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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서 한국 가요계의 팬문화는 “신세대”라 불리는 30대 이하의 젊은층(댄스, 발라드)과 “기성세대”라 불리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트로트)으로 완전히 양분되었습니다. “X세대”라는 신조어로도 불렸던 젊은층에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가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으며, 중장년층에서는 송대관, 태진아 두 사람이 거목으로 굳건하게 군림했습니다.
가요시장은 좀더 젊은층, 그 중에서도 10대와 20대 팬 위주로 주도권이 넘어갔습니다.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서태지가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에는 H.O.T를 필두로 한 아이돌 그룹들이 전성시대를 누렸습니다. 20~30대 청년층에서는 신승훈과 김건모가 폭넓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신승훈이 본격적으로 국민가수로 떠오르기 이전인 1990년대 초반에는 변진섭이 당대 최고의 스타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중견가수인 노사연(만남), 김정수(당신), 김수희(애모) 등은 전국민적인 애창곡을 탄생시키며 국민가수로 떠올랐습니다.
가요계의 전반적인 주도권이 젊은층, 그 중에서도 특히 10대 위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1990년대 가요계에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가 “빅3”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10대 청소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사회, 문화적인 파급효과까지 불러일으킨 서태지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잡았습니다. 서태지는 “문화대통령”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서태지는 데뷔곡인 “난 알아요”를 통해서 한국 댄스음악의 전성기를 선도했지만, 가수 데뷔 이전에 ROCK 밴드인 “시나위”에서 베이시스트로 잠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고, 2집 이후로는 ROCK과 힙합에 걸쳐서 음악적 저변을 넓혔습니다. 2000년대 컴백 이후에는 ROCK 음악에 전적으로 주력하고 있습니다. 서태지는 역대 한국 가수 중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매니아 vs 안티”의 호불호가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10대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다는 점 외에도 사회, 문화적인 이슈를 선점하며 1990년대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에 누구보다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편입니다.
신승훈은 “발라드 황제”로서 약 10년 이상 장기집권 하면서 “국민가수”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김건모는 댄스음악의 전성기를 이끌며 신승훈과 마찬가지로 “국민가수”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신승훈은 1992년에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14주 연속 1위”의 대기록을 작성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조용필에 이어서 역대 두번째로 “음반판매 통산 천만장 돌파”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김건모는 1995년에 “잘못된 만남”으로 “단일음반 최다 판매” 기록을 달성했으며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는 조용필에 이어서 두번째로 많은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신승훈과 김건모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신승훈은 “발라드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 분야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가수들 중에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각종 최고 기록들을 수립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당시 가요계를 주름잡던 “댄스열풍”에 힘입어서 김건모가 각종 가요대상을 독식하다시피 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아이돌 전성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면서 신승훈과 김건모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습니다.
신승훈의 진가는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 더욱 빛을 발했고, 신승훈은 1990년대 이후 활약한 가수들 중 가장 꾸준한 롱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중견급 가수들 대부분이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 80년대 스타 출신인 이승철과 90년대 스타 출신인 신승훈이 미묘한 경쟁구도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김건모는 한때 후배 아이돌 그룹들에 밀려서 주춤하는 듯했지만, 2000년대 초반에 발라드 가수로서의 변신에 성공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비록 가요계의 주도권을 신세대에게 내주기는 했지만,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는 트로트 부문에서 송대관, 태진아 두 사람의 위상은 견고했습니다. “전통가요” 부문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트로트 여제” 주현미가 독주하는 가운데 현철이 주현미의 아성에 도전하며 쌍벽을 형성하는 구도에서 1990년대 이후부터는 현철,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로 대표되는 4인방이 “트로트 4대천왕”을 형성하는 구도로 전환되었습니다. 송대관, 태진아는 본래 1970년대부터 촉망받는 스타였지만 미국 이민생활로 오랜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에 재기에 성공하며 트로트 분야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를 굳혔고, 특히 태진아는 2000년대 이후로도 여전히 국내 트로트의 대표주자로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가요계의 팬문화 자체는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층에게 주도권이 넘어갔지만, 이들 “신세대” 가수들은 “기성세대”라 불리는 중장년층의 공감대까지 얻지는 못했습니다. 신세대와 기성세대를 모두 아우르는 전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며 절대강자로 군림한 “진정한 국민가수의 시대”는 사실상 1980년대 “조용필 시대” 이후로 명맥이 끊겼습니다. 1990년대 이후의 가요계 판도는 “신세대 -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기성세대 - 송대관, 태진아”의 구도를 형성하며 철저하게 양극화된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는 이러한 가요계의 양극화 현상을 감안해서, 아예 “가수왕” 자체를 “30대 이하의 국민이 뽑은 가수왕”, “30대 이상의 국민이 뽑은 가수왕”으로 두 명에게 수여하는 방침을 4년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신세대”의 대표주자는 기존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에서 “조성모, HOT, god”로 교체된 상태였지만, “기성세대”의 대표주자는 여전히 송대관, 태진아가 건재함을 과시하며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도 후배 아이돌 가수들 가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당당히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1990년대 가수 중에서 “국민가수”라는 칭호를 들었던 사람은 신승훈, 김건모, 송대관, 태진아, 이렇게 네 명이었습니다. 신승훈과 김건모는 10대~30대까지 골고루 팬층을 형성하며 서태지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고, 송대관과 태진아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에게 골고루 인기를 얻으며 2000년대 들어서까지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김건모는 가장 폭발적인 전성기를 누리며 가요대상을 독식했지만, 신승훈은 좀더 오랫동안 롱런하면서 가요계의 각종 기네스 기록들을 수립했습니다. 전통가요(트로트) 가수 중에서 송대관은 태진아보다 먼저 “가수왕”(MBC 최고 인기가수)을 경험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태진아가 트로트 부문을 대표하는 스타의 자격으로서 각종 가요 시상식에 단골손님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부연설명: 본래 “국민가수”라는 표현은 신승훈이라는 특정 가수의 별명으로서 “고유명사”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 가요계가 10대 청소년 위주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신승훈은 20~30대 청년층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얻은 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별명은 비슷한 연령대의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김건모에게도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국민가수”라는 표현은 폭넓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가수를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트로트의 대표주자인 송대관, 태진아 등의 가수들에게도 “국민가수”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과거의 전설적인 가요계 선배들에게도 “국민가수”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편 서태지의 별명으로 사용되는 “문화대통령”이라는 표현 역시 특정 가수의 별명으로서 일종의 “고유명사”의 성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선배가수들(이미자, 패티김, 최희준, 배호, 남진, 나훈아, 하춘화, 조용필 등...)