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조선의 전쟁이야기 - 사르후 전투 동아시아 패권 쟁탈전의 분수령
인기멤버
hanjy9713
2024.05.29. 04:16조회 0
댓글 0URL 복사
사르후 전투
동아시아 패권 쟁탈전의 분수령
1) 사르후 전투의 개요
사르후(薩爾滸) 전투는 1619년 즈음 대거 세력을 확장하여 명나라를 위협하는 후금(後金)에 대항하기 위하여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후금군과 벌인 대규모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가 참패함으로써 이후 명나라의 국운은 크게 쇠하였고, 반대로 후금은 만주 지역의 패권을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 참전한 조선 오도원수(五道元帥) 강홍립은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이는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으로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노선을 유지하려던 광해군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후 조선에서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실각함에 따라 후금에 적대적인 서인정권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금과의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2) 사르후 전투의 전개 과정
17세기 초반 경 크게 세력을 확장하여 여진족을 통일한 후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명나라와 대결을 감행한다. 1618년 명에 선전 포고를 한 후 변경을 침범해 오는 후금군에 대항하여 명나라 역시 토벌군으로 맞서는 한편 조선에 원병을 청하였다.
이즈음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감지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대한 원군 파병을 두고 논의를 벌인 후에 강홍립을 오도원수(五道元帥)로 임명하여 1만 3,000여 군사를 파병하였다. 이들은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합류하였다.
조명연합군은 1619년 3월 누르하치의 본거지가 있는 허투알라(赫圖阿砬)로 진격하던 도중 사르후(薩爾滸)에서 후금군과 만나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였으나, 작전을 원활히 수행하지 못한 채 대패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4개 군단 중 총병관(總兵官) 두송(杜松)이 이끌던 서로군은 괴멸되고 말았으며, 이 패배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명과 후금이 벌인 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르후 전투에 이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명군은 후금군에 거듭 패배를 당함으로써 전세는 후금쪽으로 기울었다. 아부달리(阿布達裡) 전투에서 이미 전사한 제독 유정의 후방부대와 함께 부차(富察, 현재의 중국 환런 만족 자치현)에 머물고 있던 조선군은 홍타이지를 선봉으로 하는 후금군의 부대와 격전을 벌인 끝에 참패를 당하였다. 이에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 이루어졌다.”고 밝힌 후 남은 병력 오천을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는데, 이는 출정 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 이듬해 조선군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강홍립은 계속 억류당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이 일어나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즉위하였으며, 후금에 적대적이었던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로써 후금과의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정묘 ·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 사르후 전투 관련 문헌
명나라에 대한 원병 파병 및 후금군과의 전투에 대한 전후 사실은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과 같은 관찬사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대명 · 대청 외교활동과 관련된 기록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평가받는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의 『속잡록(續雜錄)』 등 정묘 · 병자호란과 관련된 여러 사찬사서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春正月 楊鎬與諸將 議定北伐之計 分付各鎭 姜弘立等在昌城 十二日 率諸將領軍渡遼 行二日 至炭峴下 與天兵相會 時凍雪嚴凝 山路阻塞 諸將相議曰 今此遼邊 積雪如是 況於深入 定無行師交戰之理 莫如姑退諸軍 徐待雪消 更定師期 於是大軍還退 劉綎自炭峴直到昌城 試才砲射 各賞銀兩 留一日 還遼陽
1월 양호(楊鎬, 명나라의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후금 정벌을 이끌었던 장수)는 여러 장수들과 북벌할 계획을 의논하여 정하고 각 진(鎭)에 분부하였다. 강홍립(姜弘立) 등은 창성(昌城)에 있다가 12일에 여러 장수들과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건넜다. 이틀 동안 행군하여 탄현(炭峴)에 이르렀을 때 명나라 군사들과 서로 만났다. 이때 얼어붙은 눈이 꽁꽁 엉기어 산속의 길은 막히었다. 여러 장수들은 상의하기를, “이제 이 요동 지방에 쌓인 눈이 이와 같으니, 항차 깊숙이 들어가서는 필연코 군대를 움직여 교전할 리가 없으니, 잠깐 제군(諸軍)을 후퇴시켰다가 천천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 다시 군대를 움직일 시기를 정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대군은 돌아서서 퇴각하였다. 유정(劉綎)은 탄현(炭峴)으로부터 곧장 창성(昌城)에 이르자 대포 쏘기를 시험하여 각각 은량(銀兩)을 상으로 주고, 하루를 묵고 요양(遼陽)으로 돌아갔다.
三月初四日 提督劉綎等敗沒于胡中 姜弘立等被執 左營將宣川郡守金應河力戰死之 先是 大軍回自炭峴 楊鎬改發分付 月初一日爲師期 去二十一日行軍 分三道擬達建州 劉綎兵由東路 杜松兵由西路進兵 俱被敗沒
3월 4일 제독(提督) 유정 등은 오랑캐 진중에서 패사(敗死)하고, 강홍립 등은 잡혔으며, 좌영장(左營將)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는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앞서 대군이 탄현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양호(楊鎬)는 다시 분부하여 그달 1일 군대를 움직일 기일로 정했다. 그래서 지난달 21일 행군하여 세 길로 나누어 건주(建州)에 도착하려고 하였다. 유정의 군대는 동로(東路)로, 두송(杜松)의 군대는 서로(西路)로 진병했으나 모두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속잡록(續雜錄)』 권1, 기미년 만력(萬曆) 47년, 광해군 12년(1619년)
(원문뷰어 1권 95쪽)
[네이버 지식백과] 사르후 전투 - 동아시아 패권 쟁탈전의 분수령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