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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8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시라는 것은 비단 그분의 신성뿐만이 아니라 인성도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것이다.
#20190708
#설교묵상 #누가복음 7:1-10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다(마 8:5-13; 요 4:43-54)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가버나움은 벳새다, 고라신과 더불어 예수님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라는 큰 질책을 받은 도시이다. 이 도시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큰 이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대적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들이 두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형벌의 심판을 받을 것을 선포하셨다. 소돔과 고모라는 도덕적으로 너무나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망을 시키셨는데, 복음과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 이보다 더 큰 죄악임을 가르치신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우리 눈으로 목격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없다면 그 이적과 기사로 말미암아 멸망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불순종하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저버리시지 않으시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신다.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님 당시의 신분 격차를 생각한다면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자기 집 종의 병 낫기를 위해 스스로 나선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볼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백부장의 종이 중풍병에 걸렸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본다면 이 종은 백부장보다 나이가 상당히 많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고대 귀족의 노예 중에는 특출나게 지혜가 뛰어나고 성품이 고결한 자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 종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백부장의 선대로부터 오랫동안 이 집안을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보기 드물게 인정을 받았을 것이고, 백부장의 아버지가 이 종에게 백부장의 교육을 전담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백부장은 어려서부터 이 종을 자기의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대하며 지금까지 함께 지내왔을 것이다. 또한 당시 유대교의 심각한 타락상을 봤을 때 이 백부장이 그런 유대교에 감화를 받아 여러 호의를 베풀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마도 이 종의 출신이 경건한 유대인 집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백부장을 어려서부터 교육하였을 때 유대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같이 가르쳤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종은 백부장의 전 인격에 선한 영향력을 준 은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도움을 요청한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로마인으로서는 특이하게 유대교에 큰 호의를 가진 것으로 볼 때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짐작했던 듯 싶다.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냈다는 것은 그들과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백부장이 보낸 유대인 장로들은 백성들 중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에는 속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랬다면 아무리 백부장의 요청이라 해도 심한 거부감을 느껴 거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유대인 장로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여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적대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 종교에 대해 경건한 자들이어서 백부장과 유대교에 대해 많은 신앙적인 교류를 해왔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많은 핍박을 당하고 계심을 알면서도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을 기꺼이 낮춘다.
유대인들의 회당을 짓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텐데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사랑'하여 자기 능력껏 회당을 지어주기까지 한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백부장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아마도 백부장이 먼저 자기가 다스리던 지역의 유대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였을 것이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양자로서 애굽의 왕긍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민족인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로 그의 어머니가 유모가 되어 그를 키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백부장은 유대인 태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대인들을 자기 민족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유년 시절부터 그의 전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준 누군가의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내 생각에 그런 사람은 이 백부장이 아끼고 사랑하는 늙은 종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눈과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로마 백부장과 예수님의 차이는 너무나 현격했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당시 대제국 로마인, 그것도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지휘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의 속국인 유대,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다. 백부장에게는 화려한 거처가 있었으나 예수님은 머리 누이실 곳도 없으셨다. 백부장은 좋은 음식과 술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으나 예수님은 때로는 보리떡과 생선, 때로는 곡식 알갱이 등으로 배를 채우셔야 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맥무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오시는 것이 너무나 황송해서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예수님께서 모든 선지자보다도 크다고 증언하신 세례 요한이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고 매는 것도 너무 무겁다고 한 것과 같다. 심지어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조차도 이런 고백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 요한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중에서도 보지 못한 믿음을 이 백부장에게서 보시고 극찬하셨다.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는 그 믿음을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유대인들에 대한 책망이 포함되어 있다. 이방인 조차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 고백하는데,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먼저 언약과 율법을 주셨던 유대인들은 왜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복음을 거절하고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비교해서 당할 부끄러움을 선포하신다. 즉, 유대인들에게보다 이방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을 예언하신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백부장만한 믿음을 가진 이를 찾아볼 수 있을까? 교회에서 누구보다도 더 신앙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담임목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 담임목사가 영적이건 육적이건 간에 음란을 행하고 형제와 같은 부교역자와 자녀 같은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으며 복음 사역에 성실하지 않으면서 과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수 있을까? 설령 형식적으로나 위선적으로는 고백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담임목사인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참되게 고백하는 담임목사라면 자기의 모든 사역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목적을 둘 것이며, 매순간 그리스도의 눈 앞에서 행하듯이 사역할 것이다. 백부장만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술취해 행패부리는 종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보니, 예수님을 그저 옆집 아저씨 마냥 편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를 친구 삼으신 것을 가지고 마치 우리가 그분과 나란히 어깨동무라도 해도 되는 듯이 '나는 주의 친구'라며 망령된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스럽게 계시는 예수님을 아직도 이 땅에 계실 때의 낮고 천한 모습으로 계신 것처럼 여기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낮고 천한 그 때 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스럽게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영광의 예수님을 신자들이 잘 알도록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을 힘껏 가르쳐야 한다.
