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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지나 살짝 추위, 뭐 이 정도야, ㅋㅋ 비가 와도 큰 영향이 없습니다. 요즘 날씨가 20세기와는 많이 다릅니다. 도무지 감이 안 잡혀요. 다행히 일기예보는 잘 맞습니다. ㅎㅎ 그래서 감보다는 예보를 택합니다. 확실하죠. 다른 뉴스보다 일기예보가 확실하고 재밌습니다. 자연이야기입니다. 부담이 없습니다. 안 그런가요? 사람들 이야기, 참 진절머리 날 때도 많습니다. 물론 그래도 가끔은 따뜻한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래서 버티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아직 그늘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싶습니다. 하기야 때로는 나 자신이 행여 남들의 그늘이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겁나지요. 남 탓만 하는 인생이라니!
직접 참석은 하지 않아도 괜히 기분 좋은 한 주간이었습니다. 처음 프로야구 생겼을 때 MBC 청룡 팬이었습니다. 중간에 이름이 몇 번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엘지 트윈스입니다. 야구장 가는 일은 없고, 중계방송 시청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스포츠 뉴스에서는 늘 관심을 가지고 결과를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금년 29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장식했습니다. 준 것도 받은 것도 없지만 그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게 바로 스포츠인가 봅니다. 때로는 야구장에 직접 가보고 싶은 욕망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참 보통일은 아니지요. 그냥 수십 년 결과만 지켜보다 머리만 희어졌습니다. 거참! 글쎄, 새해에는 한번 꿈을 꿔볼까요? ㅋㅋ
이 달도 서서히 기울어져가고 있습니다. 다음 주말에는 월말 이야기가 나오겠군요. 일 없어도 주말은 그냥 좋습니다. 행복하세요. ^)^
2023년 11월 18일 김종우 목사 드림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사무엘상 24 : 13)
<소년들>
끝나고 나서 화면에 뜨는 글귀를 읽으며 탄식과 분노를 안고 나옵니다. ‘이 사건으로 징벌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는 겁니까? 세 젊은이의 인생을 박살내고 나아가 한 경찰관의 앞길까지 망가뜨리고 그 가정까지 어렵게 만들어놓고도 힘 있는 자들은 시시덕거리며 여전히 그 권력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정의로운 사회이고 나라입니까? 뭔가 비뚤어진 모습을 우리는 여전히 보고 있습니다. 일단 지나고 나면 그렁저렁 잊어버릴 것이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지옥이나 그리면서 버텨야지요. 아무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일어섭니다.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비단 영화나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 우리 사는 사회 속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기에 남 이야기로만 흘려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뭔 일이 일어나는가? 그건 아닙니다. 그래도 잊지는 말아야지 다짐을 합니다. 당장의 어떤 변화가 없더라도 변화의 소망까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더딜지라도 이루어지리라, 끝까지 버텨야 합니다. 지구가 끝장나기 전에는 이루어질 것을 소망합니다. 그 전에 우리 자신 이 땅을 떠나있을지 모르지만 후대가 누릴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 미래를 꿈꾸며 참고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억울하고 분하지만 살아남아 버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불의를 보면서도 마음대로 대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불행을 당해야 합니다. 도대체 왜? 이유를 밝히기 어렵습니다. 불행을 주도하는 자들이 그 이유를 명확히 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목적은 하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를 제거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당사자보다는 그 가까운 사람이 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사자도 불이익을 당합니다. 다만 가족이 덩달아 수모와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합니다. 본인은 알지만 그런 사정을 일일이 가족에게 설명해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냥 마음만 아프지요.
악인이라 하는 사람도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그나마 양심이 있는 자와 양심마저도 없는 자입니다. 양심이라도 있다면 소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양심이라고는 쥐 털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 말조차 사치일 뿐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저지른 악행을 조금이라도 뉘우치고 끝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언급 없이 끝까지 저 잘났다고 여기며 사라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 실력이면 아마 지옥에서도 상좌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야 죽음 저 편의 일이니 그저 산 사람만 여전히 마음 지지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래 사는 사람이 승리자다 자위하며 남은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사건 발생 1년 후 진범이 전화합니다. 새로 부임해온 수사반장 '황준철'에게 연락이 온 것입니다.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고 범인들은 재판 후 감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전임 형사는 영전해 자리를 옮겼고 그 자리에 새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진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나치려다 사건 기록을 챙겨 훑어봅니다. 아무래도 허점투성입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지요. 당시 증언자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문전박대 당합니다. 재수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사도 무슨 짓이냐고 삿대질입니다. 당시 수사해서 넘겼던 형사들이 무시하고 깔보고 억누릅니다. 이게 뭔가 숨기고 잘못된 것이 있구나 싶지요. 새파란 소년들의 인생이 걸린 일입니다.
