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19 - 파리를 떠나며 이우환과 유병언에 생제르맹 카페를 생각하다!
6월 17일 파리 를 떠나면서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도시를 둘러보노라니... 다양한
볼거리와 고풍스런 건물 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숨결 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자태에 이끌려 피카소, 고흐, 오스카 와일드 등 예술가가 흘러들었고
크리스찬 디올 이나 샤넬 같은 디자이너가 파리를 "예술과 문화의 도시" 로 승화시켰습니다.
파리 남쪽에 자리한 유서깊은 베르사이유 궁전 에서는 화가 이우환 의 미술전시회
가 열렸다는데 정원 초입에 설치된 아치형 조형물 등 10점을 만날 수 있었답니다.
프랑의 대표적인 일간지 르몽드 신문 은 세간의 우려 를 불식하고.......
“이우환씨가 베르사유궁의 완벽함을 극복했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우환 은 일본에서도 활동하면서 철학적 사유에 바탕을 두며 드러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소통" 을 다루는 겸허함을 기본 으로 한다고 합니다.
베르사유 하면..... 또 떠오르는 사람 이 있으니 "창으로 본 숲" 을 찍은 사진을
루부르 궁전 과 베르사이유 궁 에서 전시회를 가진 유병언 세모 회장 입니다.
그런데 그후 세월호 사건 이 터지자 프랑스 콩피에뉴 숲 페스티벌 조직위원회는
프랑스 외교장관의 요청 으로 유병언의 사진 전시회를 취소 했다고 합니다.
유병언씨의 작품 이 루부르 와 베르사이유, 피렌체 사진 박물관이며 콩피에뉴 에 전시될
수 있었던 것은 베르사유 수십억원 등 거액의 후원금 이라니... 가히 황금 만만세 라!!!
세월호 실소유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게서 거액의 기부금 을 받고 자존심을 팔아넘긴
베르사유와 루부르 박물관 에 대해 프랑스 문화계에서 자성의 목소리 가 나온다고 합니다.
파리 르몽드 신문 은 “서울에선 공공의 적, 파리에서는 박물관 후원자”라는 제목의 기사
에서“아해”라는 아마추어 작가 에게 기부금 때문에 사진 전시를 허용한걸 지적했습니다.
르몽드 는 유병언씨 가 2,012년 루브르에 16억원 그리고 베르사유에 68억원 을 기부했다
고 보도했으니... 루브르 박물관 “고대 그리스 로마 전시관” 5번방 입구 대리석
벽에는 아해 AHAE 라는 이름이 그랑 메센중 하나로 황금색 명판에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또 베르사유궁 인터넷 사이트 에도 아해 가 후원자 명단 으로 올려져 있으며 2,013년
청해진 해운이 선원 안전교육 분야에 쓴 돈이 불과 68만원에 불과 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한편 프랑스 법원 은 딸인 유섬나 씨의 보석 신청을 기각 하면서 남동생
유혁기씨가 프랑스에 있다가 자취를 감춘 것을 이유 로 들었다고 하네요?
문화 기부 를 생각하면 예전에 내 눈으로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의 무너진 사원
을 다시 세우다시피 복구 하는 프랑스와 일본 단체들을 보았거니와.....
루부르의 모나리자 전시공간을 다시 만드는 비용은 일본 도쿄 TV 가 부담했고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보수 는 일본 소니 가 비용을 댔다고 합니다.
삼성전자 는 베르사유 궁전 홀에 고화질 텔레비전 을 기증 했으며, 미국의 하버드 대학
은 돈을 기부한 하버드씨의 이름 으로 교명까지 변경 했으니 황금의 위력 이여!!!
세모 회장이었던 “아해” 유병언 씨도 자신의 거액 후원금 을
그런 수준으로 생각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러나?
이제 파리를 떠나면서 루브르 박물관 뒤편에 있는 호텔로 배낭을 가지러 가면서
생각하노라니 아쉬운 것이 지하철 4호선 생제르맹 데 프레역 에 내리면.....
지하철 역 이름의 유래가 된 성당 이 보이고 그 맞은편 생제르맹 거리 에는
파리 에서도 유서깊은 카페 레 뒤 마고와 드 플로르 가 있습니다.
카페 레 뒤 마고 Les Deux Matots 는 1821년에 처음 문을 연 카페 로 근처에 중국 비단
가게가 많은데다가 중국 도자기 인형 을 뜻하는 “마고”에서 이름을 땄다고 합니다.
생텍쥐페리, 랭보, 헤밍웨이, 피카소, 사르트르, 까뮈에 발자크 등 숱한 문인과
화가들 이 모이던 곳이라는데 피카소는 Le Couple 를 아지트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금 레 뒤 마고 Les Deux Matots 는 1,915년에 개수한 건물 그대로 인데 핫 쵸코
를 바로 녹여낸 진하고 단 “쇼콜라 쇼”나 에스프레소 가 인기라고 합니다.
그 맞은편에 또 다른 카페 드 플로르 Cafe de Flore 는 1881년에 문을
열었는데 꽃과 풍요를 상징 하는 여신 플로르 의 이름을 땄으니....
이름 그대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상의 꽃을 풍요롭게 피워 “레 뒤 마고”
와 함께...... 파리 카페 문화의 황금시대 를 연출하였다고 합니다.