#매일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12-28
교회에서 신자들끼리 권면하는 것은 조심스럽긴 하지만 못할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으로 권면한다면 상대방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그 권면을 달게 받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담임목사가 불의하고 게으르면 참으로 답이 없다. 그런 담임목사는 타인의 권면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고 자기가 곧 하나님의 뜻인 마냥 독선적이기 때문이다. 또힌 그런 담임목사는 교회의 본질인 복음 사역에는 게으르기 때문에 말씀으로 교회를 먹이지 못하고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다. 게으른 담임목사의 교인들은 자기 교회에서 말씀을 공급 받지 못하므로 스스로 여기저기 교회 바깥에서 말씀을 찾아 먹게 된다. 그런 담임목사에게 제발 말씀 좀 성실히 준비하라고 해도 우이독경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기가 부름받은 복음 사역자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충만하기 때문이다. 정작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위임 받은 자기 권위만 내세우려 한다. 이런 게으른 담임목사의 교인들은 안타깝지만 신자들끼리 서로를 다독이며 격려하며 위로하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담임목사를 바꿔주시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 일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굳게 견뎌내는 것이 신자들의 십자가인 것이다.
선으로 악을 갚는 것은 모든 신자가 추구해야 할 복음의 덕목이지만, 특별히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더욱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서 조차도 선으로 악은 고사하고 도리어 악으로 선을 갚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교회의 사고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 고군분투 한 부교역자들을 한꺼번에 한순간에 토사구팽 하는 짓이나, 자기의 불성실과 불찰들을 바르게 지적한 교인들에게 교회를 떠날 것을 종용하고 방치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날에 각자가 행한 바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하실 것이다.
기쁜 일에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히죽거리며 웃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주님의 영광과 무관한 일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에서나 각자의 일상에 있어서나 우리가 복음을 따라 살면서 닥치게 되는 여러 환난과 고난들에 대해서 그 절망적인 상황 자체에만 머물러서 실의에 빠져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버지의 뜻이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발생한 끔찍한 시고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슬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사고를 통해서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무엇을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인지를 깊게 하나되어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며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기뻐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방식을 따라 지금까지 왔는데, 이 상황 자체도 너무다 암담하고 처참하나, 이것 까지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어떻게 우리 교회에서 이루실 지를 바라보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기도를 싫어한다. 그래서 편안할 때는 편안하므로 기도하지 않고 힘들 때는 힘들어서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들은 그 시선이 항상 하나님을 향하므로 모든 희로애락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한다. 좋은 일을 만나면 그것을 주심에 감사하며 기도하고 슬픈 일을 만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갖게 하심에 감사하며 기도하게 하신다. 즉각적으로 기도 응답이 이루어져도 감사로 기도하고, 비록 더디게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마저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감사하며 내려놓으며 기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신앙의 잣대로 상대방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되며, 상대방이 처한 상황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에 자신을 내어 맡기실 정도로 겸손하게 임하신다. 이는 마치 여자에게 잉태된 태아와 같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건강하게 태어나는 아기가 되기도 하고, 뱃속에서 굶주려 죽는 태아가 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인위적으로 끔찍하게 낙태되는 태아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신앙이 날마다 거룩함과 경건함을 추구하면 성령께서 더욱 우리를 채우실 것이고 구원 받았다 하여 안일함으로 방자하게 행한다면 결국에는 성령을 소멸시키고 가룟 유다와 같이 비참하게 배교하게 될 것이다. 