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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성의 영적 싸움
사도행전 16:16~40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이차 전도 여행을 떠나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 지방에서 첫째 가는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 전도하는 중에 만난 특별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그곳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성 출신의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전도한 후에 그 집에서 유숙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도를 시작하였지 않습니까? 루디아의 넓고 쾌적한 집에서 기거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기도와 전도에 힘쓰는 중인데 갑작스럽게 한 가지 변수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일행이 지난번 루디아를 처음 만나 전도했던 강가 기도처에 가려고 길을 가던 중인데 그 도중에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어쩌면 그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소녀는 점치는 영에 잡힌 노예 소녀였습니다. 그 여종 속에는 ‘점치는 귀신’이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원문으로 보면 그 소녀 속에는 ‘퓨톤’의 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퓨톤’은 거대한 뱀 신인데 태양신 아폴론이 잡아 죽였습니다. 퓨톤 신은 점을 치는 신으로서 이 퓨톤의 영이 든 이 노예 소녀는 사람들의 점궤를 알려주어 돈을 받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점쳐서 벌어들인 수입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이 여종을 돈으로 산 다음 그 여종을 부려서 점쳐서 벌어들인 많은 이익금을 서로 분배하여 가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그 날 사도 바울 일행을 만난 다음부터는 바울과 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계속 크게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 하였으니 날마다 이 유명한 여종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점치는 귀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의 탁월함을 증거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러 갈릴리와 유다 지역을 다닐 때에 귀신들을 내쫓을 때에 귀신들이 나가면서 소리 질러 이르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의 입구인 거라사의 군대 귀신을 쫓아낼 때에도 그 군대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자 마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이처럼 귀신들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잘 압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를지라도 귀신들은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사람들 앞에서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두려워하고 떨지만 그를 믿고 순종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점치는 귀신, 퓨톤의 뱀 신이 들린 여종이 사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계속하여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선포하였다고 하여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그 귀신들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여 쫓아내기만 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비록 귀신같이 예수님이 누구며 주의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의 존귀함을 안다고 해서, 그 귀신을 알아주게 되고, 그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복음 사역의 협력자로 삼으면 그것은 복음을 희석시키게 되는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더러운 영, 악한 영들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서로 인정해주고 서로 격려해주고 함께 동역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 곧 고린도후서 6:14 이하의 말씀에서 이르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린도후서 6:14~18)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상 섬기는 자들과 잡신 섬기는 자들과 함께 멍에를 매고 깊은 교제를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종종 ‘종교간 대화’라는 주제로 불교의 스님과 천주교의 신부와 기독교의 목사가 한 자리에 모여서 사람들과 대담하며 서로 즐겁게 덕담하면서 떠들고 이야기 나누는 티비 프로그램이 한번씩 생기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프로그램이 과연 하나님 마음에 기쁜 일이겠는가 생각하면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토론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혹시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지혜를 함께 모으는 일에는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협력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성을 뒷전으로 놓고 그냥 종교간 이해를 넓히자면서 인간적인 교제를 위주로 하는 모임은 결국 기독교의 유일한 복음 진리를 희석시키고 다른 종교의 주의 주장과 같은 차원에 두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며칠 동안이나 따라 다니면서 온 빌립보 사람들에게 소문이 다 날 정도로 사도 바울 일행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 곧 최고의 신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파하는 귀한 사람들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지만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을 알고서 계속하여 마음 속으로 거리껴지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뒤를 따라 오면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여종을 바라보고 그 속에 있는 악한 영을 향하여 나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나 귀신이 즉시 주님의 지엄하신 이름의 권위 때문에 순종하여 쫓겨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더 이상 그 속에서 어떤 잡다한 영의 지절거림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그녀는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본래의 착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평범한 소녀로 돌아간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여종은 사람의 길흉을 점치는 신비한 능력을 받은 무녀였지만 이제 조용하고 평범한 본래의 어린 소녀로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늘 여러 주인들에게 돈을 뜯기면서 늘 사람들이 찾아오면 점을 쳐주고 힘들어도 푸닥거리를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며 춤추는 등 온갖 영적인 괴로움이 가득한 무녀의 삶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무녀, 무당 본인의 삶은 불행과 고통 중에 끝이 납니다.