실존주의문학 과 입체파회화 를 태동시킨 곳으로 사르트르와 그의 여인 보부아르, 피카소,
드랭, 카뮈, 알랭 들롱, 에디트 피아프, 롤랑 바르트, 미테랑 등 명사들이 찾았습니다.
카페 플로르 창시자의 손자 작가 두랑 부발 은 1,993년 그의 저서“카페 드 플로르”에서
신성하다고 할 감동 없이는 플로르의 이 ”무거운“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화적인 인물들 뿐 아니라 카페의 테이블 위에서 세기를 만든,
지금은 실체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실재하고 있는 많은 사람 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이 많은 장인들 은 자기들의 존재 양식, 더욱이 에고이즘이 파도 치는 큰 바다
로 나아가기 몇 시간 전에 매일 정박 한 "항구" 였던 것처럼 플로르 이야기 를 합니다."
"또 성당 에 속하였듯이 사람들은 플로르의 단골 이었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문학 카페”또는 “철학 카페”라고 불린
마고와 플로르 등 이런 카페들은 대체로 지식인들의 정치적 담론의 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계절이 지나고 19세기 중엽 부르주아지의 사치한 평화 와 이어 찾아온
세기말적 탐미주의 는 많은 카페맨 을 낳으면서 새로운 카페 풍속도 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외에 19세기 중엽 파리 예술가들이 몰려들고 붐빈 곳은 파리 북쪽 언덕 위 작은 마을
몽마르트 였으니... 오늘날에도 화가와 보헤미안들의 천국으 로 널리 알려진 명소입니다.
그후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루이 14세 시대 소르본 학생들의 놀이터
였던 몽파르나스 가 "작가와 예술가의 거리" 가 되었습니다.
몽파르나스 중에서도 특히 여기 생 제르망 데 프레 지역은 일찍부터 고티에, 조르주 상드,
발자크, 졸라 등 19세기 중엽 이후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작가 들이....
자주 모여서는 지난날의 목가적 마을 은 "삶의 기쁨이라는 이미지를 잉태" 하면서...
몽마르트르 와 더불어 파리 문화를 상징하는 지적 패션의 중심지 가 되었던 것이지요.
파리는 패션의 도시 라고 하는데“이브 생로랑” 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개봉되었으니
크리스찬 디올의 사망후, 이브 생 로랑은 21살 이라는 나이에 그 뒤를 잇습니다.
패션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첫 컬렉션을 성공리에 치른 이브는 평생의 파트너가 될
피에르 베르제 를 만나 개인 브랜드 를 설립하고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발돋움 합니다.
프랑스인이 파리 오트 쿠튀르의 황태자 라고 칭하는 이브 생로랑은 스트리트패션을 사랑해
기성복 라인을 런칭하고 여성에게 바지를 입히는 등 새 패션을 제시한 혁명가 로 불립니다.
1991년 프랑스 잡지 “피가로”에 동료 베르제 등과의 ㄷㅅ애자 임을 공개했으며
“파리 마치”를 즐겨보았고 두 여동생의 인형 옷 을 만들어 입히기도 했습니다.
이브 생 로랑 은 저명한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이 심사 하는 디자인
컨테스트 에 참가하여 1954년에는 18살의 나이에 1등 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브 생 로랑 은 1955년부터 파리의 크리스티앙 디오르 에서 조수 로 근무하던 중에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갑자기 사망하자 후계자 로 지목되어 아트 디렉터 를 맡게 됩니다.
1960년 파리 센강 좌안 보헤미안구역 레프트 뱅크 의 거리 패션 에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발표하였으며 아프리카의 밤바라족의 예술 작품과 민속 의상에 영감 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칸 컬렉션 은 오트 쿠튀르 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소재 인 조개 껍데기, 나무 구슬,
동물의 이빨 모양의 비즈 등을 사용해 여러가지 색상의 실들로 엮어 만들었던 것이지요!
1976년에 러시안 룩 을 발표했으니... “뉴욕 타임스”는 이 컬렉션을
세계적 패션의 미래 를 바꿀 혁명적인 컬렉션 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후 누빔 재킷, 긴 스커트 등 러시아와 모로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통의상
인 오렌지, 핑크, 보라색, 노란색, 빨강색등 강렬한 컬러 로 창조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옷을 통해 스페인, 고대 중국, 페루, 모로코, 중앙아프리카, 몽골, 베네치아,
터키의 전통 의상과 문화를 소개 하였고 에스닉 룩의 선도적인 역할 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패션쇼 에 흑인과 동양인 모델을 기용한 첫 번째 디자이너 로 1980년대 에는
기니 출신 의 프랑스인 흑인 모델 카토우차 나이안을 뮤즈 로 삼아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와 아시아 의상 에도 그의 관심이 미쳤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한복 을 활용했다는 흔적은 없는 것 같아...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이제 파리를 떠날 시간 인데 이 나라 프랑스 는 특이하게도 출산율이 2.1 로
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편인데 우리나라는 1.1 이니 너무나도 놀랍네요?
비결은 프랑스는 남편이 요리를 하거나 아이를 보는 등 가사 분담 50% 를 반드시
지키며 사르트르~ 보바르의 후예 답게 ㅅ생아 수가 50% 에 달하는데...
이들에게도 정상적인 출생자 와 똑같은 복지 혜택 을 주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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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첫댓글 아하~
즐감하고... 여러가지로 많이 생각키우고 갑니다.
다 흘러간 일들이지요?
그래도 그림에 문학과 지성......
패션의 도시 파리 입니다!