 딛고 있다
제11회
폐선 외 2편 / 정순 시인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 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 있는 몇 줌의 항해일지와
폐유 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이튿날이면 폐유처럼 떠오르던 희망이라는 낯선 부력의 위로는
어느 해협에서 배운 악몽이었을까
나는 조용히 언젠가의 서풍이 불어와
가슴 속에서 일러주었던 말이라도 실천하듯
뇌리 속 무례한 부력을 내려놓고서
노을이 내주기 시작하는 저녁 쪽으로 어스름한 귀향을 한다
제12회
유월 장마 외1편 / 신윤서 시인
누이가 다녀간 뒤
도시는 장마권에 접어들었다
먼지 낀 창틀을 타고 검은 빗물이 흘러내렸다
짙은 눈 화장을 한 여자가
아파트 복도 끝에 서서 울고 있었다
여자들은 왜 모두, 문 밖으로 나와 울고 섰는지
누이는 왜 잿빛 승복차림으로
먼 길 떠도는지
문 안에서 여자들은 울지 않는다
무표정한 눈빛은 문 밖을 나섰을 때 울음이
되어 터져 나온다
저 길 끝을 돌며
빗물과 함께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여자들의 눈물을 본다
장마가 길어지고
파르스름하게 깎인 누이의 무덤 같은 머리엔
무성한 생각들이 잡풀처럼 자라다 베어질 것이다
닫힌 문 안에선
빗소리로 번식하는 푸른곰팡이들
누이가 미처 뿌리 뽑지 못한
입을 다문 말들이 창궐을 시작한다
제13회
새의 풍장 / 한교만 시인
푸조나무 밑에 여행가방 하나가 버려져있다 무정형의 폐기물 잠금장치가 풀리지 않아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어느 저녁쯤에야 반쯤 열린 가방 안에는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목록들이 가방주인의 취향대로 꼼꼼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공중을 날기 위해 모든 목록들은 초경량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이렇게 가벼운 것들만 넣고 다녔으니 여기까지 쉽게 날아올 수 있었으리라
실밥이 풀린 안주머니에는
기내식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는데
여독을 잘게 부수기 위한
옥수수 콘 몇 알과
출처가 불분명한 모래들
월동지의 메뉴가 소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차적응에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동거리를 재는 손목시계는 날짜변경선에 부딪치면서 가방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버려지기 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째깍거렸던 들숨과 날숨이 동시에 멈춰있었다
긴 여행이 끝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가방의 잠금장치를 푼 바람이
내장의 말끔히 비우기 위해 좁은 통로를 들락거리고,
십진법의 아라비아 숫자들 몇 개 나무 그늘 밑에 떨어져 있다 비밀번호를 해제하기 위해 여러 번 쪼았는지, 끝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바람의 부리
제14회
실종 / 김혜영 시인
신천댁이 사라졌다
사흘 전까지도 웃으며 고기도 드시고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고 하지만
십수 년 전 영감이 사라지고 나서
아니 그 이전 고물고물한 아이들의 젊은 엄마일 때
설거지물을 텃밭에 뿌리러 나올 때면
가끔씩 검은 머리와 눈썹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과 그 친구들이
대청마루에 북적일 때면 담박에
선명한 색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간격이 너무 멀어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새 날을 헐어낼수록 새 밤을 흘려보낼수록
온 몸의 빛깔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홀로 빈 집에서 벽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마당 들어서며 부르면 느릿느릿 걸어나오곤 했다
옷감의 물이 빠지듯 짙은 색에서 옅은 색으로
형체가 사라지고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날이 늘어갔다
명절이나 휴가철 자식들이 들르는 날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시간이 흐르면 온몸의 색이 바랬다
벽 속으로 사라지는 날이 잦아지고
옅은 회색빛을 띠다가 허공에서 불쑥
한 팔이 솟아나곤 했다
일 년 전 작은 딸이 부산으로 모셔갔을 때
실루엣만이 따라갔다가 한참 후
겨우겨우 뒤따라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다시 고향집 돌아와 한달 후
신천댁 벽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제15회
지구의 빨래방 / 조선수 시인
드럼통이 지구의다 기우뚱
기우뚱 축을 따라 도는 게 아니라
통통 떨어지는 동전들을 따라 돈다
대륙을 넘어온 황사와 남지나해의 수평선이
어깨를 겯고 소쿠라지는 빨래방
밤낮 세탁기 하나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우랄산맥과 치악산이 줄줄이 이어진다
갠지스 강변을 떠돌다 온 운동화도 꺼덕꺼덕
돌고 자전거 기름 묻은 청바지도