결국 황 반장은 좌천됩니다. 사건은 다시 잠잠해집니다. 16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소년들은 청년이 되어 나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숨죽이며 사는 것이지요. 살인자의 오명을 지니고 있으니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일한 목격자였던 '윤미숙'이 변호사와 함께 찾아옵니다. 재수사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거부했던 일을 이제는 나서서 하자는 것입니다. 진범의 친구가 진술한 이야기를 녹음해둔 것을 남겨두었었지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우연히 그것을 들은 미숙이 양심의 소리를 들었고 사실 어머니를 살해한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는 안 되지요.
당시의 할머니를 살해했던 진범도 실제 살해 의도는 없었습니다. 일종의 사고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공통적으로 도적질하러 들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 후 진범은 날쌔게 도주하고 어정쩡한 녀석들 셋이 걸려들었습니다. 모진 매와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범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옥살이를 하고 나온 것입니다. 황 반장이 다시 옛날 사건을 뒤지며 수사를 전개하니 윗선에서 다시 난리가 납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도 맘껏 권력을 휘두르며 협박하고 훼방하고 몰아세웁니다. 모두 감내하며 증거들을 모아 무죄판결을 받아냅니다. ‘우리는 살인자가 아니다,’ 청년들의 힘찬 외침으로 막은 내립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영화 ‘소년들’(The Boys)을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게 뭔가요?
특히 21세기에 들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안팎으로 도전을 많이 받는 듯합니다. 그만큼 또 어려운 시기를 지나온 것 같습니다. 교계에 하도 큼직한 사건들이 많아서 세간에 물의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도 당하였습니다. 교회 내에서 폭력사건도 일어나고 횡령사건, 성폭력사건 나아가 금권선거 물의 등등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놀란 것은 둘째 치고 우리 스스로 놀랐지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런가 하면 그런 물의를 빚고도 막무가내로 눌러앉는 담대함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감탄하실 강심장 아니겠습니까? 역시 교회의 힘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하나님보다 위에 앉을 날도 머지않은 듯합니다. 마치 중세 교회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중에 코로나 사태로 잠잠해졌습니다. 하나님이 강제 집행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신앙인들의 힘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도들이 하도 착해서 목회자를 잘 따르고 있다는 증표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나 무지한가, 탄식이 나오기도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인도하는 소경과 인도를 받는 소경이 있습니다. 목자나 성도나 마찬가지 신세이지요. 성도가 그저 가르쳐주는 대로 따랐습니다, 라고 변명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인도하고 있는 목자가 과연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목자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함께 지옥행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앉아서 목사님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똑똑해져야 합니다. 미련하면 우리 주님도 모른다고 하십니다.(마 25 : 1 - 12)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수천 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 자부심이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도록 천국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약속대로 보내주신 메시야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아니던가요? 그런데 정작 세상에 오시니 그 백성이 나서서 반대하고 핍박하고 결국은 죽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그것입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약속대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말씀을 외울 정도였답니다. 외웠는데 알지는 못했다는 것이지요.
암송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니 가능할 것입니다. 아무튼 암송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요. 요즘도 성경을 암송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부럽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필사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암송도 하지 말고 필사도 하지 말라 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고 존중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외워도, 필사를 한다 해도 알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우리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제사보다도 나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분명 외우고 쓰기 전에 나 좀 알아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호 6 : 6)
성경은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내용상 분류해본다면 어려운 것이 따로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암송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글’ 곧 예언이지요. 역사나 교훈을 이야기하는 성경을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십계명을 몰라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도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언은 다릅니다. 지키고 못 지키기고 문제가 아니라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지킬 수가 없는 일입니다. 왜 몰랐을까요?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 29 :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하나님이 선지자, 선견자의 눈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목자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11절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묵시 곧 예언은 계시될 때까지는 봉해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언제까지 봉해져 있어야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영원히 봉해져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열릴 때가 분명 있는 것이지요. 합 2 :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언제 열리는가, 그 묵시가 실제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책이 봉해져 있다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정말 성경에 열쇄라도 채워져 있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읽어도 알 수 없도록 암호처럼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봉해져 있다는 말은 곧 비유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라고 해도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언제까지 알 수 없다고요? 정한 때까지.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자가 나타나 실상을 증거할 때까지입니다. 그 제서야 비유의 참 뜻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이 누구를 약속하고 있습니까? 바로 메시야입니다. 그 메시야가 비유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묵시가 된 것이지요. 정한 때까지 즉 메시야가 와서 증거할 때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나타나 그 봉해진 말씀을 나름대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가리켜 ‘사람의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들이 됩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성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목자들은 진리와는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과 성경을 가지고 있던 목자들이 누구입니까?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율법사들입니다. 그들은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입니다. 백성들로부터 대접받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하지요. 요 8 :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당연한 믿음입니다. 여태 그렇게 알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의 아비는 마귀랍니다. 얼마나 황당하였을까요? 변변치도 못한 젊은 녀석이 어디서 함부로 떠들고 있나 싶었겠지요. 그래서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합니다. 48절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되지도 못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신 약속의 목자가 증거하는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합니다. 