담임목사도 여기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라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목회 하는 담임목사는 결국에는 자기 안의 성령을 낙태시키는 멸망 받을 배교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오늘날 예언은 미래의 일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성경 66권으로 완료 되었으므로 이 성경을 올바르게 풀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게 하는 가르침이 바로 예언인 것이다. 따라서 이 예언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복음 사역자에게 많이 주어져 있다. 예언을 멸시하지 않는 복음 사역자는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데만 집중한다. 이로 인해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성과는 없을지라도 낙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언을 멸시하는 담임목사는 자기 입맛대로 복음을 왜곡하고 설교를 소홀히 여긴다. 외적인 성장이 중요하므로 복음 사역보다는 온갖 잡다한 이벤트에 열중한다.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결국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이며 이는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런 담임목사가 받을 형벌은 동성애 등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러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보다 더 크고 무겁고 두려울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1-12
복음을 참되게 제대로 믿고 행하는 교회의 삶의 수준은 세상의 도덕과 윤리 기준을 초월하므로 세상은 이로 인해 참된 복음 교회를 괴롭혀왔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자처하는 많은 곳은 세상의 상식과 기준에 크게 미달함으로 말미암아 비난과 조롱을 자처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런 저급한 삶의 수준을 마치 성령의 수준이라 여기고 이로 인해 받는 비난과 조롱을 마치 복음을 위해 받은 핍박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거짓 교회이며 맛을 잃어 밖에 내다버려져 밟힐 뿐인 소금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교회도 역겨워 토하여 내치시는데 어떤 교회는 이미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을 점령해버려 불태워 버릴 수 밖에 없을 지경까지 와버렸다.
이렇게 악행을 저지르는 거짓 교회들 때문에 선한 복음 교회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장차 공의로 심판하실 것에 대한 눈에 보이는 증표이다. 주님께서는 '어느 때까지 참으리이까' 하면서 탄원하는 자신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 하신다. 복음 교회의 견고한 인내는 바로 주님께 부르짖는 탄원서인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교회를 괴롭힌 거짓 교회와 거짓 선지자를 영원한 지옥불의 괴로움으로 갚으실 것이며 환난을 견딘 복음 교회에는 영원한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다.
따라서 복음 교회는 지금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불안해 하거나 답답해 하지 않는다. 복음 교회는 장래 반드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과 부활의 날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때에 받을 풍성한 상급과 거짓 교회가 받을 영원한 형벌을 기대하며 소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거짓 교회에 머무는 참된 성도들도 답답함을 참고 견뎌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부활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 없으면 복음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받는 모든 고난이 쓸데 없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거짓 교회는 그 행위로 부활 신앙을 부정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의 세속적인 유익에만 치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결말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다.
#20220708
#요한계시록 #Revelation 16:15-16
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自己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自己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者는 福이 있도다
"Look, I come like a thief! Blessed is the one who stays awake and remains clothed, so as not to go naked and be shamefully exposed."
Ecce venio sicut fur. Beatus qui vigilat, et custodit vestimenta sua, ne nudus ambulet, et videant turpitudinem ejus.
Ἰδοὺ ἔρχομαι ὡς κλέπτης· μακάριος ὁ γρηγορῶν καὶ τηρῶν τὰ ἱμάτια αὐτοῦ, ἵνα μὴ γυμνὸς περιπατῇ καὶ βλέπωσιν τὴν ἀσχημοσύνην αὐτοῦ.
