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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방 살이 인생으로 시작했다.
누가 그랬습니다.
“인생은 고해(苦海)” 라고. "서러움 중에 내 집 없는 서러움이 으뜸이다" 고.
이제 내 나이 8 순을 훌쩍 넘긴 사람이 서울에 무작정 상경하여 대학을 마치고 잘못된 만남이 된
사람과 결혼을 하여 신혼 살림을 시작하여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려니 만감이 교차하네요.
1946년 해방된 지 1년 후 그간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모든 아이들이 한꺼번에 입학하였기에
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친구들이 함께 다녔고, 한 반에 칠 팔십 명이 보통이었습니다. 나는 9 살
이었고 굶주림 속에 월사 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면 집에 돌려보내 부모님께 졸라 대던 그런 시절
압니다.
옷이라고 해야 무명을 물들여 만든 검은 핫바지에 흰 저고리 차림이고 검은 고무신에 보자기로 싼
책을 어깨에 둘러메고 다녔으며, 졸업 사진 찍을 때는 양복 입고 다니던 친구의 상의만 빌리고 하의
는 핫바지 차림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를 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1년을
쉰 후 중학교를 갔고,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도 또 대학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무작정 상경하여 천운(
天運)으로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그처럼 소망 하던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즉 9 살에 초등학교 입학하여 중학교 입학 때, 대학 때 1년 쉬고 들어가니 다른 학생에 비해 사오 년
늦게 대학을 다니게 되다 보니. 1학년 때 징집 영장이 나왔지만 대학을 포기할 수가 없어 미룬 것이
4학년 때 기피자로 잡혀가서 교도소 신세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법의 용서를 받고 졸업하자마자 자원 입대하여 7 사단에서 만기 제대한 때가 1967년 1월 15일
이었습니다.
내가 제대할 무렵에는 월남 파병이 한창일 때라 초 비상 상태여서 밤에 완전 군장을 하고 자기 일쑤였
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못하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사선의 기로
에서 헤맬 때, 보고 싶다는 말도 뿌리치고 부잣집에 시집을 갔던 첫 여인이 5 년 후이혼하고, 나를 찾아
와 상병의 몸으로 최전방에서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가정을 이루면서 첫 딸을 임신한 아내를 제대를
하며 먼저 집으로 보내고 보름 후 제대하고 집에 가니 부모님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만남이었지만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해 1967년 3월 나의 첫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기는 태어났지 아내는 부모님과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지 나의 직장은 시기도 놓치고 1년을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지 나의 마음은 바짝 타 들어 가는 절박한 때일 때, 나는 임시 방편으로 군대에서 같이 보낸
김상철 친구의 처남을 가르치며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1968년 보험 회사에 취직이 되어 무엇
보다도 먼저 아내와 딸을 서울로 데려와 살림을 차린 것이 내가 얘기하려는 셋방 살이 인생의 고뇌였던
이야기입니다.
<서러운 셋방 살이 시작 1>
아내와 첫 딸을 시골에 놔둔 채 우선 직장부터 구하려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어느 11월, 날씨는
추운데 매일 집을 구할 생각에 속이 타 들어 가던 어느 날 남산에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저 많은 집들 속에 내가 아내와 나의 첫 아기 세 명이 살 곳이 없단 말인가?
1959년 서울에 와서 1967년까지 그 고생 다 하며 살았는데, 저 많은 집 중에 내가 살 집이 없나 생각
하며 가졌던 서러움은 지금도 가슴이 먹먹 합니다.
그래서 생각난 말이 “서러움 중에 내 집 없는 서러움이 으뜸이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1968년 2월 취직은 했지만 모든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바쁘게 얻은 직장이었기에
모두가 부족 그것이었습니다. 10명의 대졸 동료가 발령을 받았는데 두 명이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
갈 정도였습니다. 사령 장에 적혀 있는 급여가 믿기지 않아 이웃 동료의 사령장을 보니 마찬가지였
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따질 겨를이 없었으니 아내와 딸을 하루 빨리 데려와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일과가 끝나면 매일 셋방을 얻으러 다녔지만 가진 돈이 없는 걸 셋방을 구하는 것이 쉬웠겠
습니까? 더구나 친구 처남 가정교사도 하고 있었기에 이리저리 마음이 쫓겨 온종일 가슴은 시꺼멓게
타 들어 갔습니다.