이 폭넓은 연령대의 팬들에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에 비해서 서태지는 10대 청소년들이 주축이 된 일명 “신세대"(X세대)의 유행을 선도하며 굳건한 매니아층을 형성했습니다. 반면에 중장년층의 팬들에게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서태지의 팬층의 구성이나 특성이 이전 시대와는 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신세대 vs 구세대”의 대립구도 자체가 이슈가 되었고, 서태지라는 가수의 등장으로 인해서 사회문화적인 유행을 선도하는 파급효과를 나타냈던 점으로 인해서, 2000년대 초반에 서태지가 컴백한 이후부터 그에게는 “문화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한 분야의 유행을 선도하고 문화적 파급력을 가진 인물에게는 “문화 아이콘”이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으며,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층의 대중에게 폭넓은 인기를 누리는 가수에게는 “국민가수”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도 서태지의 별명인 “문화대통령”, 신승훈의 별명인 “국민가수”는 여전히 그 나름대로 일종의 “고유명사”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1990년대 이후로는 특정인의 1인독주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고, 웬만한 인기가수의 팬들이나 지지자들은 저마다 이전 시대의 대표 스타였던 조용필의 비교대상으로 삼는 분위기도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층에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의 트로이카를 각각 조용필의 비교대상으로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세대”쪽에서는 “신승훈 vs 김건모”의 라이벌 관계를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와 비교하는 분위기가 유행하기도 했고, “기성세대” 쪽에서는 “송대관 vs 태진아”의 라이벌 관계를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와 비교하는 분위기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
1990년대 가요계의 양대산맥이었던 서태지와 신승훈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서태지는 1990년대 초반 전성기 시절과 2000년대 초반 컴백 이후에 일본진출을 시도한 적이 있고 2004년에는 러시아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열었습니다. 신승훈은 2000년대 들어서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주제곡인 “I believe”를 불러서 일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높은 인기를 얻으며 “한류스타”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신승훈은 특히 일본에서는 신인시절 한국에서 히트했던 곡들을 새롭게 알리면서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편 2009년에는 태진아가 중견 트로트 가수의 일본진출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엔카 부문에서 주목받는 “한류스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물론 이들의 해외무대 도전을 오늘날 아이돌 가수들과 배우들이 주축이 된 “한류열풍” 또는 “K-POP 열풍”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1990년대 당시에 국내 가요계의 전설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던 서태지, 신승훈, 태진아와 같은 가수들이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해외 무대에서 새로운 도전을 개시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뜻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부연설명: 과거에도 국내 인기가수들의 해외진출 사례는 존재했습니다. “원조 걸그룹” 김씨스터즈는 이미 1950년대에 미국 무대에 진출하면서 해외진출의 초석을 다졌고, 1960대에는 패티김이 한국 가수 최초로 일본에 초청되고, 미국 무대에도 진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윤복희가 주축이 된 여성그룹 “코리안 키튼즈”는 영국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펼치면서 현지 언론의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1960~80년대 사이에도 국내 인기가수들은 일본이나 동남아 등의 무대에서 나름의 팬층을 확보하며 인기를 누렸습니다.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현지의 올드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인 히트곡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패티김, 나훈아, 조용필 등의 톱가수들도 국내 무대에서의 인기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나름의 인기를 누렸고, 특히 조용필은 일본진출 실적에서도 역대 한국 가수들 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멸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도 국내 가수들이 해외진출을 시도하는 사례는 계속됐지만, 눈에 띌 정도의 실적을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트로트 가수 김연자는 자신의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일본에서 꾸준이 활동하며 입지를 다졌고, “섹시퀸” 김완선은 국내 무대에서 은퇴선언을 한 이후에 홍콩이나 대만 등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면서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는 “테크노 뽕짝”을 앞세운 이박사가 각광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에는 댄스그룹 클론이 대만 등지에서 인기를 누리고, 아이돌 그룹 HOT가 중화권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한류열풍”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면서 아이돌 그룹이 주축이 된 “해외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보아(BOA)가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아시아의 별”로 부각되었습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비(Rain)가 미국 진출을 시도하면서 “월드스타”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가요계를 주름잡고 있는 아이돌 그룹들은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 등지에 진출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 되었고, 일부 걸그룹들은 미국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90년대 대표 가수들의 해외진출은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는 분위기가 강한 편이고, 오늘날의 아이돌 그룹들이 주축이 된 “한류열풍” 또는 “K-POP 열풍”과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미 시대가 변하고 전성기가 지난 상태에서 과거의 스타가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사실 자체에 나름의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는 편입니다. 특히 신승훈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 국내 가요계 활동에서 다소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평을 듣던 중 일본진출을 통해서 새로운 활력을 찾고 한국 대표가수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
1990년대 초반에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변진섭은 신승훈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발라드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변진섭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이문세, 이승철과 함께 “발라드 3인방”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그 중에서도 이승철과는 희대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변진섭은 “희망사항”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가요계를 석권했습니다. 변진섭 이후로는 1990년대 초~중반의 신승훈,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조성모가 역시 “발라드 황제”의 계보를 이으며 가요계를 석권한 바 있습니다. 변진섭은 1990년대 초반 이후로 전성기는 지난 상태이지만, 10년 이상 꾸준하게 음악활동을 지속하면서 여전히 후배 가수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변진섭이 전성기를 누렸던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의 가요계 판도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는 트로트 여제 주현미가 당대 최고의 국민적인 스타로 군림하는 가운데, 신세대의 사랑을 받는 변진섭이 대항마로 떠오르며 가요계를 양분하는 구도였습니다. “발라드”라는 특정 장르의 상황만을 놓고 봤을 때는 “이문세 - 변진섭 - 신승훈 - 조성모”의 순서로 “발라드 황제”의 계보가 이어졌습니다. 2000년대 이후로 이승철이 재기에 성공하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발라드 황제” 신승훈을 필두로 해서 “신승훈 이전 - 이문세, 이승철, 변진섭”, “신승훈 이후 - 조성모, 성시경”의 구도가 발라드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국민가요”를 탄생시킨 노사연(만남), 김정수(당신), 김수희(애모)는 각각 MBC 10대 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와 “KBS 가요대상”을 수상하면서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노사연과 김정수는 모두 오랜 무명생활의 설움을 딛고 가요대상을 수상하며 감동을 안겼습니다. 한편 설운도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철, 송대관, 태진아와 함께 “트로트 4인방”으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트로트 4인방” 중에서 가장 젊은 설운도는 송대관, 태진아의 아성을 위협하며 히트곡 퍼레이드로 경쟁구도를 형성했습니다.