돌고 히말라야 물소리 스며든 네팔 티셔츠도
덜컹거리는 궤도를 따라 달리고 있다
위도와 경도가 마구 뒤섞이는 지구의
중국발 미세먼지 이동경로 영상이 실시간
거품을 물고 소쿠라진다
아무리 탈탈 털어도 마지막 체액 한 방울은
은근슬쩍 섞여 들 것만 같은,
여기는 원곡동 밤의 빨래터
통, 통, 통 하나로 세상은 밤낮을 모르고
동전을 집어삼키느라 환하게
불 켜진 행성
제16회
밭의 문서 / 김하연 시인
아버지가 밭을 매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본래 소유권은 땅을 기름지게 한 거름의 몫이라며
아버지 헛기침 소리 깊어진다
워낭소리로 구두계약 맺은 황소의 증명은
오래 전부터 게으름을 피운 죄로 시효가 지났다
하지만 저 태양의 도장밥을 들고
마음이 기울어지는 해거름 등기소에서 붉은 날인을 받자
지독한 진드기 등에 얹고 길을 내던 황소도
밭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직계존속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에 질세라 쑥대밭을 만들던 잡초도 눈독들이며
분할 청구를 시도한다
하지만 잡초를 이겨낸 앙증맞은 강낭콩 꽃과
울타리가 되어준 돌담과
땀을 훔쳐주던 갈바람에 잠재적 지분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우선 순위가 주어져야 했다
어느새 드렁칡이 내려와 일가를 내세우고 있다
이럴 때는 믿을 만한 법적 후견인이 필요하다
얽히고설킨 감자밭과 고구마밭이 입담을 거들고 있다
아버지는 흙을 닮아 분쟁 없는 포슬포슬한 성정을 가졌기에
별도의 판단이 필요해 잠시 유보하기로 한다
그러기 이전에 부양의 의무를 다한 수수, 보라, 귀리에게
먼저 물어보기로 한다
집안의 재정을 담당하여 어머니의 푼돈이 되기도
순주들 용돈이 되어주었으니
아버지는 그들에게 마음을 더 쓰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에게 되돌려줄 게 없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하던가
아버지 된장에 풋고추 찍어 새참을 드시더니
몹쓸 탄저병으로 돌연 떠나보낸 여럿 자식들을 그리며
매운 맛 하나 그들의 몫으로
밭 한 가운데 그렁그렁 남겨두고 있다
제17회
끈 혹은 줄에 관한 단상 / 지연구 시인
택배로 부칠
상자를 묶을 포장 끈이 모자라
끈을 이어 묶다가 짧은 끈을 바라보네
애초부터 가진 끈이 짧았던 아버지
당신 끈을 내게 이어주려 무진 애를 쓰셨지
국민학교 사 년, 남의 집 더부살이
그 끈에 묶인 매듭이
모난 돌멩이처럼 늘 가슴에 배겨 아팠네
월요일 아침 애국 조회시간
줄서기가 삐뚤어져 얻어맞던 선생님의 회초리는
좋은 줄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 같았네
친구들의 질기고 화려한 나일론 줄에
새끼줄 같은 나의 끈을 슬쩍 묶어보았지만
신분이 다른 줄은 금세 풀어지고 말았네
시화공단, 꽤나 큰 포장끈 공장에서
삼십여 년 끈을 만지며 살았지만
늘어진 삶의 끈을 팽팽하게 당겨주지 못했네
너무나 느슨하고 헝클어져버려서
줄에 걸려 넘어진 생활이 동강동강 끊어지고 말았네
토막난 생활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시 이을 수는 없었네
이어 묶은 끈으로 상자를 포장하고
매듭지어진 곳에 남은 끈을 잘라버리네
이어지지 않는 끈을
아버지도 그만 싹둑 잘라버리고 짧은 숨을 놓으셨지
포장 끝낸 상자를 우체국에 맡기고 돌아오는 거리
썩은 동아줄에 매달렸다 떨어지며 울부짖는
호랑이 울음소리 여기저기 들리네
달님과 햇님이 된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려오는 듯하네
제18회
싸리나무 / 김향숙 시인
종아리에 싸리나무 흔적이 있네
아버지 꾸중이 다녀간 날이었네
천방지축의 나이
주먹을 쥐고 이를 앙다물 때
여린 싸리나무 회초리 흔들리는 중심을 잡아주었네
눈물과 후회
원망이 묻어 있는 그 기억을 만지면
참싸리꽃으로 환하게 피어나네
소쿠리와 채반이 되던 싸리나무가
몸에 스며들어 나를 일으켰네
쓰디쓴 그 맛
종아리에 새겨진 문신이
약초가 되기까지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의 싸리나무였다는 걸 깨달아
내 여린 뼈가 단단히 여물어갔네
여름이 지날 때쯤 뒷산에 피던 분홍꽃
사방에 널렸어요 지나치기만 했는데
회초리를 든 아버지가 보이네
낭창낭창 휘어져도 부러지지 말라던 말씀
늙어 회초리를 들 기운조차 없으셔서
내가 싸릿대를 꺾었네
싸리꽃은 여전히 피어나고
밑줄을 긋던 말씀은
내 몸에 붉은 꽃으로 남아 있는데
아버지는 다시 피어나지 못하네
한 줌 싸릿대를 안고 산을 내려오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싸리꽃 붉게 피어나네
제19회
멸치 똥 / 안이숲 시인
멸치 똥을 깐다
변비 앓은 채로 죽어 할 이야기 막힌
삶보다 긴 주검이 달라붙은 멸치를 염습하면
방부제 없이
잘 건조된 완벽한 미라 한 구
바다의 비밀을 까발라줄까 삶은 쓰고
생땀보다 짜다는 걸 미리 알려줄까, 까맣게 윤기 나는 멸치 똥
죽은 바다와
살아 있는 멸치의 꼬리지느러미에 새긴
섬세한 증언
까맣게 속 탄 말들
뜬눈으로 말라 우북우북 쌓인다
오동나무를 흉내낸 종이관 속에 오래 들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팔려온
누군가의 입맛이 된 주검
소금기를 떠난 적이 없는
가슴을 모두 도려낸 멸치들 육수에 풍덩 빠져
한때 뜨거웠던 시절을 우려낸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뼈를 남기고
객사한 미련들은 집을 떠나온 지 얼마만인가
잘 비운 주검 하나 끓이면
우러나는 파도는 더욱 진한 맛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