단 돈 만 원을 쥐고 이리 뛰고 저리 뛰기를 한 달여 헤매다가 결국 문화 촌에서 6만 원 전세방을 얻어
셋방 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나의 월급이 팔천 오백 원이었는데 아무 돈도 없는 내가 6만 원
짜리 전세방 얻는 것은 흔한 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때 내가 가정교사 하던 곳이 삼양동인데
적은 돈으로 구하기 힘든 전세방을 얻으러 다니며 구하지 못하고 쫓기는 마음으로 귀가할 때면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내일은 또 어디를 헤매야 하는 걱정이 나의 가슴을 짓눌렀고요.
다음 날 일어나 출근하면서 주머니에 넣어둔 돈을 만져보니 만 원이 든 봉투가 없어졌더군요.
얼마나 참담하였겠습니까? 하늘이 노랬습니다. 세상에 어떤 돈인데 없어졌단 말인가?
거의 초 죽음이 되어 직장에 가서 말을 하니 주 영철 대리가 “최 형, 이리 와봐.”하고 주머니를 보고는
“자 봐. 여기를 찢고 돈 훔쳐 갔네.” 하는데 절망이었습니다. 어떤 돈인데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는 내
일생 가장 큰 마음의 상처입니다. 결국 그렇게 6만 원 짜리 전세방을 구했는데 당시 10만 원은 되어야
방 다운 방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 촌에서 세검 정으로 가는 길 옆에 냇가가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방을 구해 아내와 딸을 데리러 간 때가 농번 기였는데 그때 아내도 모내기를 돕고 있더군요.
아기 낳은 지 1년 동안 부모님의 미안한 시선을 받으며 살다가 서울로 간다니 소리 죽여 울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내가 사선에서 헤맬 때 아버지의 간곡한 바램을 거절하고 시집까지 갔다가 나를 만나
아내라는 이름이 되었으니 부모님과의 1년 동거가 얼마나 가슴 조이고 미안한 삶이었겠습니까!
그렇게 올라온 아내와 딸 셋이서 전세방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살림에 인창고등학교
다니는 처남이 함께 지나게 돼. 삶이 말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그 사람의 일생 경제력은 그 사람의 첫 직장과 같다”고요. 그랬습니다.
적은 월급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다 느끼실 겁니다. 그렇게 나의 서울
살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러운 셋방 살이 시작 2>
그 집에서 1년 정도 살다가 두 번째로 옮긴 전세 집은 그나마 평지에서 완전히 산 동네로 옮긴 집이었
습니다. 흔한 말로 달 동네 집 말입니다. 워낙 쪼들리다 보니 더 버틸 수가 없어. 옮기고 보니 수도도
없는 집이었습니다. 개울가에 수도가 하나 있었는데 그 수도에서 달 동네 사시는 사람들이 물을 갖다
먹어야 했지만 워낙 가파른 지역이라 여자들은 오르고 내리기가 어려웠고 수도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남자들이 물 지게로 물을 길러다가 물 동이에 채워야 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나로서는 그 시간 맞추기가 참으로 어려웠기에 먼저 수도 앞에 물 동이를 가져다 놓고
시간이 되면 물을 길러 나르던 아픔은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수도도 없어 수도 옆에 물동
이 줄을 서던 이야기 하면 지금의 사람들이 이해나 할까요? 그렇게 우리 세대는 물동이 세대였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라디오도 없어 그때 그처럼 인기가 많은 권투 경기 한번 보려면 주인 댁 눈치 보던 시절,
4300원에 트랜지스터 라디오 사서 아내에게 주니 그처럼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런 이야기 지금의 사람들은 픽션이 아니냐고 하겠지요.
거기에서도 1년 정도 살다가 워낙 가파른 산 동네라 아기도 있고 해서 오르내리기 무서워 하루 빨리
벗어나야겠다 싶어 평지로 옮겨 이사하였습니다.
<서러운 셋방 살이 시작 3>
다시 평지로 내려와서 세 번째 셋방 살이가 이어졌습니다. 나의 두 번째 아기가 탄생 될 때가 되어 더
이상은 산 동네에서 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문화촌 간호대학 지나 있던 집인데 거기에서 나의
둘째 딸을 낳았습니다.