그 외에도 1990년대 초반에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가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상우, 심신, 이범학, 강수지, 원미연, 신성우, 이덕진, 이현우 등이 있었습니다. ROCK 밴드 시나위의 보컬 출신인 김종서, 임재범은 솔로가수로 데뷔한 이후에도 젊은이들에게 각광받는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ROCK 밴드 백두산의 보컬 출신인 유현상은 한때 트로트 가수로의 전향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에 걸쳐서는 박미경, 박진영, 이소라, 김정민, 김현철, 엄정화 등의 솔로가수들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엄정화는 김완선의 계보를 잇는 “섹시퀸”으로 각광받았고, 박진영은 당대의 인기가수로 전성기를 누리는 가운데 훗날 국내 굴지의 아이돌 기획사 수장으로 발돋움할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었습니다.
김수희는 본래 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가수였고, “남행열차”라는 국민가요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1993년 당시의 가요계 상황은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서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의 트로이카 체제가 막을 올리려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김수희의 “애모”가 전국민적인 히트를 기록하면서 쟁쟁한 후배들을 제치고 KBS 가요대상을 수상했던 장면은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편 1990년대 중반에 김수환 추기경은 KBS의 “열린음악회”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자신의 애창곡으로 “김수희의 애모”를 부르며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랩댄스 열풍을 주도한 현진영은 서태지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댄스와 힙합음악의 유행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현진영은 누구보다도 짧고 굵은 전성기를 누리며 서태지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서 위용을 떨쳤습니다. 현진영은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에 마약사건에 연루되면서 뼈아픈 공백기를 가졌지만, 2002년 이후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현진영은 서태지와 함께 “랩댄스, 힙합”이라는 장르의 선구자적 역할을 함으로써 대중음악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2000년대 컴백 이후에는 재즈 음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현진영이라는 가수 개인의 평가는 “아이돌”보다는 “힙합, 재즈 뮤지션”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진영이 처음 데뷔할 당시에 “SM 엔터테인먼트 1호 가수”였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날의 아이돌 그룹들의 역사적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초반의 현진영, 그리고 현진영과 라이벌 관계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서태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신해철과 이승환은 데뷔 초창기에 대중들의 각광을 받는 인기가수로서도 성공한 동시에, 이후 싱어송라이터, 뮤지션의 면모를 선보이며 매니아층을 굳건한 지지를 바탕으로 롱런했습니다. 신해철은 데뷔 초창기에는 “원조 아이돌”의 면모로 부각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ROCK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서 서태지와 종종 비교대상에 올랐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인디밴드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고, “MBC 백분토론”의 논객으로 맹활약하면서 사회적 저명인사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승환은 데뷔 초창기에는 발라드 가수로서 높은 인기를 얻었지만, 최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는 라이브 콘서트 무대를 위주로 활동하면서 ROCK 음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승환은 인기 정상의 발라드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콘서트의 거장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비교대상으로서는 비슷한 캐릭터를 지닌 신승훈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믿기지 않는 “동안 외모”로서는 서태지, 김원준 등과 종종 비교대상에 오르기도 합니다.
한편 김원준은 1990년대 초~중반에 김건모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댄스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유승준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까지 남자 솔로가수 부문에서 조성모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며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 외에도 룰라, 클론, 노이즈, R.ef, DJ DOC, 터보, 쿨 등의 댄스그룹들이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인기를 얻으면서 “아이돌 전성시대”가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한시대를 풍미했습니다.
[부연설명: 오늘날의 가요계가 아이돌 댄스그룹 위주로 재편되면서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 국내 가요계에 댄스뮤직의 붐을 일으켰던 “원조 아이돌”의 존재감은 다시금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가요계의 특수한 풍토에서 “댄스”와 “힙합”은 독자적인 장르로서의 인식은 다소 희박한 편이었고, “댄스열풍”에 편승해서 “힙합”이라는 장르가 함께 발전을 이룬 뒤, 독자생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한국 가요계에서 댄스뮤직은 1980년대 후반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의 등장을 계기로 청소년, 청년 가요팬들의 각광을 받으며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데뷔 시기는 “김완선(1986) -> 소방차(1987) -> 박남정(1988)”의 순서였지만, 당시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박남정이 가장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의 마돈나”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완선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들 “원조 아이돌 3인방” 중에서는 가장 오랜 생명력을 과시하며 롱런했습니다. 소방차는 “대한민국 최초의 아이돌 댄스그룹”으로서 오늘날 존재감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89년에 데뷔했던 현진영은 댄스뮤직 분야의 촉망받는 신예로 떠오르던 중 마약사건에 연루되며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1992년에는 마침내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해서 “난 알아요”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국내 가요계의 비주류 장르였던 “댄스뮤직”을 대표적인 주류 장르로 격상시키면서 본격적인 “댄스뮤직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1992년에 컴백한 현진영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서태지에 필적하는 최대의 라이벌로 떠올랐습니다. “서태지 열풍”과 “현진영 열풍”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랩댄스 열풍”은 10대 청소년들의 트렌드를 대표하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이후에 현진영은 또한번 마약사건에 연루되면서 공백기를 갖게 되었고, 그의 전성기도 허망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서태지는 “댄스뮤직” 분야에서는 더 이상 경쟁자의 존재가 무색한 절대강자의 지위에 올라섰지만, 점차 댄스 음악에서의 탈피와 함께 자신이 본래부터 추구해왔던 ROCK 음악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댄스뮤직” 분야에서는 김원준과 김건모의 “양김(金)”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고,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김건모가 “댄스뮤직” 분야의 절대강자로 등극했습니다. 이때부터 국내 가요계에서는 “발라드 - 신승훈”, “댄스 - 김건모”의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노이즈와 잼의 라이벌 구도는 마치 “HOT vs 젝키”의 초기 버전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댄스뮤직 분야의 라이벌 구도의 변천사는 “서태지 vs 현진영” -> “김원준 vs 김건모”, “노이즈 vs 잼”, “룰라 vs 투투”-> “솔리드 vs R.ef” -> “HOT vs 젝스키스”, “핑클 vs SES”, “god vs 신화” -> “HOT vs god” -> “동방신기 vs SS501” -> “동방신기 vs 빅뱅”, “원더걸스 vs 소녀시대”의 구도로 이어졌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오늘날 아이돌 그룹의 초창기 버전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형태의 댄스그룹들이 중흥기를 이뤘습니다. 노이즈, R.ef, DJ DOC, 룰라, 투투, 클론, 쿨, 터보 등 대체적으로 댄스그룹들이 성황을 이룬 가운데, 발라드 듀오인 녹색지대, R&B 그룹인 솔리드, 국악과 가요를 접목시킨 듀오 육각수, 힙합그룹인 지누션, 원타임 등도 함께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1996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이후부터 HOT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과도기적 상황에서는 아이돌, 언타이틀, 영턱스클럽 등이 등장하며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의 개막이 임박했음을 알렸습니다.