요한 사도는 여섯째 대접 재앙 이후 천하의 왕들이 귀신의 영에 따라 한 곳으로 모이는 환상을 이어서 설명하지 않고 중간에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주의와 경고와 각성을 기록하는데 이는 그만큼 주님의 말씀이 급박하고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주의와 경고와 각성을 주시는 대상은 천하의 왕들이 귀신의 영에 이끌려 한 곳으로 모이는 때에 있을 성도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이미 이 땅에는 성도들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고 모두 하늘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의 계시록을 읽을 당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해서 주님께서 강림하시기 전까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의와 경고와 각성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도둑 같이 오신다는 것은 비단 강림하실 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려면 먼저 지금의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주님과 복음을 믿고 영접하며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민족적인 절체절명의 위기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 시기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도둑 같이 오신다는 것은 당분간 우리 각자의 죽음의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우리가 주님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행한다면 언제 생을 마감하게 되더라도 하늘에서 불이 섞인 유리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유리바다를 통해서 땅의 악인들이 재앙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되겠지만, 주님의 경고를 경홀히 여기고 자기 옷을 지키지 않는다면 음부에서 땅의 왕들이 하나님 그리스도께 섬멸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주님의 경고를 따라 깨어 있어 자신의 옷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복을 받는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복을 받았다는 증거로서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되어 중생한 성도들은 이 경고의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할 때나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매일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하여 바르게 유지하지만, 구원받은 척 하는 거짓 신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불변이라 하면서 주님의 이 경고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고 잠에 빠져 있으며 받은 줄로 알았던 옷 조차도 지키지 못하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벌거벗고 다니다가 주님께로부터 외면과 거부를 당하게 된다.
16 세 靈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王들을 모으더라
Then they gathered the kings together to the place that in Hebrew is called Armageddon.
Et congregabit illos in locum qui vocatur hebraice Armagedon.
καὶ συνήγαγεν αὐτοὺς εἰς τὸν τόπον τὸν καλούμενον Ἑβραϊστὶ Ἁρμαγεδών.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었다. 이처럼 주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주님 강림 전에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민족적으로 회심시키셨으므로 주님의 심판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여섯째 대접 재앙으로 유브라데 강이 말라 왕들이 오는 길이 되는 것도 예루살렘으로 모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귀신의 영이 왕들을 모으는 장소를 왜 아마겟돈이라 하는지 왜 히브리어 지명을 썼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유대인 신자들을 위한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복음의 시작과 끝, 심판의 시작과 끝이 모두 이스라엘 유대 민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아마겟돈은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므깃도라는 도시의 언덕 또는 산을 의미한다고 한다.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전하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령을 무시하고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에 모아 바벨론에 항거했다가 끝내 멸망 당하고 말았고, 예수님 시대의 유대 민족은 자기들 멋대로 로마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항전하다가 끝내는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멸망 당하고 말았듯이, 귀신의 영에 미혹되어 아마겟돈에 결집한 천하의 왕들 또한 주님의 자비없는 공의의 칼날에 몰살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신앙과 복음을 내세워 악을 저지르는 교회는 아마겟돈과 같고 그런 교회에 모이는 교인들은 아마겟돈에 모여든 천하의 왕들과 같으며 그런 교회의 목사들은 천하의 왕들을 미혹하여 아마겟돈으로 모으는 귀신의 영과 같다. 사람의 눈에는 그러한 아마겟돈과 같은 교회와 귀신의 영과 같은 목사와 왕들과 같은 교인들이 네피림처럼 장대해 보이고 스스로의 모습은 메뚜기 같아 보일지라도, 성도들의 눈에 그들은 동풍에 휩쓸려 홍해에 빠져죽은 메뚜기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20210708
#신명기 #Deuteronomy 24:6