1970년 1월 엄청 추웠던 날이었습니다. 눈이 발목을 덮을 정도로 쌓인 추운 날이었는데 어머님과
큰 어머님이 함께 오셔서 아기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추운 날에 새로 태어난
아기가 얼마나 추웠을까요? 큰딸은 농촌에서 둘째 딸은 차가운 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요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밖에 태어날 수 없던 삶이 제가 살아온 삶이라 생각하면 아이
들에게 미안하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살림은 좋아지지 안 했습니다. 그만큼 제가 다니던 회사가 만족한 회사가 아니었기에
좋아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려고 내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공부하였나 하며 마음속으로 많이 울며 살던 때입니다.
<서러운 셋방 살이 시작 4>
그 집에서 살기는 두 아이와 벅찼습니다. 더구나 아이가 두 명이다 보니 주인이 여러가지로 불편해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산 동네로 가기로 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였나 봅니다. 올려 달라는 전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우면 전세금에 맞는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얻은 곳은 산 동네였는데 전에 비해서는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는 곳마다
식구가 몇 명이냐? 아기는 몇 명이냐고 따지는데 아기가 있으면 방을 구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겨우 사정을 하여 방을 얻었는데 아기가 울지 않도록 다짐을 받고서.말입니다.
그때가 우리 둘째 딸이 세 살 때였는데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아기가 울면 안 된다는 약속 때문에 말입
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가시 방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울지 않기로 약속한
것을 우리 딸이 알겠습니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둘째 딸이 밤이면 그렇게 울어 보채서 주인 눈치
보느라고 아기가 울면 밖에 업고 나가서 울음이 그치면, 새벽 두 세 시경에 살금살금 들어오던 그 어려
움이라니 지금도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를 정도입니다. 남의 집에서 세 사시는 분들은 아이가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지 이해 하실 것입니다.
그 딸이 지금 52살인데 그래서 일까요? 지금 부모에게 가장 잘 하는 효녀가 되었습니다. 그 댁 주인은
그간 세 살면서 가장 인간 다운 주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조건이 있었지만 참으로 좋은 관계로
살았습니다.
그래서였나요? 그 댁에서 나의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외아들인 내게 첫 아들이었기에 남다른 인연
이라 생각되는 집입니다.
첫아들이지만 역시 조산 원을 불러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4.2킬로나 되는 아기여서 낳을 때 난산이
었습니다. 그때 놀랐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하마터면 하고 한 숨을 쉽니다. 기뻐서 부모님께 연락
드렸더니 아버님 그렇게 기뻐하시면서 동네를 도시며 "나도 손자 얻었다" 하시며 소리치셨다 합니다.
<서러운 셋방 살이 시작 5>
다시 어느 정도 삶이 안정이 되어서 평지로 내려왔습니다. 1968년 시작된 전세 살이에서 네 군데 다니
면서 5년을 보낸 후였는데, 산 동네에서 내려올 때 작은 리어카 하나에 짐을 싣고 몇 번 왕복 해서 왔다
면 그 삶이 어떤 삶이었을까 짐작이 되시겠지요. 너무 허망했습니다. 아이가 셋이나 되는 가정의 짐이
리어카 하나에 몇 번 옮길 짐밖에 없었다면 믿어지십니까? 단칸방에서 언제 옮겨야 할지 모르는 삶이
었기에 무엇을 장만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내 집을 장만하는 게 우선이었지요..
그렇게 내려와서 얻은 집도 제대로 된 방이 네 모 반듯한 그런 방이 아니고 조금 귀퉁이가 삼각형이었
습니다. 돈에 맞춰 얻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집에서 살 때의 이야기입니다.
겨우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버티던 집에 금성 사에서 나온 미닫이 식 흑백 텔레비전을 사다 준 날, 아내와
아이들이 기뻐하던 모습은 지금까지 눈에 선하고 가슴이 찡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뻐한 모습을 본 적
이 없습니다. 얼마나 삶이 지루했으면 그처럼 기뻐했을까요. 그러다 보니 아내는 거의 씀씀이를 줄이고
절약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내 집 마련하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했나요? 회사 일이 얽혀 힘든 삶이 나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영업 과장일 때 담당 임원이 새로 부임하는데 모든 사업 계획을 내가 작성해서 사장에게 브리핑
하고 임원이 되었습니다. 그랬던 임원이 나에게 엄청 큰 상처를 준 이야기를 남기겠습니다.
