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를 끓이는 저녁/ 김은경
수상한 저녁이 올 때
문 뒤로 숨고 싶은 사람들은 저마다
한갓진 부엌에 혼자 서서 수제비를 끓인다지
가장 먼 하늘을 달려온 눈가루를 뭉쳐 반죽하고
말랑말랑 차진 달의 살점을 떼어내듯
숭숭 수제비를 뜯어 넣는 거야
어떤 건 귀가 찢어져 나가고 어떤 한 점은
까마귀 파먹은 해골박
못 먹을 시름도 뜨거운 양철 냄비 안에서는
간간히 우려지지
벌레 먹은 푸성귀의 쌉싸래한 시간들을
싹둑싹둑 저며 넣은 수제비는
가난하고 쓸쓸하지 그래서 더 쫄깃하지
한 사내 등지고 강에서 물수제비 날리던 날
제일 먹고 싶었던 것도 웬일인지 엄마의 수제비
수제비는 무릇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이야
그래 절정이라는 거 격정이라는 거
후후 불며 혀를 데어 가며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듯
코를 처박고 먹어야지
뜨거운 위로가 필요한 날은 그렇게
눈물 콧물 쏟아가며 국물을 들이켤 일이야
허기진 목숨 거두어 먹이는 일보다 더 징글징글한
일은 세상에 없는 법이라고
그보다 더 예의 바른 저녁도 없을 거라고
* 김은경 시집 ≪불량 젤리≫ (삶이보이는창, 2013)
청매화/곽요한作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수제비를 끓이는 저녁/ 김은경
우물속의 달
추천 0
조회 44
17.02.26 07:54
댓글 3
다음검색
첫댓글 낮에는 못 둑에서 물수제비 날리면서 놀다가
저녁에는 엄마가 끓어주던 수제비를
코를 처박고 먹었던 옛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