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채권자는 아무리 채무자에 대해서 채무를 돌려받을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채무자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까지 가혹하게 받아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맷돌은 일반 백성의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에 빚을 갚을 때까지 맷돌을 저당물로 가져간다는 것은 채무자로 하여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모든 방법과 길들을 차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채무자는 결국 자기 몸을 채권자에게 종으로 넘겨 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채권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법대로 자기의 모든 채무 권리를 주장하지 말고 가난한 생계형 채무자에게 일말의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형편을 불쌍히 여겨서 모든 채무를 탕감해주면 가장 좋고 설령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말로써 독촉 정도만 해서 채무자가 어떻게든 갚아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괜찮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의 맷돌이나 겉옷을 저당물로 가져갔어도 그 날 저녁까지는 반드시 돌려주라고 정해놓음으로써 채권자는 엄중하게 빚독촉을 하면서도 자비와 아량을 베풀수 있고 채무자는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빚은 반드시 갚아야 된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돌려받은 물건으로 인해 채권자에게 감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가난한 생계형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푼 채권자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한편 이는 채권자가 가난한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대해서도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금전적인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채권자여도 죄와 사망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채권자이시고 자기는 채무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왕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물론 이 비유는 비단 금전적인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간의 모든 잘잘못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금전적인 부분이 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더욱 적절하다 할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채권자가 더 부당하기 마련이지만 소수라 하더라도 반대로 일부러 빌린 돈을 갚지 않는 악덕 채무자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악덕 채무자를 만났을 때 채권자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과 신앙에 따르는 것인지도 혼동스럽기 마련이다. 어쩔수 없이 갚지 못하는 채무자에 대해서 일말의 긍휼을 베푸는 온건한 채권자라 하더라도 악덕 채무자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악덕 채무자에게는 일말의 자비나 긍휼도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정당한 법적 방법을 총동원해서 빚을 받아냄으로써 그가 다시는 빚을 떼어먹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의 정의구현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대응도 아주 온건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채권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악덕 채무자에 대해서는 차라리 빌려준 돈을 갚은셈치고 변제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주 이상적으로는 그런 채무자를 진정으로 용서하기까지 나아가야 하겠지만 사실 아무리 탁월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여전히 뻔뻔한 악덕 채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설령 빌려준 돈은 안받는다 쳐도 채무자의 괘씸함이 수 년씩 이어져서 과연 이런 자신이 복음대로 한 것이 맞나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채무자를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오만가지 잡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런 악덕 채무자라 하더라도 용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성화의 원리에 따른 참된 신앙인 채권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자비와 긍휼을 베풀 수 있으려면 돈을 빌려주는데 있어서 몇가지 주의할 점과 기준이 있다. 우선은 채권자 자신의 생계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금액만 빌려주어야 한다. 아무리 상대를 잘 알고 사정이 딱하더라도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의 돈을 빌려주게 되면 전전긍긍 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채무상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돈과 사람 모두를 잃고 심지어 신앙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옛날 아버지들이 인맥 때문에 빚보증 잘못 섰다가 망하게 된 것이나 여기저기 허투루 돈을 빌려주고서는 정작 생활비는 마련하지 않는 것들이 그런 경우다. 또한 돈을 빌려줄 상대가 정말 사정이 딱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사람, 자녀의 학비, 긴급한 병원비 등등이 돈을 빌려줄만한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보증, 사업자금, 유흥비, 투자, 도박 등등은 빌려주지 말아야 할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빌려주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빌려주고서 돌려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는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지 신앙적인 고난이 아니다. 그러나 마땅히 빌려주어야 할 상황에서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자기 위안도 삼을 수 있는데다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빌려드린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신자들도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도 생기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마땅히 빌린 돈을 남김없이 기한 내에 제 때 갚아야 하고 자기 사정이 딱하고 어렵다고 해서 갚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설령 정말 극도로 사정이 안좋아서 갚지 못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 채권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채권자가 자비와 긍휼을 베풀면 반드시 감사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그를 위해 축복하여야 한다. 그리고 생활비나 병원비나 학비 등의 급한 것에 대해서만 빌려야 하고 보증이나 사업자금이나 유흥이나 투자나 도박 등을 이유로 빌려서는 안된다. 만약에 개인파산을 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법적인 채무에서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채권자에게까지 떳떳해서는 안되며 그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계속 지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