1997년 이후부터는 HOT, 젝스키스, 유승준, 핑클, SES, 베이비복스 등을 중심으로 해서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가 열렸고, 기존에 인기를 누렸던 댄스그룹들은 다소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당대 최고의 혼성그룹 룰라와, 중견 댄스그룹인 클론, DJ DOC, 쿨, 터보 등은 꾸준한 인기와 생명력을 이어가며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또한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데뷔한 혼성그룹 코요태, 샵 등도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댄스뮤직”의 역사를 다시 정리할 때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는 초창기 장르의 기틀을 확립한 선구자의 역할로서, 서태지와 현진영은 댄스뮤직 전성기의 막을 올린 선구자이자 “원조 아이돌”로서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김원준과 김건모는 댄스뮤직의 최전성기를 이끈 주역으로서, 그리고 HOT와 god는 댄스음악에서 파생된 “아이돌 전성시대”의 선봉장으로서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와 2010년대 이후에는 보아(BOA), 비(Rain), 싸이(PSY)가 각각 “한류스타”, “월드스타”의 면모로 부각되었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댄스뮤직”이라는 특정 장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는 서태지와 김건모의 이름이 가장 대표적인 레전드의 이름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태지와 김건모 이후에는 가수 개인의 성공 자체에 포커스를 맞췄을 때는 보아(BOA), 비(Rain), 싸이(PSY)의 존재감이 대표적으로 부각되는 경향이 있지만, “아이돌 전성시대”라는 특정한 키워드에 포커스를 맞췄을 때는 HOT, god, 핑클, 젝스키스, 신화, SES로 대표되는 “1세대 아이돌”과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로 대표되는 “2세대 아이돌”의 존재감이 대표적으로 부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 “힙합”이라는 장르는 국내 가요계에서는 처음에는 “댄스뮤직”의 하위장르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댄스열풍”과 함께 “랩음악”의 붐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해서, 현진영이 좀더 흑인음악의 색채를 강화하고, 거기에 듀스가 좀더 흑인음악의 색채를 강화하는 분위기였지만, 199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이들은 모두 “댄스가수”로 분류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오늘날의 가요계 풍토가 변화하면서 과거의 선배 가수들의 존재감이 부각되고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서는 듀스와 소방차의 사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2000년대 초반에는 드렁큰타이거의 등장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힙합”이라는 장르는 “댄스뮤직”의 하위장르가 아닌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힙합”이라는 장르의 선구자로서 듀스의 존재감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1990년대 중반 당시만 해도 듀스는 수많은 “서태지 아류 댄스그룹” 중의 하나로 치부되는 분위기였고,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도 룰라, 노이즈, 솔리드, R.ef, DJ DOC 등의 댄스그룹들과의 순위경쟁에서 열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 “힙합”이라는 장르가 국내 가요계에서 독자생존에 성공하면서, 드렁큰타이거(타이거JK)가 “힙합의 대표주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해서 힙합 장르의 선배 그룹인 듀스가 “힙합의 선구자”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아이돌 전성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아이돌 댄스그룹”으로서 소방차의 존재감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본래 1980년대 후반 당시만 해도 그 시절의 기성세대들은 댄스가수들에 대해서는 “가수도 아니다”는 인식을 가지고 거부감을 표출해 왔었습니다.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소방차 멤버 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당시 TV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단 한 차례도 1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국내 가요계에 댄스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원조 아이돌”로서 서태지, 현진영 등의 이름이 언급되고, 좀더 시대를 거슬러올라가면 박남정, 김완선과 함께 댄스그룹인 소방차의 이름도 곧잘 회자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대 이후로는 아예 솔로가수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아이돌 그룹”들이 모든 대세를 장악하다시피 한 상태에서, 소방차에게는 “대한민국 최초의 아이돌 댄스그룹”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오늘날의 가요계 풍토의 변화에 따라서 과거의 선배 가수, 또는 그룹들의 존재감이 재조명되고 재평가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에 와서 과거의 선배 가수들의 존재감을 되새기고 재평가를 할 때, 일단 “댄스뮤직”이라는 장르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아울러서 재평가를 할 때는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 서태지, 현진영, 김원준, 김건모 등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편이며 특히 서태지와 김건모는 가장 대표적인 레전드로서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후배들의 연결고리를 설정할 때는 HOT, god를 필두로 한 아이돌 그룹들, 그리고 보아(BOA), 비(Rain), 싸이(PSY)를 필두로 한 “한류스타”, “월드스타”라는 키워드가 연결고리를 형성하며 “한국 댄스뮤직의 역사”라는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댄스뮤직의 전성기에서 파생된 “힙합, 흑인음악의 뿌리”에 포커스를 맞췄을 때는 1992년의 서태지, 현진영의 선구자적인 역할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서태지와 현진영은 “아이돌”보다는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한 편이고, 이들의 주력장르 역시 “서태지 - ROCK”, “현진영 - 재즈”로서 힙합과는 다소 거리가 먼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 당시의 서태지와 현진영이 일으켰던 “랩댄스 열풍”으로 인해서, 이들에게는 “원조 아이돌”의 이미지와 “힙합의 선구자”의 이미지가 동시에 부여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서태지와 현진영의 위상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는 합니다. 