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때 아버지가 사다준 세계 위인전 읽기를 참 싫어했습니다. 영웅들이란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야욕을 위해 주변 국가들을 괴롭히고 약탈하면서 자신의 나라 땅덩어리를 넓힌 것 아닙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지도 그들을 본받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주 중요한 책이라며 열심히 읽어 그 사람들을 본 받으라고 강요했습니다. 그 책 표지 사진이 바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바로 아래 보이는 이 그림이지요. .
성인이 되고 나서야 이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대혁명과 왕정 공화정 그리고 나폴레옹이 지배하던 제정시대를 거치면서 그야말로 출세지향적인 성향으로 정치인들의 활약상을 화폭에 옮긴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의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나폴레옹을 정말 멋지게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나폴레옹의 정식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입니다. 나폴레옹이 이름이고 보나파르트가 성입니다. 나폴레옹(1769~1821)은 프랑스사람들에게는 정말 영웅인 모양입니다. 알렉산더와 시저 그리고 나폴레옹을 3대 영웅이라고 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각자 각자의 판단이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유명 양주가운데 나폴레옹 꼬냑이 있을 정도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프랑스 동시대에 살았던 외교관이었던 샤를모리스는 "나폴레옹의 생애는 1천 년 내 가장 비범한 생애였다. 분명 위대하고 특출한 인물로서 생애만큼이나 자질도 비범했다. 그는 인간사 여러 세대 동안 살았던 인간중 가장 놀라운 인물이라고 나는 믿는다"라고 평했습니다. 프랑스인이 아닌 독일의 철학자 헤겔도 "말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그 절대 정신을...나는 보았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자신의 나라가 아닌 타국 그것도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던 나라의 대 철학자가 이렇게 평할 정도면 나폴레옹이 인물은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유명한 작곡가 베토벤도 나폴레옹을 위해 교향곡 영웅을 작곡할 정도였지 않습니까.
사실 한 국가에서 영웅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면 그 주변국들은 정말 죽을 맛입니다. 정복전쟁에 능한 영웅이라는 작자때문에 주변국들이 받는 피해와 피로감은 극에 달할 것입니다. 사실 알렉산더도 그랬고 시저도 그리하였고 나폴레옹 그리고 히틀러 등등이 얼마나 많은 피해와 상처를 주변국들에게 남겼을까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 아니겠습니까. 한 나라의 영웅을 타국에게는 철천지 원수이자 원흉으로 인식되는 것이 정상적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나온 영화 나폴레옹이 시사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이 영화 나폴레옹을 평하는 시각이 나라마다 많이 달랐습니다. 영화 나폴레옹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입니다. 그 유명한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연출한 감독이지요. 영국 출신입니다. 올해 87살입니다. 이 나이에 대작에 도전하는 정말 대단한 노익장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나폴레옹에 호아킨 피닉스가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 조커에서 열연을 펼친 바로 그 배우입니다. 대단한 감독과 대단한 배우가 합작한 작품인데 관객들의 호응도는 낮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그 화려한 전쟁 상황은 그다지 화면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인인 조세핀과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한마디로 영웅의 숨겨진 뒷면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감독은 나폴레옹이 한명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죠. 나폴레옹에서 카리스마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풍기는 외모적인 카리스마는 있지만 극중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들었습니다. 영화를 본 어떤 관객은 이 영화제목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과 조세핀이어야 맞지 않나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이 포커스가 아닌 철저하게 조세핀을 향한 나폴레옹의 언행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왕성한 남녀사이의 열정을 다룬 것도 아니였습니다. 그냥 평범한 남녀의 상열지사였지요. 두 남녀의 섹스장면도 전혀 고급스럽지 않아보였습니다. 왜 감독은 저렇게 섹스장면을 표현했을까 약간의 의아함이 들 정도였지요. 그냥 평범한 일국의 장군의 내면사를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영웅이라는 인물도 며칠 같은 공간에서 지내보면 그냥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하지요. 겉으로는 엄청난 능력과 카리스마를 내세우지만 그 내면에 도사린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모순점을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런 시각에서 나폴레옹을 바로 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존하는 나폴레옹 그림가운데서도 위에서 등장한 그 멋지고 늠름한 모습의 다비드 작품과는 다른 그림도 존재합니다.
바로 이 그림입니다. 폴 들라로슈(프랑스/1797~1856)의 그림입니다. 작품이름도 위의 것과 같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입니다. 그 시대의 상황과 그 시점에서 본다면 위의 다비드의 그림보다 이 그림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이런 모습으로 알프스를 정말 힘들게 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등장했던 나폴레옹의 영화들은 대단한 영웅적 모습을 그렸다면 이번 나폴레옹 영화는 아마도 이런 관점에서 나폴레옹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영웅도 그 민낯을 보면 실망할 수 있다는 관점이지요.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는 날고 기었는지 모르지만 일상 생활속에서는 조세핀에게 이런 저런 일상사를 고해바치는 일개 평범한 남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리광을 부리는 철부지 아이같은 모습말이죠.
이 영화와 관련해 프랑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역사를 왜곡하고 나폴레옹을 모욕했다고 평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속에서 이집트 원정때 피라미드에 포격을 가하는 장면이나 모스크바 원정때 상황 그리고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패배한 워털루전투 장면을 상대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한 것 등등이 나폴레옹을 뒷담화하려는 감독의 의중이 보인다는 어느 프랑스 언론사 보도도 나왔다지요. 감독이 영국출신이어서 앙숙 나라인 프랑스의 영웅인 나폴레옹을 깎아 내렸다는 말도 들립니다.
하지만 어떻게 특정 인물의 위대함만 강조할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특정 나라의 영웅은 주변국들에게는 천하의 몹쓸 인물이자 원수라고 하지 않습니까. 특정 시각에서만 특정인을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영웅도 그 내면과 사생활을 들여다보면 한낫 필부에 지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이번 나폴레옹 영화 감독인 리들리 스콧의 의중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화의 뒷 감정은 관객 각자의 몫이니까요.
2024년 1월 21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