이 점치는 소녀가 고침받은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하여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다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의 구원과 더불어 뒤에 일어난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의 구원의 사건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을 볼진대 이 소녀 역시 구원받을 것이라 추측함이 합당합니다. 그녀가 며칠 동안 사도 바울 일행을 따라 다녔고 큰 소리로 외친 바가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였으니, 이 소녀 역시 사도 바울 일행에 의하여 그 구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아서 빌립보 교회의 한 성도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점치는 영에서 해방된 이 일은 사도 바울 전도단에게 큰 소동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노예 소녀로부터 그 퓨톤의 영, 곧 점치는 귀신들을 쫓아냈을 때에 그 노예 소녀의 주인들로부터도 물질의 이득을 쫓아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여종의 여러 주인들은 돈줄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여간 속이 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 어린 소녀가 평범한 한 소녀가 되어 이웃 집 소녀들과 친구로서 수다도 떨며 지내며 나중에 시집도 가 잘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보면서 잘 되었다고 생각해야 하지만, 이들은 오직 자기들의 주머니에 들어올 재물이 끊어진 것만 생각하고 속이 쓰리고 화가 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군대 귀신을 내쫓아서 돼지떼들에게 들어갔을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구경온 사람들은 그 동안 군대 귀신들에 잡혀서 무덤 사이를 배회하면서 자기 몸을 돌로 찢으면서 괴성을 지르며 지낸 그 광인이 예수님 덕분에 제정신이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차분히 듣는 것을 보고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예수님께 깊이 절하며 “어서 우리 동네에 들어오셔서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 더 있으니 고쳐달라.”고 간청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그 귀신들린 사람의 고쳐진 것은 상관없고 그 귀신들이 들어가 갈릴리 바다에 내달려서 죽어서 둥둥 떠 있는 돼지떼들의 시체만 보고 충격을 받아서 예수님을 가까이 했다가는 경제적인 손해만 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께 어서 이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처럼 이 점치는 소녀의 몰인정한 주인들은 소녀를 고쳐준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을 해치려고 달려들어 체포하여 빌립보 성의 장터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은 재판을 여는 곳이기도 하였는데, 고발하기를 사도 바울 일행이 유대인으로서 로마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못된 풍속과 괴이한 미신을 전한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들의 본심에는 자기들의 재물의 손해 때문에 사도 일행에게 분풀이하려는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사도 바울 일행이 로마 식민지로서 로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그 도시에 떠돌이 유대인들이 들어와서 못된 미신을 퍼뜨리는 것으로 고발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미움의 대상이었고 종교적 문제들은 늘 배타적인 반대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들은 교묘한 이유를 내걸고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흥분하여 사도 일행을 비난하면서 폭력적인 사태가 벌어지려 하였습니다.
결국 빌립보 성의 집정관들 곧 그 도시의 치안 판사들, 행정관들은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니까 우선 유대인인 바울과 실라를 무조건 체벌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옷을 찢어 벗 기고 매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치안 판사들의 수행원들이 그 명령대로 벗겨진 바울과 실라의 몸에다가 사정없이 매를 휘둘러 때렸습니다. 고린도후서 11:25 말씀에 보면, 이러한 매를 세 번 맞았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이 때가 처음 맞았던 일 같습니다. 온 등어리와 허번지와 종아리와 팔이 시퍼렇게 멍들고 피가 나고 여기 저기 부어 오르고 찢어진 상처가 온 몸에 생길 때 그만 때리라고 명령이 내려졌고 감옥의 간수장을 불러서 감옥에 든든히 지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을 처음부터 살펴보면 그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고 그 귀신이 내어쫓김으로써 생겨난 일입니다. 그래서 그 더러운 귀신이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려고 일으킨 소동이라 할 것입니다. 