서태지의 동시대의 라이벌로서, 비슷한 캐릭터를 지닌 동시에 서태지의 아성을 위협한 최대의 도전자는 현진영이었지만, 현진영의 짧고 굵은 전성기는 마약사건으로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오히려 서태지의 은퇴 이후에 등장한 HOT가 서태지와 비슷한 캐릭터로서 10대 청소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비교대상으로서 HOT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10대~20대의 청소년, 청년층에서는 “원조 아이돌”로서 서태지와 HOT를 서로 비교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으며, “10대 청소년의 우상”으로서도 서태지와 HOT를 가장 “닮은꼴 캐릭터”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뮤지션”을 중요하게 여기는 음악 매니아층 중에서는 서태지를 “아이돌”로 분류하고 비교대상으로 삼는 문화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는 경향도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매니아층에서는 “뮤지션”으로서의 면모에 포커스를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서태지의 라이벌 또는 비교대상으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의 이름은 “댄스, 힙합의 선구자”로서는 현진영, 그리고 “ROCK 뮤지션”으로서는 신해철의 이름이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에 데뷔한 H.O.T는 10대 청소년들의 새로운 우상으로 떠올랐습니다. 또한 “SM 엔터테인먼트”(이수만)라는 거대 기획사의 존재감이 대중들에게 부각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거대기획사의 상업주의” 때문에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던 측면도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 가요계의 역사에는 “아이돌 전성시대”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제1차 아이돌 시대”를 이끌었던 선두주자는 H.O.T였습니다. “아이돌” 그룹들은 이전 시대의 국민가수들처럼 모든 세대를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10대 청소년들에게만큼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하나의 문화현상을 형성했습니다.
비록 “아이돌”이라는 자체만으로도 매니아층이나 평론가 집단에게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또한 5년 남짓한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해체의 비운을 맞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차 아이돌 전성시대”의 선두주자였던 HOT만큼은 1990년대 가요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HOT는 “SM 엔터테인먼트”가 국내 굴지의 연예 기획사로 자리잡게 된 일등공신이었으며, 2000년대 이후 SM 엔터테인먼트가 국내 연예 기획사의 독보적인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는 초석을 다졌습니다.
“SM 엔터테인먼트”(이수만)의 성공은 이후 “DSP 엔터테인먼트”(이호연), “JYP 엔터테인먼트”(박진영), “YG 엔터테인먼트”(양현석), “엠넷미디어(구 GM기획. 김광수)” 등의 기획사들이 연이어 성공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SM 엔터테인먼트”는 1990년대 후반에 HOT, SES, 신화를 데뷔시킨 데 이어서 2000년대 초반에는 보아(BOA),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동방신기,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샤이니 등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키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이돌 기획사 부문의 절대강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젝스키스는 HOT의 최대 라이벌로 떠오르며 “제1차 아이돌 전성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HOT와 젝스키스는 모두 5년도 안 되는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해체됐지만, 가요계 판도를 솔로가수 위주에서 아이돌 그룹 위주로 재편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HOT와 젝스키스의 라이벌 구도는 그들의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 vs DSP 엔터테인먼트”의 경쟁구도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여자 아이돌 그룹인 핑클과 SES가 연이어 데뷔하면서 두 기획사의 경쟁구도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습니다.
[ 부연설명: “제1차 아이돌 시대”의 소속사별 대표 그룹은 "SM 엔터테인먼트"에서는 HOT, SES, 신화가 포진했고, “DSP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가 포진했습니다. 사실 두 소속사의 수장인 이수만과 이호연의 과거 이력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호연은 1980년대 후반에 소방차를 발굴한 장본인이고 이수만은 1990년대 초반에 현진영을 발굴한 장본인이었습니다. 1990년대 초~중반에도 이호연은 DSP의 전신인 “대성기획”을 통해서 잼(ZAM), 아이돌 등의 그룹을 데뷔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돌 전성시대의 결정적 계기는 SM의 이수만이 HOT를 최고 인기그룹으로 성공시키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이후에는 SM에서 먼저 데뷔시킨 그룹이 성공을 거두면 DSP에서 멤버 숫자를 한 명 더 추가해서 라이벌 그룹으로 데뷔시키는 구도로 이어졌습니다. 두 소속사의 라이벌 관계는 남자 아이돌 그룹인 “HOT vs 젝스키스”의 라이벌 구도를 통해서 정점을 이뤘고, SM 소속의 HOT가 한발 앞서가는 구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초창기의 라이벌 구도에서는 SM이 모든 면에서 앞서가고 있었지만, "핑클 vs SES"의 라이벌 구도에서는 1999년 이후부터 DSP 소속의 핑클이 앞서가는 구도로 역전되었습니다. 한편 신화는 초창기에는 클릭비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지만, 이후 박진영 사단에서 god를 데뷔시키면서 "god vs 신화"의 새로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god는 SM과 DSP 이외의 기획사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둔 아이돌 그룹이었습니다. god와 신화의 전성기는 2000년대 초반으로 넘어간 이후에 본격화되었지만, 일반적으로는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전성기를 누린 HOT, god, 핑클, 젝스키스, 신화, SES, 베이비복스로 대표되는 7개의 그룹이 "1세대 아이돌"을 대표하는 인기그룹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후 약 10년 가량의 세월이 흐른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SS501로 대표되는 6개 그룹이 "2세대 아이돌"을 대표하는 인기그룹으로 떠올랐습니다. 한때는 "동방신기 vs SS501"의 라이벌 구도를 통해서 "SM vs DSP"의 라이벌 구도가 재연되는 듯 보였지만, JYP(박진영)와 YG(양현석)가 본격적으로 아이돌 시장에 뛰어들고 DSP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기획사 간의 라이벌 구도도 완전히 재편되었습니다.