이런 자가 어떻게 메시야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 증거하는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묵시를 열어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요 10 : 37 - 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아라, 그리고 믿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잡아가려고 합니다. 39절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소속이기 때문이지요. 요 8 :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묵시 곧 예언은 마치 보물지도와 같습니다. 그 암호를 풀고 실제로 보물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보물을 찾게 되면 그 지도는 사실 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지도보다는 보물을 소유해야 합니다. 집이 건축되기 전에는 설계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집이 다 건축되면 설계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집이 과연 원하는 대로, 바라던 대로 지어졌는지는 설계도와 맞춰봐야 합니다. 묵시 곧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언대로 이루어졌는지는 그 묵시를 풀어서 대조해봐야 합니다. 그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 예언대로 온 목자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이 다 알려주고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증거해도 그 증거를 받지 않는다는데 있지요. 요 3 :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두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언을 믿고 사는 때가 있습니다. 아직 묵시로 있을 때입니다. 아무도 모르지요.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았습니다. 구약성경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속의 약속은 잘 아는 대로 메시야입니다. 정작 예수님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오시는 때까지는 예언만 가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봉해진 말씀을 가지고 살았다는 말이지요. 드디어 때가 되어 약속하신 목자, 메시야가 세상에 왔습니다. 그래서 봉해졌던 책을 열어서 알려줍니다. 계시가 된 것이지요. 비로소 암호가 풀린 것입니다. 즉 비유가 풀린 것입니다. 그 동안은 묵시 곧 ‘계시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풀렸으니 ‘계시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전히 지도만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보물이 나타났는데 보물은 제쳐두고 지도만 붙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요 14 :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일이 이루기 전에 말한 것이니 그것은 예언입니다. 그 예언을 믿고 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으로 나타나는 때가 있지요. 사실 이왕이면 예언보다 실상을 보는 것이 훨씬 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도를 가진 것보다 보물을 가지는 것이 낫고 설계도를 갖고 있는 것보다 건물을 소유하는 것이 훨씬 좋겠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앞서 간 많은 선지자들보다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이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13 : 16 - 17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너희는 지금 바로 앞에서 그 약속하신 목자를 보고 있으니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한다고 합니다. 엡 4 :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히 5 : 12 - 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신자들이 단단한 식물을 먹을 정도로 장성한 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젖이나 먹고 있으면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르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아직 무엇을 믿는지도 왜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다닙니다. 그냥 다닙니다. 교회를 출입하고 있는 교인일 뿐입니다. 신자가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양육을 받아야 하고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롬 1 :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것은 곧 예언을 믿는 단계에서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을 믿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계시될 믿음’에서 ‘계시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예언은 실상을 믿도록 하기 위한 밑받침입니다.(요 14 : 29)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이 믿음 역시 예언의 믿음 단계가 아니라 이제는 성취된 실상을 믿는 그 믿음입니다. 이루어졌을 때는 예언과 더불어 성취된 실상까지 믿는 그 믿음을 가져야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도만 가지고 있으면 천국은 머릿속에만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냥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 천국은 구경도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앞에 있음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초림 때 하나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의 행적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들은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실 만났으나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 우리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요? 유대인들처럼 배척할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로 버림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들처럼 선지자들의 글 곧 예언의 말씀을 몰라도 된다는 그런 미련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언의 말씀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요즘도 신약의 유일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배우려고 하면 이상한 눈을 하고 봅니다. 교회들도 성도들을 단속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네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하지요. 모르니까. 그런데 배우려고 돌아다니면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말라고 막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분명 지도만 가지고 신앙생활 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물이 나타났다면 지도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집이 다 지어졌는데 설계도만 가지고 노숙하겠습니까? 물론 설계도와 집이 일치하는지 검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검토는 하지 않고 집이 잘못됐다고 우깁니다. 더구나 남의 이야기만 듣고 무조건 잘못됐다고 고집합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연 그런가 안 그런가, 확인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맞다 싶으면 여태 가지고 있던 것 다 버리고 새 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오셨는데 여전히 구약성경만 붙잡고 있는 거나 다시 오셨는데 초림 복음 붙잡고 있는 것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똑똑해지기를 바랍니다. 영생과 영벌이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진작 말씀하셨습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 지식이 세상 지식이겠습니까? 뒤에 언급되어 있듯이 ‘하나님의 율법’ 곧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우리 자녀들을 버리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 마디로 무서운 저주 아닙니까? 나 혼자서 망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무지함으로 인하여 자식까지 저주를 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잡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말씀을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배워야 합니다. 필요하면 교회에만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서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언도 되어 있습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여태 ‘믿으면 구원’이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신앙했다면 이제 자라야 합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는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 직설적으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요 3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누구에게 거듭나라고 하신 것입니까?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믿는 믿음에서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묵시(예언)를 가진 믿음에서 나타난 실상을 믿는 믿음으로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예언의 참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타난 계시 곧 실상이 맞는지 안 맞는지 대조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설교하는 목자가 과연 그 예언과 실상을 증거하고 있는지 맞춰보면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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