그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 역시 그 귀신들의 세력 아래 있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그 쫓겨난 귀신들이 격동시켜서 사도 바울 일행에게 분풀이하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자 그렇게 사도 일행을 붙잡아 고발하고 때리고 감옥에 쳐넣는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가 주님의 일을 행하고 교회를 세워가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항상 악한 영들의 방해를 직면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악한 영의 방해와 공격이 주의 일을 시작할 때에 곧장 다가올 수도 있고, 주의 일을 진행하는 중에 찾아올 수도 있고, 일을 마무리할 즈음에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처음 막 시작할 때에 먼저 광야에 가서 40일을 금식 기도하시는 중인데 마귀가 찾아와 시험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실 때에도 마귀는 헤롯 대왕을 통하여 아기 예수님을 찾아 죽이려 들었었고 이제 예수님께서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으시고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자 그 시작부터 마귀가 이렇게 시험하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후에 각처에 흩어져 복음을 전할 때에 사마리아 성에서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파하자 그곳에 오랫동안 터주대감 역할을 하고 있던 마술사 시몬은 자기 본심을 숨기고 교회 안에서 세례까지 받으면서 안으로부터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에 와서 그 정체를 밝히고 그 교회에서 쫓아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 섬에 가서 복음 전하다가 그 섬의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 곁에서 오랫동안 영적 조언자 역할을 하던 마술사 엘루마가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방해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성령의 권능으로 명하여 그 엘루마의 눈을 어둡게 함으로써 패배당하고 물러갔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약 3년 동안 엄청난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수많은 마술사들이 복음 앞에 굴복하고 자기들이 애지중지하던 마술 책들을 불사르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어느날에 그 도시의 오랫동안 가장 큰 신전인 아데미 신전을 숭배자들 곧 우상 숭배자들이 격분하여 폭동을 일으켜서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에 격렬한 반대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 운동과 주님의 백성의 신앙 생활의 여정에는 악한 영들의 공격과 방해가 반드시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공격을 잘 맞서 싸워 극복할 때에 놀라운 복음 운동의 진보가 있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때에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고 주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되고 저주가 속량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찾아오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이 악한 영들의 영적 공격과 도전을 맞아 그것과 잘 맞서 싸워서 결국 이 도전을 이겨내는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빌립보 성의 점치는 여종의 주인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을 이용하여 마귀와 그 졸개들인 귀신들이 사람들을 부추겨서 이렇게 절차를 무시한 재판을 열고 사도 바울과 실라를 옷을 벗겨 매로 심히 때리고 깊은 감옥에 던져넣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그리하여 마귀는 사도 바울 일행을 이방인 떠돌이들로서 로마 법을 어기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불량자들로 규정하여 영구 추방시키고 다시는 빌립보 성에 발도 딛지 못하도록 범법자의 딱지를 붙여서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귀신들은 이 영적 전쟁에서 초반 공격에 성공하여 승리하고 사도 바울의 선교단 일행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봅시다. 그 두 사람이 보인 영적 싸움의 기술들은 이 영적 싸움에서 악한 영들을 제압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이 악한 영들의 공격을 어떻게 이겨내고 승리했는지를 살펴봅시다.
첫째로, 사도 바울과 실라는 기도했습니다.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집정관을 돕는 집행관들로부터 매를 많이 맞고서 온 몸이 상처 투성이인 채로 발에는 꽉 조이는 결박이 채인 채로 깊은 감옥에 던져진 사도 바울과 실라는 기가 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입술에서 신음 소리가 나고 원망 불평이 나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깊은 감옥에 있을 때에 한밤중에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이렇게 쓰라린 고통을 겪으면서 매도 맞고 온 몸이 찢고 상처나고 깊은 감옥에 갇히는 상황을 겪음으로써 주님이 당하신 대속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사탄의 공격을 당하여 억울한 고난의 깊은 밤중에 맞서 싸운 영적 싸움의 병기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과 불평과 한숨과 탄식이 나와야 할 그 때에 기도의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을 향하는 자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의 길을 걷고 있는 줄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겪을 때에 기도하곤 했습니다. 다윗도, 다니엘도 기도하곤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기도의 자리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 거기서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땀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죽을 만큼 힘들고 두려웠던 그 때를 이기고 주님의 마음이 힘을 얻고 일어나 그 십자가를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기도가 우리를 일으켜줍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고난과 맞서 싸울 용기를 줍니다. 기도할 때에 마귀의 공격은 무력화됩니다. 마가복음 9:29 말씀에 이르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의 공격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한평생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과 실라는 찬송했습니다.
