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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서 울료는 시황제의 용모를 가리켜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11]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 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하는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덤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 같은 자"라고 혹평했다. 시황제를 비판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당시 자신에게 궁형을 내린 한무제를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시황제가 수은을 장기 복용해서 심신의 건강을 해쳤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수은은 소량 섭취 시 피부 속의 흑색 색소과립을 포함한 세포를 죽여 일시적으로 희뽀얘지며 피부가 회춘한 듯이 팽팽해지는 효능이 있으나, 장기 복용 시 신장과 뇌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진시황릉에 천하를 꾸밀 때 바다를 나타내기 위해 수은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현재 진시황릉 주변의 토양 수은 농도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실제로도 다량의 수은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12] 그렇다고 해서 시황제가 수은을 먹었다는 확증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도사인 한동(韓佟)이 추출한 원수(元水)를 먹었다고 사서에 기록은 있으나 이 원수를 수은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결국 진시황릉이 이후 완전히 발굴되어 그의 시신을 부검하기 전까지는 정확한 사인을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수은을 먹어 요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붕어 당시 나이인 49세는 당대 평균 수명을 넘는 것이라 장수한 편에 속한다.
일중독 환자였다. 그는 매일 120근(약 60kg)의 서류를 정확히 무게를 재서 검토하고 결재했다고 한다. 당시는 물론 문서는 죽간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문서 자체의 무게가 좀 나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독서량은 하루에 10만 자가 넘었다. 이런 진시황의 고사으로부터 만기친람(萬機親覽), 일일만기(一日萬機), 형석량서(衡石量書)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또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해 통일 후에는 암살 음모를 무릅쓰고 계속 수레를 타고 전국을 순행하였으며, 5번이나 천하를 돌았다고 하며, 순행하는 수레 안에서도 계속 지방에서 올라오는 서류들을 검토하고 결재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과로는 중년의 나이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고, 결국 천하를 유람하는 도중 객사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불위의 섭정과 노애의 쿠데타까지 겪은 경험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시황제 시절에는 사실 이후 진나라를 멸망시킨 큰 반란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백성들이 큰 불만은 있었을지언정 통치 시스템 자체는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사후 암군인 호해가 집권하면서 반란이 걷잡을 수 없게 확대되어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10년 만에 전국의 여섯 국가를 멸망시키고, 가혹한 통치를 한 탓에 과거 6국 백성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형가의 암살 미수와 형가의 친구 고점리, 훗날 한나라 개국 공신이 되는 젊은 시절의 장량 등이 있다. 이연걸 주연의 2002년 영화 〈영웅 : 천하의 시작〉도 보면 이 암살 시도를 모티브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시황제는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고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더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나름 유명하다. 흔히 불리는 시황제는 시호가 아니라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일 뿐이다.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시법), 철권 독재자인 시황제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호해가 이세황제(二世皇帝)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한나라가 시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멸망 이후 쓰이지 않았던 묘호까지 함께 부활시키면서 이후의 황제들은 폐위되는 등의 특이한 사정이 없는 한 시호와 묘호를 받게 되었다.
시황제의 시호가 없는 탓에, 선진·양한[13](先秦兩漢) 시대 탁월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시황제와 한무제를 함께 일컬을 때 특이하게도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표현한다.[14] 어차피 진나라의 2세 황제 호해는 황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치세를 보냈고, 재위 기간도 짧아 따로 언급할 일이 적고 그 다음 군주인 자영 역시 한 달 조금 넘게 재위한 데다 아예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왕을 칭했다.[15] 따라서 시황제가 사실상 진나라의 유일한 황제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진황(秦皇)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다. 물론 진황한무(秦皇漢武) 대신 진시한무(秦始漢武)라고 쓴 예도 옛 문헌을 검색해 보면 발견되긴 하지만 진황한무(秦皇漢武)가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황후를 두지 않았다면 그것도 당시로서는 특이한 일이었을 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 《사기집해》에는 이사가 17형을 폐하고 호해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아들이 많았던 것이니 당연히 황후와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 다만 《사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릉에 대한 내용 중 이런 서술이 있다.
이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二世曰:「先帝後宮非有子者,出焉不宜。」皆令從死,死者甚眾。)
여불위를 제외하면 공신 숙청이 없는 편인데 이는 당연한 것이 시황제는 진나라 왕실의 적통으로 처음부터 신하들과 군신관계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 숙청이 심했던 유방이나 주원장의 경우는 거병할 때, 신하들과 군신관계라기보다는 일정한 동업자 관계였고 본인의 기업에 신하들이 일정 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까지 이어질 왕권 확립을 위해서는 공신 숙청이 필수적이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왕이었고 전국시대를 통일했다는 업적이 있으니 반기를 들 신하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자랑스럽게 "우리는 단언컨대 진시황보다 강력하다."고 했으며, 1973년 7월 왕훙원과 장춘차오에게 "나 또한 진시황이다."라고 교시했다. 린뱌오의 몰락 이후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자신이 진시황이란 이유로 비판했다고 그를 부관참시하면서 린뱌오는 장제스처럼 공자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한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린뱌오 사망 이후 저우언라이의 권위가 상승한 것에 매우 불만이었던 문혁 극좌파는 신이 나서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위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에 대한 4인방의 패악질은 오히려 중국 전역에 방광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저우언라이의 상황을 알리게 되었으며 4인방과 마오쩌둥에 대한 민심은 악화되고, 저우언라이의 인기가 올라가는 역효과로 이어졌다.
현대 한국에서는 시진핑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주석 집권 후 지배력을 강화하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헌법에 명시하는 바람에 시씨 성의 황제 또는 "진짜 시진핑 황제가 되었다."는 뜻. 이 표현은 연합뉴스에서도 쓰인 바 있다.[16]
정약용은 재물이나 땅 문서를 믿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할 때 진시황 이야기를 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 쵸소카베 모리치카 등으로 유명한 센고쿠 시대의 쵸소카베 가문이 진시황의 후손을 자칭했다. 모토치카는 서장을 작성할 때 미나모토, 타이라같이 자신의 성씨를 쓰는 곳에 하타(秦)라고 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시황의 후손이라는 건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헤이안 시대 하타 요시토시(秦能俊)라는 인물이 그 선대가 하사받은 시나노의 땅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1156년 호겐의 난(保元の乱) 때 패배한 세력에 소속해있었기 때문에 토사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다른 학설로 "1221년의 죠큐의 난(承久の乱) 이후로 도망쳐왔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렇게 토사로 도망쳐온 요시토시는 토사에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 평야 지역이자 중심 지역이나 다름 없는 나가오카 군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의 성을 '소카베'(宗我部)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옆동네 카미 군(香美郡)에도 자신들의 성을 '소카베'라고 쓰는 일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나가오카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쵸소카베(長宗我部), 카미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코소카베(香宗我部)라 부르게 되었다.
유능한 정복군주이면서 말년에 암군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국가와 정권이 사후 빠르게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에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전국시대의 혼란상을 정리하고 일본을 통일한 점은 높이 평가받지만, 이후에 무리한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패하고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후계자를 육성하는데 실패함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멸문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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