"2세대 아이돌"에서는 아예 라이벌 구도의 포커스 자체가 "동방신기 vs 빅뱅"의 구도로 이동했고, 기획사의 판도 또한 SM, JYP, YG의 3대 기획사 체제로 재편되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동방신기는 "2세대 아이돌"의 선두주자로서 "1세대 아이돌"의 선두주자였던 HOT와 종종 비교대상에 오르기도 했고, HOT와 동방신기는 같은 소속사의 선후배이기도 하면서, SM이라는 기획사에서 간판으로 내세운 그룹이기도 했습니다.
가요계 전체 역사를 놓고 봤을 때는 여전히 "아이돌 그룹"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1세대, 2세대 아이돌 전성시대"였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이후의 상황만을 놓고 보더라도, 가요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여전히 솔로가수인 조성모, 보아(BOA), 비(Rain)가 아이돌 그룹들보다 더 성공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조성모는 2000년대 초반에 "더블 밀리언셀러"의 위력을 발휘했고, 보아(BOA)는 2000년대 중반에 "아시아 대표 한류스타", 비(Rain)는 2000년대 후반에 "월드스타"로 떠오르며 최고의 스타로 등극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가요계 판도가 아이돌 그룹 위주로 재편되다 보니까, 가요계 전체의 역사와는 별도로 "아이돌"이라는 특수한 분야의 역사에서는 "1세대 아이돌" 시절의 HOT와 god가 "전설의 아이돌"로 존재감이 부각되었고, 특히 HOT는 "아이돌 부문의 선구자"적인 역할이 부각되었습니다.
"SM 엔터테인먼트"라는 특정 기획사의 상황만을 놓고 봤을 때도, SM이라는 기획사가 최고의 정점에 올랐던 시점은 2000년대 초~중반 보아(BOA)의 전성기 시절이었고, 오늘날 보아(BOA)는 이수만과 함께 SM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소속사 출신 가수 중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에이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SM이라는 기획사가 초창기에 성공을 거두는 초석을 마련한 그룹이 HOT였기 때문에, SM이라는 특정 기획사의 입김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오늘날의 가요계에서도 HOT는 종종 "아이돌 부문의 선구자" 또는 "SM의 원조 에이스"의 이미지로 홍보되기도 합니다. ]
여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는 핑클과 SES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특히 핑클은 1999년에 가요대상(서울가요대상, SBS 가요대전 대상)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안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 남자가수들(조성모, 유승준, H.O.T, god)과 가요계 정상을 다퉜습니다. 걸그룹이 가요대상을 차지한 것은 1969년의 “펄 씨스터즈”(MBC 10대가수 가요제) 이후로 핑클이 30년 만에 통산 두번째를 기록했으며, 여자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핑클이 최초였습니다. 핑클 이후로는 약 10년 가량의 세월이 흐른 2008년과 2009년에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연달아서 “서울가요대상”의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핑클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꼽혔던 S.E.S는 음반판매 부문에서 걸그룹 중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습니다. “핑클 vs S.E.S”의 라이벌 구도는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대 후반에 “원더걸스 vs 소녀시대”의 라이벌 구도로 재연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걸그룹 전성시대”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여자 아이돌 그룹들이 각광받고 있고, 그 선두주자인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모두 핑클과 SES를 능가하는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2007~2008년의 원더걸스”와 “2009~2010년의 소녀시대”는 모두 이전 시대 최고의 걸그룹이었던 “1999~2000년의 핑클”과 종종 비교대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한편 1990년대 들어서는 “가요대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양대 공중파 방송이었던 MBC와 KBS의 가요대상이 권위가 하락한 가운데, “골든디스크”가 새롭게 최고 권위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밖에도 “서울가요대상”, “SBS 가요대전”이 신설되면서 가요대상이 난립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까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MBC 10대가수 가요제”는 1990년대 중반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1990년대 후반에 부활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방송 3사(MBC, KBS, SBS)의 가요대상이 여전히 가요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로 공중파 방송 3사에서는 “가요대상” 시상식 자체를 완전히 폐지하게 됩니다.
1990년대에 활약한 가수 중에서 “레전드(전설)”의 반열에 꼽히는 가수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송대관, 태진아, 노사연, 설운도, 김수희, 김정수, 변진섭, 이상우, 강수지, 엄정화, 현진영, 신해철, 이승환, 김원준, 박진영, 김광석, 김종서, 안치환 등의 가수들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편 아이돌 댄스그룹의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지지층이 특정세대(10대 청소년)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고, 그나마도 수명이 짧은 편이기 때문에 인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가요계에 “아이돌 전성시대”가 도래함에 따라서, “1세대 아이돌”의 선두주자였던 HOT는 “원조 아이돌”의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레전드”의 반열에 어느 정도 명함을 내밀고 있습니다.