점령군 한 분이었던 K 부장이 대구 영업국장으로 갔는데 그간 국장에게 지급했던 차량도 회수하면서
총무부에서 지급하던 차량 관리비를 중지한 것을 모르고 영업부에서 지급해 왔는데. 3개월 쯤 지난 후
차량은 회수했는데 왜 차량 관리비를 지급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부서 간 갈등이 생겨 내가
대구 국장에게 ‘차량이 회수 되었으면서도 왜 차량 관리비를 받았느냐?“고 따지니 걱정이었나 담당 임
원을 초치 술 대접을 받고 와서는 나를 서울에서 제일 어려운 영업 소장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하극상이라는 핑계로 말입니다. 참으로 받아드리기 어려운 비겁한 조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매월 영업이 마감되어 성적이 부진하면 부진한 소장들을 모아 회의를 하고 저녁을 먹는데, 나로 인해
임원이 되었던 H 이사가 회식 자리에서 나를 부르더니,
”최 소장, 나 너 배신하지 안 했다“ 하고 맨 끝 자리에 앉은 나에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의미
인지 아시겠지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했던가요. 7개월 쯤 소장을 하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 말했더니
이번에는 광주로 발령을 냈습니다. 영업국 총무로 말입니다다.
몇 번이나 그만 두려다 가족을 생각해서 슬픈 부임을 했습니다.
<서러운 셋방 살이 시작 6>
그렇게 시작된 광주 생활은 동명동에서 역시 전세로 이어졌습니다. 그때 제 큰 딸이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였습니다.
회사에 입사하여 온갖 어려움 다 겪으며 사주(社主)가 몇 차례 바뀌고 사장이 몇 명째 인지 모르게 바
뀌면서도 ‘나는 이 회사의 뿌리다’는 각오로 버티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살 때 명절을 맞아 고향 부모
님께 다녀왔는데 도둑이 들어 집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다 훔쳐 갔습니다. 잠시 빈 것을 어떻게 그리
알고 훔쳐 갔는지 경제적으로 많이 손해를 보았습니다. 나에게 닥친 이 일련의 일들은 앞에서 일어난
임원의 더러운 처신이 만든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나의 뇌리에는 ‘ 나 너 배신하지 안 했다“ 고 외친
그 임원의 목소리, 또한 자기의 부도덕한 행위를 임원을 불러 술 대접을 하고 넘어간 그 K부장이나
지금도 생각하면 역겹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세 자녀들과 아내가 그렇게 뒤늦게 가정이 옮긴다는 게
얼마나 큰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는 가는 미루어 짐작 되시겠지요..
그렇게 1년 정도 지나다 본사로 왔습니다. 서울에 올라오면서 다시 문화 촌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전세 살이 하면서 처음 살던 데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수구초심도 아닌데 그렇게 되
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도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각오로 그간 저축한 것을 모아 이번에는
제법 큰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방이 남아서 군대 생활을 같이 할 때 도움 친구에게 방 하나를 그저 주고
살게 했는데, 그 친구는 그를 발판으로 문화 촌에 있는 유진 상가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하여 발판을 마련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대 생활 같이 할 때 2.4종계 담당이어서 내가 신혼 살림을 할 때 도와주었던
친구였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고마움을 갚았나 싶어 안위 합니다.
여기 까지가 우리 가족이 겪은 어려운 눈물겨운 셋방 살이 이야기입니다.
< 드디어 내 집을 마련하다>
그곳에서 2년 정도 살다가 드디어 나의 집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가진 돈 400만 원으로 매일 내
집을 살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적은 돈이었습니다. 1959년 5월 상경하여 온갖
고생 다 하며 18년을 지난 후의 나의 재산이 단 돈 400만 원이라면 믿을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1977
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꿈도 아니요 현실이었습니다. 처음 만 원을 들고 전세방을 얻으려 다니면서 겼었던 고생
이 이제 내 집을 마련하면서 또 겪는 고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 느끼실 겁니다. 가진 돈은 내가
꿈꾸는 최소한의 물건을 사려해도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거든요.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갈등의 연속에서 작은 집을 보았습니다. 또 문화촌 옆 홍은동 서대문 구청이 있는 근처였습니다.