25절을 다시 읽으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자기를 그토록 무고하게 고통을 준 그 욕심꾸러기 점치는 여종의 주인들에게 저주라고 한 바가지 쏟아도 부족할 판인데,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였습니다. 상처의 쓰라림과 욱신거림과 통증이 여전했을 텐데 그들은 그것들 때문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고난과 역경 중에도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렸습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고 순종하는 중에 무고하게 이러한 핍박을 당하였으니 장차 주님 앞에 가서 상이 클 것을 생각하면서 찬양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10 이하에 이르신 주님의 약속에 이르기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쓴 편지에서도 사도가 가르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베드로전서 4:12~14)
라고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도 가르치기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야고보서 5:13)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다가 당하는 무고한 박해와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주님을 신실하게 잘 섬기는데도 불구하고 생각지 못한 재난과 역경을 만날 때에 낙심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지 말고 여전히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으면서 하나님을 크게 찬양합시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고난 중에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굳게 신뢰한다는 절대 신앙의 고백입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찬양은 이러한 고난까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절대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절대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이 밝은 대낮 곧 우리 삶이 형통할 때에 찬양해야 마땅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한층 아름답고 더 귀하게 여기는 가치 있는 찬양은 우리가 고난에 처했을 때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42:5에서 시인인 고라 자손이 이렇게 올려 드린 찬양과 같은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주의 백성이 인생의 한밤중에 올려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양들의 작은 숨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사랑의 목자십니다. 하물며 고난의 깊은 밤중에 눈물 속에서 드리는 찬양일진대 하나님게서 어찌 그 찬양에 감동하지 아니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습니까? 낙심이 되고 마음이 불안이 가득차고 어찌할 바 모를 그 때에 눈물로써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십시오. 복음성가 330장 내일 일은 난 몰라요 1절 한번 함께 불러 봅시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이나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이렇게 찬양하고 찬양할 때 주님께서 그 성도의 눈물의 찬양, 믿음의 찬양, 사랑의 찬양에 감동하시고 찾아와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그 능력의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사도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와 찬양으로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맞서 대응했을 때에 어떠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갑작스럽게 큰 지진이 나서 그 감옥이 크게 흔들리고 감옥 문들이 다 활짝 활짝 열리고 사람들의 손과 발을 굳게 채우고 있던 수갑과 족쇄들이 다 벗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진과 옥문이 열리고 모든 결박들이 풀리는 현상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로 인하여 모든 영적 결박과 삶의 결박들이 풀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그 큰 돌 산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호렙산에 엘리야 선지자가 동굴이 숨어 있을 때에 동굴 밖으로 나오라고 하나님이 불러내시고 그를 찾아오실 때에도 바람이 분 후에 지진이 나고 불이 붙고 그 후에 조용한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이처럼 산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그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하나님의 영께서 친히 그 자리에 찾아오신 증거가 지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니 당연히 마귀의 모든 결박들은 풀려나가고 그 악한 영향력, 어둠과 무질서와 혼돈과 저주들은 다 쫓겨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신앙 생활을 잘하며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복음 증거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고 있을 때일지라도 악한 마귀와 귀신들의 공격이 예상치 못하게 닥쳐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재앙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인간관계의 원수들이 찾아와서 괴롭히기도 하고, 뜻밖의 질병이 찾아와서 우리를 낙심하게 하기도 하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과 부모님들의 앞길에 장애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근심과 슬픔과 고통이 우리를 붙잡고 그 상처로 인하여 쓰라리고 깊은 슬픔의 감옥에 떨어져 한줄기 소망의 빛도 찾을 수 없는 때도 만납니다. 예외 없이 우리는 누구나 다 이런 일을 겪습니다. 그 일이 우리 신앙의 초창기에 생길 수도 있고 중반기에 생길 수도 있고 노년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단지 어쩌다 생긴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영적 공격의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잘하고 사명 잘 감당하며 충성을 다하는 데에도 이러한 시련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그 영적 공격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사도 바울과 실라가 보여준 영적 싸움의 방식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됩시다. 그러한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와주실 때 모든 닫힌 것들이 활짝 열리고 모든 결박들이 다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차 방정식의 문제들이 놀랍게 술술 풀어지고 도리어 기이하게 그로 인하여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 날 그곳에서 찬양하고 기도하였을 때에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열리므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감옥 간수장이 자다가 깨어났다가 나와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다가 감옥 속에 있던 바울이 소리쳐 그를 말리므로 그가 놀라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이 이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리하여 그 말에 순종하여 그 간수장이 그 밤중에 온 가족까지 다 주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크게 기뻐함으로써 그 간수장 가족이 빌립보 교회의 큰 기둥 일꾼이 되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사도 바울과 실라는 합법적으로 풀려지고 그들이 로마 시민권자인 것도 모르고 재판없이 때린 일로 인하여 크게 두려워하면서 그 두 사람이 합법적으로 빌립보 교회를 계속 방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도 보장해줌으로써 루디아 집에 있는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고 위로 격려하고 다음 전도지로 떠나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감옥에 갇힌 일들이 도리어 합력하여 선이 되어 빌립보 교회의 귀한 기둥 성도들이 세워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 가족과 그 귀신들렸다가 고침받은 여종과 감옥의 간수장 가족이 빌립보 교회의 기둥들이 되어서 유럽 지역의 첫 교회로서 든든한 기초 위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영적 공격이 강력했지만 사도 바울과 실라가 영적 대응을 통하여 승리함으로써 도리어 합력하여 더 큰 영적 성장과 축복을 얻는 극적 반전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삶 속에서 다가오는 많은 시련과 실패와 영적 대적의 도전을 맞이하여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캄캄한 인생의 밤중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하며 용서하고 축복하고 계속하여 사명을 붙들고 주어진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한 모든 닫힌 문들이 열리고 묶여 있는 모든 결박들이 다 풀려지고 아름답고 복스러운 반전의 승리의 열매들을 거두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