1990년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히트곡은
“변진섭 - 희망사항”, “노사연 - 만남”, “김수희 - 애모”, “김현식 - 내 사랑 내 곁에”, “김정수 - 당신”, “신승훈 - 미소 속에 비친 그대”, “신승훈 - 보이지 않는 사랑”, “신승훈 - 그후로 오랫동안”, “김건모 - 핑계”, “김건모 - 잘못된 만남”, “김건모 - 스피드”, “서태지와 아이들 - 난 알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 하여가”, “서태지와 아이들 - 컴백홈”, “현철 - 싫다 싫어”, “송대관 - 차표 한 장”, “송대관 - 네박자”, “태진아 - 거울도 안 보는 여자”, “태진아 - 미안 미안해”, “태진아 - 노란 손수건”, “설운도 - 다함께 차차차”, “설운도 - 사랑의 트위스트”, “최백호 - 낭만에 대하여”, “하춘화 - 날버린남자”, “신해철 - 안녕”, “이승환 -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이상우 - 그녀를 만나는 곳 백미터 전”, “심신 - 오직 하나뿐인 그대”, “이범학 - 이별 아닌 이별”, “손지창, 김민종 - 너만을 느끼며”, “강수지 - 보라빛 향기”, “김민우 - 사랑일뿐야”, “김국환 - 타타타”, “현진영 - 흐린 기억 속의 그대”, “김원준 - 모두 잠든 후에”, “신성우 - 내일을 향해”, “박정운 - 오늘같은 밤이면”, “박진영 - 날 떠나지 마”, “박미경 - 이브의 경고”, “룰라 - 날개 잃은 천사”, “노이즈 - 너에게 원한건”, “솔리드 - 천생연분”, “R.ef - 이별공식”, “DJ DOC - DOC와 춤을”, “녹색지대 - 준비없는 이별”, “클론 - 쿵따리 샤바라”, “쿨 - 해변의 여인”, “터보 - 회상”, “육각수 - 흥보가 기가 막혀”, “이소라 - 제발”, “김정민 - 슬픈 언약식”, “코요태 - 순정”, “엄정화 - 페스티벌”, “HOT - 캔디”, “젝스키스 - 커플”, “핑클 - 영원한 사랑”, “SES - Dream's come true”, “베이비복스 - Get up”, “임창정 - 그때 또다시”, “유승준 - 열정”, “조성모 - 슬픈 영혼식”, “김종환 - 사랑을 위하여”, “김종서 - 아름다운 구속”, “김경호 - 금지된 사랑”, “임재범 - 고해”, “안치환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박정현 - 꿈에”, “김광석 - 이등병의 편지”, “한동준 - 사랑의 서약” 등의 노래가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국민가수”의 계보는 “1920~30년대의 윤심덕, 이애리수, 이난영, 고복수”, “1940~50년대의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1960년대의 이미자와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과 나훈아”, “1980년대의 조용필”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굳이 시대별로 한 명씩만 대표적으로 거론할 경우 “남인수(40년대)->현인(50년대)->이미자(60년대)->나훈아(70년대)->조용필(80년대)”로 이어지는 계보가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조용필과 이미자가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으며, 광복 이전까지 포함할 경우에는 “광복 이전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이후의 가왕 조용필”이 종종 비교대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사에서 가요 시상식을 정착시킨 1960년대 이후의 대중가요에 익숙한 오늘날의 어르신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이 대표적인 국민가수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4인방은 어르신 세대뿐만이 아니라 신세대 가요팬들에게도 가요계의 불멸의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30대 이하의 젊은층과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극명하게 양분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그래도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층에 좀더 주도권이 있었기 때문에 젊은층의 사랑을 받았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를 대표적인 “빅3”로 꼽고 있습니다. 1990년대의 대표적인 5명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태진아, 송대관은 모두 가요계의 대선배이자 전설로서 후배들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우열을 비교해서 대표주자를 가려내려고 한다면 “빅3”(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압축되고, “빅3” 중에서는 다시 서태지와 신승훈이 1990년대의 대표적인 전설로 압축되며, 그 중에서도 단 한 명만으로 압축할 경우에는 서태지가 그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고, 은퇴 후 또는 사후에도 수십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와 "국민가요"가 존재했었는데, 그러한 "진정한 국민가수"의 계보는 1980년대의 조용필을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광복 직후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총망라해서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고, 그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들은 윤심덕, 이애리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남인수와 백년설이 가요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1940년대와 남진, 나훈아가 가요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1970년대는 가장 뜨거웠던 라이벌 시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0~50년대를 휩쓸었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직후에 “대한민국 1호 가수”로 등극했던 현인, 1960년대를 휩쓸었던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1980년대를 휩쓸었던 "가왕" 조용필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전설의 계보에서도 사실상 "왕중왕"에 해당되는 존재로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의 100년 역사를 무조건 10년 단위로 끊어서 도식화한다는 것에는 그만큼 불합리성이 작용할 수 있고, 또한 1980년대 이전 세대간 단절현상이 없던 시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과거의 “진정한 국민가수”들을 1990년대 이후의 신세대 가수들과 단순 비교하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합리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10년 단위로 단 한명씩의 이름만 순차적으로 나열할 경우”에는 “1980년대 조용필의 시대”를 기준으로 해서 “조용필 이전 - 나훈아, 조용필 이후 - 서태지”의 구도가 설정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10년 단위의 대표주자를 한명씩만 나열하면서 인위적으로 리스트를 작성할 경우에는 "윤심덕(1920년대) -> 고복수(1930년대) -> 남인수(1940년대) -> 현인(1950년대) -> 이미자(1960년대) -> 나훈아(1970년대) -> 조용필(1980년대) -> 서태지(1990년대) -> 조성모(2000년대)"로 이어지는 계보를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성모를 1990년대 가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비(Rain) 또는 보아(BOA)를 200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분류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시대에 전성기를 누렸으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로서 그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지기도 합니다. 팝음악계에서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가 동시대의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로서 역사에 회자되는 전설로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역사에서도 그러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의 남인수 vs 백년설”, 1950년대의 남인수 vs 현인”, “1960년대의 이미자 vs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는 가장 대표적인 라이벌 관계로서의 상징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는 그야말로 라이벌의 상징 그 자체로 통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가수는 오직 남진과 나훈아뿐이다”는 평론까지 등장했을 정도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는 동시대의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전설로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중장년층 이상의 기성세대들이 가요계의 팬문화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가운데, 신세대라 불리는 30대 이하의 젊은층이 가요계의 팬문화의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과거와 같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의미의 국민가수"의 명맥이 끊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세대"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3인방이 오늘날의 신세대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존중을 받는 전설로 통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그 신세대 중에서도 10대 청소년과 아이돌 팬덤을 제외한 나머지 대중이나 매니아층이 서서히 가요계의 팬덤문화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국내 가요시장 자체도 최악의 침체기를 맞이했고, "전설"이라 불릴만한 톱스타의 부재현상도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전설"의 이미지에 근접한 가요계의 톱스타로서는 "마지막 국민가수" 조성모와 "한류스타, 월드스타"로 부각되는 보아(BOA), 비(Rain)의 이름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가요계의 세대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고착화되면서 연령대별로 나타나는 “세대차이”도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로 넘어갈수록 특정 세대에 의한 가요시장 편중현상이 더욱 심화되면서, 대중적인 공감대가 점차 약화되어가고 스타급 가수들이나 히트곡의 수명도 점차 짧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10대 청소년들의 관심사는 주로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2000년대와 201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소위 “1세대, 2세대 아이돌”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있으며, 그 외에도 “한류스타”, “월드스타” 등의 키워드에 관심사가 집중되는 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청소년 팬층은 특정 스타를 지지하는 “아이돌 팬덤”은 상당한 결집력을 보이는 반면에 나머지 대중들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경향도 보이고 있으며, 심지어는 같은 10대 청소년 팬들 중에서도 이들 아이돌 가수와 팬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드러내는 안티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20~30대 청년층에게는 1990년대 당시의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빅3”가 여전히 가요계의 대표적인 전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들 “90년대 빅3”와 함께 20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조성모까지 포함한 빅4가 여전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가요계의 최강자로 인식되고 있고,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신세대의 영웅 4인방”도 기존의 “기성세대”에 해당하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 어르신 세대들에게는 외면을 받는 뚜렷한 한계점도 함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 어르신 세대들에게는 역시 과거의 “트로트 국민가수”들이 거의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 사람들은 10년만 지나도 엄청난 세대차이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의 “기성세대”에 해당하는 어르신들의 시대에는 세대차이가 오늘날처럼 극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1930~50년대에 사랑받았던 “국민가수”와 “국민가요”들이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르신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꾸준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를 마감하고 201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의 시점에서 40대 이상의 연령대를 차지하는 중장년층의 “기성세대”는 주로 1960~80년대의 가요계의 팬문화를 향유했던 세대의 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을 좀더 세분화해서 나눌 경우에는 “7080 추억세대”와 “어르신 세대”로서 나뉘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 “기성세대”들에게는 여전히 이미자, 패티김, 최희준, 배호, 남진, 나훈아, 하춘화, 조용필 등으로 대표되는 국민가수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들보다 더 이전 시대에 활동했던 “원로급 국민가수”들의 존재감 역시 여전히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 가요계 팬문화의 주도권이 “신세대”에게로 넘어간 이후에도 이들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송대관, 태진아로 대표되는 트로트 가수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신세대”와는 별도의 영역에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
[물론 가요팬들 중에서 “기성세대”에 속하는 연령대의 팬들은 “조용필”과 함께 그 이전에 전설적인 국민가수로 군림했던 나훈아, 남진, 이미자, 패티김, 현인, 남인수, 백년설 등의 선배가수들을 최고로 인정하고 “조용필 이후”에 등장한 가수들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신세대”에 속하는 연령대의 팬들은 “조용필”까지는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그 이전의 전설적인 선배가수들에 대해서는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상 “조용필”이라는 공통분모를 경계선으로 해서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확연하게 양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날의 “신세대” 가요팬에게 옛날 트로트 가수들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현상 자체는 불가피한 현상이고,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 조용필이라는 최고의 전설이 있었다”는 사실과 “조용필 이전에도 전설적인 국민가수들의 존재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듯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세대” 가요팬에게는 당연히 “조용필” 이후에 해당하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가수들에 대해서 관심도가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용필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후배가수들 중에서 최고의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 있는 가수들을 꼽는다면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태진아, 송대관, 조성모... 정도의 가수들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한편 “기성세대”와 “신세대”로 불리는 세대의 가요 팬들의 정서가 이질적인 현상을 보이는 요인으로서는 대중가요 시장이 지나치게 10대 청소년 위주로 편중되고 연령층이 높을수록 대중가요 팬덤문화에서 소외되는 현상을 보이며 대중가요의 판도 자체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1990년대->2000년대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1960년대~1980년대까지의 대중가요에 익숙한 세대인 어르신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5인방의 존재가 대한민국 가요계의 상징 그 자체로서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4인방은 나이가 좀더 어린 신세대 팬들에게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 가요계의 전설 중의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는 가요계의 팬문화가 주로 10대~30대의 젊은층에게만 편중된 “그들만의 리그”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을 아우르지 못한 채, 중장년층에서는 별도로 “성인가요”라는 문화를 향유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르신 세대의 대부분이 조용필 이후로 등장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가수들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1990년대~2000년대의 대중가요에 익숙한 세대인 소위 “신세대”에게 있어서도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90년대 빅3”의 존재는 젊은층에게 있어서는 가요계의 중심인물이라는 공감대가 보편적으로 형성돼 있지만,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층 중에서도 10대 청소년 세대에게만 지나치게 편중된 “아이돌 팬덤”이 가요계 팬문화를 주도적으로 향유하고, 20~30대의 청년층마저도 가요시장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그들만의 리그”로서의 성격이 더욱 극단적으로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성세대에게 있어서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5인방이 “진정한 의미의 국민가수”로서 남녀노소,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폭넓은 지지와 공감대를 얻었고, 조용필을 마지막으로 그러한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의 맥은 완전히 끊겼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활동한 가수들이 “선배 레전드”에 해당하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의 아성을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도 “기성세대”라 불리는 어르신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세대에게 있어서는 비록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는 존재하지 않지만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3인방이 “확실한 빅3이자 젊은이들의 영웅”이라는 인식 자체는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반면에 200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아이돌 가수들은 “90년대 전설”에 해당하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의 아성을 결코 넘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인식이 “신세대”라 불리는 세대의 가요팬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신세대 내부에서조차 10대 위주로 지나치게 편중된 팬덤문화가 향유되고 있고, 심지어는 10대 청소년 내부에서조차 “아이돌에 대한 안티” 분위기가 만만치 않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수의 대중들에게는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가요계를 주름잡고 있는 아이돌 가수들에 대한 인식은 “남녀노소를 총망라한 전국민의 영웅”은 커녕, “젊은이들의 영웅”으로서도 한참 부족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
** 원문 작성자 => JOHN CENA
** 원문 작성 날짜 => 2012년 9월 17일
** 원문 출처 => http://johncena07.blog.me/70147137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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