600만 원이었기에 200만 원이 부족하였는데 회사에서 자금을 빌려주어 아내를 상경 시켜 같이 살기
시작한 9년 후 1977년 4월 내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전세방에서 남의 눈치만 보며 살다가 내 집 마련했을 때의 기쁨은 온 세상을 다 얻은 기쁨이라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내의 기뻐하는 모습, 아이들의 맘껏 소리치고 뛰어 놀던 모습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미소가 번집니다. 그때까지 나의 가족이 겪은 서러움을 한꺼번에 벗어던지는 기쁨이었습니다.
내 집이었기 마음 놓고 직장 동료들이 곧잘 집에 왔습니다. 당시는 통행 금지 시절이었기에 조금 놀다
보면 자고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 집이었기에 마음 놓고 살던 일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자리 잡고 2년 여 살면서 살펴보니 600만 원에 산 집이 2400만 원으로 올라가는기적(?)이
일어났지만, 그때 1000만 원만 있었으면 무악재 근처 집을 살 수 있었고 6000만 원이 되는 맛을 볼 수
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400만 원만 더 있었으면 2400만 원이 아니라 6000만 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항상 그 조금의 부족이
나중에는 그처럼 벌어지는 것이 인생사였습니다.
화살을 쏠 때 처음 각도를 조금만 벌려도 떨어지는 자리에서는 엄청난 각도의 차이가 나는 이치였습니다.
거기에서 3년 여 살다 보니 4000만 원이 되었고 그 4000만 원에 조금 보태어 역촌 동으로 이사해서는
대지 83평에 건물 53평 2층 한옥을 장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삶은 고해였습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하다 보니 무엇이던지 꼬이기만 하였던 나의
삶이었습니다. 직장도 만족할 수 없는 직장이었고 그래서 삶의 질은 개선하기 어려웠고 지금까지 만족
스럽다는 삶 한 번 살지 못하고 8 순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요새 저는 저대로 자위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무작정 상경을 하지 않고 농촌에서 살았다면 오늘의 저 그리고 저의 자녀들의 삶이 어디 있겠습
니까? 2녀 1남에 큰 딸은 서울대를 나와 서울대 의대에 있고, 둘째 딸은 전업주부이지만 남편의 직장이
좋아 풍족한 삶을 살고 있고, 하나 뿐인 아들은 부부가 맞벌이 하면서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삶에 구애 받음이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으니 부모로서 할 일은 해냈구나 하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인생 4苦(노인 4苦)라는 말도 있지만 직장 그만 둔 지 28년이 지난 지금까지 직장에서 일하고 지낸 복
받은 노인입니다.그러면서 무위고를 해결하였고 고독고도 빈고도 병고도 같이 해결해 나갔습니다.
이만하면 내 할 일은 해냈다 자위하며 욕심 다 버리고 살다 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첫댓글 저 역시 자수성가한 몸이라 월세,전세 한 열서너번 이사 생각이 납니다.
이사는 초기에는 리어커(연탄집 빌려서) 그래도 행복하였다고 생각 듭니다.
글 잘보고 갑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뚝배기 님! 반갑습니다. 그 시절 우리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기에 자부심이 있는 것 아닐까요?
살짝 곁들일 말씀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부모가 노후에 자랑스러운 것은 자식으로 부터 얻는 보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 얻은 답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 하는 길 1.결혼을 한다(해 드린다.) 2.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다. 3.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릴만큼 산다. ㅎㅎ
@쇠뭉치 맞는 말씀입니다.
어려서 가정교육이 잘 된사람이 그러하지,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중심으로 가기 때문이
탈이지요.
@뚝배기★ 뚝배기 님! 정말 우리 그 시절 그렇게 살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 내가 그렇게 살았던가?" 해지네요.
간단한 예로 제가 처음 가정교사 시작할 때 "밥만 먹여 주고 빨래를 해주는 조건"이었는데 정말? 이란 생각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